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 퐁스 을유세계문학전집 9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정예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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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하고 읽기 시작하면 못 읽을 책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년 전에 빌렸다가 못 다 읽고 반납한 소설기계라는 별명의 오노레 드 발자크의 <사촌 퐁스>를 다 읽었다.

 

왕당파 출신으로 프랑스 역사상 가장 격동의 시절을 보낸 발자크는 마치 현장에 대한 르포르타주를 보여 주듯이 독자들을 1844년으로 인도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쇠락한 음악가 실뱅 퐁스다. 얼추 나이 육십의 노총각 퐁스 아재는 선량하고 겸손한 사람이다. 젊어서 부모에게 받은 유산들은 유럽의 각지에서 사들인 골동품 구입으로 날려 먹었다. 아니 퐁스 아재는 훗날 부르주아지 사회에서 예술품이 한몫하는 재산으로 둔갑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았단 말인가? 사실주의 작가 발자크는 그때 이미 혁명과 전쟁 통에 갑자기 졸부가 된 부르주아지들이 고상한 취미로 회화와 조각 같은 고상한 예술품 수집에 열을 낼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주인공 퐁스 아재에게는 아주 나쁜 취미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식도락이었다. 발자크는 그런 이유 때문에 소설에서 그를 식충이라고 부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는 잘 사는 주변의 지인들의 집을 찾아가 식사를 하는 악습을 버릴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 시절에 이미 프랑스 부르주아지들은 세상에서 진귀한 음식들을 자신들의 상에 올리면서, 소위 아랫것들 그러니까 하루 벌어먹고 사는 이들과의 자본에 의핸 변별력을 키우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가 사촌행세를 하며 들락거리는 법원장 댁의 마르빌 부인 등은 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물론 퐁스 아재가 그들에게 귀중한 골동품을 수집해서 제공하긴 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그저 귀찮은 식객이었을 따름이다. 결별의 결정적 원인은 퐁스 아재가 마르빌 부인의 영애 세실을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보내려다가 어그러지면서 발생했다. 마르빌 부인과 세실은 퐁스 아재가 자신들에게 앙심을 품고 골탕 먹이려고 했다는 이유로 그를 사교계에서 영원히 추방시키는 그야말로 파멸적 결정을 내린다. 이런 충격과 더불어 간염으로 우리의 주인공 퐁스 아재의 건강은 급속하게 악화된다.

 

이 부분까지가 소설의 절반 정도에 해당되는 이야기의 구성이다. , 퐁스 아재에게는 독일 출신 피아노 교사 빌헬름 슈뮈크가 있었다. 그야말로 슈뮈크는 부인도 자식도 없는 퐁스 아재에게 소울메이트 같은 존재였다. 문제는 슈뮈크 씨 역시 퐁스 아재와 비슷한 선량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 이제부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퐁스 아재가 그동안 모은 골동품들과 회화들이 어마어마한 재산 가치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수위 시보댁(소설에서 최고의 악당으로 그려진다)은 퐁스 아재와 슈뮈크를 돌본다는 핑계로 그들로부터 돈을 착취하고, 퐁스 아재가 애지중지하는 골동품들을 강탈한 프로젝트를 돌린다. 여기에 협력하는 이들이 제각각 딴 생각을 하는 의사 풀랭과 변호사 프레지에다. 의사는 환자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고, 법률적 대리인 역시 의뢰인의 이익 대신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니까 병석에서 죽어가고 있는 인간 퐁스는 그저 그들에게는 성공과 출세 그리고 금전적 이익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따름이다. 사회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전문직들까지 이런 파렴치한 악덕에 가담하는 상황이 가히 막장드라마답다는 생각이다.

 

지금 시점으로 본다면 아주 진부할 지도 모르겠지만, 200여 년 전 프랑스혁명의 여진이 여전한 가운데 혁명으로부터 가장 이익을 본 집단인 전문직 부르주아지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소설기계 발자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작금의 상황에 대입해 봐도, 크게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다. 이른바 법기술자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기존의 도덕적 가치들은 땅에 떨어졌으며 오직 자본만이 모든 가치를 대신하는 세상이 1845년의 4월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우리의 퐁스 아재가 결국 자신의 재산을 노리는 시보댁의 앙큼한 음모를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공증인들까지 동원해서 가짜 유서로 시보댁과 악당들을 함정에 빠트리려고 하지만, 순진한 두 노친네들을 옭죄고 있는 거미줄 같이 촘촘한 그물망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왜 이 악당들은 공모해서 자신들의 것이 아닌 타인의 재산을 노렸던 것일까? 그건 아마도 평범하고 정직하게 살아서는 이번 생에 그들이 부러워하는 부르주아지들과 같은 삶을 누릴 수 없다는 절망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양심을 팔고 악덕을 행하는 이들의 꿈은 야무졌다. 시보댁은 막대한 종신연금을 꿈꾸었다. 시보댁의 공동정범들은 수중에 퐁스 아재의 막대한 재산이 들어오면 그 자본과 연줄을 바탕으로 해서 병원장 그리고 치안파사라는 출세의 고속도로를 질주할 꿈에 젖어 있었다. 무엇보다 그 시절부터 사람들이 종신연금에 목매달았다는 정황에 그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국가가 보장하는 노후대책이 있었단 말이지.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시스템이 아니었나 싶다.

 


퐁스 아재와 그의 절친 슈뮈크 씨는 사람들이 너무 물렀다. 조금이라도 세상물정을 알았다면 그렇게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죽고 나면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못할 골동품을 죽을 때까지 끌어안고 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퐁스 아재가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 슈뮈크를 생각했다면 좀 더 세밀하게 유언장을 작성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긴 사촌들로부터 버림받고 간염으로 죽어가는 마당에 타인을 배려할 겨를이 없었겠지. 이 불쌍한 인생들인 퐁스와 슈뮈크를 돕겠다고 나선 이들은 너무 적고, 사회적 영향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는 그런 이들 뿐이다. 그러니 악덕의 번성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지금도 자본과 결탁한 악덕이 횡행하고 있지만, 19세기 세계의 수도라는 파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사람 사는 건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비슷하다는 교훈을 소설기계 작가는 세상에 전파하고 싶었나 보다. 동시에 우리를 노리는 악덕과 그의 실행자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점도.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사촌 퐁스>와 자매작이라는 <사촌 베트>에서는 이런 악덕에 대한 처절한 복수극이 시전된다고 하던데, 그 작품도 한 번 만나보고 싶다. 발자크, 읽을수록 매력적인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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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05 17: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왜 저는 마지막에 사촌 베트도 있다는 문장에 빵 터지는걸까요? ㅎㅎ
이 시절의 소설들은 또 당대의 사회상을 찾아보기에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레삭매냐님 글 뒷부분은 흐린눈으로 지나갑니다. 저도 이 책 보고싶어서요. ^^

레삭매냐 2022-11-05 19:08   좋아요 1 | URL
왠지 제 느낌에는 사촌 시리즈
가운데 <사촌 베트>가 더 재미
지지 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절로 프랑스 혁명 역사에 대해
공부를 해보게 되더라구요.

1830년 7월 혁명 그리고 영광
의 3일에 대해서 말이죠.

바람돌이님의 발작 독서를 응원
하는 바입니다.

라로 2022-11-05 18: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츠바이크의 발자크의 평전을 엄청 좋아했어서 그의 책 <고리오 영감>을 집었는데 읽다 말았어요,, 다시 시도 해봐야 하는데,, 이젠 의욕이 없어요. 번역의 문제라고 해야 할까요??
번역 때문에 읽기 힘든 책을 만나면 그냥 내려놓게 되네요... 주절주절;;;;

레삭매냐 2022-11-05 19:11   좋아요 1 | URL
15년 전에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역에서 발작 묘지를 찾는 미
쿡 아줌마를 만난 적이 있는데...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발작에
대해서는 1도 모를 때였지요.

그리고 휴먼 코미디아에 대해
알게 되었네요.

아무래도 고전 읽기는 쉽지 않
은 것 같습니다. 저도 <고리오
영감> 읽을 적에 내가 왜 이걸
읽고 있나 싶을 때가 있었거든요.
지금은 발작적으로 그의 책을
찾게 되었네요 ㅋㅋㅋ

그래서 번역이 반역이라고도
하는가 봅니다. 고저 빠이팅.

blanca 2022-11-05 19: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어서 깜놀했잖아요. 소장 중이랍니다. 발자크는 정말이지 천재 같아요.

레삭매냐 2022-11-05 19:14   좋아요 0 | URL
그러쵸 그러쵸 !!!
넘나 잼난 것~

발작은 진정 천재입니다.

전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답니다. 중고책으
로 살라구요.

Falstaff 2022-11-05 19: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흠. 저는 책 깨나 읽는 분은 다 아실 유명한 불문 역자가 <사촌 베트>를 별로 좋지 않게 이야기 하는 바람에 아직 읽지 않았는데요, 퐁스 다음 이야기라면 그것 참, 뒤통수 때리는 반전이 있을 것도 같고 그렇군요. 아 참. 그걸 스크린 캡처 해놓을 걸 그랬습니다. 제가 구라친 거 아니라는 증거로 말이죠. ㅋㅋㅋㅋ 퐁스 시절이나 지금이나 여간해 믿을 사람 읎잖어유? ㅋㅋㅋㅋㅋㅋㅋ

레삭매냐 2022-11-06 18:22   좋아요 2 | URL
오늘 <사촌 베트>를 수배해서
바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자료를 더 찾아 보니, <사촌 베트>
가 <퐁스>보다 먼저 나왔다고 하
네요.

발작의 전작들과 달리 19세기 빠리
에 대한 상세한 설명 없이 바로 본
론으로 들어가는 상황이 아주 흥미
진진하네요.

11월에는 발작을 읽습니다.

Falstaff 2022-11-06 19:15   좋아요 2 | URL
오오오..... 사촌베트를 낸 출판사는 2013년에 문을 닫았.... 지 않나 싶습니다. 정말 의심이 가는 건, 물론 의심입니다,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거 아닙니다!!! 불어 직역이 아니라 일어 중역인 것 같더라고요. 그리하야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하느냐를 알고 싶은 독자는 읽되, 발자크의 맛을 알려면 기다려라, 하는 게 제가 들었던 충고였습니다. 그냥 읽으면 발작을 할 수도 있다는...... ㅋㅋㅋㅋㅋㅋ

mini74 2022-11-07 15: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꼭 윌리엄 호가스의 판화연작을 책으로 보는 느낌이네요. ㅎㅎ 막장인데 매냐님이 너무 찰지게 내용을 소개해서인지 저도 자꾸만 웃음이 납니다. 자매작엔 복수가 담겨있다니 ㅎㅎ 재미있게 읽었어요 ~

레삭매냐 2022-11-08 11:17   좋아요 1 | URL
발자크의 소설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치(?) 중의 하나가 19세기
파리에 대한 너무나 사실주의적
묘사인데, <사촌 베트>에서는 그런
부분은 몽땅 제거해 버리고 아주
빡시게 진행이 되네요.

<사촌 퐁스>보다 훨씬 더 매운
맛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