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금강 지음 / 불광출판사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열일곱 번째 서평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금강 스님




미황사. 그 아름다운 이야기




“보살님, 초파일 앞두고 행사가 있으니 꼭 오세요.”

나는 불교신자가 아니다. 그러나 낯선 이방인인 내게 앳된 얼굴의 비구니 스님은 합장을 했다. 얼떨결에 들고 있던 작은 생수병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설픈 모양으로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던 나는 그 순간 저 낯선 스님이 내 맘을 꿰뚫고 가는가 싶어 묘한 기분에 싸여 얼굴이 달아올랐던 기억이 있다. 왜 내게 말을 걸었을까. 그러나 무심하고 또 무심했던가 보다. 스님은 작은 전단지 하나를 건네며 촘촘히 보폭 작은 잰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갔다.

그 무렵 생각할 것들이 너무나 많은 까닭에 나는 매일같이 산에 올랐다. 산이라고 해봤자 한 시간 정도면 임의로 정한 나만의 반환점을 돌아 하산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이였고, 꼭 그 만큼의 거리였기에 그다지 험한 길은 아니었다. 그 어중간한 산 중턱에도 작은 사찰 서너 개가 자리했던 터라 종교의 의미를 불문하고 사찰 안으로 들어갔던 것 같다. 워낙 작은 규모의 사찰인지라 일주문 비슷한 나무문 바로 앞에 커다란 돌계단을 헐떡이며 올라서면 바로 대웅전이었다. 대웅전 앞마당 한 귀퉁이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을 즐겼던가. 내가 선 곳에서 더 높은 곳으로 뻗어나가는 거대한 산의 등줄기를 보는 일은 부드러운 힘의 기운을 느끼는 일이었다.




  대웅전을 등에 지고 바라보던 그 산이 내품었던 포근함 앞에서 나는 작은 소인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도 내게 있어 사찰이란, 불교 경전이란, 또는 스님들의 이야기라는 나름의 명제를 접하는 것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서는 일이다. 그것은 일상을 이어가며 생겨나는 초조함과 불안감 때로는 교만과 많은 감정의 굴레까지. 마음속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터럭이라는 이름의 모든 것들을 비워내는 가장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방법에 하나임에는 변함없다.




이름없는 사찰이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걸어들어 왔다고 하면 맞는 표현이 될까. 첫걸음은 흐릿하고 미비했으나, 그 걸음걸이로 내딛은 발걸음의 흔적은 깊고 온화했을법하다. 온당 그러하다. 땅끝마을의 작은 사찰 미황사는 사람들에게 많은 울림으로 다가선다. 그것은 그들의 기억이 자리하는 곳마다, 그들 옆에서 순간순간 귓전에 일렁였을 바람결마다, 혹 서걱거리는 옷자락에 스쳤을 법한 그들. 사람과 사람들의 숨결마다 깊게 배어든 울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름다운 절 미황사. 추운 계절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멸을 의미하는 겨울은 새로 돋아나는 모든 만물의 기대치를 품고 있기에 어쩌면 봄보다도 더 희망적이지 않겠는가. 계절의 순환에 따라 겨울 봄 그리고 여름과 가을 사계절의 고운 풍광과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진 사진은 미황사를 좀 더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특히나 금강 스님의 미려한 문체는, 스님의 꾸밈없이 소박하게 풀어낸 이야기와 함께 미황사가 지닌 진면목에 더욱 빛을 발하게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책을 읽으면서 세 가지 정도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했었는데 그중 가장 으뜸은 금강스님의 시처럼 여운이 자리하고 잘 다듬어진 고운 글에 관한 이야기이며, 두 번째는 스님이라는 자리에 서 있는 한 인간의 금강스님을 만나는 일일 것이며, 마지막은 종교와 관련해 종교와 사람의 이야기로 생각했던 것 같다.





 책은 스님이 바라보는 미황사의 이야기, 그 안에서 부처의 뜻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구도자로서의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주변의 마을 사람들과, 미황사를 찾는 인연의 이야기를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낸다. 이야기 속에는 불교와 민속신앙(토속신앙)의 조화가 공존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고, 갖가지 사연을 지닌 채 미황사를 찾아온 이들의 풋풋하면서도 진솔한 각자의 인간적인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문학당과 템플스테이, 참선수행 프로그램 ‘참사람의 향기’ 등과 같은 자리에서 그 깊이를 더한다. 누구나 평범한 한 사람의 모습으로 지극히 낮은 곳에 있는 자아를 발견하고, 저마다의 해안을 얻는다는 데 의미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설사 모두가 찾으려했던 그들 나름의 답을 구하지 못했을지언정 그 자리에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만한 기운을 가슴에 담고 각자의 일상으로 회귀하는 것이야말로 금강스님이 꿈꿔왔던 그림이며 또한 부처의 뜻이 아니었을까싶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 이 기억난다. 불교가 왜 대중성을 잃을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한용운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나는 금강 스님과 미황사를 나란히 옆에 가져다 놓고 생각의 고삐를 당긴다. 작고 미비한 존재였던 미황사가 크고 웅대한 사찰로,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 자리매김한, 말 그대로 ‘미황사의 아름다운 성장기’를 보고 한용운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




산중에 있어 깊이 안으로 침잠하는 것으로만 열중하지 않고, 직접 사람들에게 다가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미황사 식구들. 그리고 금강 스님의 열정에서 나는 또 다른 성불의 개념을 찾아냈다는 생각을 한다.

 

----- 늘 찾아오면 맞이할 줄만 알았지 이렇게 틀을 깨고 직접 찾아가는 법도 있었다는 사실에 더없이 행복하다

----- 이렇듯 수행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사람들 속에서 나를 보는 것이다.




 라고  토로했던 불자의 진솔한 고백에서 미황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내일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책 한권이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비단 그것뿐일까.

마지막으로 “입차문래(入此門來) 막존지해(莫存知解)” 라는 말을 기억하려 한다. 문을 들어 올 때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뜻이라 했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나를 온전하게 비워내야 한다는 말인가.

 

새로운 것을 담기 위해서는 내가 지닌 모든 것을 낡은 것인양 미련 없이 버리고 그 자리를 새롭게 한 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새날을 맞이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은 법인 스님의 표현처럼 ‘세상 속으로 걸어 나온 절’인 미황사를 만나면서 내가 알게 된 또 다른 해안의 방법으로 오래 기억되리라 믿는다.

끝으로, 박남준 시인의 깊은 가을밤 달무리 같은 고운 글도 덤으로 만날 수 있어 좋았다는 것도 잊지 말자.




사실은 ‘들어갈 문을 찾는 일 보다, 내 것을 비우고 잊어낼 수 있을까’ 라는 화두가 먼저 내 발목을 붙잡는다. 그러나 이런 주저함마저 그곳 미황사에 가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가볍게 털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바뀔 것을 예감하며 남해 끝. 땅끝마을 미황사에 대한 내 사랑 노래를 마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한산성의 눈물 샘깊은 오늘고전 12
나만갑 지음, 양대원 그림, 유타루 글 / 알마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열여섯 번째 서평

남한산성의 눈물

전쟁. 현자와 충신을 찾는다




책을 논하기에 앞서 이번 서평을 위한 책의 주 독자층이 일반 성인이 아닌 어린이와 학생이라는 사실을 제시해야 할듯하다. 물론 어른이 봐서는 안 될 ‘어른금서’라는 말은 아니겠지만, 학생들에게 보다 쉽게 접근하기 위한 편집내용을 보더라도 시처럼 예쁜 제목을 가진 이번 책은 아이들 책꽂이에 꽂아두고만 싶어진다.

병자호란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진 까닭에, 전쟁과 관련된 사실적인 이야기와 당시 조선의 시대상황과 일반 백성들의 이야기까지 엿보고 싶었던 첫 욕심은 잠시 보류해야 할듯하다. 이번 사적인 욕심은 ‘남한산성의 눈물’을 총괄해서 설명하고 정리한 한명기 교수의 다른 저서를 통해 풀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다음기회로 넘겨야하지 않을까. 선물로 초등학교 4학년으로 올라가는 조카에게 주고 싶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한산성의 눈물. 제목을 접했을 때 무척이나 시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또 한편으로는 책을 받고나서 근래의 어린이를 독자층으로 삼고 출판되는 서적의 수준에 대해서 잠깐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독자 연령대를 떠나서 이 한권의 책이 담고 있는 것은 역사적 사실임에 분명하기에 그만큼의 가치는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질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그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은이에 대한 소개가 남다르다. 정작 이 책을 쓴 이는 유타루(아마도 필명인 듯 보인다)와 그림을 그린 양태원이지만, 병자호란을 몸으로 겪으며 전쟁의 참 모습을 기록으로 남긴 병자록의 저자는 정작 따로 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의 눈물’은 바로 병자록의 기록을 새롭게 한글번역 정도의 단계를 거쳐 재구성된 책이다. 조금 더 살을 붙이자면 실존 인물인 나만갑이라는 병자호란 당시의 문신이 일기처럼 남긴 전쟁일지라고 보면 적당한 설명일 듯싶다. 이쯤에서 발동이 걸리는 딴지 하나는 병자록의 저자 나만갑이라는 인물 소개가 너무 소소하게 또는 흐릿하게 보여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원작자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도 좀더 신경을 써줘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딴지는 일절만 걸고 넘어가자. 남한산성의 이야기는 크게 5부로 구성되어 병자호란의 시작과 그 과정에서 생겨났던 크고 작은 이야기 그리고 전쟁이 끝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1부 전쟁의 시작 편에서는 병자호란이 시작되기까지 주변국의 상황이 소개되고 있다. 쇠퇴하는 ‘명’과 새로 번성해가는 여진족의 ‘청’, 이 두 나라의 상황이 조선이라는 나라에게 매우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2부에서부터 5부까지는 산성에 고립된 채 싸워야 했던 인간적인 고충이 (신분상의 층위를 따라 제각각 드러나는 감정적 동요가) 잘 그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임금이었던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피신하여 칩거하다가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오기까지 날짜순으로 기록된 나만갑의 일지를 살펴보면 무엇보다도 주화파와 척화파의 갈등 앞에 시선이 머물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병자호란 당시에 시대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참 모습 임에 분명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일신상에 문제나, 나라의 흥망을 결정짓는 문제나 비슷한 상황이 되면 항상 양극화 현상으로 분리되는 여론을 접한다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조선의 말기 일제통치를 앞둔 상황과도 비슷했고, 현재 푹 빠져 읽고 있는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는 해방 직후의 시기적 상황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사는 당대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후대가 판단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각설하고 주화파(청과 화친에 주도적 역할을 하던 부류)또는 척화파(청과의 화친에 반대하는 부류)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명분은 있지 않았던가. 무엇이 더 실리적인 선택이었는지를 생각하면 잠깐 답을 찾는데 시간이 걸릴 것도 같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양쪽 파벌을 떠나서 한 개인의 시선에 동조하려던 참이다. 그는 유난히 이번 책에서 빛을 발하는 인물로 소개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임에 틀림없다. 그 인물은 바로 척화파의 이조판서 ‘정온’이다. 주화파의 수장격인 ‘최명길’과 대립을 이루며 임금에게 올렸던 상소문의 일부가 책에 소개되어 있는데, 주화파나 척화파 그 어느 쪽에도 기울어짐 없는 입장에서 보더라도 그의 상소문은 우직함과 함께 힘이 받쳐주고 있는 명분이란 이런 것이다, 는 느낌을 받게 한다.




“무릎을 꿇고 사느니 바른 길을 지키다 죽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의리를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는데 최명길은 둘이 있기를 바라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데 최명길은 두 임금이 있기를 바랍니다...........엎드려 원합니다. 전하께서는 최명길의 말을 단호하게 물리치시고, 나라를 판 그의 죄를 밝히십시오...........”




역사 이래로 어느 시대든, 어느 나라이든 다양한 인간성이 공존하는 것 또한 흥미로운 사실일진데, 그 가운데는 유난히 이타적 인물과 함께 배타적 인물들의 군상이, 대립과 반목을 일삼는 일의 반복적인 양상을 갖는 것을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지난 달, 한때 거대한 유명세를 등에 업고 종용한 드라마에서 나왔던 대사가 생각난다.

‘전쟁도 사람의 일인지라~~~~’ 라고 했던가.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 권력층과 또 다른 권력층의 대립, 이합집단과의 불일치 또는 그 성격을 조금 달리한 민초들의 봉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쟁과 조선조 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일반 민중들의 난 역시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침략하는 자와 침략을 당하는 자 모두 사람이고,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 역시 사람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쪽이나 당하는 쪽이나 피해는 같지 않을까.




시대가 어려우면 영웅이 탄생한다고도 했다. 난국일수록 신하됨의 충직함과 덕망을 갖춘 인물은 찾기 어려울 수 있으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충신이 한 두 명이라도 꼭 불안한 군주 곁에 서 있었다는 데까지 생각이 흘러간다. 주화파와 척화파 그들이 서로 주장했던 실리와 명분을 다시 생각하면서 과연 어느 쪽이 현자이며 충신이었던가, 고민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차의 눈을 달랜다 - 제28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160
김경주 지음 / 민음사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열 다섯 번째 서평

시차의 눈을 달랜다- 김경주 시인

언어의 유희 그 안에서 가슴속 파편을 찾는다

 

 내가 처음으로 시를 좋아했던 시절은 이십대 중반이었고,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몇 년 전이었지만 시를 시라고 부를만한 단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시집을 쌓아두고, 책꽂이에 시집이 보이지 않을만큼 다른 책을 겹겹이 올리고, 커다란 옷걸이 행거를 가져다놓은 채 철마다 정리되지 않은 몇몇의 두터운 가을 겨울용 외투를 늘어놓고 보낸 시간만큼이나 시는 내게서 멀어져 갔다. 안녕, 등을 돌리고 조금씩 조금씩 뒷걸음치며 갔던가. 아니면 작별의 인사도 없이 줄행랑을 칠 요량으로 황급하게 달려갔던가.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시집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첫장을 펼치는 향연을 즐겼다. 두근거리는 마음속에는 꼭꼭 쟁여놓았던 한때의 애정이 꿈틀거리며 올라왔고, 십년도 훨씬 지나왔던 외면의 시간쯤이야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을 것만 같아 욕심은 커져 바삐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걸 어찌하면 좋을까. 내가 시집을 덮고 산 지난 시간동안 내가 알고 있던 시의 세계는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동동거리는 나를 주저하게 했다. 김경주 시인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었다. 이번 그의 시집을 받아들고부터 나는 그에 대한 늦은 뒷조사를 살금살금 하기 시작했다. 그가 썼던 이전의 시 몇 편도 같이 읽어보았다.




 그가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굳이 책꽂이 귀퉁이에서 낡은 소포지로 포장해두었던 김수영 전집을 꺼내들었던 것은 사실 김수영의 시를 들여다보기 보다는, 김경주 시인의 작품세계를 더 잘 알고 싶었던 까닭인지도 모른다.

얇은 시집 한권에는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이 춤추고 있었다. 밤하늘에 깨알같이 박힌 별들이란 표현처럼, 그의 시집 한권에는 그만의 색이라 할 수 있을법한 이미지들이 도열한다. 현대시를 감상할 때 느껴왔던 점을 생각하면, 김경주 시인의 작품은 이미지(다소 무겁거나, 또는 어둡거나 질척이는 듯한 ) 중심의 작품세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언어를 조탁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시인의 몫을 논할 때 그 조탁의 힘과 더불어 같이 생각해봐야 할 것을 한 가지 더 추가하고 싶다. 이를테면. 시인은 눈과 가슴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다. 시인 안에서 멈추지 않고 세상으로 향한 열린 눈과 가슴은 시인만이 지니는 강한 무기이자, 모든 상처로부터 치유하고 보호하는 치료제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런 생각은 내가 읽는 시가 그런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욕심에서부터 출발하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시차의 눈을 달래기 위해서 나는 이 시집을 한번에 그치지 않고, 서너 번은 더 읽어야 함을 느꼈다. 물론 순간 느낌이 오는 시도 몇몇 있었다. 그렇지만 시인은 내게 좀 더 부지런을 떨 것을 부탁한다. 이미지들의 나열 속에서 나는 과연 얼마나 많은 시인의 뜨거운 가슴속 파편들을 건져냈었나.

뜨거운 가슴으로 찢긴 조각들을 하나둘 찾아 모으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달게 생각하고 주저하지 않는 시인의 시 쓰기는 얼마나 헛헛함이 몰려드는 일이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시인의 시가 단순한 이미지의 나열에서 오는 언어유희의 함정에 빠졌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언어가 풀어내는 유희라는 함정에 시인이 스스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리고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다만, 유희의 함정이나 스스로 문을 닫은 시인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독자들이 얼마만큼 시인의 이야기에 공감을 하고 이해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차피 모든 문학은 소통과 교감의 장르가 아니었던가. 개인의 경험과 사고의 범위에 따라 문학을 수용하는 형태는 갖기 다른 모습으로 전이되는 것까지도 간과하지 않겠지만, 이번 김경주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나는 노파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하자.




“처음 눈물이라는 것을 가졌을 때는 시제를 이해한다는 느낌”

                                  

“사람의 눈으로 들어온 시차가 구름의 수명을 위로한다”

  

                                                           -연두의 시제




“이불 속에서 누군가 손을 꼭 쥐어 줄 때는 그게 누구의 손이라도 눈물이 난다 하나의 이불로만 일생을 살고 있는 삶으로 기꺼이 범람하는 바늘들의 곡선을 예우한다”

            

                                                            -바늘의 무렵




“저녁에 흰 뼈가 드러나는 바람과 함께

나는 묻힐 것이다 수십 개의 이름으로”

                                                  

                                                             -개명


시인의 가슴에서 어우러지고 있는 이미지들은 그 나름대로의 이야기로 오롯하게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의 시에서 몇 구절을 옮겨 적어놓고 보니 시인은 분명 그 자신의 길을 찾아 쭉 바른 직선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행이다. 초반에 느꼈던 불안감(독특한 시 세계의 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이질감)이 이제 슬슬 나를 풀어주려 하려는가 싶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김경주 시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된 시 한편을 기록하면서 서평이란 이름의 끄적거림을 마무리할까보다.




새가 떨어지지 않는 하늘이 없다




                                  김경주




시 때문에 죽고 살 일은 없었으면 하는데

자꾸 엄마는 시를 놓으라고 울고 나는 고양이를 울린다

자꾸 시 가지고 생활을 반성하는 놈 좀 없었으면 하는데

시 때문에 30분을 책상에 앉아 있다가도 참혹해지고

시 한 편 발표하고 나면

몰래 거리에 쓰레기 봉지를 두고 온 기분이 든다




시 때문에 살 일 좀 생겼으면 하는데

사형수가 교수대를 향해 걸어가면서

뒤따라오는 간수들에게 갑자기

자꾸 밀지 말라고 울먹이는 광경처럼




밀지도 않는데 떠밀리고 있다는 느낌으로부터




시만 짜서 이대로 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




시 때문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오래 시 안 쓰다가 다시 쓴다는 놈 생각

좀 하고




다시 쓴다는 놈치고

세상의 속물 다 겪은 후 오만하게 돌아온 것 못 봤다

그게 시의 구원이라면

시 때문에 형편없는 연애라도 그만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해 보지만

시 때문에 죽어서도 까불지 못하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따지고 볼 것도 없이 신파란

내 쪽에서 먼저 부러우면 지는 법이다

이기고 지고 살 일도 아닌데 시 때문에

이름 없는 무덤 옆에 가서 잠도 자 보았다




시 때문에 울먹이는 일 좀 없었으면 하는데

하루도 새가 떨어지지 않는 하늘이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은 철학자들의 서 -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우며 숭고한 철학적 죽음의 연대기
사이먼 크리칠리 지음, 김대연 옮김 / 이마고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열네 번째 서평




저것은 천국인가. 지옥인가.

               - 독일 철학자들 편, 철학자 실러.




죽음 앞에 선 한 철학자의 말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죽음을 바라보는 그는 천국과 지옥을 떠올렸던가 보다.

모든 것은 불명료하다. 철학자들이 철학을 하는 까닭은 불명료의 많은 것을 명료의 반열위로 올려놓기 위한 노력이라는 생각을 한다. 삶이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오만가지 잡다한 논변거리든, 또는 삶을 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로 그릴 법한 죽음이든 다 비슷하지 않을까.

놀이공원에 있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제일 높이 만들어진 철제조형물의 꼭대기 끝 지점에 다다랐을 때 다음 순간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생각해보면 어떨까. 물론 약간의 예상은 누구나 갖고 있기마련이다. 그런데 일초 또는 일분의 짧은 순간, 정적과 동작의 멈춤에서 오는 불안한 공포와 두려움 뒤에 내가 온 몸으로 맞아들여야 할 하강곡선에서의 충격은 그 짧은 순간 롤러코스터에 엉덩이를 구기고 앉아있는 내게 찰나일지언정 무한대의 가늠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올 것 같다.

철학자들이 롤러코스터를 타고 높은 꼭대기의 낙하지점을 향해 올라간다. 모든 관념과 문제들 앞에서 그네들 스스로 공부하고 내세워왔던 학설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그들은 그들만의 자신감과 확신에 가득 부푼 자의식으로 무장한 채 인간이 갖는 ‘두려움’은 한갓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역설한다.




한권의 책 안에 많은 철학자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저자 사이먼 크리칠리는 많은 철학자들을 소개하면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단순히 역대 철학자들이 생각해왔던 죽음의 대한 개념을 소개하는 데만 목적을 두지 않는다. 저자는 여기저기 제시된 텍스트를 한데 묶어서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어간다. 저자가 그리스, 중세 로마, 중세, 그리고 현대까지 이어지는 철학자들의 연보를 들면서 하고자 했던 요지의 핵심은 정말 간단하다.

죽음은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는 말. 철학을 한다는 것은 곧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독자와 더불어 많은 이들이 죽음을 뛰어넘어 평정심을 확고히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으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곧 죽음을 통해 철학에서 배울 수 있는 적절한 태도라는 하나의 추상적인 논지를 던지고 돌아서는 저자의 사려 깊은 의도와 부합하는 이야기인 듯싶다.




  “철학은 죽음을 준비하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으며, 죽음에 대한 준비 없이는 행복은 물론이고 그 어떤 만족의 개념도 환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이 으스스해 보이는 책에서 내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는 바로 행복의 의미와 가능성이다.




-----------------------------(중간 생략)




감히 장담하건대 죽는 법을 배움으로써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죽음을 통해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다는 말인 듯하다. 그런 까닭에 정말이지 수로 헤아리면 너무나도 많은 인류 역사상 현존했던 철하자들은 모두 불러들인 듯한 인상을 주는 이 책속의 인물들은 말 그대로 다양한 죽음과 맞닥뜨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처음 갖고 있었던 선입관은 책에 대한 가벼움이었다. ‘소똥에 질식하거나 화산에 뛰어들거나, 스스로 무덤에 들어가거나 분신하거나, 매독으로 죽거나 날벌레에 쏘여 죽거나, 위장병으로 죽거나 오줌을 참아서 죽거나, 병 들어 죽거나 미쳐 죽거나’ 와 같은 제목을 가지고 소개된 사이먼 크리칠리의 책에 대한 선입관은 이를테면 소재의 중압감을 인지하고서라도 그저 비교적 가벼운 산보하는 이미지로 다가왔었다. 왜 하필이면 소똥에 질식한 철학자인가 말이다.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그러나 솔직하게 나는 그런 내 생각에서 완벽하게 아웃되었다고 생각한다.

틀렸다. 물론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독서의 방향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적어도 가벼운 산보의 시간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다.




 죽음을 기다리며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느낄 수밖에 없는 두려움과 공포를 적나라하게 그려낸 철학자의 모습에 나는 연민을 보낸다. 또한 기독교 성인들의 죽음 편에서 소개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신 앞에 선 인간과, 신 앞에 섰으나 여전히 흔들리는 불안한 한 존재로서의 지극히 인간적인 그(아우구스티누스)’를 만났다.

저자가 말했듯이,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중의 고통 속에서 번민한다. 그는 철학자도, 종교인도 아닌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가 아직도 인간의 굴레에서 얼마나 벗어나지 못했으며 신께 얼마나 충분히 다가가지 못했는가를 알려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놀랍게도 이런 말을 남긴다.

-------------------------

나는 내 슬픔에 또 하나의 슬픔이 더해져 슬프다. 나는 두 겹의 슬픔에 짓눌려 있는 것이다 .”

 

 철학적 계보에 따라 다양한 학파들이 등장하고, 각기 분열된 그들의 의식 속에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그림을 달리 색칠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 한가지라는 점에 의의를 두고 싶어진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평범하며, 겸허해진다는 것이다. 비록 그가 터무니없는 이유 때문에 죽음의 골짜기에 내동댕이쳐졌을지라도 마지막 순간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긴 해도 그것이 어디 철학자들의 이야기일 뿐일까.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들자면, 번역물이 갖고 있는 문장흐름에 대한 점을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쉬어감이 없는 문장 분위기에 초반에 지루함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다. 아. 왜 작가는 이렇게 많은 이들을 이 좁은 종이 위에 꽉꽉 채워서 설명해야 하는 걸까. 하나의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저자는 또 다른 이야기의 중반부를 시작하는 듯 했는데, 어쩌면 그것은 작가의 욕심을 알아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던 것 같다.



죽음이 다가올 때 떠는 것은 유령이나 귀신을 무서워하는 아이처럼 구는 것이다. 창백한 유령은 언제든지 자신이 원할 때 내 문을 두드릴 수 있지만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용감한 사람도 겁쟁이가 되는 순간에 철학자만이 용감하다.

                                   

                                             -라메트리‘에피쿠로스의 체계’

                                                                                    ”

이 순간 모든 이들이 죽음이라는 명제 앞에서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홀한 글감옥 - 조정래 작가생활 40년 자전에세이
조정래 지음 / 시사IN북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열세 번째 서평




황홀한 글감옥 (조정래 지음)




시대의 산소, 작가 조정래를 만나다




 난 그다지 많은 책을 읽지 못했다. 더군다나 태백산맥이라는 제목으로 유명해진 작품과 작가에 대해서 흔히 하는 말 그대로 나는 정보부족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여학교 시절 교편을 잡고 계시던 아버지의 서재에서 낱권으로 한두 권쯤 훔쳐보던 때가 있긴 했다. 아. 그런데 질펀하게 늘어지던 그 남도의 사투리를 일일이 발음해가면서 읽기에는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너무 성격이 급했었나보다. 많은 시간이 흘러서 지인의 입에서 다시 한 번 책 제목을 전해 들었다. 이른바 신혼 우울증에 제대로 빠져버린 까닭에 심리학 분야의 책을 추천해달라고 떼를 쓰던 내게 그는 스케일이 큰 책을 읽어볼 것을 충언했다. 당시에 내가 붙들고 있었던 책은 ‘프리다 칼로(멕시코 여성화가. 페미니즘과 연계)’에 관한 책이었는데, 그녀의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은 욕심에 그와 관련된 서적을 몇 권씩 사다 나르던 참이었다.

생각해보면 태백산맥이라는 책은 한두 번 쯤, 내 옆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좋게 말해서 그렇다는 뜻이지, 사실 내가 지금까지 그 책을 읽지 않았으니 나를 기다려주었던 책이 아니라, 내 관심 밖 그야말로 주변 언저리에 포진하고 있는 수많은 책들 중에 한 부류였을 뿐이다.




문학 작품을 먼저 접하기에 앞서 그에 대한 에세이를 읽는 다는 게 방법론에서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많았다. 그래서 주저하기에 시간이 많이 흘러갔던 것도 갔다. 책을 몇장 씩 생각없이 들춰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빙빙 돌려보기도 하면서 나는 방관했다. 책에 대한 부담감을 덜고 싶은 생각조차 내 머릿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후 지금 나는 생각한다. 모든 면에서 기다림은 용이하다고 말이다.

어떤 분야, 어떤 동기와 목적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기다림이 필요하다면 굳이 떨쳐낼 필요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결과적으로 내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닫고 있다.




뉴스에서 작가 조정래 선생이 에세이를 냈다는 기사를 접하고 바로 책을 구입했다. 첫장을 열고 읽기까지 나름대로의 고충이 따랐던 것도 사실이지만, 책 ‘황호한 글감옥’의 내재되어 있는 힘은 역시 강했다.

단순히 일인칭으로 서술하는 형식을 떠나, 독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글은 이어져간다. 물론 상당한 분량의 질문과 답글은 작가 나름대로의 룰과 형식에 의해 구분되고 있으며,  문학론, 작품론, 또는 작품과 시대성, 작가 한 사람의 생에 대한 부분까지 폭 넓게 전개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조정래 작가의 ‘황홀한 글감옥’ 이 책은 단순히 삶을 반추하며 써나가는 에세이의 형식을 벗어난다. 문학만을 두고 본다면, 문학을 위한 마음 다잡기를 비롯해서 문장 강화 수업의 교재로 쓰일법할 만큼 이따금 작가는 정확한 문장을 강조하는 것이 올바른 문학의 길이라 강조하고 나서기까지 한다.

그의 작품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작품의 특성상 시대적인 부분과 많은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을 것이다. 이번 책에서도 역시 그 부분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고 있다. 시대의 아픔을 풀어나가는 데 작가로서 그가 경험해야 했던 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솔직하게 저술되고 있다. 몇 번의 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 마침내 이적물이라는 붉은 딱지를 떼어내게 되는 그의 작품은, 지나간 어렵고 위험한 협곡의 시간을 인내하며 무사히 견뎌냈기에 더욱 빛을 발하는 결과를 가져온 듯하다. 

책 속에는 작가라면 반드시, 또는 작가가 아닌 일반인의 자리에서라도 마음에 새기고 간직할 작가 조정래의 진심어린 충언이 담긴 문구가 속속들이 숨어 있다.

그중에서도 당연 으뜸으로 꼽고 싶은 구절은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 라 했던 작가의 말이었다. 보통은 분노 앞에 이성적일 수 없는 것이 사람이며, 증오 앞에 논리적일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삶인데, 작가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작가 나름의 철칙을 세워 한 번도 꺾지 않고 지금까지 강건하게 버텨왔던 것이다. 한번쯤이라도 부조리 앞에서 흔들릴 수 있는 게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지 않을까. 그렇지만 작가 조정래는 역시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역시 스스로 말하기를 ‘작가는 인류의 스승이며, 그 시대의 산소’ 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 시대에 건강한 정신으로 한 생을 바친 그의 열정에 고개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은 너무 감상적인가. 




 앞부분에서 잠깐 언급되었지만, 글쓰기와 창작에 관한 작가 조정래의 작가론은 누구나 한때 저질렀던 실수처럼 지금까지도 많은 학생들이 문학을 접할 때, 기술과 테크닉 분야에 심취하는 점에 더 치중하는 폐단을 가차 없이 꼬집어 흔들어댄다. 작가의 글 어디쯤에 있었던 문구는 문학의 정신, 글쓰기의 핵심을 가장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듯했다.

 

‘살 껍질이 닳아지고, 속살이 닳아지고, 뼈가 닳아질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




이제 수많은 독자의 자리에 한발을 내딛어 한 구석 비집고 들어가 앉아 있으니 묘한 생각이  늘어지는 것은 느낀다. 서둘러야겠다. 불안했지만 어쨌든 작가에 대한 좋은 영향은 그만큼 작가가 품어 탄생시킨 작품에게까지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작가 조정래. 그의 작품을 만날 일에 가슴이 설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