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마음 대산세계문학총서 129
하비에르 마리아스 지음, 김상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6년 전에 사서 이제는 절판된 책을 읽는다. 제목은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새하얀 마음>. 위대한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따온 구절이라고 한다. 스페인 출신으로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해다마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고 또 미역국을 자시는 그런 양반인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1992년 작품이다.

 

소설의 시작은 정말 화끈하다. 이제 막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새색시 테레사 아길레라가 아버지의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테레사의 남편 란스는 그녀의 여동생 후아나와 결혼해서 이 소설의 화자인 후안을 낳았다. 초반부터 너무 엽기적으로 흘러가는 게 아닌가. 그만큼 자극적이라는 말일 게다.

 

<새하얀 마음>의 기본 기둥은 바로 왜 테레사 아길레라가 죽었는가에 방점이 찍혀 있다. 나머지 이야기들은 죄다 그 사실에 가기 위한 여정일 뿐이다. 일단 후안은 수십 년 전의 자기 아버지처럼 통역일을 하다가 만나 사랑에 빠져 루이사와 결혼에 골인했다. 거창한 신혼여행을 떠나 뉴올리안즈와 마이애미 그리고 쿠바의 아바나까지 간다. 영어도 잘하고, 스페인 말은 모국어이니 뭐 말할 필요가 없겠지. 아바나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물라토 미리암과 불륜에 빠진 남자 기예르모의 이야기는 기묘하기만 하다.

 

그리고 다시 후안은 삶의 거처인 마드리드로 돌아온다. 통역일을 하며 세계를 주유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주인공의 삶에서 나는 왠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연상한다. 그러니까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집을 떠나고, 집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그런 존재의 연장이 아닐까. 협소한 시각에서 본다면, 학교에 일터로 떠나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들은 모두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살지 않던가. 그런 기본 바탕에 엿듣기의 괴로움, 비밀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가 지닌 새하얀 마음들이 오염되고 타락하는 과정을 거북이걸음으로 작가는 전개한다.

 

, 한 가지 더 하비에르 마리아스는 푸른 수염의 전설도 과감하게 도입한다. 그리고 현대판 푸른 수염은 바로 화자 후안의 아버지인 란스다. 어쩌면 이야기의 재조합이라는 점에서 하비에르 마리아스는 정말 천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별 것 아닌 잔잔바리 이야기들에 서양에서는 한자락하는 작가들의 모티프를 차용해서 이야기를 재조합해서 새로운 오리지널리티를 만들어낸 것이다. 화끈하기 짝이 없는 비기닝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별다른 것도 없지만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비밀이란 결국 밝혀지는 법이다. 아니 어느 작가가 공들여 준비한 비밀 폭로를 하지 않고 소설의 결말을 낸단 말인가. 그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결말에 가서야 비로소 등장하게 되는 비밀의 실체를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구나 그래. 그리고 보면 결국 란스도 자신의 와이프 테레사 아길레라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갈 수 없는 그런 운명이 아니었을까.

 

다른 부수적인 이야기들을 투척하면서 하비에르 마리아스 작가는 소설의 긴장감을 후반까지 그대로 끌고 간다. 이거야말로 작가의 실력과 기술이 드러나는 장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차고 넘치면 김이 빠질 것이고, 또 너무 느슨하면 독자가 외면해 버릴 테니까 말이다.

 

이번에는 소설의 공간을 한 번 살펴 보자. 마드리드와 아바나 그리고 뉴욕의 삼각 지점을 이룬다. 그런데 왠 갑자기 아바나가? 그것은 화자 후안의 외할머니의 고향이 바로 쿠아였던 것이다. 그리고 푸른 수염란스의 여정이 시작된 곳도 바로 아바나였다. 그런 점에서 하비에르 마리아스는 란스의 아들 후안을 다시 아바나로 보내 그곳에서 미리암과 기예르모를 만나게는 하는 셋팅을 준비한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서 후안이 오랜 친구 베르타의 집에서 8주 동안 지내는 동안, 베르타가 만나게 된 이라는 신원 미상의 남자와 맺게 되는 기묘한 관계도 첨부한다.

 

스페인에서 태어나 세계를 돌며 언어를 번역하는 남자 후안의 이야기는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장면들이 다수 등장한다. 동시통역사들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언어를 그 자리에서 바로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하기 때문에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이 그야말로 기계적으로 번역한단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과 스페인의 펠리페 곤잘레스 총리의 대담 장면에 대한 묘사도 인상적이었다. 두 나라 정상들이 회담을 할 때면, 무언가 대단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갈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꼬집고 싶었던 걸까.

 

다시 서사의 시점을 뉴욕으로 돌려 보자. 베르타는 결국 만나게 된 빌과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집에 돌아온 후안에게 정중하게 나가서 시간을 좀 보내 달라고 부탁한다. 마치 대학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시감을 느끼던 후안은 서점에 들러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잠자는 미녀>를 사기도 하고, 레코드판도 사고 또 이것저것 쇼핑도 하고 24시간 돌아가는 대도시의 공간에 자신을 투영한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에 등장하는 조약돌이나 빵부스러기들처럼 저자가 곳곳에 준비해둔 단서들을 쫓는 재미가 쏠쏠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결국 푸른 수염란스가 조심스럽게 감추고 침묵했으며 망각의 자리에 밀어 넣은 비밀과 결국 마주하게 된다. 소설의 어디선가 듣는 것은 가장 위험하고 피할 수 없는 그런 행위라고 했던가. 사실 보는 것은 눈을 감으면 되지만, 듣는 것은 그럴 수가 없다는 게 작가의 주장이다. 게다가 우리의 주인공 후안의 직업이 또 듣고 다른 말로 치환해서 전달하는 게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후안에게 결국 엿듣기는 피할 수 없는 그런 숙명이었다.

 

알라딘 동지들의 버프를 받아, 결국 지난 6년 동안 묵혀 두었던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새하얀 마음>을 꺼내서 주파하는데 성공했다. 다음에는 역시나 읽다 접어둔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를 읽어야지. 그리고 보니 이 책도 왠지 <새하얀 마음>과 결을 같이 한다는 느낌이 들더라. 참고로 이 책도 어느새 절판이 되었다. 유일하게 구할 수 있는 책은 2년 전에 나온 <사랑에 빠지기>. 물론 두 권 다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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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6-27 14:4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별것아닌 잔잔바리ㅋㅋㅋㅋ
아 이 작품 찜해두었었는데 꼭 읽어야겠네요!😊

레삭매냐 2021-06-27 16:05   좋아요 4 | URL
마치 오래 묵힌 숙제를
한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새파랑 2021-06-27 14:4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도 북플보고 이책 구해서 읽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전 <초조한 마음>, <새하얀 마음> 두 책이 형제같아서 나란히 책장에 꽂아놨어요 ㅎㅎ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찾아봐야 겠네요. 알라딘 우주점 어딘가에는 있을듯 😀

레삭매냐 2021-06-27 16:07   좋아요 4 | URL
흔할 때는 몰랐었는데, 그게 또
절판되었다면 갖고 싶어지는
맴이라니...

구판은 우주점에 있는데 신판
은 안 보이네요.

페넬로페 2021-06-27 15:1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매번 느끼지만 레삭매냐님의 리뷰는 어찌 이리 군더더기 없이 줄거리와 감상을 이어주시는지요. 거기다 방점을 찍는 문장과 유머로 마치 일타강사의 강의를 듣는 기분입니다.
제가 게으른 사람이라 절판된 책을 어렵게 구하려고 하기보다 재빨리 도서관에 검색해 보는데 다행히 이 책이 있네요 ㅎㅎ
‘사랑에 빠지다‘도 관심이 갑니다^^

레삭매냐 2021-06-27 16:08   좋아요 5 | URL
그게 또 절판된 책을 수중에
넣게 되면 뭐랄까 득템한
고런 기분이 들어서 끊질 못
하게 되더라구요.

<사랑에 빠지다>는 신간으로
사서 구간으로 읽을 판입니다.
하긴 많은 책들이 그렇지만요.

감사합니다.

scott 2021-06-27 16:1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혹시 이작품 원작으로 만든 영화 보셨나요? 원작 만큼 감동! 대산 세계문학 작품들은 어느새 절판 되어 버려서 눈에 띌때마다 쟁여둬야 ㅎㅎ

레삭매냐 2021-06-27 17:40   좋아요 4 | URL
하비에르 마리아스 작가의 책은
<새하얀 마음>이 처음이라서요.

영화는 금시초문입니다.

예전에 책지인이 그래서 자기는
당장 읽지 않아도 책을 사둔다고
하더라구요.

붕붕툐툐 2021-06-27 21: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북플에서 보고 학교도서관에 신청했는데 절판이라는 소식을 듣고 슬퍼했습니다. 시도서관을 뒤져야겠네요!ㅎㅎ

레삭매냐 2021-06-27 21:55   좋아요 2 | URL
고작 6년 전에 나온 책이 절판이라니.

로빈슨 크루소는 무려 13년 전에
나와서 11쇄 순항 중인데 말이죠.

고저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