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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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설들이 있다. 남자가 투고한 <우주 알 이야기>. "원래부터 시간순으로 서술된 작품이 아님은 분명"한 "뒤로 갈수록 한 챕터의 길이가 길어지고, 소제목과 글 사이에는 어떤 패턴이 있는 것 같았는데, 그건 그냥 여자의 착각인지도" 모를 그런 소설. 아니면 남자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쓴 소설 <그믐>. "학교 폭력 이야기"를 다룬, "화자가 하는 말이 그렇게 다 거짓말이었던 게 반전"인 소설. 이것은 거의 정확하게 장강명의 이 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하 <그믐>)의 내용을 뭉뚱그려 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 소설의 어떤 전략을 말해주고 있기도 하다. 그 전략이란, 시간을 흩뜨린다, 어떤 패턴을 중첩한다, 트렌디한 소재(그러니까 학교 폭력)를 다룬다, 반전을 담는다,를 포괄한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단순한 전략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도록 어떤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전략들이란 사실 너무 흔한 것이니까 말이다. 시간을 뒤섞는 것, 혹은 패턴을 중첩하는 것(그 패턴을 어떤 '복선'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반전을 담는 것, 그런 것들은 이미 낡을대로 낡은 수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소설 속 소설의 내용이라고 이렇게 서술한 것에는 다른 의미가 있을 터였다. 그 다른 의미에 담겨진 무엇이 있을까. 아니면 희미한 의심. 이것마저도 어쩌면 또 하나의 전략이 아닐까.

    

책의 말미를 보니, 이 다른 의미에 주목하는 평들이 있다. 평론가 강지영의 평. "이 소설은 SF의 외연을 끌어오고 있지만 이미 그 안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문자답하고 있는 훌륭한 메타소설이기도 했다." 아니면 평론가 권희철의 평. "형식의 관점에서 볼 때 소설이 기억을 통해 시간의 문제를 다루는 물건이라는 점에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 여느 평범한 소설가 소설보다 훨씬 더 깊이 있게 소설이라는 물건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느꼈다." 이 두 개의 평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이 소설 <그믐>이 소설을 통해 '소설이라는 형식'을 살펴보는 일종의 메타소설이라는 점이다. 위에서 얘기한 대로, 소설 속의 소설이 등장하고, 그것이 겉 소설의 내용을 암시한다는 점에서의 비슷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다른 설정에서도 이 소설 읽기(혹은 쓰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투고된 원고를 실수로 떨어뜨려 원고가 섞이는 것, 혹은 남자가 자신에게 들어온 '우주 알'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 같은 것들 말이다. 남자는 과거를 볼 수 있게 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자신에게 들어온 '우주 알'에 대해 그것을 책을 읽는 것에 비유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원하는 속도로 읽으면 되는 거니까. 중간에 멈출 수도 있고, 어떤 페이지를 읽다가 다른 페이지로 건너뛸 수도 있고, 앞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 시간이란 게 책처럼 통째로 펼쳐져 있으니까." 혹은 "그렇게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페이지를 뒤섞고 다시 제본을 해서 읽는 거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자가 종종 놀림 섞은 의문을 가지듯이 그가 모든 것에 대해 알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남자가 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미술관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는 것에 비유하여 설명하는데, 그는 입구부터 차례대로 그림을 감상할 수도 있고, 중간중간에 그림을 건너뛸 수도 있으며, 다시 되돌아가 특정의 그림을 감상할 수도 있으며, 출구부터 입구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미술관에 걸리지 않은 그림을 볼 수는 없다. 그것을 다시 책에 대한 비유로 돌아와서 생각해본다면, 그는, 그리고 동시에 모든 소설의 독자인 우리들은, 설혹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페이지를 뒤섞고 다시 제본을 해서 읽"을 수는 있지만, 소설이 결국 서술하지 않은 장면을 읽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소설에서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여러 책을 읽는다는 행위도 어떻게 보면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여러 책을 통해 과거와 미래의 사건, 혹은 동시대의 우리가 경험해보지 않은 사건을 간접적으로 체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 쓰여진 적이 없는 무엇인가에 대해 읽을 수는 없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읽고 싶다면, 우리가 직접 상상하여 쓰는 수밖에 없다. 서술되지 않은 것, 혹은 섞여버린 원고 사이를 이으려면 우리가 우리의 상상을 거기에 첨부하여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결여된 무엇인가가 있다. 예를 들어 소설의 말미에 등장한 질문. 세 가지의 순서를 바꾼 단어들로 이루어진 질문.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너는 도대체 누구였어? 너는 누구였어, 도대체?" 그것은 그의 작동 방식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남자는 자신의 안에 들어있는 우주 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여러 비유를 들어 설명했지만, 그 질문은 그것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존재가 과연 무엇인지, 그것의 기원과 존재의 이유에 대해 묻는 것이다. 그것을 다시 소설 읽기로 돌아온다면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페이지를 섞고 다시 제본을 하여 읽든, 쓰여지지 않은 것을 상상으로 첨부하여 읽든) 소설이란 무엇인가, 왜 소설을 읽으려고 하는가. 그것을 거창하게 말하기 보다는, 나는 이렇게 바꿔서 말하고 싶다.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너는 도대체 누구였어, 너는 누구였어, 도대체,라는 중첩된 질문이 지시하는 바는 (미세한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같다. 그것은 소설 속에서 시간을 흩뜨려 놓는 것과 비슷하다. 즉 소설 속에서 시간이 뒤섞인다고 해도, 거의 모든 독자들은 그것을 자신의 머리 속에서 재배열하여 자신의 소설 속 시간을 만든다. 그리고 끊어진 시간들을 자신의 상상이라는 풀로 이어붙여서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서, 단어를 뒤섞는 것이나 시간을 뒤섞는 것이나, 결국 하나의 테크닉이고, 그렇다고 해서(즉, 그 테크닉으로 가려놓았다고 해서) 근원적인 질문이 바뀌지는 않으며, 그 질문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질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예를 들어 이 소설에서라면 이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남자는 여자에게, 그리고 동시에 독자를 향해 서술한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거짓말들은 다 잊더라도, 이 말만은 기억해줬으면 해. 널 만나서 정말 기뻤어. 너와의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어. 난 그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고마워. 진심으로." 소설 속에서 '이 말만은 기억해줬으면 해', 혹은 '진심'이라는 낱말이 등장할 때에 동반하게 되는 어떤 머뭇거림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 말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남자의 진심이란 무엇이었을까. 아니, 이 남자에게 이 여자는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것을 여자의 입을 빌려 묻고 싶다.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그것은 남자 안에 작동하는 우주 알의 작동 방식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그 우주 알이란 무엇인지, 혹은 그 우주 알이 들어간 남자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묻는 것이다. 그가 원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우주 알은 그에게 들어갔는지, 소설의 말을 빌리자면 그의 '패턴'이 과연 무엇인지. 그에게 남은 패턴, 그리고 그 전에 그가 지워나간 패턴은 무엇이었는지.

      

"인간이란 건 결국 패턴이야." 소설은 말한다. 그렇다면 소설도 일종의 패턴일까. <그믐>에는 어떤 패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소설에 붙은 중간제목들의 패턴. '순서/보람/개성' '작두/홍콩/교지' '노선/모범/소금' ..... 언뜻 연관이 없어 보이는, 그러나 두 음절로 이루어진 어떤 패턴을 이루는 듯한 단어들. 이 소설 <그믐>도 그런 것과 비슷하다. 작은 패턴들은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 패턴들이 잘 붙지가 않는다. 각각의 디테일한 이야기들이 있다. 예를 들어 '홍콩', 홍콩에 살고 있는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동창의 이야기. 혹은 '모범', 모범택시를 모는 아버지와 그의 바람을 의심하는 어머니의 이야기. 이 각각의 이야기들은 디테일이 살아 있으며, 그 자체로 충분히 읽기의 즐거움을 주는 이야기거리가 된다. 그것을 작가의 능숙한 테크닉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이 붙어서 만들어내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 남자는 어떤 사람이고, 여자는 어떤 사람이며, 남자를 집요하게 쫓는 아주머니는 어떤 사람인가는 여전히 흐릿하다. 그것은 각각의 패턴들은 있지만, 그 패턴들을 엮는 고리, 그 고리의 만듦새가 헐겁기 때문이다. 디테일(혹은 패턴들)의 총합이 소설이 되지는 않는다. 각각의 장면들을 최대한 디테일하게 만든다고 해서 좋은 영화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디테일함들을 엮어내는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소설이라는 형식에는 필요하며, 그것은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이상의 무엇인가는 무엇인가, 무엇이 결여되었는가에 대해 답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결국 소설을 왜 읽는가, 소설은 읽는 이에게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될 것이다. 다만 나는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라고 질문하며 애처롭게 남겨진 이 인물이 작가의 테크닉 실험의 희생양이 아닐까,하는 희미한 의심, 혹은 그것마저도 어떤 전략의 일부가 아닐까,라는 더 희미한 의심을 가져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한국이 싫어서>에서 계나의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거야"라는 진술에 섞인 어떤 의구심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이 <그믐>의 "진심으로"와 <한국이 싫어서>의 "진짜'가 말하고자 하는 무엇에 대하여.

    

 

덧.

두 가지의 목적에서 이 리뷰를 썼다. 하나는 장강명 리뷰대회에 붙은 상금을 보고. 그런데, 결국 이런 내용이고 보면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리뷰인 것 같다. 아니 내가 출판사 직원이라도 이런 리뷰는 안 뽑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고지 10매 이내라는 분량 제한도 무시하고 있으니....)

 

다른 하나는 지난 번 <한국이 싫어서>를 읽고 남긴 별 하나가 마음에 걸려서다. 소설 하나만 읽고 이 작가에 대해 너무 단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다른 소설들은 이와는 전혀 다르지 않을까,싶어서 한 권쯤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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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15: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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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15: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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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20: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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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8 15: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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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8 1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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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8 15: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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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9 12: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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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1 10: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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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9-20 0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간 왔다 갔다 하는 거 읽기 힘들더군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끝까지 보려고 합니다 그래야 무슨 이야긴지 조금은 알 수 있기도 하니까요 이런 말을 처음에 하다니... 그냥 소설은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보다 지난날을 떠올릴 때가 더 많기도 하군요 단편도 지금이 아닌 예전 이야기를 할 때가 많고... 우리나라 단편 별로 안 읽어서 잘 모르는데, 얼마전에 조금 읽고 생각한 거군요 다 지난날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게 더 많다고 느꼈습니다

왜 제가 시간 왔다 갔다 하는 거 힘들게 여겼는지 생각났습니다 읽으면서 이걸 어떻게 쓰지 해서예요 쓰는 것 때문에 그랬다니... 지금은 거기에 덜 매이려고 하지만... 책을 본 다음에 쓰기 시작했을 때 별로 생각하지 않아서군요 어렸을 때 쓴 독후감처럼 쓰려고 해서, 지금도 거기에서 그렇게 벗어나지 못했지만... 좀더 괜찮은 생각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그런 것도 못하는군요 독후감 잘 쓰는 사람도 있군요 제가 그걸 거의 안 써봐서...

책 내용 조금 아는데,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 조금 했습니다 그것 자체로 좋다고 봐야 할지, 그저 그럴 수도 있겠지 해야 할지... 진심이겠죠 그렇게 될 만한 게 보이지 않는다 해도... ‘진심이야’ 하는 말을 하면 그렇게 들리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겠죠 잘 모르는데 이런 말을 했네요

이번에도 별점은 낮군요


희선

맥거핀 2015-09-21 11:10   좋아요 1 | URL
그런데 소설에서 시간을 섞는다고 해도 그것은 일종의 트릭일 뿐, 결국 그것은 읽는 이의 머리 속에서 재배열되죠. 소설은 결국 읽는 이의 기억에 의존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예를 들어 단기기억상실자가 소설을 읽는 풍경을 상상해본다면 말이죠.) 근원적으로 소설에서 시간을 섞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은 섞이는 것 같지만(어떤 트릭으로 섞이는 척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섞이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서 트릭 이상의 무엇인가가, 그러니까 시간을 섞는다면 왜 섞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이 이 이야기에서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대답은 그렇게 저를 납득시키지 못했습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소설이라는 것이 결국은 진심을 포장하는 기술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소설들이 진심이라는 것을 어떻게하면 손상시키지 않고 최대한 전달할까 고민해왔겠죠. 그런데 어떤 소설들이 그것을 `진심이야`라는 말로 한마디로 뭉뚱그릴 때 어떤 (조금 우습게도) 배신감들을 느껴요. 다른 누군가들은 진심을 저렇게 전달하려고 애쓰는데, 너는 그것을 단순히 `진심이야`라는 한마디로 끝내?, 뭐 그런 단순한 생각이겠죠.

아무튼 이제 장강명 씨와는 한동안 바이바이하고, 다른 책들을 조금 봐야할 것 같습니다.^^
 

 

 

 

소수의견, 김성제, 2015

 

 

(영화의 내용 및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 <소수의견>의 마지막 장면들은 상당히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다. 재판부는 배심원단의 의견을 뒤집고 피고 박재호(이경영)에게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고,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죄를 적용한다. 그리고 퇴정하는 재판부와 결과에 분노하는 방청객의 모습을 교차하여 보여준 다음, 박재호의 얼굴을 비추고, 곧바로 이 사건의 키, 그러니까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으려 애썼던 사건 당시의 바로 그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법정을 나서는 박재호로 돌아와 그가 (이유가 어찌되었건 결과적으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여준 다음, 교도소 안에서 복잡한 감정에 잠긴 박재호의 모습을 보여주고, 여기에 자식을 잃고 회한과 슬픔에 잠긴 (박재호에게 살해당한) 전경 김희택의 아버지(장광)의 모습을 비춰준다. 이 마지막 장면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마지막 장면에서 두 아버지의 위치는 거의 비슷하다. 자식을 잃은 두 아버지, 서로가 가해자로 얽혀 있는 이상한 상황. 그러나 두 아버지는 (원망한다고 말하면서도) 서로를 원망하지 않는다. 김희택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박재호에게 말한다. 그것은 피치 못할 어떤 상황에서의 실수일 것이라고. 눈 앞에서 아들을 잃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 마지막 장면들에서 이 두 아버지는 서로에 의해 아들을 잃었지만, 서로를 깊이 원망하는 대신에 묘한 연대(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의 지점에 와 있다. 그렇다면 그 연대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의 힌트는 아마도 그 장면들 사이에 이상하게 끼어든 것처럼 보이는 그 결정적 장면, 즉 사건 당시의 화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사건 당시의 장면이 서 있는 위치는 조금 이상하다. 이 장면 전후로 붙은 것은 박재호에 대한 클로즈업이다. 즉 보통의 영화문법에서라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 장면들이 박재호의 시점에서 본 회상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해 보이는 것은 이 장면들이 박재호의 증언을 강화하거나 그의 입장을 강조해주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사건의 상당 부분은 어떤 증언들이나 정황적인 증거, 혹은 검사 홍재덕(김의성)의 위증 강요가 밝혀짐으로서 드러난 상태이고, 배심원단에 의해 박재호의 정당방위가 인정된 상태이다. 물론 그 후에 재판부가 그 결정을 바로 뒤집기는 하지만, 그 장면 바로 후에 재판부의 굳은 얼굴로의 퇴장과 항의하고 분노하는 방청객들의 모습을 교차하여 보여주는 것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위치가 어디인지 대략 짐작하게 해준다. 그런데 이어져서 위치한 이 '사건 당시의 진실' 혹은 '박재호의 시점에서 본 사건의 진실'은 조금은 다른 인상을 심는 것처럼도 보인다. 사건의 어떤 팩트들, 그러니까 전경 김희택이 박재호의 아들 박신우를 죽이고, 다시 박재호가 전경 김희택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이것이 영화적으로 눈앞에서 재구성되었을 때 그것은 조금 달라 보인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어쩌면 이런 질문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만약 이 장면을 재판부, 혹은 배심원단이 보고 판결을 내린다면, 그 때는 그에게 정당방위를 인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뒤통수를 가격하는 장면을 느린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것이 정당방위라고 인정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실제라면 이것은 절대 볼 수 없는 장면이지만, 이 볼 수 없는 장면이 영화적으로 관객에게 심는 효과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이 장면만을 놓고 박재호의 무죄 여부를 판단한다면, 그에게 영화를 본 우리는 무죄를 선고할 수 있을까. 아마도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도리어 (팩트는 그대로이지만, 거기에 어떤 영화적인 효과를 심은) 이 장면은 박재호에 대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질문을 하기 위해 거기에 위치한 것처럼도 보인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 그들은 거기에서 왜 맞닥뜨리고 있는가. 이제 막 철거되려는 어둡고 침침한 성당 건물에서 그들은 왜 서로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나. 그들을 거기에 몰아넣은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을 거기에 몰아넣고, 이들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 자, 다시 말해서 위에서 말한 묘한 연대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 즉 '국가'는 누구인가. 이들은 결국 피해자들만 남은 것처럼 보이는 이 재판에서 (보이지 않은) 승리한 자들이다. 영화 <소수의견>은 사실 두 가지의 재판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박재호가 정당방위인가 아닌가를 밝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에게 배상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재판에서 박재호와 김희택(의 부)은 모두 지면서 피해자의 위치에 머무르게 되었고, 오로지 국가만이 승리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하나의 다른 실제 사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흔히 용사 참사라고 불리는 그 사건. 경찰 1명과 철거민 5명이 죽음에 이르렀던 그 사건. 영화 <소수의견>은 "이 영화의 사건은 실화가 아니며 인물은 실존하지 않습니다"라는 단호한 자막으로 시작하지만(정치적인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방지하고, 영화가 하나의 방향으로만 해석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런데 웃긴 것은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만들어진 후 한참이 지나고서야 지각개봉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분명 어떤 하나의 사건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그것은 철거민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루었기 때문도 아니고, 영화를 둘러싼 어떤 이야기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청와대에서 이 사건 대신에 연쇄살인마를 다룬 사건을 더 강조하여 보도하라는 요청을 내려주는 장면 같은 것(실제 용산참사에서도 연쇄살인마 강호순 사건을 더 강조하여 보도해달라는 청와대의 요청이 있었다)들이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그런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하나는 실제 사건과 영화 속의 사건, 이 두 가지 사건 모두 위에서 말한 것처럼 결국 국가가 승리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김영진 평론가는 <씨네21> 지면을 통해 <소수의견>을 다루며, 이 영화가 박재호와 김희택의 아버지를 희생자의 자리에 위치시키면서, 그들이 희생자의 자리에서 자존을 회복하지 못하게 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그랬을지 몰라도, 이 장면들은 분명히 어떤 분노를 보는 이에게 불러 오는데, 실제의 사건에서도 모두가 피해자였을 뿐, 승리자는 국가였고, 그들의 하수인이었다. 살기 위해서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 올라간 철거민들은 물론, 거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두 개의 문이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영화<두 개의 문>), 무리한 진압 작전에 투입된 전경 및 경찰들도 피해자다. 이들을 그 옥상에서 맞닥뜨리게 한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푸른집에서 나와 그분이 자서전을 쓰시는 동안, 또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진압 작전을 지휘한 김석기 씨가 총선에 출마하고 한국공항공사 사장으로 가는 동안, 철거민들은 희생자의 위치에서 자존감이 억눌린 채 살아야만 했다. 영화를 보는 이들의 카타르시스는 이들이 희생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자존을 회복하는 것으로 충족될 지 몰라도, 실제의 어떤 것을 상기시키는 데 이는 때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이 영화가 장면을 소구하는 방식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사건의 진실을 둘러싼 결정적인 장면의 공개를 최대한 늦춘다. 마치 최대한 보여주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도 보인다. 물론 사건의 진실이 영화의 키가 되는 법정영화에서 흔하지 않은 방식은 아니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 <소수의견>은 어떤 사실관계를 법정에서 추리하면서 밝혀내, 그로인해 어떤 영화적 쾌감을 얻고자 하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떤 정황적 증거는 법정을 통해 거의 밝혀졌으므로 이 장면의 공개로 사실이 뒤집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이 장면은 어떤 희생자의 정서를 두 사람에게 덧붙이는 것 외에도 (본의 아니게) 어떤 다른 것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것은 이 장면의 공개가 이렇게 최대한 지연된 후 드러남으로써 실제의 사건, 즉 용산참사에서의 그 공백을 다시 생각케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영화 <두 개의 문>에서도 잘 드러났듯이) 이 사건의 중요한 부분은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3천 쪽에 달하는 초동수사 기록과 경찰이 촬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존재하지 않는 'No Signal'의 채증 영상. 그 곳에서는 사람이 불타 죽었지만, 그들이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아무런 증거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공백을 앞에 두고, 오로지 철거민들에게만 책임을 물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온다면 우리는 마찬가지를 영화에 물을 수 있다.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영화 속 재판부나 혹은 윤진원 변호사(윤계상)의 위치에 비슷하게 서 있다. 우리는 정황적인 증거를 보고 있지만, 사실 중요한 지점은 여전히 공백에 놓여져 있다.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박재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물을 수 있다면 그에게만 책임을 물을 것인가. 그러나 실제의 재판부는 영화 속 재판부와 같이 그에게만 책임을 물었고, 그들만 피해자이자 희생자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결정적 장면을 결국 영화 속에서 공개하지 않고 끝내는 것도 가능한, 어쩌면 더 훌륭한 선택이 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의 설정대로라면 이 장면은 결국 우리가 볼 수 없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볼 수 없는 것을 영화가 보여줄 때 생기는 쾌감, 혹은 정서와 그와 동시에 발생하는 어떤 미심쩍음. 그것은 늘 비슷한 무게이지만, 그 미심쩍음이 종종 더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도 그렇다.)

 

이 바깥에, 그러니까 박재호나 김희택의 부 외곽에 존재하는 인물들이 있다. 아마 우리들 대다수도 그에 해당할 것이다. 영화는 두 가지의 인물상을 보여준다. 하나는 경직되어 마치 어떤 부품처럼 존재하는 사람들. 국가의 대리인으로 나온 자들, 그들은 마치 어떤 기계의 일부처럼 보인다. 그들이 보여주는 차갑고 기계적인 행동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미소(특히 여검사가 보여주는)도 마치 로봇이 보여주는 그것같아 섬뜩하다. 그것을 홍재덕 검사는 영화 끄트머리에서 요약하여 말해주는데, 그것은 자신이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임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즉 그 '넌 뭘했냐'는 그 물음은 네가 부품으로서 뭘했냐,는 질문인 것이다. 그 반대편에 있는 인물상들이 있다. 윤진원 변호사, 장대석 변호사(유해진), 공수경 기자(김옥빈) 같은 인물. 이들은 언뜻 '대의'라는 큰 틀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모두는 동시에 각자의 입장과 각자의 지향점이 있다. 즉 어떤 대의도 물론 중요하지만, 동시에 윤변호사는 지방대를 나와 국선변호사나 하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고, 공기자는 특종을 터뜨리고자 하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어떤 대의라는 큰 기계의 부속품은 아닌 것이다. 각자 나름의 욕망으로 최선을 다해서 그 대의를 수행하고자 하는 어떤 각축도 여기에는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에는 대의가 단지 선의의 총합만으로는 이루어질 수도 없고, 완수될 수도 없음을 아는 어떤 현실 인식이 들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윤진원 변호사는 하나의 일화로 잘 요약하여 들려주는데, 그가 떨어지는 실력에 지방 국립대에나마 갈 수 있도록 공부를 가르쳐 준 사람은 (학생운동으로 인한) 수배자로 방에 숨어있던 형의 친구였다. 영화 속 장대석의 한숨섞인 한탄대로, 이 386 따라지에 대한 (한숨섞인) 부채 의식. 이는 영화 속에서 이들이 처한 위치를 말해주면서, 동시에 그 부채만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을 같이 말해준다. 그것은 기계가 지시하는대로만 움직이는 부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신의 욕망과 염치를 가지고 그것에 대응하며 움직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이에 대비되는 자신의 반대편에 있던 그 로펌으로 들어간 홍검사, 아니 홍변호사의 몰염치). 몰염치의 시대의 최소한도의 염치,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 영화의 인물들, 윤변호사와 장변호사, 공기자, 그리고 더 나아가 박재호와 김희택의 아버지 등은 보여주고 있다(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 혹은 원망하지만 그것이 피치 못할 사정임을 아는 것).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국가라는 기계가 벌이는 몰염치의 공습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저번에 양심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베테랑>의 쪽팔림을 묻는 그 질문도 여기에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몰염치의 시대, 우리는 우리의 염치를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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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6 0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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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7 18: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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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5-08-26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읽었고, 영화는 아직 못 봤어요.
맥거핀 님의 글을 읽고 나니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맥거핀 2015-08-27 18:30   좋아요 0 | URL
저는 반대로 영화만 봤지, 책은 못봤습니다.^^ 책도 평은 괜찮은 것 같은데, 영화도 나름의 매력이 있습니다. 강력추천 합니다.

2015-09-01 1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02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02 1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02 15: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02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02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04 1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5-09-03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로사회와 심리정치의 행렬처럼 양심-몰염치....맥거핀님이 보는 이 사회의 영화적 계보도 만들어지는 거 아닌가 기대되는 수순입니다? <위로공단> 보시면 또하나 나올 거 같은데 말입니다.
인상적인 리뷰였습니다.

맥거핀 2015-09-04 12:25   좋아요 0 | URL
저번에 양심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염치가 더 맞을 듯 해요. 요즘에 뉴스를 보면 시대의 트렌드(?)가 몰염치인듯 싶습니다. 위에서부터 아래에까지 이게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뻔뻔하게 밀어붙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그래서 아마도 그런 내용의 영화들도 점점 늘어나는 것이겠죠. <위로공단>은 조금 위로가 될까요..

2015-09-09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16 0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17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베테랑, 류승완, 2015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류승완의 신작 <베테랑>은 전작들, 특히 그 중에서도 <부당거래>의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한 영화다. 물론 어떠한 것들이 대척점에 서 있으려면 그것들은 공유하는 부분이 있어야만 한다. <부당거래>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 역시 경찰 내부가 주 무대가 되며, 그들의 활동이 이야기의 주요 소재가 된다. 류승완은 이를 약점으로 생각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활용하려는 듯이 보이는데, 예를 들어 배우들의 거리낌없는 활용이 그것이다. 황정민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주인공 형사 역할을 다시 맡고 있으며, 천호진, 안길강, 김민재 등의 배우들이 비슷하게 재변주된다. 물론 <베테랑>은 <부당거래>와 다른 점이 훨씬 많은 영화다. 그것을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캐릭터에 보다 확실한 색깔을 입히려 했다는 부분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당거래>나 그 이후 나왔던 <베를린>이나 인물들의 캐릭터는 복합적이고, 구도는 복잡하다. 인물들은 선과 악의 경계에서 모호하게 자리잡고 있고, 이야기는 점점 중층적으로 변해간다. 그러나 <베테랑>은 다르다. 인물들의 선악의 경계는 확실하고, 영화는 그들의 거의 처음 등장 장면에서부터 관객들이 인물의 성향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끔 방점을 찍는다. 

 

그러니까 이번 영화에서 류승완은 드라마에서 다시 액션으로 방향을 튼 것처럼 보인다. 예전 <베를린>에 대한 평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쓴 적이 있지만, 좋은 액션물에서 이야기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며, 캐릭터를 어느 정도 명확하게 규정짓는 것은 필수적이다. 어떤 액션물이든 관객은 심정적으로 기댈 곳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액션물이든 설혹 주인공이 지나친 폭력을 휘두르는 듯이 보여도, 관객은 그 캐릭터를 응원하며 영화를 본다. 그 캐릭터가 어느 쪽의 편에 서 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까닭에 그렇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액션물에서 캐릭터의 성향을 규정짓는 것은 그들의 액션의 형태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유명한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특유의 액션들이 있다. 성룡의 영화에서 성룡이 보여주는 액션이 있고, 본 시리즈에서 주인공 본이 보여주는 액션이 있으며,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서 주인공 에단 헌트가 보여주는 액션이 있다. 그것은 각각의 형태가 다른, 특유의 액션이며, 캐릭터의 성향과 결합된 액션이다. 이 영화 <베테랑>에서도 주인공 형사 서도철(황정민)이 보여주는 액션과 악역 조태오(유아인)가 보여주는 액션은 다르다. 서도철이 보여주는 것은 그의 느물느물한 성격을 보여주는 듯한 성룡 식의 슬랩스틱 액션이다. 어딘가 허술해보이고, 맞기도 많이 맞지만, 사실은 기술적으로 꽤 다듬어져 있다. 그러나 공격적이기보다는 방어적이며, 치명적인 공격은 피한다(성룡의 공격으로 사람이 죽는 법은 없었다). 반면 조태오의 액션은 비열하고 치졸한 액션이다. 즉 예전 동네 비열한 양아치들이 일대일 주먹 싸움에서 불리해지면 접이칼을 꺼내들던 식이다. 그는 불리해지면 앞뒤 가리지 않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며, 어떤 잔인한 방식도 서슴치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액션 방식은 아마도 이 영화의 주제와도 연결이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이 있다. 쪽팔리게 하지 말자. 이 말은 주인공 서도철이 계속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자, 그가 어떤 삶의 태도로서 지향하는 말처럼 보인다. 서도철은 조태오의 돈의 회유에 넘어간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압력을 가할 때, 늘 되풀이하여 말한다. 쪽팔리지 않아요? 부끄럽지 않아요?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도 부끄럽게 맞기보다는, 차라리 정정당당하게 맞서는 쪽을 택하라고 말하며, 그것은 다시 그의 아내(진경)에게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하게 보이는, 그러니까 무리하게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도리어 감독이 가장 하고 싶어하는 말처럼 보이는 장면은 아내가 경찰서에 와서 하는 그 대사이다. 나, 쪽팔리게 하지 말라는 것.) 즉 류승완은 대놓고, 노골적으로 이 영화에서 묻고 있다. 그거 쪽팔린 거잖아,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즉 이 핀트는 조태오에게 어느 정도 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조태오의 악행을 돕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맞춰진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적어도 영화 상에서의 조태오는 그것이 쪽팔린 건지, 아닌지 이미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인물이니까. 그 메시지는 조태오의 하수인들, 그러니까 최상무(유해진)를 비롯한 조태오의 곁에서 악행을 실행하는 인물들(하다못해 조태오를 수행하는 경호원들에게까지)이나 그의 돈의 유혹에 굴복하여 서도철에게 압력을 가하는 경찰 내외부의 인물들에게 향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감독 류승완이 이 사회에 던지는 나름의 진심어린 호소일 것이다. 부끄러운 일은 하지 말자, 제발.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미안한 말이지만) 그것은 사실 순진한 메시지일 수 있다. 쪽팔리지 말자, 부끄럽지 말자고 호소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어떤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니까. 이것은 어떻게 생각해보면 아주 쉽게 배반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잘 알면서도 류승완은 그것에 건다. 어쩌면, 류승완은 이제 걸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양심이라는 것은 이제 류승완의 영화에서 묘하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류승완의 초창기 영화는 보다 순진했다. 사실 알고보면 순진한 남자들이 순수한 것을 지켜내려고 싸우다가, 혹은 그것에 배반당해 죽었고, 그것을 류승완은 촌스럽게 찍었다. (물론 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제 더이상 그렇게 촌스럽게 찍지는 않기 때문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주먹이 운다>, <짝패>의 인물들. 그 이후에 류승완은 시스템의 문제를 엿봤다. 그것은 아마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들은 양심으로만은 안된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반대편에는 거대한 시스템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혹은 그 시스템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 <부당거래>에서의 시스템의 탐색은 여전히 그것이 견고하다는 재확인이었다. (<부당거래>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한다면, <부당거래>는 결국 그 시스템이 작동하는 그 방식으로 정확하게 끝을 맺으며 거기에는 어떤 절망이 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 <베테랑>의 어떤 호소가 있다. 쪽팔린 줄 알아. 즉 류승완의 처음 영화들이 거대한 조직에 맞서는 개인들의 실패를 응시했다면, 두 번째에서는 그 조직이 바뀔 수 있는지 가능성을 탐색하며 다시 그것에 절망감을 맛본 다음, 이제 <베테랑>에서는 약간은 우회적이지만, 보다 강력한 접근방식을 택한다. 그것은 그 조직, 시스템 구성원들의 개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거기에 그러고 있는 것이 부끄럽지는 않니.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순진한 호소이기는 하지만, 어떠한 의미에서는 가장 근원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설사 어떤 악이 거대할지라도 그 악은 소수의 절대적인 악과 다수의 중간자적 모호함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간의 모호함들을 선의 편으로 돌려놓을 수 있으면 악은 뿌리뽑힐 수 있다고 류승완은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류승완의 게임이다. 상대의 알 수 없는 진심을 믿고 벌이는 순진한 게임. 이제 걸어보는 마지막 승부수. (다시 말해서 류승완이 보는 한국사회는 혼탁해지고 도리가 땅에 떨어진 무협영화의 강호이다. 갑은 굳건하고, 을이 을과, 또는 을이 병과 싸우게 만드는 이상한 법칙이 난무하는 세계 - 조태오의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격투는 바로 그 풍경이다. 너무 노골적이기는 하지만 - 그러니 시스템과 맞서는 개인, 그러니까 액션 영웅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이 액션 영웅은 단지 절대악을 처단하는 것이 그 임무가 아니다. 배트맨의 임무도 결국 절대악, 예를 들어 조커를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더이상 선량한 이들이 악에 물들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협영화의 영웅도 절대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땅에 떨어진 강호의 도리를 다시 세우는 것이 목적이다. <베테랑>의 서도철도 이 지점에 비슷하게 위치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 승부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이 영화는 사실 정확한 마무리를 보여주지 않는다. 서도철의 승리로 게임이 끝났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게임의 결말은 아직 알 수 없다. 우리는 현실에서 승리처럼 보였지만 승리가 사실 아니었던 것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로 인하여 새삼 화제가 되었던 여러 지난 사건들. 그 지난 사건들에서 가해자들은 어떻게 처벌되었고, 결국 현재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이 영화의 결말이 승리가 아닐 수도 있음을 안다. 그 끝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어쩌면 류승완은 이 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을 풀어준 시스템을 만들어낸 것에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당신도 어쩌면 일조한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 하고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류승완의 순진한 호소가 너무 딱해서 내가 말하는 억지일지도 모르겠다. (보여주지 않은 것에서 무엇인가를 봤다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억지이니까.) 다만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자. <베테랑>은 거대한 조직과 단지 가지고 있는 조그만 힘으로 대결하려는 개인을 보여주는 류승완의 처음으로 돌아간 듯한 영화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개인은 조금 더 느물느물해졌고, 단지 고독한 액션 영웅이 아닌 주위를 돌아보고 활용하는 방법을 조금은 배운 것 같다.

 

그것이 단지 두 시간 동안의 영화적 쾌감으로 끝나는가, 혹은 그 이후의 다른 것으로 조금이나마 연결되는가는 결국 관객의 몫이다. 다시 말해서 상대의 알 수 없는 진심을 믿고 벌이는 순진한 게임. 그 순진한 게임이 순진한 패배로 끝날지 아닐지는 이제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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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8-14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괴물은 될 대로 되었고, 괴물의 과도기에 있는 이들에게도 먹히지 않을 ˝쪽팔리진 말자˝...쪽? 그 까짓 거 힘있으면 다 돼(꾸미든, 상대를 철저히 부수든) 하는 시대, 구호가 광고보다 못한 시대, 괴물이 되는 악의 심리와 마찬가지로 선의 심리도 건드리겠다는 거군요. 악에 쉽게 경도되는 전염성 만큼이나 선의 추구도 그 전파성을 믿어보아야겠지요. 우리가 기대는 희박성. 그러나 또한 우리가 모르는 미래.

그런데....문득 유하 감독 영화들에서 그 시대/세대적 감수성이 점철되는 걸 생각해 볼 때 류승완 감독의 작품들에서도 저는 그런 유사성을 느낍니다...˝쪽팔린다˝란 말이 한참 회자되던 시대가 있었죠. 요즘 세대는 ˝쪽팔린다˝ 그리 잘 쓰지 않지 않나요??
도킨스도 말했다시피 우리는 조상과 부모와 닮기보다 세대를 더 닮기 마련이라는 점도 겹치네요...
어쨌거나 ˝쪽팔린다˝에 대해 부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맥거핀 2015-08-15 14:36   좋아요 1 | URL
네..촌스럽죠. 어떻게보면 딱하기도 하구요. 위에도 썼지만 그게 류승완의 감성이기는 했습니다. 옛날에는 내용도 형식도 촌스러웠다면, 이제는 형식은 많이 나아진 편이죠. 근데 그런 순진한, 나이브한 메시지가 결국에는 궁긍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죠. 류승완의 영화가 촌스럽기는 하지만, 힘이 생기는 것도 바로 그런 나이브한 메시지 때문일 것이구요.

다만 이것이 단지 영화 안의 쾌감으로서가 아니라 영화 밖의 무엇인가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조금 세련된 마감들이 필요하리라고 봅니다. 단지 이것이 영화 안의 쾌감으로, 혹은 도리어 그 반대로 작용한다면 순진한 메시지들은 결국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요즘에는 `개쪽`이라고 하겠죠. (아니..어쩌면 이것도 옛날말이려나요.) 그런데 그 개쪽이란 그 옛날의 `쪽팔리다`와는 조금 다른 뉘앙스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 `쪽팔림`이 예전에는 대체로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면, 이 `개쪽`은 대체로 타인을 향해있죠.

2015-08-15 0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15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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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쓴 글들을 돌아보는 것은 늘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서는 이 내용을 써야 했는데, 혹은 여기서는 이런 것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는데...너무 칭찬만 하는 걸까, 아니면 너무 가혹했나, 또는 너무 냉소적이었나, 문장은 또 왜 이 모양이지, 하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글을 읽는 중간중간에 쉴틈없이 끼어든다. 평가단으로서 마지막 글을 쓰기 위해 지난 글들을 돌아보는 것은 다른 기수의 평가단 때도 했던 일이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해 이번 기수에 쓴 글들을 돌아보니 다른 때보다 조금 더 악전고투의 흔적이 보이는 것 같아서 면구스럽다.

 

몇 번의 경험이 있던 인문 신간평가단이 아닌, 소설 신간평가단으로서의 처음. 소설은 분명히 인문 쪽의 책들보다는 술술 읽히지만, 막상 무엇인가를 쓰려고 하면 읽은 내용들, 그리고 했던 생각들이 모두 슬금슬금 어디론가로 도망치는 것 같다. 무작정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며 애써 그들을 잡아두려 해보지만, 기껏 건져놓은 것들을 보면 아쉽다. 중요한 것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부스러기만 남아있는 듯 해서다. 소설을 읽을 때에 들었던 어떤 막막함들, 혹은 즐거움들, 안타까움들, 부끄러움들, 기타 수많은 이런저런 생각의 조각들을 어떻게하면 최대한 전달할 수 있을까. 지식은 그대로 옮겨놓을 수도 있겠지만, 감정은 어떻게 손상시키지 않고 전달할 수 있을까. 어쩌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결국 이 소설에 담긴 것들을 100분의 1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아서 늘 아쉬움이 남는 것이 소설에 대한 글쓰기인 모양이다.   

 

그럴 때마다 (평가단을 시작하던 처음에 얘기했던 것처럼) 다른 평가단 분들의 글을 읽었다. 독특한 독해에 감탄하기도 하고, 때로는 좋은 문장들에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중에서도 가장 힘을 얻었던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악전고투들을 행간에서 읽어냈을 때였다. 나만큼이나 다른 이들에게도 이 소설이 어떤 (버거운) 무게를 주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감정을 또한 100% 전달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악전고투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모두들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무엇인가를 이 소설에 실어 전달하려 애쓴다는 것. 

 

잘 잡히지 않는 것들을 같이 어떻게든 잡으려고 애쓴 다른 평가단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다음 번에 또 기회있으면 같이 잡아보아요, 하며 말을 건네고 싶다.

....................................

 

이렇게 훈훈한 말로 끝내고 싶지만,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이번에도 단순하게 그간 준 별점을 가지고, 좋았던 책들을 추려내본다. 일단 별 다섯 개를 준 건, 다음의 네 권이다. 

 

 

플래너리 오코너,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가장 처음에 이 책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소설을 읽는 감각에 확 불을 당겨줬달까. 그녀의 무심해보이는 문장들은 차곡차곡 정교하게 쌓여 마지막에는 끝내 읽는 이를 날카롭게 벤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구병모

 

제목만 봐도 서늘해지는 경험은 흔치 않은데, 이 제목은 (지금 이 시대의) 많은 것을 새삼 생각케 한다.

 

 

익사, 오에 겐자부로

 

노작가의 만년의 글이지만, 지금 어느 젊은 작가의 글보다 (형식과 내용의 모두의 측면에서) 새롭다.

 

 

네메시스, 필립 로스

 

묘사가 나쁜 작가치고, 좋은 소설을 쓰는 작가는 없는 것 같다. 필립 로스는 먼저 우리를 그 때의 그곳으로 데려다 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별 네 개를 준 건, 줄리언 반스의 <용감한 친구들>, 무라카미 류의 <55세부터 헬로라이프>, 코맥 매카시의 <선셋 리미티드>, 파트릭 모디아노의 <지평>, 이렇게 총 4권인데(이렇게 보니 내가 꽤 점수가 후한 편인 것 같다), 처음에 혹평을 한 것도 미안하고,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다가 눈물이 찔끔찔끔 맺혔던 기억도 생각나고 해서 다음의 책을 골랐다.

 

 

55세부터 헬로 라이프, 무라카미 류

 

그리고 그 중에 가장 좋았던 책은 이 책이다.

 

 

시간을 말하는 예술인 영화는 물론이고, 소설 또한 마찬가지로, 결국 이 질문에는 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지금' 이 이야기가 필요한가, 왜 '지금'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마찬가지로 만약 어떤 고전을 지금 재출간한다면, 왜 '지금' 이 책이 재출간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답해야 할 것이다. 그저 저작권이 이제 공짜로 풀렸으니까, 라는 얼척없는 대답 말고.)

 

오에 겐자부로는 이제 (자신을 포함한) 시대의 낡은 정신과 묵은 형식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법칙과 이제까지와는 다른 정신이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망령들이 청산되지 못하고, 새로운 세대에까지 악영향을 미치려는 이 때, 필요한 소설이 아닌가 싶다. 노작가는 이렇게 말하는데, 법칙 따위는 난들 모르겠고, 그냥 나만 아니면 돼, 라고 젊은 세대가 말하는 것은 조금 아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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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1 02: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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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2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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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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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 뒤편에 있는 문학평론가 허희 씨의 해설을 읽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끝은 주인공 계나가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고 결심의 말을 덧붙이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허희 평론가는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그녀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확신한다.(p.200)" 그러니까, 이 해설은 소설의 결론을 뒤집는 것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결국 이 소설이 어떤 부분에서는 무엇인가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거나, 혹은 그려내는 데에 실패했다(혹은 치밀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부분에서 그런가.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는 결심.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한 가지는, '난 행복해질 거야'라는 진술.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나는' 행복해진다,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국가나, 가족이나, 다른 거대한 무엇이 끼어들 틈은 없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제목 <한국이 싫어서>는 일종의 낚시, 혹은 자극적인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계나가 한국을 떠나 호주로 이주하는 것은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다. 한국이 싫어서, 가 아니라, 한국에서 행복해질 수 없다고 혹은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실 여기에는 국가라는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무엇이 끼어들 틈은 없다. '한국'이라는 것은 단지 어떤 울타리의 다른 이름일 뿐이고, 허희 씨의 말을 빌리자면, 그저 여러 개 축사 중에 어느 한 귀퉁이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그게 '한국'이면 어떻고, '서울'이면 어떠하며, '호주'든 혹은 '우간다'인들 뭐가 달라지는 게 있으리.

 

다시 말해서,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은 '한국'이라는 특정의 공간에 대한 비판을 담고자 한다는 오해를 불러오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은 그런 거창한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한국에 대한 비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우리가 익히 상상하는 그 지점에서 머무르며, 단지 계나가 한국을 탈출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이라는 공간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공간에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계나(그리고 철저하게 계나의 1인칭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 계나의 세계관과 소설의 세계관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이 소설)에게는 사실 그 나머지는 관심 밖, 아이 돈 케어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계나의 스탠스는 사실 그녀가 비판하고자 하는(그러나 사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비판하는 척 하는) 스탠스와 거의 일치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즉 이 소설에서 담고 있는 '한국'이라는 공간에 대한 비판은 그 공간을 지배하는 지배법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 지배법칙의 (최소한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에 대한 비판에 가깝다. 지배법칙이 그 모양으로 생겨먹은 것에 대해서는 소설은 사실 관심조차 별로 없다. 오해는 마시라. 나는 이것이 마냥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소설에서 자꾸 '한국'이라는 것을 불러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저 계나가, 혹은 소설이 말하는 지점은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어디가 되었든 말이다. 그 이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실 이 소설의 '관심 밖'이다. (그러니 '한국이 싫어서'라는 이 제목은 마케팅의 산물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이 별로 싫지는 않은데, 내가 거기서는 힘이 없고 앞으로도 힘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아서'에 가까울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난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는 결심에서 '진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의 가장 마지막 문장에 붙은 이 '진짜'는 사실 그녀가 이 소설의 내내, 그러니까 호주에 와서도 결코 '진짜' 행복해진 적은 없었음을 간명하게 말해준다. 허희 평론가의 말대로 "2000년대 한국 소설에 등장한 이주노동자의 살림과 유사한 모습이다. 부푼 희망을 안고 호주에 온 그녀를 비롯한 한국인들은 고국에서보다 도리어 궁핍하게 산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아 빌딩 청소 등 고된 육체노동을 하면서 영주권과 시민권을 취득하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p.200)" 그 뿐인가. 계나는 두 번이나 부당한 이유로 재판에 연루되고, 벌금을 내고 호주에서 추방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그녀의 고백대로 사실 그녀가 호주에서 '진짜' 행복해하는 것처럼 보였던 때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호주 시민권을 취득했을 때는 행복해할 법도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증서 수여식이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다과회에서 친지들과 기념사진을 찍을 때 슬그머니 행사장을 빠져나왔어. 6년 동안 고생한 게 하나하나 생각나서 뭔가 뭉클한 기분인데, 그렇다고 나 이제 호주 사람이다! 이러고 만세를 부르기도 뻘쭘하고. (p.172)"

 

결국 그 순간에도 그녀가 떠올리는 것은 6년 동안 고생한 기억이다. 그것은 이런 것과 다를까. 예를 들어 그녀가 한국에서 6년 동안 고생하여 좋은 일자리의 취업을 거의 100% 보장해주는 어떤 자격증을 땄다면, 그녀는 그 순간 행복해할까, 아니면 6년 동안 고생한 기억을 떠올릴까.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묻고 싶다. 만약 계나가 6년 동안 한국을 떠나지 않고 호주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만큼 한국에서 무엇인가를 했다면, 한국에서 살아남을 정도가 될까, 혹은 한국에서 행복해졌을까. 아니 또 오해는 마시라. 나는 당신이 이 모양으로 사는 것은, 단지 당신이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라는 엿같은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하는 말이다. 한국에서 돈없는 노동자로 사는 것과 호주에서 이주노동자로 사는 것의 차이.

 

아주 간략하게 말해서 그것이 큰 차이가 있어요, 라는 것이 이 소설의 태도이고, 그것은 사실 큰 차이가 없다, 중요한 무엇인가는 바뀌지 않았다, 라고 말하는 것이 허희 평론가의 말이고, 내가 어느정도 수긍하는 말이다. 적어도 이 소설에서의 계나의 진술을 그대로 믿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계나가 행복해질 수 없다고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어쩌면 행복해질 수도 있겠지.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렇게 얻는 행복이 소설을 읽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지? 물론 당연하게도 소설 주인공의 행복과 우리의 실제 행복은 크게 상관이 없다. 나는 그것을 새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소설의 행복이 우리의 행복과 일치할 수도 있다는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소설은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그 환상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소설은 어떻게든 모든 가능한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소설이 1인칭으로 말을 건네는 형식을 취하는 것도 그러한 강구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계나가 말을 건네는 이들은 누구일까. 호주에 이미 도착한 이들은 아닐테고, 아직 한국에 남아있는 은혜나 미연이나, 혹은 동생 예나와 같은 이들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이 말은 전해지고 있을까. 이렇게 말하면서? "시드니에서 매일 크고 작은 모험을 겪고 있어서 그런가, 옛날 친구들이 좀 얄팍해 보이더라. 내가 걔들보다 더 나은 선택을 했다거나, 내 미래가 더 밝을 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호주에 올 일 있으면 연락해, 나 무지 전망 좋고 겁나 큰 아파트에서 살아."라며 휴대폰 번호와 새로 만든 이메일 주소를 알려 주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어.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p.121)" 이 말들은, 그러니까 이 소설은 누구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혹시 계나와 미연이와 은혜가 벌이는 작은 파티에서 주문한 배달음식을 30분 안에 배달해주는, 신용카드를 양손으로 받고 90도로 인사하는 배달원에게?)

 

허희 평론가는 (그래도 평론가의 예의를 담아) 계나가 (지금과 같은 태도라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진지하게 충고해주었지만 나는 조금 더 냉소적으로 말한다. 그녀가 행복하든지, 말든지 나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어졌다. 관심 밖, 아이 돈 케어. 그리고 (주인공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는) 환상을 깨는 이 소설은 (적어도 나에게는) 실패한 소설이다.   

 

 

덧.  

어쩌면 이 소설의 의미는 다른 것에 있는 것 아닐까. 예를 들어 '한국이 싫어서'라는 마케팅적인 제목이나, 중편 소설 정도에 적당한 분량을 적당히 편집으로 늘려 '장편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하드커버를 씌워 13,000원에 팔아먹는 자세 말이다. (빨리 술술 읽힌다,라는 평들이 많은데, 내가 생각하기에 여러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짧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결국 말을 건네고자 하는 젊은 청춘들에게,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어쩌면 이 소설의 내밀한 '태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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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08-06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드린 날보다도 3일 늦었네요. 너무 더워서 납작 엎드려 있었어요. 파트장님과 신간평가단 담당님께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2015-08-06 2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10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07 0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10 0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5-08-22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별 한 개. 많이 과대평가됐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요즘 한국문학이 워낙 별로니까 평가는 후하게 줬던 것 같은데, 사실 냉정하게 어느순간부터 국내소설 신간에 별점을 높게 주기가 힘든 건 사실이에요.

맥거핀 2015-08-24 12:17   좋아요 0 | URL
솔직히 내용상에서도 그다지 공감이 안 가기도 하고, 제 기준에서는 어떤 소설의 기본이 안되어있다..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근데 이 책 꽤 잘 팔리는 것 같은데..요즘에 이런 게 먹히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요새 젊은 작가들이 잘 쓰기는 하는데..글쎄요. 이상하게도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다,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근데 그 `무엇인가`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말하기가 어렵네요).

그나저나 잘 지내나요? 북플에서는 여전히 왕성하게 책을 보시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2015-08-24 1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5-08-24 12:24   좋아요 0 | URL
맞죠, 자극적인 제목덕을 많이 본 소설이기도.
응, 또 나이를 먹는구나 으흠, 생각해볼게용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