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개
이언 매큐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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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언 매큐언의 읽지 않은 책은 3권이 남았다. 항상 그런 법이지. 전작 읽기를 시작하면 그 작가의 모든 책은 다 구해서 읽게 되는 법. 이언 매큐언의 신작 소설도 올해 출간 예정이라고 하던데, 구간과 신간을 기대하는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이번에 새로 나온 <검은 개>는 내가 읽은 이언 매큐언의 12번째 책이다.

 

소설을 이끌어 가는 화자는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준과 버나드 트리메인 부부의 사위 제러미다. 8살의 나이에 부모를 교통사고로 잃은 제러미는 삼십대 중반에 만난 아내 제니와 가정을 꾸리면서 유년의 상처를 치유하고 비로소 삶의 구원을 얻었다고 했던가. 남들과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린 트리메인 부부에게서 유사 부모라는 감정을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세계대전에서 영국 첩보대의 일원으로 일한 버나드와 통역사로 복무한 준은 전쟁의 폐허에서 새로운 유럽의 재건을 꿈꾸며 공산당에 가입한다. 원래부터 합목적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던 버나드는 냉철한 이성주의자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준은 1946년 직후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떠난 신혼여행 중, 랑그도크 지방에서 “검은 개”를 만나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광채를 만나 신비주의에 입문하게 된다.

 

이후 준과 버나드 부부는 각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출판사 사장이었던 제러미는 장모 준이 병에 걸려 프랑스에서의 은둔 생활을 마치고 영국에 돌아와 요양원에 지내는 동안, 죽음을 대면하게 된 준의 회고록 작성에 돌입한다. 자신의 부모처럼 생각했던 준과 버나드의 삶에 대한 추적은 어쩌면 제러미가 추구했던 구원의 완성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노련한 저자 이언 매큐언은 한 때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젊은 공산주의자 청춘들의 삶에서 실패한 것으로 귀결된 사회 변혁에 대한 이상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준이 요양하던 영국 윌트셔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현장으로 달려간 장인 버나드와 제러미의 일탈적 모험으로 이어진다. 준은 아마추어 곤충학자로 활동하던 버나드는 아름다운 심페트룸 상귀네움(Sympetrum sanguineum: 고추잠자리의 학명)을 잡아 살충병에 포획하는 젊은 신랑에 모습에 경악을 감추지 않는다. 이 젊은 두 부부의 간극은 어쩌면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메울 수가 없었던 게 아닐까. 물론 베르주리 인근에서 준이 경험하게 되는 ‘검은 개’와의 조우에 비하면 고추잠자리 사건은 아무 것도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자신을 다른 새의 둥지를 차지하려는 “뻐꾸기”라고 생각하는 제러미에게 준과 버나드 부부의 미스터리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야기 소재가 아니었을까. 제러미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장인 장모 부부의 결혼생활에 개입하면 할수록, 미스터리가 증폭되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사적 관계인 부부 사이의 간극과 갈등도 해소하지 못하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타인의 물질 조건들을 변화시켜 궁극적으로 거대한 사회적 변혁을 이루겠냐는 작가의 날카로운 지적은 또 어떠한가.

 

장모 준이 살던 랑그도크 베르주리 인근을 하이킹하던 제러미가 대면하게 된 식탁에서의 느닷없는 가정 폭력에 현장은 유럽 대륙에서 행해진 숱한 폭력의 재현이 아니었을까.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에 대항하는 마키단의 활약과 폴란드 마이다네크 수용소에서 싹튼 제러미와 제니의 사랑, 1956년 헝가리 사태를 계기로 결국 공산당에 환멸을 느낀 노동당 정치인 버나드 트리메인의 결정 등이 베를린 장벽 붕괴라는 역사적 현실 앞에 귀결되는 장면을 통해 이언 매큐언은 우리 인간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검은 개>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이언 매큐언의 소설 중에서 가장 정치적 색깔을 지닌 책이 아닐까.

 

물론 트리메인 부부가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된 배경에는 그놈의 ‘검은 개’가 있었다. 어쩌면 트리메인 가족에게 검은 개는 금기어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처음에 제러미가 준과 버나드의 회고록을 쓰겠다고 나섰을 때, 괜한 짓을 한다며 트리메인 자녀들이 반대하지 않았던가. 마키단을 수색하기 위해 독일 게슈타포가 마을에 투입한 수색견이라는 시장 엑토르의 추론 앞에서 저자가 구사하는 이야기가 이렇게 다양하고, 얼마나 멀리 나갈 것인지 궁금해졌다. 나 같은 보통 사람에게 역사 앞에 선 개인의 책임에 대해 그리고 도도하게 진행되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가운데 우리가 보고 느낀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은 좀 버겁기까지 했다. 과연 미래의 거장다운 풍모가 느껴지는 서사가 아닐 수 없다.

 

대단히 정치적 서사에 개인의 삶과 갈등 그리고 구원이라는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주제를 녹여낸 이언 매큐언의 내러티브는 그 어느 작품보다도 강렬하게 나를 타격했다. 아마 그 후유증은 적잖이 오래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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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5-21 1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언 매큐언...우아 12번째라니!!!! 근데 <여행의 이유>읽으면서 레삭매냐님 생각 났습니다 ㅎㅎ

레삭매냐 2019-05-21 16:35   좋아요 1 | URL
빈프리트 게오르크 제발트와 더불어
제가 자신 있게 모든 작품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이한 작가 중의 하나랍니다.

그나저마 <캄포 산토>는 다시 읽고 리뷰를
써야할 것 같습니다.

목나무 2019-05-21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넛셀>에 실망하고 나서 이후 나온 <솔라>도 안 읽고 이건 한번 읽어볼까 말까 고민만 하던 중인데... 음~~~ 딱히 빨리 읽어야겠다는 마음은 안드네요. ㅎㅎㅎ;;;;
그래도 자칭 이언 매큐언 빠순이니 언젠가는 읽겠지요. ㅋㅋㅋ

레삭매냐 2019-05-21 17:35   좋아요 1 | URL
<넛셸>은 말씀해 주신 대로 좀 실망
이었지요. 아무래도 연세가 드셔서
패기 혹은 총기가 쩜... ㅋㅋ

그런데 <솔라>는 무척 재밌게 읽었죠.

요 책은 한참 때 나온 책이라 재치와
이언 매큐언 특유의 블랙 유머가 많이
첨가되어 있답니다.

syo 2019-05-21 18: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레삭매냐님 발이 빠르시다....

이 책 최초의 알라딘 리뷰가 레삭매냐님 리뷰가 된 것은, 이 책 입장에서도 정말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19-05-21 21:53   좋아요 0 | URL
지나친 상찬이시지만...

너무 기분이 좋삽니다, 감사합니다 시오님.

뒷북소녀 2019-05-23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혹시... 이 글 읽으면 스포 당한건가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