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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스캔들
이희정 지음 / 여우비(학산문화사)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남녀 사이에 과연 우정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 책을 보면서 가장 먼저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로맨스소설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소재가 바로 요런거다. 수년동안 친구로 지냈는데 알고 보니 서로에 대한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일 뿐이거나 어느 한쪽이(남자쪽이면 더 좋다.) 오랫동안 짝사랑을 하는 것 말이다.
왠지 더 애절하고 가슴아프지만 둘의 사랑이 결실을 맺을 땐 더 기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라디오 스캔들 속의 정우수는 한물간 아이돌 출신의 비인기 시간대의 라디오 DJ이다. 그의 우월한 유전자는 숫한 여성들의 대쉬를 받게 하고 그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때로는 즐기기까지 한다. 물론 다 이유있는 생활이다.
그리고 새벽시간 작업을 핑계 삼아 커피한잔과 함께 매일 우수의 라디오를 듣는 그의 소꿉친구 민재린. 언제가 대박날 날을 꿈꾸며 로맨스 소설에 매진하는 엄연한 작가다. 그녀에게 우수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두 모친들의 친분으로 친구먹은 말그대로 뼛속까지 친구다.
남녀간의 우정은 결국 두 사람 모두가 서로의 성(性)을 인지하지 못할 때나 가능할 것이다. 동성친구와는 다르다곤 하지만 그래도 서로에겐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없을 때나 가능한 것이지, 어느 한쪽이 서로가 그어놓은 선을 손톱만큼이라도 넘어서는 나는 날에는 이미 우정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변한 것이다.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아슬아슬 곡예를 하는 우수 역시도 섣불리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은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만으로 밀어 붙여 그나마 발 딛고 있는 우정이란 허울마저 벗어야 할까봐서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내가 50을 줬으니 상대도 나에게 50을 주면 딱 좋겠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다. 내가 그보다 더 주어도 상대는 덜 주어도 뭐라할 수 없고, 아예 주지 않아도 나무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많이 사랑하는 약자의 비애라고나 할까.
사랑에 승자와 패자가 어디있겠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엄연히 사랑에도 승패가 존재하는 법. 우수 역시 재린에게 자신을 친구가 아닌 남자로 인식시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DJ로 있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그녀와 자신만이 아는 추억으로 서서히 그녀를 사로잡는 것이다. 이른바 가랑비 작전.
한차례 퍼붓고 마는 소나기가 아니라 서서히 옷 젖어드는 줄 모르는 가랑비처럼 그렇게 라디오라는 가랑비를 무기로 그녀를 자신에게로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너무 잘난 남자와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그 잘난 남자가 세상과도 바꿀 수 없다고 당당히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가 라디오 사연을 빙자해서 오늘도 On Air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