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 폴 토마스 앤더슨, 2012

 

 


(영화의 전체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5년만의 신작 <마스터>는 대체로 '어렵다'는 것이 중평인 것 같다. 그 어려움의 이유를 여러가지 많은 것들, 예를 들어 <마스터>라는 이름을 가졌음에도 유달리 마스터 씬이 없는 것 등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내용상으로 볼 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한 가지는 이 영화가 현혹되지 않아야 하는 대상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의 두 주인공 중의 하나 랭케스터(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는 인간의 심리를 연구한다는 '코즈' 연합회의 창시자이자, 그 자신의 소개로는 작가이자 의사이며 핵물리학자이자 이론 철학자이며, 우리가 보기에는 사이비 교주이다. 사실 영화 속에서 쏟아지는 그의 말들을 곰곰이 뜯어보면 그다지 틀린 말은 없다. 우리의 현재의 어떤 두려움, 혹은 심리상태가 과거의 무엇으로부터 연원한 것이며, 그 과거로 돌아가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여야만 현재를 치유할 수 있으며, 인간은 동물과 다르기 때문에 인간이며, 웃음이 많은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 등등의 말들 말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뭐 사이비가 틀린 말들을 해서 사이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이비들일수록 말들은 더 번지르르하고 그럴듯한 법이다. 사이비가 사이비인 것은 그들이 하는 말들과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다르다, 혹은 전혀 반대의 방향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른 사람에게 과거를 돌아보라고, 혹은 과거로 일순간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랭케스터 그 자신의 과거는 이 영화의 다른 누구보다도 미스테리하다. 몇 명의 전부인들이 있었던 것 같고, 어떠한 계기로 일정 정도의 부, 혹은 후원자들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사상의 근원에 있는 뿌리를 잡아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또한 그는 인간을 동물과 애써 구분지으려 애쓰면서도 동물적인 욕망, 예를 들어서 프레디(호아킨 피닉스)가 만들어내는 정체 불명의 술이라든가 성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랭케스터가 무엇인가 말들을 쏟아내게 한 다음에 그의 반대되는 씬을 붙임으로써, 예를 들어 그의 프로세싱 이후에 그와 프레디가 프레디가 주조한 술을 같이 나누어 먹는 장면을 연결하거나, 웃음과 듣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설 이후에 그가 자신의 이론에 대한 의구심 섞인 질문을 받자 화를 벌컥 내는 씬을 붙임으로써 그의 어떤 면모를 우리가 간파할 수 있는 힌트를 준다.

다른 한 가지는 이 영화가 결국 실패의 서사(실패를 보기 위한 서사)라는 점이다. 우리는 사실 대체로 이런 영화에서 어떤 성공의 구조에 익숙해져 있다. 고뇌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주인공이 어떤 '마스터'를 만나고 그의 영향으로 새로운 단계로 성숙하여 나아가는 것, 사실 우리는 그러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그런데 나는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이 마지막이 조금은 의심스럽다. 그가 마지막에 무엇인가를 성공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영화의 내내 프레디는 성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 욕망의 끄트머리에 다다르는 것, 그러니까 여자와 섹스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프레디는 모래로 만든 여자와 섹스를 하고, 흥분을 못이겨 바다에서 자위를 하고, 모든 이미지에서 성적인 요소만을 찾는 등 거의 섹스중독자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는 정작 그런 성적 욕망을 해소할 기회가 주어짐에도 스스로 거부하는 것 같다. 사진관에서 여자와 성적인 접촉의 기회가 생겼을 때에도, 그리고 랭케스터의 딸이 유혹했을 때에도 그는 그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린다. 그리고 그 욕망은 이상한 방식으로 처리된다. 처음의 실패 직후에는 그는 사진관에서 이상한 폭력성을 보여줬고, 두 번째 실패 직후에는 성적인 환상을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던 그가 마스터를 떠나온 후 마지막에 여자와의 섹스에 성공하는 것, 예를 들어 이것을 그의 어떤 변화라고 볼 수 있을까?   

그 질문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는 시계바늘을 조금 앞으로 돌려야만 한다. 우리가 그의 변화 혹은 성숙을 믿는다면, 그의 성숙의 기점은 그가 바이크를 타고 평원에서 사라진 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그가 과거로 돌아가 보게 되는 것은 비어있는 과거, 혹은 돌아가야 할 대상(도리스)의 부재이며, 그는 그 이후에 다시 랭케스터가 원했던 담배를 손에 들고, 그러니까 그가 원했던 술을 주조해주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페기(에이미 애덤스)가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라고 묻자 그가 대답하는 것은 고작 사진을 찍어드릴 수 있다는 대답이다. 그러나 물론 알고 있듯이 사진찍기는 일찍이 그가 실패한 것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는 랭케스터에게 과거의 그 둘의 인연을 들은 후 그곳을 돌아나온다(물론 과거의 이 둘의 인연, 즉 랭케스터가 얘기해 주는 두 사람의 전생은 의미심장하다. 파리 코뮌 중 외부와의 연락도구였던 비둘기, 그 중에서도 랭케스터가 얘기하는 것은 실패한 두 마리의 비둘기이다. 즉 랭케스터는 이들의 실패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여전히 술을 끊지 못한 상태에서 술집에서 여자를 만나고 그녀와 잠자리를 가진다. 물론 여기에서 가장 미심쩍은 것은 그 마지막이다. 프레디가 여자와 섹스를 하면서 벌이는 모습 말이다. 프레디는 바이크를 타고 평원을 달리며 랭케스터를 위시한 이 수상한 단체를 스스로 버린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마지막 그 여자에게 '프로세싱'을 하고 있다. 즉 그는 랭케스터를 흉내내고 있다. 그가 여자에게 말한 '가장 용감한 여자'라는 말은 처음 프로세싱이 끝난 후 랭케스터가 그에게 해준 말이었다. 그는 여전히 마스터를 버리지 못했다. (이는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을 일종의 유사 부자관계로 보는 입장에서도 어느정도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모든 아들들은 아버지와 다른 모습이 되고자 하나 결국에는 아버지의 어떤 모습들을 자신도 모르게 흉내내게 된다. 물론 그 중에는 흉내내야만 하는 것들도 있고, 결코 흉내내지 말아야 할 것들도 있다. 조금은 다른 얘기겠지만, 이러한 관점이라면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워지는 것은 어린 새엄마 페기의 위치다.)

 

 

물론 프레디만이 랭케스터를 버리지 못한 것은 아니다. 랭케스터 역시 프레디를 버리지 못했다. 일견 프레디와 랭케스터는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인다. 욕망에 따라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술을 만들어 먹는 프레디가 동물에 가까운 캐릭터라면, 동물 위에 영혼을 가진 인간이 있다고 설파하는 랭케스터는 그를 길들이는 사육사처럼 보인다. 그들의 어떤 물리적인 운동 양식도 다른데, 창과 벽을 반복하여 오가게 하는 랭케스터의 치료 과정이나 어떠한 지점을 설정해놓고 그곳으로로 달려간 후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바이크를 타는 장면을 보면 랭케스터의 지배적인 물리 운동은 시계추와 같은 반복이다. 그러나 프레디는 다르다. 프레디는 폐소공포증을 가지고 있고, 되돌아가지 않는다. 노래를 불러준 도리스에게 되돌아가지 않았고(뒤늦게서야 돌아갔지만 그녀는 없었고), 역시 마찬가지로 노래를 불러준 랭케스터를 뒤로 하고 그는 떠났다. 물론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그가 바이크를 타고 점이 되어 사라지는 장면이다. 그는 영원히 어딘가를 떠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다름들에도 그들은 또 한편으로 비슷해보이고 서로에게 서로가 매우 필요했던 것처럼 느껴진다. 현실적으로 볼 때 정신적인 두려움과 상처 속에서 정신적인 버팀목으로서 랭케스터가 필요했던 프레디나 열렬한 추종자 및 영적 치유의 증거로서 다른 신도들에게 본보기로 내세울 프레디가 필요했던 랭케스터, 각각의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한편으로 다른 면에서도 그렇다. 예를 들어 그들은 프로세싱을 하면서는 마스터와 추종자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프로세싱이 끝나면 주조한 술을 나누어 먹는다(그러므로 마치 이것을 즐기기 위해 프로세싱을 했던 것처럼 보인다). 둘이서 나란히 감옥에 갇혔을 때에는 처음 프레디를 분석하려 드는 랭케스터의 모습에서 시작하여 종국에는 두 사람이 거의 비슷하게 설전을 벌인다. 과연 그 두 사람은 달랐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위에서 얘기한 랭케스터를 흉내내는 프레디의 모습도 그 한 단면일 것이고 이는 동시에 그의 실패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폴 토마스 앤더슨은 왜 이 영화를 실패의 서사로 마무리 지으려는 것일까? 그것은 물론 현재의 미국인들이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대로는 앞으로도 실패할 것 같기 때문이다. 다시 시계추처럼 반복하여 보자.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어떤 부분을 되짚어야만 현재의 어떤 두려움, 상처, 잘못된 행동 등을 치유할 수 있다는 랭케스터의 '프로세싱'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자체로는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그렇다면 모든 정신분석이 잘못된 것이라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가 막 시작되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이 <마스터>의 이야기도 결국에는 같은 방식의 것이니까. 우리를 과거로 돌려보내놓고, 한 마스터, 혹은 한 사이비 마스터와 그를 추종하는 상처받은 어린 양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현재의 미국인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목소리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미국인들은 상당수 정신적인 공황과 두려움,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아주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어떤 것으로 표출되어, 폐쇄적인 대외정책과 내부의 매카시즘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근원에 있는 것이 과연 공산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이었을까, 혹시 그것은 다른 어떤 더욱 거대한 근심, 마음 깊은 곳에 그 근원이 있는 거대한 무엇인가를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로 쉽게 치환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그것을 쉬운 적으로 치환하지 않고 근원으로 돌아가 치유하는 하나의 방법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예를 들어 술에 쩔어 있는 프레디에게 술을 끊으라고만 말하는 것은 술이라는 쉬운 적으로 전선을 몰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프레디가 술을 마시는 것은 물론 술이 너무 좋아서가 아니고, 그 과거에 있는 무엇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간 프레디가 결국 보게 되는 것은 과거의 부재이고, 과거로 돌아간 미국인들이 보게 된 것은 인디언의 학살이나 흑인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과 같은 부재하는 것만도 못한 과거, 혹은 어떤 의미에서는 부재한 과거이다(과거로 돌아간 프레디가 만나게 되는 것은 도리스의 부재이자 동시에 배우의 이름과 같은 '도리스 데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즉 여기에서 한편으로 부재하는 과거는 배우, 그러니까 매끄러운 하나의 이미지로 치환된다. 이미지...예를 들어 과거의 서부극들은 인디언 학살이라는 실제를 어떤 고정된 이미지로 치환하는 데에 얼마나 기여했던가).

예민한 예술가는 과거를 보여줌으로써 예리하게 현재를 생각하게 함은 물론 오지 않은 미래마저 예측하도록 만든다. 2013년 두 편의 근심어린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가 있다. 한 편은 이미 지나간 폭풍이자 과거의 근심 <마스터>이고 다른 한 편은 아직 오지 않은 폭풍이자 미래의 근심 <테이크 쉘터>이다.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치유하려는 방법은 (영화 속에서) 실패했고, 이 실패들은 영화의 모델이 된 싸이언톨로지 같은 형태로 여전히 현재 미국인들의 정신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반면 미래를 봄으로써 현재를 치유하려는 방법은 성공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전혀 올 것 같지 않은 폭풍이 두려워 방공호를 짓는 남자의 이야기, <테이크 쉘터>를 봐야만 할 것 같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넙치 2013-07-20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실패의 서사가 아니라 완벽한 성공의 서사로 받아들였어요. 다만 그 성공의 모습이 전형에서 벗어나고 있고요. 말씀하셨듯이, 우리한테 익숙한 성공은 랭카스터한테 조명이 맞춰지는 거지만 랭카스터한테 성공은 자신의 정신사고 세포를 이식하는 게 아닐까요...엔딩장면에서 프레디는 여자한테 랭카스터의 복제물임을 증명하는데, 전 식겁했습니다.

맥거핀 2013-07-20 16:32   좋아요 0 | URL
말장난에 가까울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런 예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술 먹고 가족을 때리는 아버지를 보고 자라난 아이가 나중에 술먹고 가족을 때리는 가장이 되었을 때 그것을 성공한 것으로 봐야할 것인가,라는 물음 말이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랭케스터의 입장에서 본다고 해도, 과연 흉내내기를 '전수'로 봐도 될까 싶기도 하구요. 마지막 프레디의 행위는 어설픈 흉내내기에 가까웠죠. 물론 어떻게 보면 랭케스터 자신의 행위들도 다른 무엇의 (실체가 없는) 흉내내기라는 점에서 이를 복제라고 볼 수도 있겠죠.

좋은 주말 되세요.:)

네오 2013-07-20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이렇게 좋은 글이 빨리 알라딘 서재에서 내렸갔네요 ㅋ 이글을 읽고 그냥 이 비평문에 대한 마스터에 대한 글을 재빠르게 쓸려고 했는데요 ㅋ, 그런데 사실 저는 뭐 실패든 서사든,,어느 것 하나도 마음에 안들었다는 거죠,,최악까지는 아니지만,,언제나 앤더슨의 편집리듬은 마음에 안들더군요,,왜 잘라야 할때 안 짤라서 서사의 실패학이라는 소리듣겠되는지 ㅋ 그냥 저는 허트로커와는 같은 테마인데 끝이 다르게 했구나정도,,물론 허트로커가 더 좋지만요,,원래 주인공도 제레미 러너였다면서요,,스케쥴이 안맞아서 하차했다던데요,

맥거핀 2013-07-21 00:17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폴 토마스 앤더슨 영화가 본 지가 참으로 오랜만이라, 그가 원래 어떤 스타일인지 기억이 안나요. <데어 윌 비 블러드>도 기억이 가물가물...미국 내에서도 평이 상당히 상반되었다고 하죠, 이 영화? 저도 중간중간 리듬을 잃게 하는, 그러니까 말그대로 지루하게 만들거나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부분이 조금 있었어요. 제레미 레너라면 아마 호아킨 피닉스 대신일텐데, 글쎄요. 저는 제레미 레너보다는 호아킨 피닉스가 더 나았을 것이라 봅니다. 제레미 레너는 왠지 정이 안가서..^^
 

 

 

 

 

 

 

 

 

 

 

박찬욱,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2006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2006년 12월 박찬욱은 복수 연작의 어떤 변주, 혹은 색다른 복수를 보기를 원했던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상당히 이상해 보이는 소품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내놓고 돌아왔다. 기괴한 행동과 말들을 거듭하는 캐릭터와 반질반질하고 아기자기하고 키치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도리어 괴이하게 보였던 정신병원이라는 공간도 그렇지만, 사실 가장 이상해보였던, 그러므로 불친절하게 보였던 것은 그 이야기의 방식이었다. 박찬욱 영화에 으레 있으리라고 기대되었던 충격적인 사건도 없었고, 충격적인 반전도 없을뿐더러, 사실 변변한 '사건'이라고 부를만한 것조차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에 있는 것은 오로지 이상한 틀니를 끼우고 멍한 눈으로 손끝에서 총알을 발사하는 여자주인공과 이상한 토끼가면을 뒤집어 쓰고 살금살금 걸어다니는 남자주인공과 그들 못지 않게 이상해보이는 행동을 거듭하는 주위의 다른 정신병을 가진 인물들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들 캐릭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마도 영화의 거의 전부를 이야기하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시작은 그들의 정신병이 왜 촉발되었는지, 특히 여자주인공 영군(임수정)이 왜 스스로를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지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영화는 그녀가 왜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지를 그리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영화의 오프닝에서 이미 스스로를 싸이보그라고 생각하고 있는 영군을 본다(박찬욱 영화의 오프닝이 대체로 멋진 것이 사실이지만, 특히 이 영화의 오프닝은 그 어떤 다른 영화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정신병(우리가 그것을 '정신병'이라고 부른다면 말이다)의 원인을 대강 추론하여 짐작하는 수밖에 없다. 먼저 한 가지 전제해 두어야 할 것은 많은 정신병자들이 그러하듯이 이 영군도 나름의 확고한 논리의 체계가 있으며 그 체계에 따라 사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군은 영화 내내 밥을 먹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영군이 스스로를 싸이보그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한 귀결이다. 기계장치를 몸 안에 가진 싸이보그가 밥을 먹을 이유는 없다(그래서 영군은 남들이 밥을 먹을 때 건전지를 입에 대고 충전을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밥을 먹지 않는 것에는 무의식적인 다른 것이 작용했던 것 같다. 그녀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대상이었던 할머니의 존재 말이다. 영군은 자신을 쥐라고 생각하며, 무만 갉아먹었던 할머니가 정신병원에 끌려가며 틀니를 놓고가서 더이상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쩌면 영군의 단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즉 자신이 틀니를 전달해주지 못해 할머니는 굶고 있는데, 자신만 밥을 먹을 수 없다는 죄책감이 여기에는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표면상으로 이 죄책감을 드러내는 것은 그녀를 더 괴롭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신을 지탱하게 해줄 편리한 하나의 논리체계를 만들어냈다(그것은 자신을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극단적인 경우에 이 죄책감은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다. 그리고 박찬욱은 이미 <올드보이>에서 죽는 것보다는 정신병을 가지고라도 살아남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즉 그녀에게 '싸이보그라는 망상'은 그녀를 지탱하게 해주는 것이다). 싸이보그는 밥을 먹을 필요가, 아니 밥을 먹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하고 많은 것 중 싸이보그일까. 싸이보그의 특징 중의 하나는 그것의 겉모습과 안이 다르다는 것, 즉 원래의 인간의 내장이 다른 것, 즉 싸이보그의 경우라면 기계장치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몇 가지를 연상시키는데, 예를 들어 그녀가 가장 소중하게 가지고 다니는 할머니의 틀니 같은 것이다. 틀니는 원래 있던 이의 대체품이다. 즉 틀니는 원래 있던 것이 사라지고 기계장치적인 어떤 것이 인간의 신체 일부를 대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망상이 실재를 대체하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하다. 그것은 망상이 어떤 의미에서는 (죽지 않고) 그 망상을 가진 존재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면에서도 그렇지만, 그것이 오랜기간 실재를 대체할 경우, 그 실재를 망가뜨린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할머니는 영군에게 충고한다. 틀니를 끼우지 말라고, 왜냐하면 자꾸 끼우면 진짜 이가 망가지니까). 그러나 아무튼 영군은 안을 기계장치라도 좋으니 무엇인가로 채워넣어야만 했다. 그것은 할머니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안이 비어버린 영군의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일단 무엇인가 안을 채우면 된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어머니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아니 이상한 농담은 그녀의 어머니가 순대를 만드는 일을 한다는 점이다. 순대란 돼지의 창자에서 원래 있던 것을 비워내고 당면을 채워넣은 음식이다. 한 마디로 싸이보그와 같은 음식.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저 그녀의 빈 것을 아무 것이라도 좋으니 채워넣기를 바란다. 자신이 싸이보그라고 고백하는 진지한 영군에게 그녀의 어머니는 입에 순대를 밀어넣으며, 그녀가 받아먹자, 그럼 되었다고, 싸이버..인지 뭐인지는 상관이 없으니 먹으니까 되었다고 답한다. 이는 정신병원의 하얀맨(의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는 사실 영군의 망상이 무엇이든, 즉 그녀가 싸이보그인지 뭐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강제로 주입하여 그들이 믿는 치료를 행하는 것이다. 그 강제로 주입되는 것들, 예를 들어 그것은 대통령이 누구야, 와 같은 질문들이고, 답을 하지 못하는 영군은 원래 그것을 몰랐다고 답한다. 물론 사실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결국 밥을 먹게 만드는 것은 하얀맨들이 아니라 일순(정지훈)이다. 일순의 접근법은 하얀맨들과 다르다. 하얀맨들은 그녀 고유의 망상의 체계를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인 주입의 방식을 택했지만(그녀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그의 방식은 그녀의 망상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즉 이 고유의 망상에 음식을 기계적인 에너지로 바꾸는 장치를 몸 속에 집어넣었다는 망상을 추가하는 것,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방식은 멋지게 성공을 거둔다(이 일순의 수술(?) 장면은 평론가 김혜리 씨가 박찬욱 영화들의 가장 로맨틱한 장면으로 꼽기도 했다. 사실 나는 이 두 배우를 모두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의 말에는 적극 동의한다. 일순은 이 수술로 영군을 치료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 역시 어머니가 남기고 간 물건을 그녀 안에 심음으로서 그것에 대한 고착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럼 일순에게는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것의 단초는 일순이라는 캐릭터의 어떤 특성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정신병적인 부분이란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에게서 훔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가 훔치는 것이 어떤 '물질적인 물건'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한 환자에게는 탁구를 치는 능력을 훔치기도 하고, 다른 환자에게는 타인에게 매우 미안해하는 마음을 훔치기도 하며, 영군에게는 그녀의 부탁으로 동정심을 훔치기도 한다. 즉 조금 더 명확하게 표현한다면, 그의 정신병이란 무엇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어떤 특성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서 그의 정신병이란 '타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한 가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타인이 되어 보는 것, 그것은 그의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주인공들이 갖추지 못한 것이었다. 동진(송강호)은 영화 속에서 결코 타인이 되어 본 적이 없었고, 그러므로 어떠한 동정심도 갖추지 못했으며, 그 댓가로 배에 칼이 꽂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이 동진을 살릴 수도 있었던 동정심, 이것은 일순에게는 이미 갖춰져 있다. 그것은 그가 타인의 입장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영화 속에서 영군이 밥을 먹지 못할 때, 그녀가 독방에 홀로 갇혀있을 때 누구보다도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고, 그녀를 돕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런 캐릭터는 일찍이 박찬욱의 영화에서 존재하지 않은 캐릭터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영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속에서 영군은 반복되는 메시지를 듣는다(물론 이것은 그녀가 그전에 듣던 라디오에서 혹은 공장의 기계적인 지시음에서 유래한 망상이다). 동정하지 않기, 망설이지 않기,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슬퍼하지 않기 등등의 메시지를 말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이 중의 으뜸은 동정하지 않기라고 이야기해준다. 즉 이것은 일종의 그녀가 만들어낸 스스로의 금기이다. 그런데 역으로 생각해보면 어떤 것이 지금부터 금기된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 이전에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즉 그녀가 스스로에게 그것을 금하는 것은, 그녀가 망설이고,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고, 슬퍼하고, 무엇보다도 동정하는 캐릭터임을 말해준다. 즉 영군 역시 일순 못지 않게 동정심을 갖추고 있다. 다른 모든 가족은 할머니를 어딘가로 치워버려야 하는 존재로만 생각했지만, 그 할머니를 진심으로 동정하고 할머니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노력한 것은 영군 뿐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생각해보면 복수 연작들과 동떨어져 보였던, 그래서 상당히 기괴한 소품으로만 보였던 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사실 이 복수 연작의 거울 선상에 위치한 것을 알 수 있다. 복수 연작에서 수많은 인물들은 미치지 않은 상태에서 점점 미쳐갔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미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 중의 상당수는 이미 미쳐 있었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와 반대로 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영군과 일순은 미쳐 있었지만, 다시 미치지 않은 상태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거나, 사실은 처음부터 미치지 않았던 것처럼도 보인다. 그것은 그들이 복수 연작의 어떤 인물도 갖추지 못한(금자씨는 미약하게나마 갖추게 되었지만), 동정을 가진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영군과 일순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다른 주변 인물들 역시 동정심을 갖추게 된 것처럼도 보인다. 영화의 끄트머리에 다다라, 영군이 억지로 밥을 먹는 장면을 보면 식당의 모든 환자들은 영군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하며, 그녀가 밥을 먹기를 응원한다. 어떠한 하얀맨도 없이 이루어지는 이 장면에서 모든 정신병자들은 이미 타인이 되어가는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정신병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좁은 의미로 보면 '싸이보그지만 (먹어도) 괜찮아'라는 것이지만, 사실은 '싸이코지만 괜찮아'이다. 비록 그들은 싸이코지만 괜찮다. 그것은 '그들의 그 미쳐 있는 상태'가 그들에게 크게 안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약간은 좁은 의미에서도 그러하지만(즉 그들은 '미치는' 상태가 아니라, '미친' 상태이며 이는 망상을 가지고서도 그것이 그들의 삶의 유지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보다 넓은 의미로 보면 그들이 도리어 '정상'이라고 말해지는 사람들보다 낫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싸이코지만 (싸이코가 아닌 자들보다) 괜찮아'이다. 그러므로 영군의 할머니는 영군의 환상 속에서 나타나, 그녀가 10만 볼트의 충전을 하여 핵폭탄이 되기를 원한다. 물론 그 핵폭탄은 동정의 파편들을 세상 천지에 넓게 퍼뜨리는 핵폭탄일 것이다. 박찬욱은 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라는 이상한 우화를 통해 우리가 걸러낸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지켜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미완의 해결이다. 남들보다 유난히 뛰어난 동정심을 가진 이들이 이미 이야기를 정신병원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즉 이 사회는 '남들보다 뛰어난 동정심'을 원치 않는다. 사회는 여전히 등가교환과 그에 따른 대체로 이루어져 있다. 영군이 처음 싸이보그라는 망상을 가지게 된 것에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 외에도 그녀를 단지 하나의 싸이보그로밖에 여기지 않는, 그녀가 처음 일했던 공장의 시스템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줄지어 늘어선 여공들이 같이 동작을 되풀이하는 이 처음의 장면에서 영군은 그 공장의 거대한 부속물이고, 영군이 빠지게 된 자리는 아마 다른 부속물, 다른 여공이 대체했을 것이다. 물론 그녀가 자신의 몸이 기계로 대체되었다고 믿는 것에는 이러한 공장에서 얻게 된 것들도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지나친 동정심은 등가교환을 무너뜨린다. 일순이 말한 평생보장 AS는 이 사회에 없다. 즉 어떠한 관점에서는 동정심은 등가교환하는 자본주의적인 원칙을 어지럽히는 일종의 바이러스이며, 그런 측면에서 바이러스는 하얀맨들에 의해 치유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 바이러스의 보균자들은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또다른 바이러스가 있다. 아니 어쩌면 두 가지의 바이러스'들'이 있다. 박찬욱의 복수 연작들에서 복수는 돌고 돈다. 즉 복수는 교환되고, 그 교환의 고리를 끊지 않는 한, 그들에게 영혼의 구원이란 없다. 그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우화로 숨고르기를 한 박찬욱은 그 등가교환과 대체의 지독한 고리를 끊기 위한 하나의 가능성을 이 바이러스들의 탐구를 통해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영화 <박쥐>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Shining 2013-07-12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찬욱 감독 영화는 다 봤는데 생각해보니 이 영화는 안 봤네요. 사실 여전히 별로 끌리지는 않아요; 이상하게도. 안 본 영화지만 맥거핀님이 이렇게 연작으로 페이퍼 써주시니 좋네요 :) 박쥐로 이어지는 거죠? 끝에 예고까지 써주시고 안 쓰면 반칙입니다ㅎㅎ

맥거핀 2013-07-15 00:58   좋아요 0 | URL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 않은데(저는 좋더군요), 박찬욱의 팬들에게마저 일종의 서자 취급을 받는 영화지요. 조금 더 글을 타이트하게 써야 하는데, 이렇게 띄엄띄엄 쓰니, 좀 그렇기는 하지요?

박쥐는 예전에 개봉시에 영화를 보고 난 직후에 쓴 리뷰가 있어서 짤막하게 쓰고 지나갈 것 같습니다. 그 리뷰가 좀 엉망이긴 하지만.

2013-07-13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15 0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리 크뢰이어>와 <월드워 Z>의 스포가 될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최근에 평론가 정성일씨는 트위터에 프랑스 평론가 도미니크 파이니의 글을 인용하여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는 감각이란 한번 잃어버리면 되찾기가 몹시 힘들다."라고 남겼다. 뭐 사실 이를 흔한 영화평론가의 흔한 '영화부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영화를 조금 더 진지한 마음으로 보고 싶다면 일종의 훈련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훈련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을 연상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내가 말하고 싶은 훈련이란, 좋은 영화들을 꾸준히 보는 것이다. 어떤 영화들이 나쁜 이유는 어떤 나쁜 생각이나 사상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생각을 정지시키기 때문이다. 두 시간 동안 눈을 스쳐 지나갔다가 머리 속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어떤 영화들은 보는 사람들을 거의 두 시간 동안 죽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주 오랫동안 어떤 이들에게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영화의 미덕이라고 칭송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두 시간 동안 기꺼이 죽어있겠노라 선언하는 셈이다.) 또한 동시에 영화는 두 시간 남짓되는 제한된 시간동안 이루어지는, 시간의 제약을 가지고 있는 예술이다. 그 짧은 시간을 집중하는 것은 단지 집중력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루틴의 결과물이다. 꾸준히 좋은 영화를 보게 되면 집중의 산물이 아닌 일종의 루틴이 자신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아마도 일종의 '(자신만의) 영화를 보는 감각'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내 자신의) '영화를 보는 감각'이란 것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그것은 분명히 좋은 영화를 보지 못한 탓이다. 올해의 상반기에 좋은 영화로 꼽히는 영화들, 예를 들어서 <코스모폴리스>, <홀리모터스>, <장고>, <테이크쉘터>, <스타트렉다크니스>, <우리에게 교황이 있다>, <문라이즈킹덤>, <링컨> 등등의 어느 영화도 보지 못했다. 아니 여기 언급되지 않은 어떤 영화들도 좋았던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그것이 좋은 영화였는지 확신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타인의 리스트만 늘어놓는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좋은 영화들을 보았는지 알 수가 없다. 다 감각이 무뎌진 탓이다. 그저 지나간 몇 편의 영화들에 대한 잡설을 늘어놓는 것이 그 감각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될까? (이 두 가지의 영화가 짧은 리뷰의 대상인 것은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저 가장 최근에 본 두 편일 뿐이다.) 


 

 

<마리 크뢰이어>, 빌 어거스트, 2012

야구에는 '우완정통파에 대한 로망' 같은 것이 있다. 150km를 넘나드는 강속구를 자유자재로 제구하는 오른손 투수에 대한 선망. 그러나 물론 이들이 로망의 대상인 것은, 이런 친구들이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빠른 볼을 던지기는 하나 제구가 안되는 투수들은 비일비재하고, 결국 투수코치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든다. "구속을 좀 떨어뜨려서 제구를 잡자!" 그러나 여기에는 실패의 가능성이 늘 도사리고 있다. 다이조부 박사는 현실에 없다. 구속은 현저하게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제구는 들쑥날쑥하고 빠른 볼을 던지던 미완의 대기는 그저그런 패전처리 투수가 된다. 물론 다른 방법도 있다. 타자를 현혹시키는 키킹 동작을 추가한다, 볼을 끝까지 숨겨나오도록 투구폼을 교정한다, 특정의 변화구를 장착한다, 구속을 조절하는 방법을 습득한다, 타자의 리듬을 빼앗는 불규칙한 인터벌 조절법을 습득한다 등등의 다양한 방법들 말이다. 아니면 아예 극단적으로 쓰리쿼터나 언더스로로 폼을 바꿔버릴 수도 있다(심지어 어린투수의 경우에는 우완에서 좌완으로 전환시킬 수도 있다). 즉 이들은 어느 틈에 기교파 투수가 된다. 우완정통파와 좌완기교파. 즉 어릴 때부터 기교파가 목적인 투수는 (거의) 없다. 누구나 160km를 던지는 정통파가 되고 싶지만, 그것의 길은 멀고, 대신에 살아남기 위해 여러 다른 기교를 배운다. 즉 수많은 기술들은 살아남기 위한 산물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렇다고 우완정통파는 기술 없이 던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적당한 키킹으로 머리 위에서 손을 내리꽂아 빠른 속도로 공을 던지는 우완정통파의 투구폼 역시 야구의 역사에서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단 1km의 속도를 더 내기 위해서 그간 연구된 수많은 방법들이 이 우완정통파 투수의 강속구에 녹아들어가 있다. 즉 이는 기본기지만, 이 기본기 역시도 수많은 기술들의 집약체이다.

별 쓰잘데기 없는 야구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정복자 펠레> 등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 감독 빌 어거스트가 우완정통파 투수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유명한 <정복자 펠레> 등의 영화에서도 그러하지만, 그의 영화에는 별다른 기교가 없다. 영화는 시작하면서 한 장례식장에서 아기를 안고 서 있는 한 미망인의 모습을 비춘다. 아기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버린걸까? 영화는 별다른 설명없이 시계바늘을 돌려 그녀의 아주 오랜 옛날로 돌아간다. 그리고 우직하게, 별다른 카메라워킹도 없이 이야기를 천천히 이끌어 나간다. 그리고 이 순탄하지 않은 마리 크뢰이어의 삶을 조용히 따라가며 수많은 분기점들에서 그녀의 선택들을 지켜본다. 그러므로 사실 이 영화의 가장 위험한 부분은 마지막에 있다. 관객이 "나는 이 여인의 삶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이 여인의 선택들, 혹은 그녀가 처하게 된 마지막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다."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영화로서 끝난 것이다. 단지 그저 두 시간 동안 '화성인 바이러스'를 본 것이다. (당신이 그것을 보는 동안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해서 보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단지 당신은 동물원 우리 속의 동물로서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그녀의 삶이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녀의 어떠한 선택들이 가능한 선택의 범위 속에 들어있음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비록 그런 삶이 아닐지라도 우리에게는 조금이나마 얻게 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즉 구속을 1km라도 끌어올리기 위해서 빌 어거스트는 몇 가지 전통적인 장치를 효과적으로 구성한다. 예를 들어 복선의 장면들이 그것이다. (복선은 물론 가장 효과적인 서사전략 중에 하나다. 그러나 요즘의 어떤 영화들은 관객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복선을 의도적으로 생략한 후에 어떤 장면을 던져버리고, 어리둥절해진 관객들은 인터넷에 "그런데 그 장면의 의미가 뭐죠?"라고 질문을 올린다.)  예를 들어 마지막 딸 빕스의 선택이 이해가 되는 것은 우리가 이미 그 전에 어머니가 대체된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리 크뢰이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때 카메라는 마리 크뢰이어의 등 뒤에서 집의 모습을 비춘다. 집은 평안하고, 어머니는 집안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으며, 한때 어머니였던 마리 크뢰이어는 손님의 위치가 되어 집안을 조심스레 살핀다. 아니면 다음의 장면. 영화의 시작부, 아버지의 어떤 행동들을 두려워하는 딸 빕스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을 예감하게 됨은 물론, 지금까지 반복된 수많은 일들, 그리고 그것에서 딸과 마리가 감내야하여야만 했던 일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중에 마리 크뢰이어의 선택을 지지할 수 있는, 혹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복선의 구실을 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휴고의 처음 등장과 <안나 카레니나>에서 브론스키의 처음 등장을 비교해보면 어떨까.) 즉 차곡차곡 쌓여진 장면들은 구속을 조금씩 끌어올려 기어코 당신이 삼진을 당하게 만든다. 그래서 당신은 덕아웃으로, 아니 집으로 돌아가며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무게중심은 마리 크뢰이어에서 어느새 빕스 크뢰이어로 옮아간다. 그러므로 영화를 다시 다르게 보는 하나의 방법은 마리 크뢰이어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빕스 크뢰이어의 관점에서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이다. 마지막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빕스의 모습을 보며 마리의 남은 삶보다는 빕스의 남은 삶이 궁금해지는 것은 아마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정복자 펠레>의 마지막이 오버랩되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감독의 삶을 혹은 사회를 바라보는 자세이기도 할 것이니까. 삶은 그렇게 세대에서 세대로 조금씩 나아간다.

 

 

 

<월드워 Z>, 마크 포스터, 2013

마크 포스터는 적어도 액션 장면들에서 긴박함을 끌어낼 줄 안다. 이 영화는 액션들의 백과사전과 같다. 좁은 공간에서의 폐쇄적 액션, 거대한 군중들의 동시다발적 액션, 도로의 카체이싱, 비행기 안에서의 액션, 무소음 액션, 밀폐된 공간에서의 일대일 대결 등등 여러 다양한 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액션들이 이 영화에는 총망라되어 있으며, 마크 포스터는 각각의 장면들에서 적당한 컷과 편집과 리듬으로 각 장면들의 긴박함을 살려낸다. 그리고 액션들 사이에 중간중간 적절한 휴식처를 관객들에게 제공하고, 관객들에게 숨을 돌릴 틈을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즉 다시 야구로 말하면 그는 매우 다양한 기교를 갖추고 있다. 인터벌 조절도 능하고, 이중키킹을 구사하며, 공을 끝까지 손에서 숨기면서 릴리스한다. 그런데 참 이상한 건, 그가 끝끝내 나를 삼진으로 돌려세우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여전히 용큐놀이를 하고 있다. 물론 안타를 쳐내지 못하는 용큐놀이란 투수만 피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놀이를 하는 당사자도 피곤하게 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에라 모르겠다,하고 나는 배트를 휘둘러 버린다. 영화로 돌아와서 말하자면, 나는 결국 이 제리(브래드 피트)가 죽든지 말든지 별로 상관이 없어진다. 다시 말해서, 나는 그의 남은 삶이 전혀 궁금해지지 않게 되었다.

이 영화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좀비의 어떤 바이러스적, 혹은 박테리아적 속성이다. 즉 이 영화에서 말하는 좀비는 어떤 주술이나 신비한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이고 과학적인 방식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만약 좀비에 물렸더라도, 그 부분을 도려내는 등의 빠른 처치가 이루어진다면, 좀비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좀비 바이러스는 아주 파괴적이고, 전염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감기 바이러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이 영화를 스티븐 소더버그의 감기 재난 영화 <컨테이젼>과도 비교할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어떻게 보면 비슷한 시작을 보여준다. 끊임없이 중첩되는 뉴스 리포트들로 시작했던 <월드워 Z>와 비슷하게 <컨테이젼>은 바이러스가 처음 전파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영화들은 점점 분기되어 나아가기 시작한다. 끝까지 다큐멘터리 혹은 뉴스 프로그램의 기조를 유지하는 <컨테이젼>과 다르게 이상하게도 <월드워 Z>는 농담을 하기로 마음먹고, 그 농담을 점점 강화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중간에 끼어있는 예루살렘과 북한에 대한 농담, 혹은 마지막에 들어있는 그 WHO에서의 액션 같은 것 말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온 몸에 퍼진 상태에서 연구동을 유령처럼 떠도는, 한때 전세계의 건강과 보건을 위해서 분투했을 그들의 기괴한 액션(어떤 블로거 분은 이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라고 탁월한 설명을 해주셨다)을 선사하는 것이 농담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아마도 이 제목 <월드워 Z>의 Z는 좀비의 Z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능성 없는 것으로서의 Z일지도 모른다. 즉 현실성의 정도를 A에서 Z까지 나눈다면, '월드워 A'는 소더버그 식의 이야기, 그리고 '월드워 Z'는 이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문제는 영화의 안쪽이 아니라, 영화의 바깥쪽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단지 농담을 하기 위해서  이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본다는 것에 담겨진 의미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매 전쟁을 뚫고 표를 힘들게 구한다음 주말저녁 힘들게 차를 타고 나가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용케 자리를 찾아서 앉아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두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견뎌낸 대가가 고작 농담이라고 말해질 때의 그 어떤 허탈감 말이다. 농담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이 가장 바보같은 것이라는 점은 고금불변의 진리지만, 그 농담이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는 댓가라면 우리는 그 농담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왜 보는지 자문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아이고, 왠 오바질이야, 진짜 죽은 거 아니잖아요, 그거 다 아주 잘 만들어진 가짜 죽음이잖아요.

사실 문제는 그 '가짜 죽음'이다. 영화 기술이 발달하면서 특히 발달한 부분 중에 하나는 죽음의 묘사이다. 요즘의 눈으로 옛날 영화를 본다면 가장 눈에 띄는 어색함은 누군가가 죽을 때이고, 그것은 그 죽음을 묘사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미비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올수록 죽음의 묘사는 점점 정밀해지고, 그것은 마치 실제의 죽음처럼 보인다. 과거의 영화가 카메라 눈속임으로 배에 칼이 꽂히는 장면을 묘사했다면, 컴퓨터 그래픽의 발전으로 배에 칼이 쑥 들어가는 장면을 클로즈업하여 자연스럽게 슬로우로 보여줄 수도 있다. 즉 죽음은 거의 진짜와 같아졌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객의 인식이다. 그것이 너무 정밀해지다 보니 그 죽음들은 거의 농담처럼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거의 실물과 같은 죽음을 보고도 그것이 진짜 죽음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혹은 거대한 대규모의 죽음을 영화관에서 보면서도 웃고 있다. 그것이 가짜임을, 혹은 거대한 농담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예전의 영화들에서 이상하게 진화한 것이기도 하다. 과거의 어떤 죽음들은 기술적으로 어설펐지만, 우리는 그것이 죽음이라고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동의하지 않으면, 그 죽음들이 너무 어설프게 묘사되었기 때문에 '영화보기'라는 행위 자체가 이어질 수 없었다). 즉 우리는 그것을 눈에서 가짜라고 받아들였지만, 머리 속에서는 진짜라고 인식했다. 이제는 그 반대가 되었다. 눈에서는 진짜라고 인식하지만, 우리는 머리 속에서 그것을 가짜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이게 도통 좋은건지 모르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네오 2013-07-02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곡차곡 쌓여진 장면들은 구속을 조금씩 끌어올려 기어코 당신이 삼진을 당하게 만든다. 그래서 당신은 덕아웃으로, 아니 집으로 돌아가며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ㅋㅋㅋㅋㅋㅋ 이런 상황은 허무하죠 ㅋㅋ 빌 어거스트나 마크 포스터가 영화잘만든다는 생각은 안했는데 그게 계속해서 드러나나 보죠? 월드 워z는 촬영감독이 로버트 리챠드슨이라서 볼 마음은 있지만 기대는 그게 다네요 ㅋ 오히려 스티븐 소더버그의 <컨데이젼>이 짱이죠~<매직 마이크>, <헤이와이어>는 지금 생각해도 올해의 영화란 말이죠~ 그런데 요새 mlb좀 보시나요? 아주 본격적으로 달려들면서 보고 있는데,,정말 재미있더군요,,전에는 kbo가 최고의 재미를 선사했는데,,이맛을 알고 난다음 도저히 못보겠던요,,진심으로 엘쥐팬이었음에도 불구하고요 ㅋ 저는 뉴욕 메츠의 맷 하비가 지금 오른손 정통파워에 계를 있을 것 같던데요,,피츠버그의 신인 게릿 콜도 괜찮던구요, 아직 3경기만 했지만요,,지금 리그 통틀어서 가장 좋아하는 투수는 왼손 정통파 클레이튼 켜쇼지만요 ㅎㅎ

맥거핀 2013-07-03 15:01   좋아요 0 | URL
스티븐 소더버그는 정말 '영화 장인'이라는 말이 잘 어울려요. 많은 영화를 만들면서도 각 영화의 수준이 (높은) 일정 정도를 유지하고 있으니..<헤이와이어> 뒤늦게 집에서 보았는데, 영화가 좋더군요. 여주도 맘에 들고...

저는 아직 막장 한국야구에 빠져 있습니다. 엘지팬이면 요새 야구를 안보실 수가 없을껀데..ㅋㅋ 매년 엘지팬들의 패턴이 있잖아요. 처음에 시즌이 시작할 때는 부푼 마음을 안고 야구에 열중하여 보다가 6월이 넘어갈 시점에 슬슬 mlb로 넘어가죠. 저도 작년까지는 그런 패턴으로 갔었는데, 올해는 아직까지 엘지의 게임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에 나온 굇수들은 잘 모르겠고(게릿 콜이 쩐다면서요? 요새 피츠가 잘 나가서 왠지 기분이 좋아요. 피츠가 망가지면 엘지도 망가질 것 같은 마음이라고나 할까?), 우완정통파하면 제가 좋아하던 애들은 저스틴 벌랜더나 망가지기 전의 팀 린스컴 같은 애들이었는데...저는 사실 잊을 수 없는 그런 애는 케리 우드예요. 걔 데뷔전 보다가 어찌나 입이 딱 벌어졌던지...참 그러고보면 불꽃같이 태우고 사라진 투수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친절한 금자씨, 박찬욱, 2005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이자, 복수 연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친절한 금자씨>는 중간에 한 번 영화가 탈바꿈을 한다. 엄밀한 용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나는 그것을 톤(tone)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중간의 기점은 금자(이영애)가 백선생(최민식)이 가지고 있던 다른 아이들의 상징물들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이 때부터 상당히 비현실적이고, 뭔가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던 이 영화는 급속하게 지상으로 내려와 관객들에게 달라붙는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의 중간까지의 분위기의 형성에 큰 몫을 담당하던 나레이션(내용상으로 볼 때 이 나레이션은 금자의 딸 제니가 후일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이다. 목소리는 라디오 '밤의 플랫폼' 등으로 익히 알려진 성우 김세원 씨가 맡고 있다)이 이 중간을 기점으로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이 중간 이후로 등장하지 않던 나레이션은 마지막에 단 한 번 등장한다). 물론 내용상으로 볼 때도 이 중간부터 이야기는 다른 양상을 띤다. 전반부까지는 금자가 복수를 위해서 세력을 규합하는 과정이다. 무엇인가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공간(물론 이는 여성교도소라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공간이 주무대인 점에도 이유가 있다)에서 비현실적인 사건들이 비현실적인 톤으로(예를 들어 기도하는 금자의 등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장면 같은 것) 이루어진다. 그런데 금자가 거의 복수에 성공하고 그것을 완결지으려 할 즈음에 금자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죽은 아이가 원모 한 명이 아니었던 것. 그리고 이 때부터 이른바 '집단의 복수'가 등장하고, 문제의 학교에서의 씬이 이어진다. 그리고 박찬욱이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듯, 그가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이 후반부의 학교에서의 일들이었던 것 같다.

다른 이야기에 앞서서 먼저 몇 가지의 자잘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박찬욱의 미장센 구성 능력과 형식적인 시도들을 많이 볼 수 있는 영화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는 박찬욱이 특히 <스토커>에서 쉴새없이 보여줬던 평행편집의 원형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대화를 섞어서 새로운 제3의 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나, 대비되는 두 사건을 교묘하게 엮어서 독자의 이해의 쾌락을 증폭시키는 것 등이 그런 것이다. 이는 예를 들어 금자와 백선생이 다른 인물(목사(김병옥)와 박이정(이승신))들을 이용하여 서로를 추적하는 장면이나 영화의 중간 금자 사건의 담당 형사가 빵집에서 금자를 대면하는 장면 등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이 빵집에서의 씬에서 금자와 같이 일하는 근식과 금자의 대화, 그리고 형사와 형사 아내의 대화를 동일 선상에 놓음으로써 간단하게 금자와 형사를 동일 선상에 위치시킨다. 즉 금자의 사건에서 금자가 가지게 되는 죄의식의 어떤 부분을 형사도 공유하고 있음을(왜냐하면 그도 결국 당시에는 진범을 잡아내지 못했고 금자를 범인으로 만들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나중에 학교에서 금자를 돕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이 장면에서 도리어 주목하여야 할 것은 대화보다도 어둡고 축축해보이는 긴 지하도를 통과하는 형사와 그의 아내의 모습이다) 관객에게 보여주면서 동시에 다른 미묘한 것들도 살짝 암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형사의 아내는 금자가 만든 케이크를 내던지며 "이걸 어떻게 먹어!"라고 형사에게 소리치는데, 이 대사가 (근식에게) 예전에 아이를 살해했다고 말하면서, "걱정 마. 먹지는 않았으니까."라고 덧붙이는 금자의 대사 뒤에 붙음으로서 '먹는다'라는 표현이 말하는 미묘한 뉘앙스가 관객에게 전달되도록 하고 있다(그리고 이 장면 뒤에 금자와 근식이 관계를 맺는 장면이 붙는데, 이는 '먹는다'라는 대사와 맞물려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해보도록 한다. 예를 들어 금자와 근식의 관계, 혹은 형사와 금자의 관계, 백선생과 금자의 관계 같은 것들을 말이다. 이것은 또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이후 금자의 딸 제니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금자의 죄'라고 할만한 것이 나온다. 그런데 사실 영화를 보다보면 이 금자의 죄라는 것이 명확하지가 않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금자는 아마 아이를 꾀어냈을 뿐, 범죄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서 복수의 구조는 성립한다. 금자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백선생의 죄를 대신 뒤집어썼고, 그 결과 감옥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이는 세상의 죄일 뿐, 사실 어떤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속죄'와 같은 것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녀가 결코 죄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녀도 어떤 의미에서 보면 피해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전반부까지 금자가 준비하는 복수는 철저히 그녀만의 것이고, 형식상으로는 원모의 원한을 갚는다는 식의 형태를 띠었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복수(그렇지만 어딘지 모르게 미심쩍은)에 가깝다. 즉 원모의 부모에게 속죄하고, 죽은 아이를 대신하여 백선생을 처단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녀의 일종의 퍼포먼스이고, 이는 한편으로 이 복수를 어떤 가벼운 놀이극처럼 보이게 한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친절하다'. 그녀가 친절한 것은 자신들의 복수를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그녀가 교도소에서 '친절한 금자씨'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것은 말 그대로 친절하기도 했지만, 공공의 적 마녀를 쓰러뜨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녀는 그럼으로써 타인의 신뢰를 얻지만, 동시에 마녀의 지위를 물려받기도 했다. 즉 그녀는 친절하지만, 이 친절함은 왠지 가면과 같은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녀는 감옥에서 나와 그 가면을 벗어던지고,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변했다'는 말을 듣는다.

이 '변했다'는 것은 일종의 복선이다. 왜냐하면 금자는 실제로 변했으니까 말이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다른 사람의 복수를 대신해서 처리했던 금자가, 그래서 심지어는 자신의 복수마저도 일종의 놀이극처럼 보이게 만들었던(영화의 전반부까지) 금자가, 정작 그 자신의 복수는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겨버린다는 사실이다. 즉 이 마지막의 학교에서 금자는 이 복수에서 살짝 '비껴서' 있다(그녀는 결국 죽은 백선생의 시체에 총알을 날렸을 뿐이다). 이를 이렇게 이야기해보자. <복수는 나의 것>에서 이야기한 것은 하나의 복수가 아니라 돌고도는 복수의 연쇄이다. 복수는 또다른 복수를 낳고, 복수를 행한 당사자는 다음 번의 다른 복수에 의해 쓰러진다. <올드보이>에서 이야기한 것은 복수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살고자 하는 노력, 혹은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즉 복수는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해하는 것이며, 복수의 촘촘한 그물망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의 노력 뿐임을 말한다. 이것은 <친절한 금자씨>에 이르러 하나로 합쳐진다. 복수, 즉 처벌은 결국 자신을 해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처벌을 그만둘 수도 없다. 왜냐하면 백선생과 같은 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백선생은 일종의 맥락을 알 수 없는 악이다. 이것에는 어떤 윤리적인 의미나 개인적인 원한 같은 것이 없다. 백선생은 안이 텅 비어있는 입출력기계, 어떤 신호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기계와 같다(예를 들어 그가 밥을 먹다가 박이정과 거의 강간에 가까운 성행위를 하는 장면을 보면, 그의 입력(먹는 것)과 배출(로서의 성행위)은 거의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최민식은 흥미롭게도 <악마를 보았다>에서 이런 캐릭터를 한 번 더 연기하기는 했다). 그것이 자본주의적인 욕망과 연관되어 있으며(그는 요트를 사기 위해 아이들을 죽였다고 했다), 또한 예전에 말한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의 논리'와 연결되어 있음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백선생과 같이 (현대 자본주의의 병리적인 현상으로서의) 맥락을 알 수 없는 악에 맞서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이 영화에서와 같은 대리 처벌이다. 스스로를 구원하면서도 필요한 복수를 행하는 것, 그것이 대리 처벌이며, 그것은 한편으로 이 사회가 구현하는 방식이다. 결국 생각해 보면, 이 영화에서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집단적인 처벌은 사회적인, 우리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처벌이다. 물론 그것은 완전히 같지는 않다. 그것의 실행과 집행은 공권력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의 손을 떠나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맥락과 실행으로 볼 때 <친절한 금자씨>에서 '돌아가면서 칼로 찌르기'나 우리 사회에서 '재판을 통해서 사람을 목을 매다는 것'이 거의 동일한 것처럼 보이며, 실제로도 그렇게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복도의 긴 의자에 우비를 입고, 비닐장갑을 끼고, 손에 단도를 들고 어떻게 하면 손이 다치지 않고 잘 찌를 수 있는지에 대해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떠올린 낱말은 '신산스러움'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내재된 그 '신산스러움' 말이다. 우리 사회의 재판과 형의 집행은 그것을 조금 더 간편하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즉 복도의 긴 의자에 앉아있는 이들에게는 이 '신산스러움'과 '다가올 복수의 쾌감'이 공존한다. 우리 사회의 대리 처벌은 이 중 '신산스러움'을 상당부분 제거했고, 그 결과 복수의 쾌감이 더 크게 남았다(물론 이 과정에서 복수의 쾌감도 줄어들기는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간단하게 남겨져 현재 비교적 간단하게 실행되는 이 과정에서 은연중에 잊게 되는 중요한 것이 있다. (즉 우리는 현대사회에서 죄를 처벌하는 것이 우리의 손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사실 그에 대한 많은 함의를 잊어버렸다.) 그 밑바탕에 있는 것이 무엇일까.

 

 

<친절한 금자씨>는 위에서 이야기했듯 백선생의 죄가 원모의 죽음 뿐만이 아니었다는 점을 금자가 알게 되는 것이 기점이다. 즉 이야기는 이를 기점으로 그 전까지의 금자의 개인적인 복수에서 후반부의 사회적인 복수로 넘어간다. 사회적인 복수로 넘어가는 까닭은 금자가 이 아이들의 부모의 심정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이 죽어가는 비디오를 보고 나서야, 혹은 그 비디오를 보고 부모들이 보이는 엄청난 강도의 '애끓음'을 보고 나서야 금자는 백선생이 자기가 간단히 처리해야 할 장난감이 아님을 깨닫는다. 간단히 말해서 백선생은 자기 혼자 간단히 먹을 작은 케익이 아니라 커다란 케익의 한 조각인 것이다. 물론 그녀가 공감을 할 수 있었던 것에는 그녀의 딸 제니의 존재가 큰 역할을 담당한다. 왜 <친절한 금자씨>에 딸 제니가 중간에 등장하고, 그녀를 딸처럼 사랑하는 양부모가 등장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그것을 보아야만 금자가 공감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그래서 그녀는 이 복수에서 '비껴선다'. 그러므로 사회적 복수, 혹은 사회적 처벌의 근원에 있는 것은 공감하는 마음, 혹은 동정하는 마음이다(물론 이는 단순히 '피해자'의 입장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즉 복수의 선행 이전에 존재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회적인 처벌, 일종의 대리 처벌이 이루어질 때 악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것을 이루어내서는 안된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이 악은 맥락이 없는 악이다. 그것을 우리가 나쁜 놈이니까, 혹은 죽어야 할 놈이니까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 맥락없음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다. 그 근원에 놓인 맥락을 찾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악과 우리가 다른 점이다.

박찬욱의 복수 연작은 이렇게 조금씩 진화한다. 뭐 간단하게 말하자.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마지막 모든 인물들이 죽었고, <올드보이>에서는 가까스로 죽음은 면했으나 정신분열을 피하지 못하였다.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죽지도 않고 미치지도 않았으나, 그렇다고 영혼의 구원에 이르지는 못하였다(마지막 나레이션이 이를 이야기해 준다). 그것은 <복수는 나의 것>의 인물들은 공감이나 동정에 이르지 못하였고, <올드보이>의 인물은 여전히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신의 말만 하였으나(오대수, 아니 최민식은 전편에서 혀를 자르는 징벌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충분치 않았다. 그는 이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자신을 어떻게 죽일 것인가를 입에 재갈이 물려진 채로 큰 스피커로 들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이 말에 대한 불신은 계속 이어지는데, 금자씨가 백선생을 잡아 가장 먼저 한 일 중에 하나는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었으며, 어른인 채로 금자씨 앞에 나타난 원모(유지태)는 금자가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려하자 재빨리 재갈을 물려버린다), 금자씨는 어렵게나마 약한 공감, 혹은 동정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얘기가 조금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 영화의 배우들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쓰이고 있다. 위에 든 최민식이나 유지태도 그러하려니와 금자와 제니에게 나타난 두 명의 킬러, 송강호와 신하균은 어떤가. 그렇다. 사실 이들은 동일한 한패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간에 금자씨 역시도 영혼의 구원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니 그 영혼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인가. (박찬욱에게 구원은 그렇게 쉽게 오는 문제가 아니다. 정성일도 지적했지만 마지막 빵집에서 샹들리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를 나홍진의 <추격자>와 비교할 수 있는데, <추격자>에서 가장 의아하게 만든 것은 마지막 교회를 둘러싼 설정들이다.) 예를 들어 미친 자이거나 남의 피를 빨아야만 살 수 있는 자들에게는 영혼의 구원이란 없을 것인가. 그것의 양상들을 우리는 박찬욱의 다음 영화들에서 보게 될 것이다.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13-05-27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반부를 백선생의 처단하는 모습에서 "생생한" 오리엔탈 특급 살인 사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필 제가 맥거핀님의 이 글을 보기 바로 직전 "검단산 여대생 살인청부 사건"의 전말을 봤답니다. 복수..혹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게 불필요하게 느껴지지 않더군요.)

맥거핀 2013-05-27 20:12   좋아요 0 | URL
네..그 장면들이 그 소설의 그 부분과 통하는 부분들이 있죠. 이 영화가 처음 개봉했을 때 따라했느니 하면서 여러 말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근데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그 사건은 뭐죠? 관련내용을 찾아보겠습니다. 글쎄요..근데 인류 역사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벗어나기 위해 참 많은 노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죠. 그것을 되돌리면, 우리는 야만으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아님 무엇인가(예를 들어 정의)를 '회복'하는 것일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확인해보니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나온 사건이군요.)

Shining 2013-05-29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군요, 좋아요. 약속을 지키는 맥거핀님이 공정사회를 만드실겁니다요-_-b(...뭐지;;)

저는 이 영화를 생각하면, 희미하게 드는 어떤 예감같은 것,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균질하지 못한 감각, 같은 게 느껴지는데 어쩌면 그게 맥거핀님이 말씀하신 톤,일지도 모르겠어요. 이상할만큼 불쾌해지는 영화예요. 잔인함이나 주제나 방식과는 별개로. 어떤 묘한 불쾌감.

불쾌감, 하면 말씀하신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도 떠오르네요. 비오는 날 풍기는 어슴프레한 비린내나 수초 표면에 낀 이끼자국, 지하실의 습기 같은게 떠오르는 영화. 컷이나 연출보다는 뚜렷한 후각,으로 기억되는 영화거든요 저한테는.

덧) 윗 댓글에, 그것이 알고 싶다, 지난주 우연히 틀었다 광분과 혐오의 도가니에...하아.

맥거핀 2013-05-30 01:02   좋아요 0 | URL
저는 불쾌해진다는 느낌보다는 이상한 공포감을 많이 느꼈던 영화예요. 이 영화, 조금 무서운 구석이 있어요. 전반부는 영화가 이상하게 장난스러운 부분들이 있잖아요. 여러가지 테크닉적인 장난들, 혹은 내용상의 어떤 장난스러운 부분들 - 예를 들어 교도소에서 금자는 못하는 일이 없는 사람으로 보여지죠. 마치 거의 로봇을 보는 것 같은데, 이것을 로봇을 볼 때의 어떤 이질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 이 있고, 금자의 복수는 어떤 게임과 같이 혹은 장난과 같이 이어지죠. 금자가 원모의 부모님에게 사죄하는 방식 같은 것을 보아도 말이죠.

그런데 그런 영화가 후반부에 갑자기 확 틀어버려요. 장난을 하던 영화가, 이제 갑자기 "그래도 이게 장난같아보여?"하고 관객에게 묻는 거죠. 아이들이 울부짖는 비디오를, 그리고 그것을 보는 부모들이 울부짖는 것을 억지로 보게 하면서 말이죠. 그런 다음 영화는 부모들이 계좌번호를 주섬주섬 적고, 금자가 케익에 머리를 묻으면서 이상하게 다시 장난으로 돌아옵니다. 장난을 치던 아이가,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그 장난에 숨은 무서운 걸 보여주다가, 아니 사실은 그것도 장난이었어 하고 말하는 격이랄까요. 저는 그게 조금 무서웠어요. 아니 사실은 많이 무서웠어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나홍진 감독의 영화들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뭐 그냥 제가 그렇다는 겁니다.^^

아이리시스 2013-05-30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읽었는데 이제 댓글 달아요. 공정사회는 저 같이 약속안지키는 사람도 있어서 만들어질 수가 없어요. 그냥 맥거핀님의 바른 자세가 이 세상을 영차영차 하면서 끌고 올라와 저를 희석시키는 거;; 영화는 '너나 잘하세요'나 기억날 뿐이지만, 이 영화는 유독 다시 보고 싶은 영화가 아닌 게, 저는 이영애가 너무 별로;; 근데 이영애만 기억이 나고 다른 배우들은 거의 기억이 안나지만 내용(감독의 철학)은 확실히 처음보다 점점 발전하는 양상을 띠고 있는 것 같아요. 이 리뷰 보니까 더더욱.

그런데 나홍진 감독에게는 왜 동의안해요? 이건 Shining님 대신에 제가 궁금해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도 보실 건가요?ㅋㅋㅋ

맥거핀 2013-06-03 14:34   좋아요 0 | URL
공정사회는 뭐..일단 제가 공정하지가 않기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을 거예요.^^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이번에 순서대로 다시 보니까, 예전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흐름이랄까, 어떤 내용의 단계적인 발전이랄까 같은 것들이 보이는 것 같아요. 이후에 아마 기회가 기회가 있으면 쓰게 되겠지만, 이 흐름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와 <박쥐>, <스토커>까지 지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나홍진 감독의 영화들은 뭐랄까, 인물들이 너무 가혹하게 버려진다는 느낌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어떤 미학적인 아름다움, 혹은 일시적인 감정을 주기 위해서 인물들이 가혹하게 다루어질 때, 아니 감독이 창조한 인물을 스스로 갑자기 구겨버릴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아..그리고 저번에 제가 질문했는데 왜 질문에 답 안달아줌? ㅋㅋ

아이리시스 2013-06-04 16:00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요, 그거 제 댓글 아래 댓글 그거 맥거핀님이 맥거핀님 글에다가 비밀댓글로 단 거 아니예요? 이상하게 비밀댓글인데 그게 제 답글같단 말이죠.. 제가 좋은 정보도 알려주고 간만에 일본어도 사용했는데 왜 답글 안달아줌? 이게..전부터..좀 의심스러웠음..ㅋㅋ

그게 아니라면 무슨 질문?


2013-06-04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4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5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6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7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5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5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오 2013-06-30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토커> 별로였는데요-.,- 그래서 다음부터 박찬욱 아니올시다 라고 결정지으려다가 음,,님 글때문에 갈등때리네요 하~ 어쭙잖은 갈대의 방황 ㅋㅋ 박찬욱의 세계다음에 이제는 누구차례인가요? 조금은 저는 맥거핀님의 박찬욱을 다루고자 하는 글들을 봤으면 하는 소망도 있지만요,,이렇게 작품 따로 따로 떼어내지 말고 전체적인 작가론은 볼수 없나요? ㅋㅋ 왠 요구사항이 이렇게 많을까요^^ 아 그런데 올해 상반기 베스트로 어떤 영화를 선정했나요? 저는 음 한국영화제외하고 베스트원은 <제로다크서티>, 그다음은 <코스모폴리스>, 음 그리고 그리고 <링컨>, <장고>, <문라이즈 킹덤> 요렇게요,,

맥거핀 2013-07-02 00:33   좋아요 0 | URL
하하..네오님 오랜만. 근데 아직 박찬욱이 안 끝나서요. 싸이보그..도 써야하고, 박쥐나 스토커도 다시(특히 <박쥐>는 예전에 쓴 리뷰가 지금 읽어보니 엄청 이상하더군요.) 써야하는데..사실 필요가 있어서 작가론을 하나 쓰기는 했는데, 그거를 쓰다가 남는 부분들을 이렇게 리뷰들로 재활용(?)을 하고 있어요.ㅋ

근데 상반기 베스트는 일단 최소한 어느정도 챙겨본 사람들이 뽑는 거라서, 제가 뽑으면 그냥 본 거 다 써야할 것 같은데요.ㅋ 저는 위에 뽑으신 거 사실 하나도 안 봤어요. <링컨>은 꼭 보고자 마음먹었건만...<제로다크서티> 리뷰 쓰셨던가요? 찾아봐야지.
 
올드보이 일반판 - 재출시
박찬욱 감독, 최민식 외 출연 / 스타맥스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영화의 자세한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박찬욱의 복수 연작의 두 번째 작품 <올드보이>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한 리뷰를 등가교환으로 끝냈으니 그것으로부터 이어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신장과 신장의 교환, 익사와 익사의 교환과 같은 등가교환에 대한 집착은 이 영화 <올드보이>에서도 이어진다. 예를 들어 오대수(최민식)는 사설감옥의 사장 철웅(오달수)의 이빨을 장도리로 뽑아내고, 그에 대한 대가로 철웅은 오대수의 이빨을 뽑아내려 한다. 철웅은 미도(강혜정)의 가슴을 손으로 만지고, 그 대가로 손이 잘린다(이것에는 또한 오대수의 어떤 오해가 작용하고 있다). 물론 가장 크고도 근본적인 등가교환은 이 영화 그 자체이다. 즉 우리는 영화의 전체에 걸쳐서 오대수의 복수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이우진(유지태)의 복수이다. 그리고 그 복수란 자신(이우진)과 이수아(윤진서)의 관계와 동일하게 오대수와 미도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커다란 등가교환의 영화이고, 무엇인가가 무엇인가로 대치되는 영화이다. 오대수의 복수에서 이우진의 복수로 영화는 어느틈에 옮겨가고, 이우진과 이수아는 오대수와 미도로 슬그머니 대체된다. 어떻게 보면 <올드보이>는 모든 비밀이 담긴 보라색 상자를 보여주기 위해 달려오는 영화이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전작 <복수는 나의 것>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점점 개연성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저 이 보라색 상자를 보여주기 위해 영화가 지금까지 왔던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리고 묻는다. 이 상자를 열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것을 택하겠습니까. 이것을 열면 무엇인가를 보게 되지만, 그것을 본 대가는 당신이 치러야합니다.


이러한 등가교환에 대한 집착, 어떠한 것의 부재를 거의 그것과 동일한 실물로 보상받으려 하는 것은 거의 정신병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신병의 많은 징후 중 하나가 등가교환이지, 등가교환을 하기 때문에 그들이 정신병을 가진 이들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즉 간단하게 말해서 그들은 이미 광기를 가지고 있었고(오대수의 말이나 행동은 물론이고, 이우진의 모습에서도 광기를 지우기란 힘들다), 이 영화 <올드보이>는 두 광기를 가진 사내들의 대결이다. 15년간이나 사설감옥에 물리적으로 갇혀있음으로서 생긴 광기가 오대수의 광기라면, 이우진의 정신적인 문제는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의 정신적인 갇혀있음(고착)이다. 즉 그는 이수아의 죽음이라는 과거의 사건에 갇혀있고, 그것에서부터 전혀 성장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둘다 무엇인가에 갇혀있고, 말 그대로의 '올드보이(즉 아주 오래된 소년들, 육체는 자랐지만 여전히 정신은 과거에 남아있는 소년)'들이다. 정신병이란 일종의 고착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정신병에 걸린 주체는 어떤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과거의 어떤 순간, 그의 정신병이 촉발된 어떤 순간에 머물러 있다. 라캉의 이야기를 빌어서 말한다면, 정신병에 걸린 이들은 언어와 법의 세계인 상징계를 통과하지 못하고, 몸 이미지의 세계인 상상계, 혹은 몸의 리비도인 실재계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사건을 상징으로 대체하지 못하고, 때로는 실재 그 자체를 망상으로, 거의 완전한 실재에 가까운 망상으로만 만난다. 그것은 예를 들어 동생의 아이를 뱄다는 소문 속에 휩싸인 이수아가 실제로 배가 불러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이것을 이우진은 "이우진의 성기가 아니라, 오대수의 혀가 임신을 시켰다"고 표현한다). 그 망상과 상상의 세계를 깨뜨리기 위해 마법의 진실, 혹은 고통스러운 진실이 들어있는 보라색 상자가 온다. 그리고 질문이 반복된다(그러나 조금 바꿔보자). 이 상자를 연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두 가지 정도의 이야기를 여기에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하나는 주체가 상징계로 나아갈 길은 애초에 완전히 막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들이 정신병에 걸린 모습을 보여준다는 징후적인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박찬욱은 이 영화에서 법과 언어의 세계를 건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 법이 스스로 그 역할을 포기한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면 이 영화에서는 거의 법의 흔적 자체가 없다. 서울 한복판에 사설감옥이 존재하고, 이우진이나 오대수가 수많은 살인을 저질러도 그것은 거의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보다 더욱 막혀있는 것은 언어의 세계이다. 이우진은 말한다. "오대수는요. 너무 말이 많아요." 그리고 그 대가로 오대수는 자신의 혀를 스스로 자른다(물론 이 자체도 일종의 등가교환이다). 사건은 언어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은 오대수가 스스로 자신의 언어를 제거함으로서 징벌된다. 그것은 이렇게도 볼 수 있는데, 이 영화 <올드보이>는 조금 색다른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아파트의 옥상에서 오대수는 자살하려는 남자(오광록)의 넥타이를 잡고 있고, 남자는 울먹이면서 말하다. "말투도 X같고, 당신 도대체 누구야, 씨발..." 그리고 오대수는 느리게 말한다. "내 이름은..." 그리고 이 때 플래시백되어, 경찰서에서 술이 떡이 된채로 '오.대.수.'라고 답하는(그리고 '오늘만 대충 수습'한다는 그 유명한 설명과 함께) 장면으로 넘어간다. 자살하려는 남자의 이 첫 장면이 말하고자 하는 것, 혹은 이 장면으로부터 영화가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대수의 사설감옥에서의 고행이 끝난 후 이 자살하려는 남자의 이야기는 다시 등장하는데, 이 부분을 보면 조금 이상한 장면이 있다. 오대수는 엘리베이터를 내려와 아파트를 나서고 있고, 그 뒤로 남자의 시체가 차 위로 떨어진다. 이 남자는 오대수가 살려주려 했음에도 왜 자살을 결국 감행한 것일까. 물론 오대수는 이 죽음에 물리적인 책임이 없다. 오대수가 어떤 위해를 가했다고 보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으니까. 그런데 대신 다른 책임을 물을 수도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오대수는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이 옥상에서의 장면은 조금 특이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짧게 구성되어 있는 시간과 달리, 오대수와 남자는 꽤 길게 이야기를 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오대수의 대사가 있고, 커팅 된 후, 아 그렇군요, 그럼 내 얘기를 할께요,라는 남자의 대사가 이어진다. 즉 우리가 보지못한 커팅된 이 사이에는 오대수의 긴 자신의 이야기(우리가 지금까지 보았으므로 생략된)가 들어있다. 다시 말해서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15년간이나 감옥에 있었으면서도 오대수는 그 말하기 좋아하는 자신의 특성을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이것만 보아도 그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의미심장해 보이는 것은 그 다음이다. 막 자신의 이야기를 남자는 하려고 하는데, 오대수는 벌떡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간다. 즉 오대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 다른 이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그에게는 공감, 혹은 동정의 능력의 결여되어 있다. 공감이나 동정의 하나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물론 중요한 것은 이는 공감이나 동정의 수많은 형태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오대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 들으려는 생각은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가 마지막 혀를 자르는 것은 이우진의 사건에 대한 징벌이면서, 동시에 이 남자에 대한 죽음에 대한 징벌은 아닐까. 그가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어쩌면 이 남자는 뛰어내리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그렇게 그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혀를 자름으로써 말하지 않고 들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며 언어의 세계는 근본에서부터 거부된다(오대수, 아니 최민식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에 대해 또 한번 징벌을 받기는 한다. 그 얘기는 다음번에 하자).

두 가지 중의 다른 나머지 하나는 그 이후 주체의 선택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에는 바로 앞의 이야기, 즉 오대수가 말하는 기능을 상실하고, 오로지 듣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점이 관련되어 있다. 전체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올드보이>의 마지막에서 이우진은 참 잔혹해보인다. 그는 오대수에게 자신의 심장이 리모컨으로도 끌 수 있다며, 버튼을 누르라고 부추긴다. 그리고 극도의 분노에 휩싸인 오대수는 버튼을 누른다. 그런데 이 때 쓰러지는 것은 이우진이 아니라 오대수다. 왜냐하면 그 버튼은 이우진의 심장을 폭파시키는 버튼이 아니라, 오디오를 재생시키는 버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펜트하우스는 곧 오대수와 미도의 절정의 신음소리로 가득찬다(그리고 이때 이우진은 당신들도 서로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즉 이 마지막에서 입을 잃고 귀만 남은 오대수가 가장 처음으로 듣게 되는 것은 자신의 가득한 리비도이다. 상상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오대수에게 이우진이 내던진 것은 리비도로 가득찬 실재계, 혹은 리비도 그 자체였다. 즉 이우진은 아니 박찬욱은 상상계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주체에게 상징계를 주는 대신에 실재계를 선물할 정도로 잔혹하다. 그렇다면 이 주체에게는 그 육체를 파괴시키는 일만이 남은 것일까. 즉 죽음으로 리비도만 남은 육체를 끝내는 것만이 남은 것일까. 박찬욱은 그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요?"라는 반복되는 대사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영화 속에서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자살하려는 남자가 하고, 다른 한 번은 오대수 자신이 한다.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자살하려는 남자는 처음 영화가 시작하면서 등장하고, 중간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나는 그냥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어떤 영화에서 어떤 장면이 다시 등장한다면, 혹은 어떤 대사가 다시 반복된다면, 그건 그 장면이 중요하다는 뜻이고, 그 말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즉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박찬욱의 말이고, 여기서 방점은 아무래도 '짐승만도 못한'보다 '살 권리'에 찍혀있다. 이는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서 또 하나 중요하게 제시되는 말이 있다면 다음의 이 말이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이 말은 영화 속에서 성경 구약 '잠언' 6장 4절이라고 소개되며, 그것은 오대수가 이우진의 펜트하우스 엘리베이터 비밀번호를 찾는 주요단서가 된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은 '잠언' 6장 4절이 아니라, 6장 5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본래의 6장 4절의 내용이다(나는 물론 박찬욱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실수라고 보지만, 실수에서도 의미를 찾는 것이 호사가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또 공교롭게도 그다음 6장 6절부터는 개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이 영화의 개미에 대한 비유와 맞물린다는 점이 또 재미있다. 그 이야기는 있다가 하자). '잠언'의 6장 4절은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이다.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고,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라는 것, 이는 '죽어서는 안된다'는 말이기도 하며, 동시에 '살 권리'의 다른 말이다. 즉 스스로 구원하라는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음을 벗어나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마지막 오대수가 택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결국 정신분열이다. 비밀을 아는 몬스터와 비밀을 모르는 오대수로 나뉜다는 이 마지막은 정신분열의 일종의 비유이며, 그렇게 해서라도 목숨을 유지시키는 것이 낫다는 것이 박찬욱의 복수연작의 두 번째 단계이다(그러므로 사실 마지막 오대수가 몬스터인지 오대수인지를 묻는 것은 주체를 두 번 죽이는 외설적인 질문이다). 복수연작의 첫 단계(<복수는 나의 것>)에서 인물들은 모두 죽었으나, 그 두 번째 단계에서는 비록 정신분열을 스스로 선택했을지언정, 오대수는 살아남았다(즉 박찬욱의 복수 연작에서 가장 양상이 다른 것은 마지막에 결국 주인공들이 처하게 되는 위치이다. 물론 그것을 일종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해서라도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박찬욱의 대답이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망상을 부서뜨리지 않고 유지시키는 것이 때로는 삶을 유지시키는 기제가 되고 환자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정신의학의 관점과도 통하는 것이다(그것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박찬욱의 후일의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조금 더 자세히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정신병이 그렇게 나쁜 것이라고 볼 수만도 없다. 지젝에 따르면 "속임수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길은 상징적 질서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것, 즉 정신병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정신병자란 바로 상징적 질서에 의해 속지않는 주체이다." - <삐딱하게 보기> p.162. 그리고 이는 법과 언어라는 상징적 질서의 길을 애초에 막아놓은 박찬욱의 선택이 그렇게 기만적이거나 가혹하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도 된다. 상징적 질서들이 벌이는 속임수들은 그에게도 경계의 대상이었고. 그에게는 상징적인 질서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그것은 전에 이야기한 동정이나 공감과 같은 것들이고 그것은 사실 상징적 질서와 별다른 관계가 없다. 금자씨는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덧.
약간 반농담삼아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 <올드보이>는 동시에 개미형 인간과 거미형 인간의 대결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설감옥에서 개미에 대한 환상을 보는 오대수, 그리고 지하철에서 커다란 개미의 환상을 보는 미도가 개미형이라면, 오랫동안 덫을 놓고(15년간이나 이우진은 기다렸다)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이우진은 거미형이다. 이는 또한 <복수는 나의 것>과 교묘하게 연결되는데,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개미형이 류(신하균)라면 거미형은 동진(송강호)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는 영미(배두나)가 류에게 "개미같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으며, 동진이 딸의 환영, 혹은 실재를 만나게 되는 장면 직전에는 동진 집의 텔레비전에서 거미에 대한 다큐가 방영되고 있다. 물론 그가 전기충격기를 문의 손잡이에 연결시켜 놓고 류의 집에서 자면서 류를 기다리는 장면은 거미의 사냥방식이다. 그렇다면 개미형 인간들이 거미형 인간들과의 대결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의 개미가 아니라 '개미'라는 집단이 되는 것이다. 떼지어 다니는 개미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사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개미는 소도 무너뜨린다). 물론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개인은 아니 개미는 사실 자신이 하나의 몸뚱이에서 자라난 두 머리임을 알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가끔 타인이 되어보아야 한다.
 
여담을 하나 붙여두자면, 아주 예전에 어쩌다 이 영화이야기가 나왔고, 누군가가 올드보이에 나온 개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길래, 농담으로 오대수는 개미형 인간이고, 그것은 주식시장의 개미투자자들을 의미한다고 말해줬다. 영화에 보면 이우진이 아주 돈많은 사람으로 뭘 팔고 어쩌고 하는데, 이 영화는 한 마디로 거대한 기업투자자가 개미투자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흘리면서 잡아먹는 이야기라고 말이다(실제로 오대수가 영화내내 농락당하지 않는가). 그는 놀랍게도 내 말에 수긍하는 듯한 눈치였는데, 이 자리를 빌어 개드립에 죄송한 마음을 전할 뿐이다(하지만 술자리에서는 누구나 개드립을...).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거핀 2013-05-10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투브 음악 하나 링크시키려다 날려먹고 다시 올림..ㅠㅠ

올리려던 음악은...OST에 있는 The Searchers
'올드보이'는 사실 영화보다 음악이 더 좋음..


넙치 2013-05-11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찬욱 감독 영화들 다시 보기 중 이신가 봅니다.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글을 쓰셨네요..

맥거핀 2013-05-14 13:16   좋아요 0 | URL
사실 이미 다 다시보기는 했어요. 글로 쓰는 게 오래걸릴뿐이죠.
박찬욱 영화들은 다시 봐도 또 새롭게 보이는 지점들이 있어서 참 좋았어요.

Mephistopheles 2013-05-13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마지막 "개드립"에 빵 터져버렸습니다....ㅋㅋㅋ
(개인적으로 박찬욱 감독이 복수 시리즈를 4부나 5부까지 만들어 사회의 제도적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등장시켜 봤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는데, 영리한 분이다 보니 그 부분만큼은 살짝 비켜나가는 것 같더군요.)

맥거핀 2013-05-14 13:18   좋아요 0 | URL
아..그런 생각은 못해봤는데, 박찬욱 감독이 만드는 지배자의 복수란 어떨지 궁금하기는 하네요. 올드보이는 다시 봤더니 예전에 느낀 것보다 훨씬 영화가 잔혹하더군요. 물리적인 잔혹함보다는 정신적으로 몰아붙이는 게 이정도였나 싶은 영화였습니다.

Shining 2013-05-13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개드립... 맥거핀님은 술김에 그런 생각이 나오나요? 아님 혹시 미리 준비해둔...-_-
이 기세라면 <친절한 금자씨>에 대해서도 글을 쓰실 것 같군요. 좋아요 좋아-_-*

덧) (피터 사스가드와 매기 질렌할이 혼인관계란 것을 알았을 때 무지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저는 <언에듀케이션>에서의 모습을 떠올리고 개츠비 역으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마이클 패스빈더(패스밴더,가 맞나요?), 피터 사스가드 둘 다 이미 캐리 멀리건과 연기한 적이 있군요. <셰임>과 <언에듀케이션>.

민머리라... 브루스 윌리스, 섹시하지 않나요?ㅎㅎㅎ

동생이 <아이언맨 3>를 보고 최고의 오락영화 블록버스터 히어로물 어찌고 하길래 뭬야? <다크나이트>를 이길 순 없어, 라면서 싸울 뻔 했습니다... <아이언맨3> 안 봤지만 제깟게(ㅋㅋ) <다크나이트>를 이길 순 없다, 고 저는 믿습니다...

맥거핀 2013-05-14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일 1개드립을 실천중입니다. 네..아마도 다음번의 글은 <친절한 금자씨>가 될 것 같군요. 그 전에 좋은 영화를 보게 되면 다른 것을 쓰겠지만..

민머리..하기는 민머리와 뭐 정력의 관계 같을 것을 이야기하기도 하죠.ㅎ 사실 브루스 윌리스는 별로 섹시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요. 저는 <언에듀케이션>이나 <셰임> 두 개 다 본 적이 없어요. 피터 사스가드와 매기 질렌할이 부부라는 것도 Shining님에 의해 처음 알았습니다.

아니..아이언맨이 다크나이트에 비견될 정돈가요. 뭐 둘이 진짜로 싸우면 아이언맨이 배트맨을 이길 것 같기는 하지만, 저는 오락적 완성도로 봤을때도 다크나이트에 한 표를 던집니다. Shining님이 맞아요. ㅎㅎㅎ

아이리시스 2013-05-22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샤이닝님 답글이 독자적 댓글로 버려져있어요(대단한 발견!).
그런데 강혜정은 왜 이 영화 이후로는 더 나아가는 배우가 되지 못했을까요.
미녀는 괴로워 이후 에이급 스타가 된 김아중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김아중보다는 강혜정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 '')

오랜만에 와서 댓글 참 쓸데없네요, 맥거핀님. 미..미..미안..

맥거핀 2013-05-23 12:06   좋아요 0 | URL
아..맞아요. 댓글 달고 며칠 뒤에 발견했는데, 귀찮아서 그냥 놔뒀어요.ㅋㅋ 강혜정은 좀 아쉽지요, 괴물 같은 배우가 나온 줄로 알았는데, 여러가지 논쟁들(?)에 휘말려 배우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저도 사실 아중씨는 연기를 잘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아이리시스님도 살아있군요! 생존 신고를 좀 하세요.ㅋ

2013-05-23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3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