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밤에 부대찌게를 먹으면서 맥주와 소주, 그리고 무려 와인까지 한 병을 달리는 바람에 일요일 내내 피로에 쩔어있었다. 그런데 술이 엄청 취한 상태에서 갑자기 떠오른 이런 저런 생각이 있어 페이퍼를 열고 몇 자 적다가 글자가 세 개로 보이고 타이핑이 어려울만큼 손이 떨려서 생각난 토픽만 적어서 보관했는데, 어제 열어보니 무엇을 쓰려고 했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뭔가 양웬리 준장을 추억하려고 했던 것은 알겠는데, 어떤 글을 구상했었는지 정말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술이 웬수다. 아니 어쩌면 쓰지 않았던 점이 다행일 수도 있겠다. 알코올의 영향을 받으면 뭐가 나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Thanksgiving 주간인 이번주의 정식 휴일은 목요일부터 시작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남은 휴가를 사용해서 주말부터 또는 주중에 일찍 휴가를 시작하기 때문에 화요일인 오늘 벌써 사무실이 입주해있는 건물은 매우 한가하다. 나 역시 오전에 업무처리를 마친 후 집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잉여롭게 하루를 보내고 있다. PC를 켜놓고, 책을 한 권 잡고 맥주 한 잔에 안주 한 점을 집으니 더 부러울 것이 없다. 사실 일찍 회사에서 나와서 술 한잔을 걸치고 싶은 맘이 든 것은 갑자기 내린 가을비 때문이었는데, 마트에 들러 집에 오니 적장 비는 그친 상태다. 지금이라도 다시 비가 와주면 좋으련만...

'은하영웅전설'로 가장 유명하고 '창룡전'이나 '아루스란 전기'로도 유명한 다나카 요시키의 단편이다. 예전부터 구매를 꿈꾸었는데 이번에 들어왔다. '은하영웅전설'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게임도 아닌 무려 마이컴에 소개되었던 게임공략집을 통해서였다. 대충 1991년 겨울 정도로 기억하는데, 공략집에 담긴 애니메이션 작화의 마술사 양과 공화국의 영웅들, 그리고 라이하르트와 함께하는 제국의 영웅들 그림과 약간의 줄거리만으로도 이 작품은 머릿속 깊이 새겨졌다. 게임은 대학생이 되었을 정도에 3인가 4를 구입했으나 호환성 문제로 큰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고, 이후 VCD로 약간을, 그리고 지금은 full copy로 애니메이션을 즐기고 있고, 책은 을유문화사의 해적판을 구해서 봤고, 최근에 드디어 정식판을 주문했다. 아참. '일곱도시이야기'는 미니 '은하영웅전설'의 느낌을 주는데, 가까운 미래에 pole shift로 지구가 재정립된 후, 달에 이주한 이전 인류의 지배를 받다가 그들이 죽은 후, 그러나 그들이 설정해 놓은 제약 때문에 지표면을 떠날 수 없는, 일곱 개의 도시에 나뉘어 문명을 이어가고 있는 5000만 인류의 이야기라고 하겠다. 누가봐도 은영전을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와 스토리 구성이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매우 금방 읽었다.
이 사람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자유주의자라고 하고, 보수라고 말하는 수구세력에 대한 분명한 반감을 갖고 있는 이 사람. 대한민국에서 가장 한글의 매력을 잘 살리는 글쟁이라는 이 사람. 자기를 중도우파 정도로 분류하는 이 사람. 어떤 말은 쉽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으나 어떤 의견에는 절대로 찬성할 수 없게 만드는 이 사람. 이 사람의 고민이라면 아마도 양쪽에 욕을 먹을 수 밖에 없는 자유주의자의 숙명이 아닐까? 한편에 속해서 다른 쪽을 비난해야 하는 이 시대의 지식인이길 거부하는 자의 숙명은 누구도 피할 수가 없는 자유의 댓가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좌파에서 제기하는 그에 대한 비판은 선뜻 수긍할 수 없다. 다만, 내 나름대로 그의 의견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 뿐이다. 나 역시 그처럼 욕을 먹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니까. 고종석의 책은 모두 구해서 읽어보고 싶다. 다만 출판사에 기획한 바에 따른 다음 책은 복거일의 책인데, 아직 그것을 읽고 '균형잡힌' 시각을 운운할 생각이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내 한계는 여기까지다. 복거일 같은 개새끼의 발언을 굳이 돈주고 읽어가면서 시각의 균형을 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방금 읽은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절대적으로 남자독자의 사랑을 받을 책이라고 생각되는데, 읽고나서 얻은 결론은 나도 덕후라는 점이다. 피규어나 프라모델을 모으지는 않지만, 영화와 게임 소프트를 모으는 편, 영화는 굳이 장르를 가리지 않지만 게임은 크게 대전격투와 RPG, 그리고 약간의 RTS로 분야가 좁혀져 있다. 전시할 생각도 없고,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즐기기 위함인데, 여기에 나는 책도 사들이고 있으니 정체성은 좀 모호한대로 나 역시 덕후라고 생각된다. 다양한 취미의 세계를 건드려주어 훌륭한 입문서 역할을 해줄 것 같고, 어떤 정리를 통해 자신을 진단할 수 있게 해주는 점도 맘에 들었다. 만드는 건 잘 하지 못해서 딱 이 정도 수준의 취미생활이 나에게 맞는다. 즐겁게 좀더 자부심을 갖고 덕력수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다가 자극을 받고 나도 모르게 알라딘에서 또다시 책주문을 하고야 말았다. '진격의 거인'. 이제까지 나온 모든 것을 다 주문한 덕분에 다시 지갑이 가벼워졌다. 아직 슬램덩크 완전판이 기다리고 있는데...
왔으면 하는 비는 오지 않고 그저 비온 다음의 추위만 몰려오고 있다. 아직 업무시간상 3-4시간이 더 남이 있기 때문에 긴장을 풀 수는 없지만, 이런 연휴에는 딱히 새로운 업무가 발생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크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는다. 이번 주간에 읽으려고 가져온 다른 책을 펴는 것이 훨씬 남는 장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