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은사라고 할 수 있는 교수님이 두 분 계시는데 둘 다 역사학과의 교수님들이다. 한 분은 당시에도 연세가 꽤 있었던 정교수로 지금은 은퇴한 것 같고 다른 한 분은 당시 비교적 젊은 편의 강사였는데 프린스턴을 거쳐 스탠포드에서 박사를 취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사로 계시는 것 같다. 이 두 번째 교수님의 강의를 정말 많이 들었었는데 개론부터 문학사도 즐거웠었지만 특히 영화사를 들은 것이 그 방향으로 내 지평을 크게 넓혀준 계기가 되었었다. History of European Cinema개론을 들었고 4학년 무렵엔 세미나를 한 학기 들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덕분에 영화라기 보다는 moving pictures였던 초창기 film부터 차근차근 감상하면서 원래 좋아하던 '영화'라는 걸 진짜 처음부터 들여다볼 수 있었다. 무성영화나 흑백영화에 대한 재미도 이때 배웠고 헐리웃의 영화나 중국무협의 세상 너머로 넓게 펼쳐진 영화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지금은 컨텐츠가 넘치는 세상이지만 당시만 해도 비디오로 구해서 소중하게 보관하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꺼내보던 재미가 남다른 시절이었다. OTT시장조차도 포화상태가 되어버린 streaming의 세상에서 영화를 접하기 시작한 세대는 조금 모를 것 같은 느낌인데 이런 세상에서도 나 같은 사람은 굳이 물리적인 매체로 영화를 구해서 보관하고 싶어하는데 아마 지금과 많이 다른 시대를 살아온 흔적 같은 그런 것이다. 당시의 물가에서 보면 값이 상당히 비싼 편이었던 비디오테잎에서 DVD로, 거기서 blue ray로, 이젠 4K로 계속 진화하면서 아직도 손에 넣을 수 있는 물리적인 매체가 계속 나오는 건 아직 세상엔 나 같은 이들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좋던 시절의 기억이 뭉글뭉글 올라왔는데 덕분에 조금 전에 옆 방에 가득 쌓이 박스들을 뒤지면서 VHS테잎과 DVD를 뒤적거렸다. 버리라는 목소리들이 주변 한 가득이지만 정 안되면 몰래 작은 personal storage를 빌려서라도 일단 보관할 결심을 굳혔다. 열심히 살아왔고 지금도 홀로 모든 bread earning을 맡아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놈의 '평등'이 뭔지 내가 살아온 세월과 시절을 존중받지 못하는 이런 꼴이라니. 암튼 이건 앞으로도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그리고 하루키처럼 지독하게 모아들이고 열심히 살겠다는 선언이다. 미니멀리즘은 개한테도 주지 말아야 할 문화의 말살정책의 다른 이름이다. 일본인에 의해 주창된 일본스러움 가득한 가치관.
이 책은 단순히 옛날 영화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거나 개발새발 추억담을 늘어놓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읽을 필요가 있다. 예컨대 어느 정도 비평의 입장에서, 그리고 행간과 배경을 갖고 영화를 대해야 함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영화란 것이 linear한 시간의 관점에서 계속 '발전'한다고 볼 수만은 없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에게는 그저 영화에 대한 소중한 시간들을 하나씩 떠올리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이미 이 책을 읽은 건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