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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이빨 1
제이디 스미스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수년 동안 읽겠노라고 도전하다가 실패했다가 어쩌다가 결국엔 다 읽고야 말았다. 게다가 이 책은 절판되어 이제는 구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중고 시장에서 쏠쏠한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더라. 왠지 중고 책을 그 가격에 주고 사는 건 미친 짓인 것 같아 기다리다가 2권을 지난주에 알라딘 중고로 저렴하게 데려왔다. 물론 1권을 다 읽고 나서 2권은 모클로 도서관에서 빌려다 놓긴 했었지. 어쨌든 당장 읽지 않더라도 살 수 있을 때 책은 사두어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제이디 스미스의 기념비적인 데뷔작인 <하얀 이빨>은 20년 전에 발표되었다. 책의 출간에 대한 썰은 2권 말미 후기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고하시면 좋을 듯. 개인적으로 <하얀 이빨>을 대환장 파티의 연속으로 기대하고 접해서 그런지 아무래도 나의 기대에 충족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이미 그동안 숱하게 레이시즘과 다이아스포라 그리고 도무지 섞이지 않는 이질적인 문화적 충돌을 다룬 책들을 만났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폴 비티, 로힌턴 미스트리, 줌파 라히리 등등 <하얀 이빨>의 후속편 격인 책들에서 섭렵하다 보니 원조에서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고나 할까.
책 소개에서 살만 루슈디의 후계자 어쩌구라는 문구를 본 것 같은데, 공감이 가더라. 살만 루슈디가 전 세대의 조금은 진지하면서도 근엄한 스타일의 혼종 문화에 대한 소재를 다루었다면, 나름 신세대인 제이디 스미스는 보다 힙한 스타일로 문제에 접근한다. 자, 시작은 1975년의 첫날이다.
<하얀 이빨>은 기본적으로 아치 존스가 가장으로 있는 존스 패밀리와 사마드(샘) 미아 익발아 대표하는 익발 패밀리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2권으로 넘어가면서 샬펜 집안도 추가된다. 영국인 아치 존스와 사마드 미아는 2차 세계대전을 함께 겪은 전우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몬테카지노나 스탈린그라드에서 나치 독일군을 상대한 건 아니고, 전쟁 끝판에 잠시 전쟁맛을 본 것이 전부다. 하지만 그들의 만들어진 무공(?)은 30년 동안 울궈먹기에 아주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한 때 종군기자를 꿈꾸었던 아치 존스는 오늘날 인쇄소에서 종이접기로 벌어 먹고 사는 남자다. 그리고 전후 이탈리아에서 얻은 와이프와 30년 동안 잘 살다가 결국 파경에 도달했다. 그리고 이것저것 다 마음에 들지 않는 무허가 할랄 정육점 앞에서 자살을 시도하다가 보기 좋게 실패한다. 그리고 뉴이어스파티의 끝물에서 만난 클라라 보든과 만나 3주 만에 결혼에 골인한다. 클라라는 교통사고로 윗니가 모두 날아가 버렸고, 고작 19살이었던가. 출발부터 심상치 않은 전주곡을 예고한다.
자, 다음은 익발 집안으로 가보자. 사마드 미아는 방글라데시 다카 출신 이슬람교도로 3년 전인가 아내 알사나 베굼을 데리고 영국으로 이주했다.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한 손을 사용하지 못하는 베테랑 용사인 사마드는 고향에서는 대학 출신의 나름 엘리트였으나 영국 런던의 윌즈던에서는 다른 할 일이 없어 친척 집에서 카레를 나르는 웨이터다. 알사나는 성인샵에 납품하는 요상한 옷을 만드는 일에 종사한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영국의 주류 백인들에게 ‘파키’라고 불리면서 가난하고 신산하기 짝이 없는 이민자들의 삶을 버텨간다. 백인들에게 인도 사람이나 파키스탄 사람이나 혹은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구분은 전혀 필요 없다. 그들의 눈에는 모두 파키인 것이다. 대충 1970년대 영국에서 인종주의가 어떤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시간은 십년 정도 건너 뛴 1984년이다. 아치 존스와 사마드 익발의 다음 세대인 아이리 암브로시아와 마기드-밀라트 쌍둥이가 등장한다. 당시는 마거릿 대처 아래 신자유주의가 정점을 찍던 세상이었다. 허구한 날 옛 전우 아치 존스와 이슬람교도가 운영하는 아일랜드 식당 오코넬에서 죽치는 쿼지 이슬람교도 사마드 익볼 선생이 아이들의 담임인 백인 포피 버트존스 선생과 바람이 난다. 버트 선생님은 기이하게도 중년의 불구남자에게 무슨 매력을 느꼈던 걸까? 학교에서 전통적인 추수감사절 행사에 반대하는 도발적인 의견을 제시한 엉뚱한 중년 유부남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나?
이교도들이 득실대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중심에 살면서, 자식들이 고유의 전통 문화와 종교를 존중하면서 살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을까. 결국 예상한 대로 멋진 갈색 피부의 밀라트는 어려서부터 대마초와 육욕에 빠져 아버지가 바라지 않던 길을 가게 된다. 불륜을 저지른 사마드가 아들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냐만. 방글라데시에서 데려온 아내 알시는 순종은커녕 서구 문물의 영향 탓인지 집안에서 육박전도 마다하지 않는 거친 인물로 묘사된다. 대개의 경우 알시의 승리로 귀결된다. 아 참, 장남 마기드는 더 이상 타락한 영국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막대한 돈을 들여 방글라데시로 보낸다. 당시 인도아 대륙은 1984년 10월 31일 시크 교도 출신 경호원의 인디라 간디의 암살로 온통 혼돈의 도가니였는데도 말이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두 대륙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건들이 끊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게 바로 <하얀 이빨>이 주는 매력일 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사마드 익볼 패밀리네 사연이 더 흥미로워서 그런 진 몰라도 못지않은 아치 존스와 클라라 보든 가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기술이 적었다. 1907년 킹스턴 대지진, 여호와의 증인으로 캠퍼스에서 흑인 소녀 클라라가 전도에 나선 일 정도가 기억에 난다. 아이리의 아빠가 될 뻔한 남자 친구 라이언 톱스의 베스파 스쿠터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윗니가 모두 날아갔다는 사실도. 클라라는 종교에서 이탈했지만, 예의 남자친구가 개종해서 충실한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 지구 종말을 준비하게 되었다는 아이러니도 흥미로웠다. 아이리인지 엄마 클라라가 다니던 학교에서 봉사활동의 일원으로 찾아간 백인 노인네 집안에서 듣게 된 “하얀 이빨”을 보고 총질해댔다는 사연에서 소설의 제목이 유래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아치 존스-사마드 익볼 집안을 잇은 샬펜 가문의 등장도 만만치 않다. 아이리와 밀라트의 대마초 친구를 자처하면서 소설에 등장한 조슈아 샬펜(드마라에서는 젊은 제임스 맥어보이가 조슈아 역을 맡았다)이 짠하고 나타난다. 아버지 마커스 샬펜은 잘 나가는 유전학자로 ‘미래쥐’ 연구에 매진한다. 엄마 조이스는 페미니스트 출신 원예가로 학교에서 대마초 사건으로 징벌을 받게 된 밀라트와 아이리를 자기 집안에 선뜻 받아들인다. 샬펜 가는 너무나 모범적인 자기 자식들과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천하의 말썽꾼 밀라트를 환대하는 모습에서 이민자로 영국 사회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익볼 가족의 그것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아니 어쩌면 제이디 스미스는 이런 다양한 등장인물들과 그들이 만들어가는 관계성을 통해 하나의 가능성을 도모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니까 무언가 하나가 된다는 생각을 아예 버리고, 각자의 문화와 습관을 지키면서 살자! 대신 서로를 존중하는 예의 갖추도록 하자. 뭐 대충 이런 식이 아닐까. 캐나다에서 살다 온 지인의 말에 의하면 캐나다가 그런 식의 삶의 양태를 추구한다고 하더라. 캐나다 역시 영연방 국가 중의 하나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에도 다양한 캐릭터들이 빚어내는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다만, 대환장 파티급은 아닌 것 같다. 잔잔바리들의 향연 정도라고 해둘까 싶다. 영국 사회의 오픈마인드가 닫힌 마인드로 바뀌게 되고 이민자들에 대한 혐오(특히 이슬람교도!)가 폭증하면서 밀라트 같이 삐딱한 녀석들이 급진주의자(KEVIN)의 물결에 동참하게 된다. 살만 루슈디가 개입된 <악마의 시>로 촉발된 사건도 빠지지 않는다. 샬펜 가문 출신의 조슈아는 PETA를 연상시키는 FATE 활동을 하면서 열혈동물애호가로 변신해서, 아버지 마커스에 반기를 든다. 마침내 익볼 브라더스가 상봉하고, 미래쥐를 대악마 샬펜의 손아귀로부터 구하겠다는 동물애호가들 그리고 세계 종말을 외치는 여호와의 증인들까지 가세해서 마커스 샬펜 박사가 자신의 DNA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는 1992년 12월 31일의 발표장인 페레연구소로 몰려든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인터넷을 검색을 해보니, <하얀 이빨>을 다룬 논문들이 많이 보였다. 그만큼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들에 대해 할 말들이 많다는 방증이 아니겠는가. 개인적으로 결말 부분이 좀 아쉽긴 했지만, 사반세기를 아우르는 영국 이민사회에 대한 제이디 스미스가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고 쓴 ‘육성 리포트’는 인상적이었다. 자신들의 식민지에 대한 물적 착취에만 집중하느라 그들의 문화와 종교의 차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식민지 모국의 무관심은 인도아 대륙 사람들의 미묘한 차이를 무시하고 ‘파키’라는 단어에 뭉뚱그리는 그들의 언어폭력이 대변한다. 여전한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부산물로 봐야 할까. 공생공영이라는 공동체 가치 대신 각자도생이라는 천박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전염병처럼 퍼지는 가운데, 상대를 존중하는 대신 배척하는 근본주의의 뿌리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하얀 이빨>을 읽기 전에 제이디 스미스의 <런던 NW>를 읽고 있었고, 그 다음에는 <온 뷰티>에 집중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온 뷰티>가 가장 마음에 드는 것 같다. 작가의 에세이가 그렇게 좋다고 하던데 에세이집도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러나저러나 아직 대환장 파티는 도래하지 않았던가.
[뱀다리] 2권을 처음에 구하지 못해서 도서관에서 모클 버전으로 빌려다 읽고 있었는데 나중에 구간이 도착해서 비교해 봤다. 구간의 주석 부분에 수정할 부분들이 있었는데 왜 모클 버전에서 고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출판사의 게으름 탓인가. 고칠 의지가 있다면 내가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하시겠지 뭐. 아 참 이제 절판됐지. 그럴 필요도 없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