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노무현 - 대한민국의 가시고기 아버지
장혜민 지음 / 미르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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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서른 두 번째 서평

바보 노무현.




현실 너머 꿈을 꾸던 사람. 노무현




IMF후로 짧은기간 동안 자전적 성격이 강한 에세이를 펴내는 것이 유행을 타던 시절이 있었다. 웬만한 재력가라든지 어느정도 직장이나 가정 등 자신이 속한 곳에서 비교적 사회적 기반을 잡아 생활하는 몇몇 이들이, 자신의 삶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에 주저 하지 않았다. 이런 식의 변화에 대해 대필가들은 수입을 올리기도 했을법하지만, 그 역시 유행은 유행인지라 그다지 오래 가지는 않는 눈치였다. 어느 책이든지 간에  독자들의 평가로 서점가 내지는 책 시장가에서 걸러지는 작업이 필요하다. 자전적 에세이가 홍수처럼 범람하던 시기가 지나간 듯한 현 시점에서 본다고 한다면, 나름대로의 여과작업을 거쳐 조금이라도 다듬어진 양질의 자전적 에세이가 출간되고 있다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각설하고 ‘바보 노무현’이란 책을 접했다. 평전인가, 전기인가, 추모의 글인가 생각하다가 자전적 에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미 고인이 된 이후인지라 단순히 자전적 에세이라고만 칭하기는 어색해보이기도 한 부분이 있는 듯하다. 

  정치적 노선이라면 너무 딱딱한 표현이 될듯하다. 여하간에 정치적 생각이 조금은 달랐기 때문인가. 노무현이라는 한 사람에 대해 그다지 많은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고, 긍정적인 동조를 얹어주지도 못한 듯싶다. 사실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이 정답일 지도 모르겠다.

  책을 통해 한 사람으로의 평범한 노무현을 만났다는 게 첫 번째 가치 있는 일이고, 더불어 당대의 정치현실에 대해 세밀하지는 못하지만 비교적 쉽게 요약하면서 다시 되짚고 넘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 이 책을 통해 얻는 두 번째 가치인지도 모른다.

  노동운동을 접하게 되었던 계기와, 늦깎이로 노동의 현장에 뛰어들어 몸을 아끼지 않으며 그야말로 고군분투하며 온몸으로 실행에 옮겨왔던, 그의 젊은 시절을 새로 만나는 동안은 누구나 숙연해지지 않을까. 철새마냥 이리 편승하고 저리 편승하는, 고질적인 정치 흐름에 정면으로 대치하는 행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관철시키는 고집스러움은 그 자신을 지켜주는 또다른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헌정이후 처음이었다고 했다. 대통령 탄핵사건을 접했을 때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어이없어 할 때마다 남편은 우스갯소리로 이런 농을 건다. ‘그러면 그 잃어버린 어이를 찾으면 될 것 아니야.!’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역시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들이 끌어내리는 꼴이라니, 나라가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가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섰을 때 많은 일들이 있었고,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며, 심히 몹시 앓는 어린아이처럼 온 나라가 시름시름 앓았던 것 같기도 하다.

 

  책은 평범한 한 사내의 노무현을 기억한다. 그의 삶과 정치입문, 정치행로와 대통령으로서, 아니 그 이전 법조계의 한 일원으로서, 다양한 노동계의 부조리를 보고 느끼며 기꺼이 가슴앓이 하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그의 문제의식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그의 문제해결 방식이 현실보다 한층 높은 이상적인 단계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를테면 대중이나 현실은 그의 이상을 접수하고 수용할 준비가 채 되어있지 못한 상태였는데 반해, 그가 추구하는 문제해결에 대한 발상의 근원은 현실을 뛰어넘는 이상향 그 어딘가에 있는 무엇이 아니었을까.  

  툭하면 중얼거리는 인간 각자의 ‘이데아’를  생각한다. 이데올로기의 반목과 그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오는 각자의 이상향, 이데아는 분명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하나도 통합하기에는 각각의 것을 먼저 수용하는 일이 먼저일진데 생각해보면, 노란 풍선의 물결을 타고 나타났다가 홀연히 떠나버린 이 사람 노무현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형상을 우리 곁에 결과물로 내어놓기 이전에, 각각의 것을 수용하다가 시간이 없어 먼저 가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에게 조금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우리 각자는 어떤 생각의 변화를 가져왔을까. 나는 그에게 반대표를 주었으되, 그의 이론에 대해서는 그다지 부정 하지는 않는다.

  가난하기 때문에 불평등 위에 나와 내 자식들이 설 수밖에 없는 사회적 현실에 ‘이건 아니다’,라고 반기를 들 수 있는 용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그 사람 노무현은 노동의 한 가운데,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웃들 곁에서 머물기를 좋아했으며, 그 하나의 신념으로 이 땅에 변화를 가져오기를 바랐던 실천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의 정치적 색깔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를 얼마나 잘 알고 있었는가, 라는 의문을 갖을 필요가 있다.




  다만 이 책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면, 이 자서전 에세이를 쓴 저자에게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저자 장혜민을 검색해보니 몇몇의 자서전 에세이를 출간했으며 그 외 그의 저서가 몇권 더 눈에 들어온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성격의 글을 쓸 때 저자의 자세에 대해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느정도의 객관성을 확보해야 하는지. 먼저 저자 장혜민은 이번 에세이의 원고를 작성하는 저자의 자리라는 입지적 성격과, 바보 노무현이라는 한 사람을 추종하는 자리에 선 사람중에 하나라는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는 특성을 보이고 있었다. 

  이 두 가지 특성은 어쩌면 공과 사라는 측면에서처럼 정확하게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생각하기에 다르겠지만 두 가지 특성을 분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수도 있다. 또한 사람에 따라 굳이 분리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이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에 대한 대중의 이해와 보편성을 전제로 해서, 각자의 수용하고자 하는 정치적 성격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전자에 이야기했던 두 가지 측면은 나뉘어져 한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또한 저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사심 없이 바라보고 써야 하는 무심함을 필요로 한다. 이 또한 독자에게 신뢰감을 주는 요소이지 않을까 싶다.

  책 중간중간 보이는 작위적이며 인위적인 표현과 미화되는 부분들이 이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흠으로 작용한다면, 이는 우리가 함께 생각하고 있는 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굳이 그런 인위적인 표현이 없더라 하더라도 우리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너무 친절한 배려는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온 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던 참이다.

  또한 스토리 연계에 있어 시점이 관찰자의 그것에서 주인공의 시점으로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다소 정리되지 않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한 권의 책으로 한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한 걸음 또는 반걸음의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모르긴 몰라도 이 책을 접하는 이라면 평범한 사람 노무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지 않을까.

 

 모든 인식에게 고하기를, 서평을 기록하는 이곳에서만이라도 다른 의식에서 벗어나 오롯하게 책 한권에 대한 서평으로서만 기록될 수 있기를 희망하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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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세 가지 거짓말 - 드라마를 통해 재조명되는 영조의 출생 비밀
김용관 지음 / 올댓북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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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한번째 서평




영조의 세가지 거짓말-김용관 지음




역사, 군상(群像)의 이야기




자극적인 제목이다. 조금은 가볍게 옛날이야기 한편쯤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겉장을 펼쳐보아도 좋을 듯한 책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곧 빈틈 하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역사를 논하고 있으면서 다양한 사료를 참조하여 구성하고,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런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깊이감에서 아쉬움 감이 드는 것이 바로 빈틈의 한부분이 아닐까.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스스럼없이 선택했다. 내가 이 책을 사들고 나왔던 곳은 서점이 아닌, 병원 일층 로비 한 귀퉁이에 있던 작은 편의점이었다. 그리고 혹여 폐렴으로 입원해서 울다 지쳐 잠든 아이가 잠에서 깰까 싶어 서둘러 병실로 돌아와서 읽기 시작한 책이었다. 그저 편하게, 이 불편한 현실에서 벗어나 잠시 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만한 책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깊이감이 느껴지는 책은 집에 가서 읽자는 심상이었을 게 뻔하다.

이를 테면 이번 책 같은 조선의 한 임금이 했다는 거짓말 따위에 호기심이 발동해서 구태여 자꾸만 미끄러져오는 안경을 올리고 입시 공부하듯, 연필을 들고 정독을 하지 않더라도 내용은 잘 이해가 되는 동시에 시간은 잘도 가주리라는, 개인적으로 다분히 치졸한 계획을 세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제 책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책은 숙종과 영조 그리고 사도세자 정조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영조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저술은 기존에 고착화 되어왔던 영조라는 인물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한 듯하다.

잘 알고 있는 숙종 시대의 장희빈을 시작으로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난 경종은 영조의 형님으로 임금을 영조에게 물려주고 죽는다.

이쯤에서 독자는 영조가 했다던 세 가지 거짓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라는 것에 집중하지 않을까. 그 첫 번째 거짓말은 바로 경종과 영조 사이의 관계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경종의 의문스러운 죽음을 두고 영조가 형인 경종을 죽였다는 것이 영조를 두고 조정과 민심에서 흘러나던 거짓말의 처음 시작이었다. 그리고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설과, 사도세자와 관련하여 그의 역모설에 대한 것들로 정리할 수 있다. 책의 저자 김용관은 영조가 평생을 살면서 이 세 가지 의문에 대해 나름대로 변명과 때로는 부적절한 항명 비슷한 행위를 했었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을 의심에 눈초리로 노려보는 노론과 소론의 대신들 앞에서 스스로의 입지를 구축하기 위한 영조만의 살아남기 위한 노력이었는지 모른다.

이 책은 역사적 사실에 중요한 기반을 두고 이어져나간다고 할 수 있다. 경종의 죽음을 빌미로,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일어났던 ‘이인좌의 난’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민란이었다고 소개된다. 민란의 주체들이 주장했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다. 그리고 두 번째 그들이 내세운 반란의 명분은 영조가 경종을 독살한 주범이라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계하여 ‘나경원의 고변서’와, ‘임오년사건’ 등이 소개된다.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년의 사건을 중심적으로 소개함)




역사를 다룬 책을 접할 때마다 매번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을 책이 표방하고 있는 중심적인 시각이며 관점이라고 할수 있을까. 지은이가 갖고 있는 역사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지 또는 어느정도의 객관성과 중립성을 유지하면서 책을 썼는가에 대한 생각은, 이번 영조의 이야기를 다룬 책 역시 그 절차를 뛰어넘지 않았다.

저자는 영조의 감추어지고 잘 드러나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과 이야기를 독자에게 풀어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책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것의 사실을 떠나서, 나는 언뜻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또한 저자의 비판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새로운 이미지의 영조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가 독자에게 보여주는 영조의 모습은 저자의 주관적 느낌이 강하게 드러난 인물로 비춰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다른 저자의 역사서일 것이다. 애석하게도 어쩐지 나는 김용관이 소개하는 영조의 모습이 영조의 또 다른 모습의 일부분이기에, 이 느낌으로 한 인간을 전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식으로 분위기를 몰고가는 듯한 책의 흐름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참이다.

그러나 사적인 생각은 이쯤에서 각설하고, 영조가 독특한 인물이었음에는 분명한 듯하다. 당대의 노론과 소론의 틈바구니 속에서 임금의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 이를테면 노련한 판단과 명석함이 묻어나는 아집으로 똘똘뭉친 영조의 참 모습은 세간으로 따지자면 고집스럽고 욕심 많은 어느 나이 든 노인의 모습이었다.

아들을 아들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경쟁자로 바라보는 영조의 시선과, 자신의 앞날을 위해 아비의 불행한 기억을 스스로 가슴에 묻어야했던 정조의 모습은 그만큼 조선의 정치와 임금이라는 자리가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수 있다.

 

500년 넘게 이어져왔던 조선이라는 나라는 겉으로 보기에 참 평온해보였던 것 같다. 물론 몇 번의 외침과 몇 번의 쿠테타와 내란을 제외했을 때를 말함이겠지만, 기실 그 내면은 설명하기조차 버거운 복잡한 일들이 벌어지던 시대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사를 알아갈수록 어쩌면 이전과는 달리 당혹스러운 감정을 새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역사란, 거창하다기 보다는 인간적인 것이라는 점일 것이다. 역사는 바로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임금도 사람이고, 임금을 보필하는 여러 당파의 많은 이들도, 모두 같은 사람이 아니던가 말이다. 사람이기에 분노와 시기, 질투, 모든 희노애락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아닐까. 역사란 그렇게 인간군상에 의해 만들어졌던 것이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실질적으로 실록과 사료를 참고로 정확성과 명료성을 보이긴 하지만, 딴은 조선의 야사를 보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 책이었던 것 같다. 그런들 어떠할까.

역사라면 골머리를 앓는 이들에게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책이 아닐까 싶다. 문득 책속에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당신을 노려보고 있는 영조를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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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 18현 - 조선 선비의 거울
신봉승 지음 / 청아출판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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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번째 서평

조선선비의 거울 문묘18현-신봉승 지음




 열린 세상의 문을 찾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문학작품에서 시대적 현실반영에 대한 타당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말이다. 그 즈음 큰 이슈가 되었던 정치 또는 사회적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하는지에 대해 토론을 했던 이들의 의견은 물론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결론은 현실반영의 수위조절 정도에 따라 점수를 달리 주고 있었다. 

소설이나 시가 아니더라도, 가끔은 책을 쓴 이의 집필의도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책을 만나곤 한다. 때로는 너무나 명료하기까지 한 그들의 솔직함 앞에서 난처해지는 것은 오히려 독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을 내게 된 동기에 대해 담담하게 피력하고 있는 저자 신봉승의 이야기 앞에서 나는 고전과 현대의 소통과 조화 속에서 또 다른 교화(敎化)의 이미지를 찾는 중이었다.

각설하고 쉽게 말하면 이 책의 주제 따위를 따로 고민하지 않아서 좋을 법하기도 한 이치이다. 하지만 모든 책을 앞에 두고 주제를 따지고 소재와 줄거리를 생각한다면 책 읽는 시간이 즐거움이 아닌 노동의 의미로 전략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신봉승의 문묘 18현은 저자의 집필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났던 책이었지만, 거부감 없이 잘 수용하면서 읽어갈 수 있었던 책이었다. 저자의 편안한 문체는 안정감이 있고,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독자를 향한 배려가 담긴 표현(긴 인용으로 인한 읽는 이의 부담감을 걱정함과 더불어 소설 형식을 빌려온 이야기 전개형식 따위)이 역시 눈에 띄는 대목들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다소 어려운 주제와 소재를 가지고 오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기실 이 책의 이야기는 이미 우리가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제목으로만 보면 조선선비의 거울, 문묘18현이라 했고, 사약으로 죽어 천년을 산다는... 문구로 시선을 붙잡는다.

조선의 선비라 하면 이미 잘 알려져 있는 한두 명 정도는 그 이름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시간이 그렇게 따분하고 졸릴 수가 없었노라고 토로하던 어느 누구라 하더라도,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에 한번이라도 몰입했던 이라면 문득 그때의 감흥을 되살려, 지나가는 호기심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사약을 받지는 않는다. 그렇게 본다면 일단 오류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다 보면 비단 사약을 받지 않은 이들에게도 사약만큼 두렵고 견디기 힘든, 시절들을 극복해야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 시발점이 되는 곳부터 이야기하면 아마 접근이 쉽지 않을까. 지금의 성균관대학이 있는 곳은 말 그대로 조선의 성균관이 있던 자리이다. 그곳에는 아직까지도 옛 선조들이 사용해왔던 고풍스러우면서도 자연에 가까운 투박함을 자랑하는 오래된 건물들이 있으며, 여전히 긴 세월을 살아온 은행나무도 자리하고 있다. 조선의 선비들을 지방에서 시험을 통과하고 서울의 성균관으로 들어오면서 만나게 되는 장소가 문묘이다. 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조에 살았던 이들. 그들은 긴 시간의 역사에 위에 선 이들이다. 충직한 신하, 나라와 임금에게 충성한 신하. 젊은 선비들은 문묘에 배향된 선조들을 보며 자신만의 꿈을 꾸었을지도 모르겠다.




책은 문묘에 배향된 이들을 소개하는 형식을 갖고 있다. 크게 연대순으로 순차를 정한 듯했으며, 한 인물에 대해 출생과 성장배경을 소개하며 정계에 입문 후 왕과의 관계를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의 주제는 강직한 신하이다. 목숨이 위태로워도 직언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선비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의 이야기가 책 속에 가득하다.

사약을 받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성리학과 더불어 현인의 경지에 오른 이황과 이이, 또한 이들을 따르는 후세의 또 다른 현인들, 중국의 주자학을 도입해 조선의 예학의 시초가 된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제목처럼 18명의 현자들의 이야기가 시대적 배경과 함께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는 과정을 쉽게 풀어쓰고 있다. 4부로 나뉘었으며 주제별로 구분지어 놓았으나 어찌보면 한 사람의 제자, 그리고 또 그 사람의 제자 그 아들, 또 다음 세대의 순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우매한 임금이라기보다는, 간신들이 많은 시기에 혼란한 시기를 버거워하던 위태로운 임금을 위해 명확한 사리분별을 필두로 냉철하게 써나갔던 상소를 접하는 것은 또 다른 백미였다.

그중에서도 문원공 이언적의 상소는 세부적이며 지극히 현실적인 요소들이 눈에 들어온다. 섬세하며 꼼꼼한 지적으로 왕의 바른 길을 안내하고 있으며, 문성공 이이의 상소와 함께 숙종에게 올렸던 문순공 박세채의 상소 역시 많은 생각을 갖게 했던 대목이었다.




어리석은 왕은 직언을 올린 신하에게 벌을 내리기도 하지만, 그 뜻을 깊이 이해하는 왕은 그들을 늘 가까이 두려고 노력해왔다. 듣지 않으면 아무리 강직한 뜻이라 하더라도 빛을 보지 못하기 마련이다.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아무런 미련 없이 고향으로 낙향하는 대쪽 같은 의지는 또 무엇일까. 불러도 대답이 없고, 다시 임금의 곁에 와 달라고 애원을 해도 결코 마음을 바꾸지 않는 그 당찬 기세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저자의 의도를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는다하더라도, 이 책이 현실 반영의 수위를 어느 정도 조절한 것이 사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까지야 숨길 수가 없어 보인다.

새롭게 기호학파, 영남학파, 서인과 동인 내지는 노론과 소론에 대해 다시 알고 가는 시간이었다. 다만 역사적 결과물을 떠나서 동인, 남인에 비해 서인(서인에 속한 문묘 18현들의 수가 더 많은 관계일 듯싶다)에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설명하는 것과 더불어, 숙종시대의 남인과 서인의 관계에 있어 정치적 성격을 떠나 숙종 개인의 사랑놀음이라 했던 부분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크게 동조하지 못했던 점도 있었던 것 같다.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였고

나라를 내 집처럼 근심하였네

해가 아래 세상을 굽어보니

붉은 충정을 밝게 비추어 주리“

                                   -----문정공 조광조                




사약을 앞에 두고 남긴 조광조의 시를 옮겨본다. 각설하고 필요성을 느끼는 것은, 어진 임금과 그 임금보다도 더 어진 현명한 신하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항상 서로간의 의지가 되며, 믿음과 신임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열린 통로. 서로간의 열린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2010년 우리는 어느 곳에서, 그 열린 세상의 문을 만날 수 있을까. 책 한권 읽으면서 그 속에 수천가지 생각이 들어차는 것은 또 왜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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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칼 포퍼 지음, 허형은 옮김 / 부글북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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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번째 서평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칼 포퍼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따금 삶이란 것에 매달린다. 삶에 대한 해답을 얻었던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가끔은 지금 이 순간이 삶이다, 이것이 정답이다, 라는 우습지 않은 생각에서 우격다짐으로 정리를 끌어내기도 한다. 이십대에 나는 보다 치열함에 스스로를 옭아매고 지냈다. 이를테면 부조리나, 자의식, 세상의 약하고 어둡고 후미진 그 어떤 흐름을, 한통으로 모두 가져다 놓고 잘게잘게 토막을 쳐서 끄집어내는 것이다. 오늘은 이것에 대한 생각, 내일은 저것에 대한 생각 따위 식으로 자잘한 생각은 이어졌다. 그렇다고 내가 철학을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이십대 끝자락에 섰을 때 나는 삼십대의 관문이라는 삶의 한 고비 앞에서 두려워했다.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될까, 그것이 제일 관건이었다. 그런 고민은 아직도 이어지기에 사십대를 앞두고 여전히 고민 한다.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어떤 삶을 추종하며 살게 될 것인가.

칼 포퍼의 책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는 제목에 대한 착각과 몰이해에서부터 책에 대한 애착이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내가 생각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이 위대한 노학자의 글 앞에서 어안이 벙벙해져버렸다고 해야 될 듯싶다.

삶에 대한 진솔한 노학자의 이야기를 기대했었다. 그가 누구인지, 무엇을 전공했던지, 얼마나 많은 이론과 책을 저술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가 삶이란 것에 대한 짤막하지만 심도 있는 지침서 한두개 쯤 내게 쥐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었던 것 같다. 각설하고 이제 책으로 들어가보자.

책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나뉘고 있었다. 초반에는 역사와 정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후반부에는 자연과학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 가득 들어차있다.

책을 번역한 이(허형은)의 이야기 속에는 우리가 칼 포퍼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없더라 하더라도 별 어려움이 없이 잘 이해하고 읽어갈 수 있는 책이라 소개한다. 그 말은 반은 맞는 말이고 반은 틀린 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학과 각종 단체, 그리고 전공자들의 모임에서 했던 강의를 묶어놓은 형식인 이번 책은, 칼 포퍼의 다양하고 깊이 있는 사고의 영역을 포괄적으로 접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책을 읽어 가면 갈수록 이해가 더 용이하기 보다는 조금 더 깊은, 아니 조금은 더 다양한 기본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현실적인 책 읽기였다.

책 속에는 칼 포퍼의 뇌리 속에 저장되어 있는 많은 학자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역사와 정치 편에서 마르크스와 레닌, 엥겔스 등과 함께 그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 거론된다. 논리와 그에 대등한 논리, 그리고 그 논리를 논박하는 또 다른 새로운 논리. 그 과정에서 칼 포퍼는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의 면모를 보인다. 그는 때때로 낙관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실재주의, 무엇보다도 경험주의 이론에 충실한 학자로 그려진다.

정치와 과학이라는 두 가지 틀에 나뉘어 글을 싣고 있지만 사실 책 한권을 다 읽고 난 후에 와 닿는 결론은 이 모든 내용들이 서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번역자의 의견과도 비슷한 듯 보인다.




다소 많은 분량의 이야기와 다양한 이론들의 갑작스러운 출몰로 인한 현기증이 좀 오래가는 부작용이 속출하기는 했지만, 뜻밖에 깊이 있는 책을 만난 듯 해 아직도 그 깊이의 무게로 허우적거리고 있는 듯하다.




칼 포퍼가 항상 말하던, ‘아무것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는 개념이 냉전시대의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풀어나가며, 다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주제들의 결합인 ‘과학과 인간의 내면의식의 전반적인 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물론 대부분이 그의 가설과 논리로 시작과 끝을 맺고 있다. 책을 읽는 동안 칼 포퍼의 새로운(과학과 인간의 내면심리를 결합해 이론을 이끌어내는 그의 논리를 분명 새로웠다) 또는 밀도 짙은 설득에 온 몸을 저지당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다. 그래서 끊임없이 좌절하고 후회하며 낙담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포기는 할지언정 스스로 자멸하지 않는 의지를 갖는다. 그 또한 칼 포퍼의 이론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경험과 경험이 이끌어주는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은 끊임없이 완벽을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지금에 있는 이론을 논리적으로 논박할 수 있는 타당한 근거가 있는 새로운 논증거리를 찾는 과학자들의 삶의 모습과 어딘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메바와 아인슈타인의 차이점에 대해 아는가,’ 라는 질문을 그가 던진다. 이에 대한 답은 가장 쉬운 설명으로 풀이해놓고 있었다.




“아메바는 오류를 싫어할 수밖에 없다, 오류가 제거되면서 함께 사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오직 실수를 통해서만 학습할 수 있음을 알고 있으며, 새로운 시행으로 새로운 오류를 포착하고 그 오류를 이론에서 제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칼 포퍼, 그의 이야기를 통해 나는 자기비판과 객관적 진리라는 명제에 다시 매달리기 시작한다.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라 했던가. 책 내용과 어쩌면 잘 들어맞지 않는 어색한 제목이라고 느꼈던 처음 생각은 달라졌다. 객관적 입장에서 끊임없이 자기비판과 자아를 생각하다보면 저자의 말처럼 크게는 정치와 이념 그리고 과학과 인간정신 따위도 다 같은 테두리 안에 들어앉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어쩌면 커다랗고 방대하며 그리고 무한하기까지 한, 깊이 있는 우리 각자의 삶의 문제 앞에 다시 서게 되는 것은 아닌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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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사 2011-03-01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부하지 않은 평 잘 읽었습니다.

월천예진 2011-03-03 09:20   좋아요 0 | URL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베터라이프 2020-06-06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퍼 아저씨 글은 대학때 엄청 가방에만 넣고 다녔더랬죠. ^^;;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여러 판본으로 사모으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서가 어디에 쳐박혀 있는지 기억이 안나네요 ㅜㅜ 좋은 서평 잘 읽고 갑니다! 날이 가면갈수록 더워지는데 건강 잘 챙기세요!

월천예진 2020-06-06 23:43   좋아요 0 | URL
아. 오늘은 정말 뜨거웠던것 같아요. ㅡ.ㅡ 전 더위를 잘 안 타는데도 오늘은 쉽게 지치더군요. 포퍼 아저씨의 글을 좋아하셨군요. ^^♡ 저도 시간이 많이 흘러서 다시 보고 싶어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베터라이프님.
 
작가의 집 - 책들이 탄생한 매혹의 공간
프란체스카 프레몰리 드룰레 지음, 이세진 옮김, 에리카 레너드 사진 / 윌북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스물여덟 번째 서평




작가의 집- 프란체스카 프레몰리 드룰레 지음




그들만의 집-치열한 삶의 애착을 담다




작가는 상상력을 원동력으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 그 분야가 소설이든, 시든 혹은 희곡이나 시나리오라 할지라도 현실에서의 경험만으로 대중의 숨은 상처까지 들춰내 다시 치유하는 것은 부족하기에, 경험을 받쳐주는 상상력의 가치가 필요조건에 속한다는 말이다.

아침부터 꽤나 딱딱한 분위기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론상 공책을 펼쳤을 때 하는 이야기이다. 사실 한편의 문학작품을 대할 때 독자는 어디까지가 사실일지, 어디까지가 허구일지를 먼저 따지지 않는다. 그저 그 작품 깊숙이 자신을 함께 싣고 가는 데 자기만족과 희열을 느끼지 않을까싶다.




작가의 집이라는 책 한권이 있다. 무심코 책을 선정한 까닭은 누구나 그렇듯이 들여다보기에 대한 호기심 내지는 신비감 때문임에 분명한듯하다. 하지만 혹자가 가졌을 그런 호기심만을 채워주기 위해 책이 생겨났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책이 지닌 이야기는 보이는 것 이외에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양의 내적가치를 품고 있다. 마치 어린 사내아이의 양쪽 주머니 속에 감춰진 구슬 조각을 셈할 때의 기분처럼 직접 꺼내기 전에 상상하는 설렘과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책에 대한 이미지는 상반될지도 모르겠다. 독자의 생각과 입장에 따라 그 가치가 다르게 평가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모든 책이 독자와의 관계성을 생각한다면 다들 비슷비슷한 운명을 이어가긴 하겠지만, 특히나 이 책은 에세이와 비슷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면서(엄밀히 따지면 에세이는 아닌듯하다) ‘들여다보기’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동시에, 문학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 책을 감싸고 있는 나름의 가치를 생각할 수 있을법하다. 그러나 작가들의 뒷모습과 그들의 삶이 오롯하게 그려져 있는 하나의 매개체인 집이라는 것을 소개하고는 있으나, 다소 가벼운 생각이 드는 까닭을 굳이 고백하자면 이런 것 때문이 아닐까. 한명의 작가와 작품 그리고 그의 생애와 그 모든 것을 어우르는 존재인 집을 이야기하기에 지면은 많은 양을 다 할애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 바람결에 따라 흘러가는 아카시아 냄새처럼, 늦봄 냇가에 맥없이 떠있는 개구리 알의 무더기처럼 다만 표면위에서 살랑살랑 거리다 흩어져가는 무엇과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은 위험하게도 이놈의 느낌은 정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환기해야 한다. 어떻게 느끼는가는 어디까지나 독자의 영역이기 때문이기에.

깊이감을 원했다면 책을 읽고나서 각각의 작가와 작품을 다시 만나면 좋을 듯하다. 깊이 있는 재회의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싶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자들처럼 부담 없이 다가서기를 원했던 이들이라면,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한번쯤 산보하는 기분으로 읽어가도 무방할 듯 보이는 책이다. 책에 대한 느낌은 자유로워야 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책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 20명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주된 이야기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집이라는 공간에 집약된다. 그들의 삶에 있어 집은 단순히 거주를 의미하는 집의 의미에서 한정되지 않는다. 집은 삶의 공간인 동시에 작업실이며, 상상의 나래를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또는 뒤죽박죽 공장의 일터로서 정의 내린다. 어쩌면 이 정의는 작가 스스로가 원하던 의미가 아니었을까. 집에 대한 애착을 작품에 그대로 승화되어 구체화되기도 하는 예를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왔던 작가들을 포함해서 미국, 노르웨이, 이탈리아등 지역과 나라의 한계를 넘어 책은 오로지 작가와 작품이 탄생한 집에 고집스럽게 매달려 그 가치에 빛을 발하고 있다. 정원을 가꾸는 이도 있었으며, 작품 인세를 받아 다 쓰러져 가는 낡은 집을 수리하는 작가의 모습도 엿보인다.

책은 삶에 대한 강한 애착, 그리고 작가로서의 끊임없는 자기존재의 확인에서 오는 고통과 희열의 얼룩이 번지는 집과 그 집에서 탄생한 빛나는 작품들의 소개가 잔잔하게 들어차있다. 특히나 카렌브릭센, 버지니아 울프, 비타 색빌웨스트 등과 같은 여류 작가들을 새롭게 접할 수 있는 기회 역시 신선했다는 생각이 든다.




추억과 그리움으로 들어찬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고 가슴에 새겨진 어느 훈장의 느낌처럼 책 속에 담겨진 작가의 생전 흑백사진과 함께 처연하면서도 아담한 그들이 사랑했던 옛집의 사진들이 눈길을 붙잡는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인도차이나를 배경으로 한 영화 ‘연인’의 원작자인 마르크리트 뒤라스가 남긴 말을 마지막으로 기록한다.

“노플 집의 고독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고독이었다는 점이다. 나를 위해 만든 고독, 오로지 이 집에서만 나는 혼자였다”




작가에게 고독은 현실적인 저항인 동시에 정신적인 지주였을 법하다. 의도된 고독을 견디는 고된 시간을 함께 해온 것은, 그들이 그렇게 사랑하고 안식을 원했던 그들 ‘작가의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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