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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평점 :

클레어 키건의 작품은 단편소설로 짤지만 읽고 나면 그 어떤 장편의 소설을 읽은 것보다 더 큰 울림을 준다. 게다가 때로는 이미 두껍지 않은 작품을 몇 개의 단편으로 나눠서 담아낸 경우도 있는데 이번에 만나본 그녀의 최신작이기도 한 『푸른 들판을 걷다』은 무려 세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먼저 표제작이기도 한 「너무 늦은 시간」을 살펴보면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한 남자가 나온다. 카헐이란 이름의 남자는 공무원으로 평범해 보이는 일상을 보여주지만 그의 시간과 의식을 따라가는 이야기 속에는 과거 그가 결혼 직전까지 갔던 사빈이라는 프랑스 여성과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놀랍게도 이 작품을 보면서 오랫동안 카헐의 내면에 잠재된 여성 혐오에 대한 이야기, 어쩌면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던 그런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단순히 가부장적 사고를 넘어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카헐은 굉장히 문제적이다. 처음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사빈과 카헐은 보통의 연애를 즐기듯 사빈이 카헐의 집을 오가며 잘 지내는 듯 하지만 곧 함께 살기 위해 그녀가 자신을 짐을 가져오고 결국 청혼을 하고 결혼을 하기 직전까지 가는 동안 카헐은 자신의 것을 양보하기도 그녀를 배려하는 것조차도 불편해 한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좋다고, 만족스럽다고 생각하지만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자신의 것(돈)의 소모나 이후 자신이 해야 할 것들(요리 후 설거지)에서는 불만을 드러낸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고 환불되지 않은 맞춤제작의 웨딩반지와 드레스만 남았는데 이에 대해 왜 이렇게 되었을까에 대해 생각하며 과거 어머니와의 일화(사실 이 내용이 가장 충격적이라 아일랜드 남자는 적어도 과거에 이랬던 것인가 싶어 놀랐다는...)를 떠올리며 후회를 하는 듯 하지만 결국은 그 감정마저 지워내려는 듯 사빈을 탓하며 넘어가는 모습이 다소 충격적이다.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의 경우에는 하인리히 뵐이라는 작가가 죽은 후 유족들이 그가 살던(유명해진 일기를 쓴 방이 있는) 집을 창작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남겨두고 선정된 사람이 그곳에서 머물며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데 여기에 오게 된 주인공이 이곳에서 어떤 시간을 보낼 것인지 계획한 첫 날 한 독일 교수가 찾아온다.
그는 창작자들의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는 문구조차 어긴 셈인데 결국 주인공은 독일 교수와의 정식 약속을 잡고 대접을 위해 준비를 하고 근처에서 수영을 즐기며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놀랍게도 그 독일 교수는 모든 사람들이 오고 싶어 하는 이 공간에서 창작은 하지 않고 케이크(이 남자가 불쑥 찾아온 탓에 다시 찾아오길 바라며 약속을 잡았고 이를 위해 대접할 케이크였다)나 만들고 수영이나 한다면 주인공을 비난한다.
도대체 이 남자에게 누가 이렇게 할 권리를 주었단 말인가. 너무나 무례하기 짝이 없는, 그러나 현실에서도 이런 류의 인간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남극」의 경우에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한 주부의 일탈기를 그렸는데 그 끝이 다소 충격적이라 인과응보라고 해야 할테지만 결국 그녀가 그토록 알고 싶어했던 질문에 대한 답에 그녀는 만족스러웠을까 싶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서로의 만남이 결코 좋지 않은 결말로 이어지는 이야기 속 배려받지 못한, 그리고 때로는 무례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폭력적이기까지 한 이야기들이라 읽고 나서도 여러 생각이 들게 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