
책 읽기에는 타이밍이 있는 법이다
아주 오래 전에 김영하 작가가 읽어주는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을 듣고 바로 책을 수배해서 읽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유대계 억척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로맹 가리의 회고록이었다. 자신은 먹지도 못하는 스테이크를 매 끼니 아들을 위해 준비해주는 어머니의 모습, 그 어머니가 피우시던 골루아즈 담배에 대한 기억들... 하지만 나는 번번히 <새벽의 약속> 읽기 도전에 실패했다.
낭독 방송을 듣고 나서 한참이 지난 뒤에야 간신히 <새벽의 약속>을 읽을 수가 있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 읽다가 실패했지만, 정작 어느 순간 단박에 읽어냈다.
작년 12월 초에 수배해둔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도 마찬가지다.
리뷰 대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안 오늘까지도 내 책상머리에서 내가 읽어주기만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책을 사고서는 읽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 별의 순간이 오기만을.
그리고 리뷰 대회에 참전하기 위해 책읽기에 나섰다.
처음에는 미리보기로 이십 몇 쪽을 읽었다. 그 다음에는 알라딘전자도서관을 이용해서 퇴근 버스에서 30쪽을 돌파했다. 만석 버스에서 전자책을 읽는 재미는 기대이상이었다. 집에 와서 비로소 책을 펴들었고 단박에 112쪽을 읽었다.
뉴욕 브롱스에서 살던 시절에 대한 유년 시절에 대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러시아에서 이주한 유대인 가족이라... 어라 이거 로맹 가리네 이야기랑 비슷하잖아.
졸지에 과부가 된 네티 러바인 여사와 꼬마 리처드의 이야기를 거쳐, 어릴 때 알았던 시절과 놀랍게 달라진 게이 매디와의 우연한 만남 그리고 51살의 나이에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 노예로 살다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모하다 못해 광란의 드라마 쇼를 보여주는 어머니의 모습. 모든 이야기들은 두 모녀가 현재의 맨해튼의 곳곳을 지나는 동안 곳곳에 이야기를 포갠다.
여성들 간에 일종의 동지애로 대공황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 시절을 겪어낸 저자의 어머니는 작고하신 아버지와 함께 공산당원이었다고 한다. 아 뭐지? 여기서는 또 왜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떠오르는 거지?
다 필요 없고, <사나운 애착>은 재밌다.그렇지 않다면 요즘 독서 슬럼프에 빠져 헤매는 내가 이렇게 빠질 리가 없지 말이다. <반란의 멕시코>를 읽다가 좀 질려 버린 모양이다. 과잉 정보들을 수집하다가 스스로 자멸해 버린 느낌이랄까.

며칠 전에 분갈이한 네그리타가 봄향기를 맡고 그야말로 만개했다.
낮에는 이렇게 활짝 핀다고 한다.

낮에는 이렇게 활짝 피었다가 저녁에는 꽃봉오리가 오그라든다.
벌이나 나비가 없으니, 붓으로 수분이라도 해주어야 하나 어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