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함께 만든 세 개의 4단 책장으로써, 사는 방에는 모두 일곱 개의 책장 분량의 책을 가져다 놓았다. 주로 문학서적을 영문/국문으로 적절하게 갖다놨고, 한 개의 책장에는 무술서적, 딱 4단 책장 하나 분량으로 가져다 놓았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열심히 문학에 빠져들 것 같았는데, 막상 정리하고 보니, 오히려 책읽기가 부담이 되는 것이다. 왜일까.
조금 바쁜 스케줄과 이런 저런 일과에 겹쳐 이번 달의 독서는 매우 저조하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그러다가, 내가 잘 하는 그것. 책읽기가 막히면 언제나 하는 마중물 같은 독서.
그렇게 해서, 오후에 늦게 퇴근하는 것을 핑계로 4시부터인가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여행을 떠나고픈 내 마음을 가득 담은 책이다.
탁피디의 여행수다에 나오기 전에 나는 손미나 아나운서가 누군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도 사실 누구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녀가 이 책을 썼고, 이혼을 했고, 소설을 한 권 출간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팟캐스트를 듣고 책을 구했는데, 기실 내 눈에는 너무 뻔해 보인 탓에 읽기는 지금에서야 읽은 것이다.
29쇄의 히트상품인 것과는 무관하게, 외국에서 오래 거주한 나에게는 탁 박히는 내용보다는 그저 적절히 된장적이고, 적절히 성찰적이고, 용감하고, 그리고 적당히 국수주의적인 그런 책으로 느껴진다. 내용도 좋고, 재미도 있고, 읽는 내내 스페인 곳곳을 누빈 듯한 기분을 갖게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내 편견에 기인한 impression은 쉬이 가시지는 않는다.
이곳에 살다보면 외국이라는 것에 대한 환상은 많이 사라진다. 특히 '외국인'과 친구가 되거나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이 하나도 신기할 것이 없기에, 스페인에 가서 사귄 외국친구들과 에피소드라던가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있고, 부러울 수는 있어도, 환상 같은 것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는 것이다. 왜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영어공부를 위해서, 또는 호기심이든, 여타의 다른 이유로 '영어'하는 '백인'친구를 사귀면 '쿨'한 것인양 묘사하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생각이 나는 것은. 작가의 의도도, 실제로 그녀가 느낀 감성도 그런 것이 아닐진데.
그저. 이 책을 읽는 두어 시간동안, 나도 자유를 느꼈다고 결론짓고 싶다. 나의 편견들이 사라지기를 바라면서. 굳이 그녀의 진취적인 삶의 태도가 멋지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리라.
덕분에, 퇴근하면서 Trader Joe에 들려 싸구려 스페인 산 와인을 두 병이나 사들고 왔다. 살라미와 함께. 술꾼에게 술을 마실 핑계는 얼마든지 널려 있지만, 그래도 책을 읽은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연이지만, 사온 와인이 맛이 좋다. 이렇게 한 잔 걸치고 있다.
여행이 하고 싶어 이 책을 읽은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이 책은 위의 책보다 먼저 읽었다, 심지어는.
게으름과 이런 저런 이유로 늦어진 리뷰일 뿐인데, 그리 많이 쓸 내용은 없다.
드 보통을 낮게 보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 유독 잘 먹히는 듯한 그의 글에 대한 약간의 반감이랄까.
쉬운 이야기를 어렵게 하는 것도 재주고, 사소한 소재에서 긴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 또한 그의 재주일 것이다.
공항에는 떠나기 위한 설레임. 도착의 안도감. 이런 것들이 적절히 베어있다. 작년 이만때였나? 저녁 비행기로 도착하는 사람을 픽업하러 SFO에 갔을 때, 건조한 이곳의 공기와는 달리 다소 습한 시멘트 바닥의 내음과, 세계 곳곳에서 모여드는 듯한 to-and-from의 여행객들의 향취를 느꼈다. 그래서 작년 이맘때 여행에 대한 갈구를 느끼는 글을 남겼더랬다.
그런데. 공항이 아니라 여행기술에 대한 책을 내고, 지금도 그런 이야기를 잘 하는 저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약하다'. 의뢰를 받아 쓴다는 점이 저자의 자유도에 영향을 주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부자연스러움은 차치하고, 그냥 그렇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책에서 여행에 대한 영감도, 다른 공항을 보면서 느끼는 자연스러운 여행의 감흥도 받지 못했음이다.
누군가의 말해 의하면 '한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외국인 작가'라는 알랭 드 보통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아직도 다른 책들 몇 권의 정리가 밀려는 있지만, 쉬이 진도가 나가지 않을 뿐더러, 배도 부르고, 날도 늦어지는 관계로, 빨리 다시 와인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