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류승완, 2015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류승완의 신작 <베테랑>은 전작들, 특히 그 중에서도 <부당거래>의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한 영화다. 물론 어떠한 것들이 대척점에 서 있으려면 그것들은 공유하는 부분이 있어야만 한다. <부당거래>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 역시 경찰 내부가 주 무대가 되며, 그들의 활동이 이야기의 주요 소재가 된다. 류승완은 이를 약점으로 생각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활용하려는 듯이 보이는데, 예를 들어 배우들의 거리낌없는 활용이 그것이다. 황정민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주인공 형사 역할을 다시 맡고 있으며, 천호진, 안길강, 김민재 등의 배우들이 비슷하게 재변주된다. 물론 <베테랑>은 <부당거래>와 다른 점이 훨씬 많은 영화다. 그것을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캐릭터에 보다 확실한 색깔을 입히려 했다는 부분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당거래>나 그 이후 나왔던 <베를린>이나 인물들의 캐릭터는 복합적이고, 구도는 복잡하다. 인물들은 선과 악의 경계에서 모호하게 자리잡고 있고, 이야기는 점점 중층적으로 변해간다. 그러나 <베테랑>은 다르다. 인물들의 선악의 경계는 확실하고, 영화는 그들의 거의 처음 등장 장면에서부터 관객들이 인물의 성향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끔 방점을 찍는다. 

 

그러니까 이번 영화에서 류승완은 드라마에서 다시 액션으로 방향을 튼 것처럼 보인다. 예전 <베를린>에 대한 평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쓴 적이 있지만, 좋은 액션물에서 이야기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며, 캐릭터를 어느 정도 명확하게 규정짓는 것은 필수적이다. 어떤 액션물이든 관객은 심정적으로 기댈 곳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액션물이든 설혹 주인공이 지나친 폭력을 휘두르는 듯이 보여도, 관객은 그 캐릭터를 응원하며 영화를 본다. 그 캐릭터가 어느 쪽의 편에 서 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까닭에 그렇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액션물에서 캐릭터의 성향을 규정짓는 것은 그들의 액션의 형태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유명한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특유의 액션들이 있다. 성룡의 영화에서 성룡이 보여주는 액션이 있고, 본 시리즈에서 주인공 본이 보여주는 액션이 있으며,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서 주인공 에단 헌트가 보여주는 액션이 있다. 그것은 각각의 형태가 다른, 특유의 액션이며, 캐릭터의 성향과 결합된 액션이다. 이 영화 <베테랑>에서도 주인공 형사 서도철(황정민)이 보여주는 액션과 악역 조태오(유아인)가 보여주는 액션은 다르다. 서도철이 보여주는 것은 그의 느물느물한 성격을 보여주는 듯한 성룡 식의 슬랩스틱 액션이다. 어딘가 허술해보이고, 맞기도 많이 맞지만, 사실은 기술적으로 꽤 다듬어져 있다. 그러나 공격적이기보다는 방어적이며, 치명적인 공격은 피한다(성룡의 공격으로 사람이 죽는 법은 없었다). 반면 조태오의 액션은 비열하고 치졸한 액션이다. 즉 예전 동네 비열한 양아치들이 일대일 주먹 싸움에서 불리해지면 접이칼을 꺼내들던 식이다. 그는 불리해지면 앞뒤 가리지 않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며, 어떤 잔인한 방식도 서슴치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액션 방식은 아마도 이 영화의 주제와도 연결이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이 있다. 쪽팔리게 하지 말자. 이 말은 주인공 서도철이 계속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자, 그가 어떤 삶의 태도로서 지향하는 말처럼 보인다. 서도철은 조태오의 돈의 회유에 넘어간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압력을 가할 때, 늘 되풀이하여 말한다. 쪽팔리지 않아요? 부끄럽지 않아요?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도 부끄럽게 맞기보다는, 차라리 정정당당하게 맞서는 쪽을 택하라고 말하며, 그것은 다시 그의 아내(진경)에게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하게 보이는, 그러니까 무리하게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도리어 감독이 가장 하고 싶어하는 말처럼 보이는 장면은 아내가 경찰서에 와서 하는 그 대사이다. 나, 쪽팔리게 하지 말라는 것.) 즉 류승완은 대놓고, 노골적으로 이 영화에서 묻고 있다. 그거 쪽팔린 거잖아,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즉 이 핀트는 조태오에게 어느 정도 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조태오의 악행을 돕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맞춰진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적어도 영화 상에서의 조태오는 그것이 쪽팔린 건지, 아닌지 이미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인물이니까. 그 메시지는 조태오의 하수인들, 그러니까 최상무(유해진)를 비롯한 조태오의 곁에서 악행을 실행하는 인물들(하다못해 조태오를 수행하는 경호원들에게까지)이나 그의 돈의 유혹에 굴복하여 서도철에게 압력을 가하는 경찰 내외부의 인물들에게 향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감독 류승완이 이 사회에 던지는 나름의 진심어린 호소일 것이다. 부끄러운 일은 하지 말자, 제발.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미안한 말이지만) 그것은 사실 순진한 메시지일 수 있다. 쪽팔리지 말자, 부끄럽지 말자고 호소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어떤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니까. 이것은 어떻게 생각해보면 아주 쉽게 배반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잘 알면서도 류승완은 그것에 건다. 어쩌면, 류승완은 이제 걸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양심이라는 것은 이제 류승완의 영화에서 묘하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류승완의 초창기 영화는 보다 순진했다. 사실 알고보면 순진한 남자들이 순수한 것을 지켜내려고 싸우다가, 혹은 그것에 배반당해 죽었고, 그것을 류승완은 촌스럽게 찍었다. (물론 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제 더이상 그렇게 촌스럽게 찍지는 않기 때문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주먹이 운다>, <짝패>의 인물들. 그 이후에 류승완은 시스템의 문제를 엿봤다. 그것은 아마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들은 양심으로만은 안된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반대편에는 거대한 시스템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혹은 그 시스템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 <부당거래>에서의 시스템의 탐색은 여전히 그것이 견고하다는 재확인이었다. (<부당거래>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한다면, <부당거래>는 결국 그 시스템이 작동하는 그 방식으로 정확하게 끝을 맺으며 거기에는 어떤 절망이 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 <베테랑>의 어떤 호소가 있다. 쪽팔린 줄 알아. 즉 류승완의 처음 영화들이 거대한 조직에 맞서는 개인들의 실패를 응시했다면, 두 번째에서는 그 조직이 바뀔 수 있는지 가능성을 탐색하며 다시 그것에 절망감을 맛본 다음, 이제 <베테랑>에서는 약간은 우회적이지만, 보다 강력한 접근방식을 택한다. 그것은 그 조직, 시스템 구성원들의 개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거기에 그러고 있는 것이 부끄럽지는 않니.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순진한 호소이기는 하지만, 어떠한 의미에서는 가장 근원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설사 어떤 악이 거대할지라도 그 악은 소수의 절대적인 악과 다수의 중간자적 모호함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간의 모호함들을 선의 편으로 돌려놓을 수 있으면 악은 뿌리뽑힐 수 있다고 류승완은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류승완의 게임이다. 상대의 알 수 없는 진심을 믿고 벌이는 순진한 게임. 이제 걸어보는 마지막 승부수. (다시 말해서 류승완이 보는 한국사회는 혼탁해지고 도리가 땅에 떨어진 무협영화의 강호이다. 갑은 굳건하고, 을이 을과, 또는 을이 병과 싸우게 만드는 이상한 법칙이 난무하는 세계 - 조태오의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격투는 바로 그 풍경이다. 너무 노골적이기는 하지만 - 그러니 시스템과 맞서는 개인, 그러니까 액션 영웅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이 액션 영웅은 단지 절대악을 처단하는 것이 그 임무가 아니다. 배트맨의 임무도 결국 절대악, 예를 들어 조커를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더이상 선량한 이들이 악에 물들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협영화의 영웅도 절대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땅에 떨어진 강호의 도리를 다시 세우는 것이 목적이다. <베테랑>의 서도철도 이 지점에 비슷하게 위치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 승부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이 영화는 사실 정확한 마무리를 보여주지 않는다. 서도철의 승리로 게임이 끝났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게임의 결말은 아직 알 수 없다. 우리는 현실에서 승리처럼 보였지만 승리가 사실 아니었던 것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로 인하여 새삼 화제가 되었던 여러 지난 사건들. 그 지난 사건들에서 가해자들은 어떻게 처벌되었고, 결국 현재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이 영화의 결말이 승리가 아닐 수도 있음을 안다. 그 끝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어쩌면 류승완은 이 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을 풀어준 시스템을 만들어낸 것에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당신도 어쩌면 일조한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 하고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류승완의 순진한 호소가 너무 딱해서 내가 말하는 억지일지도 모르겠다. (보여주지 않은 것에서 무엇인가를 봤다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억지이니까.) 다만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자. <베테랑>은 거대한 조직과 단지 가지고 있는 조그만 힘으로 대결하려는 개인을 보여주는 류승완의 처음으로 돌아간 듯한 영화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개인은 조금 더 느물느물해졌고, 단지 고독한 액션 영웅이 아닌 주위를 돌아보고 활용하는 방법을 조금은 배운 것 같다.

 

그것이 단지 두 시간 동안의 영화적 쾌감으로 끝나는가, 혹은 그 이후의 다른 것으로 조금이나마 연결되는가는 결국 관객의 몫이다. 다시 말해서 상대의 알 수 없는 진심을 믿고 벌이는 순진한 게임. 그 순진한 게임이 순진한 패배로 끝날지 아닐지는 이제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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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8-14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괴물은 될 대로 되었고, 괴물의 과도기에 있는 이들에게도 먹히지 않을 ˝쪽팔리진 말자˝...쪽? 그 까짓 거 힘있으면 다 돼(꾸미든, 상대를 철저히 부수든) 하는 시대, 구호가 광고보다 못한 시대, 괴물이 되는 악의 심리와 마찬가지로 선의 심리도 건드리겠다는 거군요. 악에 쉽게 경도되는 전염성 만큼이나 선의 추구도 그 전파성을 믿어보아야겠지요. 우리가 기대는 희박성. 그러나 또한 우리가 모르는 미래.

그런데....문득 유하 감독 영화들에서 그 시대/세대적 감수성이 점철되는 걸 생각해 볼 때 류승완 감독의 작품들에서도 저는 그런 유사성을 느낍니다...˝쪽팔린다˝란 말이 한참 회자되던 시대가 있었죠. 요즘 세대는 ˝쪽팔린다˝ 그리 잘 쓰지 않지 않나요??
도킨스도 말했다시피 우리는 조상과 부모와 닮기보다 세대를 더 닮기 마련이라는 점도 겹치네요...
어쨌거나 ˝쪽팔린다˝에 대해 부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맥거핀 2015-08-15 14:36   좋아요 1 | URL
네..촌스럽죠. 어떻게보면 딱하기도 하구요. 위에도 썼지만 그게 류승완의 감성이기는 했습니다. 옛날에는 내용도 형식도 촌스러웠다면, 이제는 형식은 많이 나아진 편이죠. 근데 그런 순진한, 나이브한 메시지가 결국에는 궁긍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죠. 류승완의 영화가 촌스럽기는 하지만, 힘이 생기는 것도 바로 그런 나이브한 메시지 때문일 것이구요.

다만 이것이 단지 영화 안의 쾌감으로서가 아니라 영화 밖의 무엇인가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조금 세련된 마감들이 필요하리라고 봅니다. 단지 이것이 영화 안의 쾌감으로, 혹은 도리어 그 반대로 작용한다면 순진한 메시지들은 결국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요즘에는 `개쪽`이라고 하겠죠. (아니..어쩌면 이것도 옛날말이려나요.) 그런데 그 개쪽이란 그 옛날의 `쪽팔리다`와는 조금 다른 뉘앙스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 `쪽팔림`이 예전에는 대체로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면, 이 `개쪽`은 대체로 타인을 향해있죠.

2015-08-15 0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15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