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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 연습
레몽 크노 지음, 조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평점 :
지난 12월부터 무려 6개월에 걸쳐 이 책을 읽었다. 레몽 크노라는 프랑스 작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해제가 본문보다 더 많다니... 어쩐지 나는 왜 이 책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드는걸까. 그만큼 우리 우매한 독자는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문체와 문장을 해석하는 자신의 능력보다 해제가 더 필요하다는 말일까. 입맛이 씁쓸해지기 시작한다.
지금으로부터 74년 전에 어느 프랑스 작가는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99가지 방식으로 쓰는 도전에 나섰다. 아, 그 점부터 말하고 싶다. 나는 프랑스어에 대해 1도 모른다. 9년 간의 정규 교과 과정 덕분에 영어 독해는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말이다. 어제도 브리스 디제이의 단편 <Time and Again>에 나오는 drop에 대해 꽤 고민하기도 했다. drop에는 낙하하다라는 표현도 들어 있다는 걸 알고는 나름 흐뭇해했었지.
하지만 프랑스어는 절대 독해 불가다. 그러니 본문 뒤에 실린 프랑스어 원문은 나에게는 아무런 쓸데없는 그런 부분이었다. 난 이 책을 도서관에서 세 번인가 빌려서 다 읽었는데, 돈을 주고 샀다면 본문은 몰라도 역자의 해제가 실린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빡치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왜 역자의 해제를 돈주고 사서 읽어야 하는가 말이다. 공짜라도 사양할 판인데 말이다.
파리에 사는 어느 나름 멋쟁이 청년에 대한 관찰기를 레몽 크노 작가는 정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동원해서 비틀고 꼬고 데치고 볶고 그렇게 해서 99가지 스타일의 글들을 생산해냈다. 원래의 내러티브 역시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냥 어디서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의 하나다. 아마 저자는 그런 이야기를 목표로 한 게 아닐까 싶다. 이해가 간다.
나름 신선하기도 했다. 맛과 냄새 그리고 독특한 수학 산식까지 동원해서 이야기를 늘어뜨리는 재주에 대해서는 정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시점의 문제라고 해야 할까. 아마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열 댓가지 문체에서 포기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레몽 크노 작가는 작가답게 포기하는 대신, 뚝심 있게 밀어 붙인다. 그 점 하나에 대해서는 정말 높이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나라 15세기 고어에 ‘네다’ 스타일의 이북 사투리는 좀 너무 나간 게 아닐까. 번역에 핍진성을 대입하는 게 옳은 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지만, 나는 그런 핍진성이 부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자꾸만 불편해지고, 가독성이 떨어지면서 자그마치 한나절이면 다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던 책을 다 읽는데 자그마치 6개월이나 걸렸다. 이 책을 다 읽기 위해 도서관에 세 번이나 행차를 해야했다.
아마 전후 프랑스 사회에 범람하기 시작한 미국식 영어에 대한 반감 혹은 경계도 영어 스타일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왓 더 뻥튀기’하는 장면은 좀, 솔직하게 말하면 아주 많이 웃겼다. 일본어를 섞어찌개 스타일로 구사한 장면도. 역시 우리 닝겡들은 자신이 아는 부분에서 그런 유머들을 소화해낼 수 있는가 보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청년에 대한 40대 초반의 레몽 크노 작가의 서술에서는 왠지 모르게 꼰대 같다는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모자 끝에 배배 꼬은 줄을 두른 젊은이의 스타일을 못마땅해 하거나, 84번 S 버스에서 승객들과 끝없이 마찰을 일으키는 그의 까칠함을 부각시키는 장면들이 그렇게 느끼게 했던 것일까. 그렇게 다른 승객들과 툭탁거리던 녀석이 자리가 비자 냉큼 달려가는 장면에서는 왜 그렇게 밉상이던지. 이 모든 게 작가가 의도한 바라면, 정말 점층적으로 주인공을 적대시하고 이유 없이 미워하게 되는 과정이 놀라울 뿐이다.
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그리고 어떤 번역이 과연 좋은 번역인가, 단순하게 의미의 전달만이 번역의 핵심인 것인가? 아니면 뉘앙스나 느낌이 좀 달라지더라도 독자 친화적인 번역이 좋은 것인가에 대해 자꾸만 되묻게 되는 그런 나의 독서의 시간들이었다. 아, 이건 좀 엉뚱한데 영어 번역서에서는 또 어떤 식으로 번역이 되었는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