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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란 - 오정희 짦은 소설집
오정희 지음 / 시공사 / 2022년 8월
평점 :
활란
2022년 9월 추석 연휴가 끝났다. 연휴 마지막 날 어제가 생일이었다. 이따금 추석 연휴와 생일이 오가며 겹쳐서 다가오곤 한다. 생일은 양력인데 추석을 음력으로 따지다보니 어느 해는 추석 당일이 생일인 경우도 있더라.
그렇긴한데, 언제나 생일보다는 명절이 더 중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딸이라는 자리보다는 며느리이고 아내이며 아이들의 엄마라는 자리가 더 컸기 때문이다.
시댁에 내려가기 이삼일 전부터 빠지던 몸무게는 내 집에 와 꼭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 원상태를 회복했다. 결혼한지 20년째. 여전히 예민하다. 몸무게가 빠지고, 지병이 나빠지고. 누가 알까. 누가 알아주기나 할까. 아니, 아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뭘 그런 것까지.
오정희의 짧은 소설 활란을 읽는다. 참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작가다. 20대 시절 만났던 오정희와 40대 후반에 만나는 오정희의 글. 작가는 여전한데 자꾸만 의문이 생겨난다. 무엇이 변했을까. 무엇이 달라졌을까. 결국 변해버린 건 나뿐인가.
이상하기도 하고 마음이 아리기도 한 이 기분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건지 가만히 생각해야 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아내, 엄마, 며느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끌어안은 나. 라는 존재를 들여다보면서 나도 모르게 동일시 되는 것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어느새 나는 오정희의 소설 속으로 들어가 있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나는 작아진 내 모습을 발견한다. 때로는 구차하고 때로는 씁쓸하며, 어느 순간에는 울컥하고, 또 어느 순간에는 착잡하고, 슬며시 늘어지는 자괴감과 작은 실소들이 이어진다.
제목 활란은 주인공의 이름이다. 김활란 박사처럼 여성으로서 당당한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에서 주인공의 이름을 활란으로 정했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결혼 혼수로 책상을 해왔다는 것까지. 그러나 주인공 활란은 부모의 기대와는 달리 평범한? 중년의 시간을 살아간다. 스스로 빛을 내기보다는 남들이 내는 빛을 따라가기 바쁘고, 자신보다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헌신하는 그런 여인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시간이 만들어내고 사회가 끌어가는 이런 모습이 진정 평범한 모습인가에 대한 의문은 늘 따라오는 것 같기도 하다.
작고 낡은 신혼집에 남들 다 해간다는 양문형 냉장고 대신 커다란 책상과 책장을 들여놓았던 청순했던 옛 시절이 오버랩된다. 제법 튼실하고 큰 책장이 들어간 자리 맞은편에 작은 냉장고가 자리를 잡았던 낡은 그 집은, 비가 사선으로 퍼붓는 날이면 벌어진 틈으로 벽까지 스며든 빗물로 인해 새로 바른 벽지가 불룩하게 부풀어오르곤 했었다. 좋은 냉장고 대신 책과 책장을 선택한 것에 대해, 친정집보다 한없이 소박한 신혼집을 구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대해 그 시절 순수했던 신혼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막 뜨겁게 타오르던 사랑이란 것이 존재했으니까. 회사에 출근한 그가 모르게 혼자 남겨진 나는 종종 박라연 시인의 시를 들여다보며 위로했었다. ‘서울에 사는 평강 공주’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 전기가 ---- 나가도 ---- 좋았다---- 우리는----’
나는 공주가 아니었지만, 그렇게 시인의 이야기처럼 정말이지 그렇게 덤덤하게 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 청승이다.
주어진 삶에 순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알을 깨고 나온다는 이야기처럼 알은 깨져야 하는 것인데, 어쩌자고 알 속에서 안주하며 살아가게 되는지. 그것이 삶인지 그것이 인생인지. 근 오십 년을 살아도 여직 잘 모르겠다.
어제 친정엄마가 문자를 보내셨다. 생일인데 잘 보내고 있니? 그때까지 명절 후 기름기 많은 음식 설거지로 인해 내내 서성거려야 했던 나는 투정 가득한 문자로 화답을 했었다.
-생일은 무슨. 여태 설거지만 했구만.
-인생이 다 그런거다.
일흔이 넘은 내 엄마는 이미 삶에 통달하셨나보다. 당신의 삶도, 당신이 낳은 딸의 삶까지도 말이다.
여러 편의 짧은 소설 중 ‘방생’과 ‘상봉기’가 아른아른 기억에 남을 듯싶다. 뭐랄까. 잔잔함이 좋은 건지도. 오정희의 글을 구태여 요즘 시끄러운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은 내게 없다. 온전히 그냥 그녀의 글로 받아들이고 싶다. 2000년대 이후의 소설을 자주 접해 볼 일이 거의 없었기에 나는 여전히 그 시기 이전의 소설 세계에 머물러 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노라고 쓴다. 가만히 따뜻하게 차가워진 가슴을 쓸어주는 손길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고 쓴다. 꽁꽁 얼어붙은 손과 발을 녹여주는 작가의 그 마음을 다시 읽어볼 수 있어서 더없이 행복했다고 쓴다. 안정감과 과하지 않은 무게감. 가볍지 않은 진중함. 더 깊은 것과 더 넓은 것.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어떤 것들까지 보여주려 애쓰는 작가 오정희의 이야기가, 오늘을 사는 내게 나와 닮은 삶을 살아가는 동지들에게 작은 힘이 되어주고 위로가 되어주리라 생각한다.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