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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서울의 일상
류신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당신이 서울에 살고 있다면 한 가지의 실험을 제안하고 싶다. 아니, 아마도 이런 경험은 한번쯤 있을 확률이 높으므로 굳이 실제의 실험을 행하지 않고 사고실험으로 그쳐도 좋다. 그것은 최소한도의 교통비만을 가지고 집을 나가서 이 넓은 도시에서 홀로 하루라는 시간을 보내보는 것이다. 실제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은 이 넓은 도시에는 참으로 갈만한 곳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거리에는 수많은 건물과 상점과 공공기관과 종교시설과 영화관과 은행과 커피숍과 쇼핑몰들이 있지만, 우리를 반겨주는 곳은 그다지 많지가 않다. 기껏해야 도서관이나 대형서점이나 공원 정도일까. 그러나 도서관은 어서 이 도서관을 하루빨리 떠나고 싶은 수많은 무리 혹은 갈곳 없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로 인해 점령당한지 오래고, 대형서점은 점점 책을 읽을만한 공간들을 없애나가고 있으며, 공원마저도 긴 시간을 보내기에는 적당하지 않다(도심의 공원은 누구나를 위한 공간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공원은 누구나를 위한 공간이라고 이야기되지만, 그곳의 출입자격은 여러가지에 의해 암묵적으로 제한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양복을 차려입고 공원에 장시간 앉아있다면 딱딱한 나무로 된 벤치를 견뎌내는 것보다 누군가의 시선을 견뎌내는 일이 더욱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주머니에 현금을 가득 가지고 있다면 이야기가 꽤 다르다. 각종 다양한 상점에 들어가 이것저것 쇼핑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영화관이나 문화시설에서 좋은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도 있으며, 은행에 들어가 VIP고객 대접을 받으며 장시간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커피숍에 들어가 오랜시간 차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도 있으며, 이도저도 귀찮다면 호텔이나 모텔같은 숙박시설에 들어가 잠을 청할 수도 있다. 즉 이 드넓은 도시 서울의 많은 곳은 출입자격을 명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규정한다. 아예 돈이 없다면 출입자체가 가능하지 않은 공간도 있고, 어떤 공간들은 출입은 할 수 있되, 어떤 어색함, 빨리 나가줄 것을 요구하는 암묵적인 분위기, 자괴감, 비우호적인 눈초리, 물리적인 불편함등을 견뎌내야만 한다(예를 들어 요즘의 상당수의 은행들은 출입구에 안내원을 세워놓고 번호표도 뽑아주고, 어떤 업무인지도 물어보고 하는데, 그것이 어떤 '서비스'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감시'나 '걸러내기'를 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은행의 편의시설은 그 은행에 돈을 많이 예치한 고객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것이 이 사회에 어울리는 사고방식일 터이다). 다시 말해서 이 출입자격은 누가 결정하는가. 그것은 자본이 결정한다.

 

아마도 그것이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저자 류신, 혹은 그의 분신인 직업과 아내를 갖지 않은 서른 일곱살 룸펜 구보가 서울 거리를 산책하기 위해 발터 벤야민과 소설가 구보씨를 끌고 들어온 이유일 것이다. 이 책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잉여 구보가 하루동안 서울거리를 전전하는 이야기이다. 아니 이것을 이야기라도 불러도 좋을까. 작품에 대한 평론과 인문학적 단상과 창작된 소설과 저자의 실제경험이 혼재되어 있는 이 이야기 속에서 구보는 영등포에서 출발하여 경복궁, 서울광장, 롯데호텔, 세운상가, 홍대입구를 돌아 다시 서울의 강남으로 내려가 코엑스몰, 가로수길, 강남역을 거친다음 다시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간다. 즉 그가 돌아보는 곳은 소위 서울의 중심가들이다. 그리고 중심가라는 의미는 이 자본이 만들어내고 스스로 자라고 있는 도시 서울에서 가장 자본이 집약되고 있는 공간들이라는 의미도 된다. 아마도 그것이 발터 벤야민이 등장하는 이유이어야 할 것이며, 이 책이 그저 '서울 프로젝트'가 아니라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인 이유일 것이다.

 

아케이드(arcade)란 "원래 열주(列柱)로 지탱되는 아치형의 천장을 가진 구조물과 그것이 조성하는 개방된 통로"를 의미하는 말로서, 이 책에서는 "유리 지붕이 덮인 상점가를 위시해 유리 돔이 설치된 홀, 상점이 늘어선 지하도,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지하 통로나 공중 가교, 투명한 차양이 설치된 노상 시설, 유리와 철골로 이루어진 건축물을 지칭하는 광의의 개념(p.11)"으로 사용됐다. 그리고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그의 생애 말년 13년 동안 19세기 초반 '세기의 수도'로 군림했던 프랑스 파리에 등장한 새로운 쇼핑 공간(아케이드)을 미시적으로 탐사함으로서 자본주의의 기원을 천착하려 했으며, 이를 '아케이드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였다(저자는 이 책에서 '파사주(passage)'라는 용어가 아케이드보다 더욱 적확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은 발터 벤야민의 사상과 개념을 빌어 이 드넓은 도시 서울을 지배하고 있는 다양한 유형 무형의 쇼핑 공간(아케이드)에 서려 있는 자본주의의 면면을 살피고자 하는 시도다. 아니 역으로 말해서 자본이 출입자격을 결정하는 이 서울의 공간들에 기어이 출입자격을 얻기 위해 발터 벤야민을 과거로부터 소환해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필요해지는 것은 발터 벤야민 외에 저자와 사상적으로 동행한 또하나의 인물,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등장하는 1930년대 경성 거리를 하릴없이 산책하는 소설가 구보씨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소설가 구보씨라는 인물이라기보다는 그가 벌이는 행위, 즉 '산책'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공간에서의 미덕은 그저 단 두 가지, 즉 그저 빠르게 스쳐지나가거나, 아니면 자본을 소비하며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공간들은 자본이 없는 자들은 어서빨리 스쳐지나가도록 하고, 자본이 있는 자들은 그들을 이 공간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산책은 이 두 가지에 모두 반하는 행위다. 산책은 조용히, 천천히, 혹은 유유히 공간안으로 들어가 공간 속에서 어떤 사유를 수행한 후 다시 그곳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유유히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 사유는 개인적인 사유일수도, 공간이 연상시키는 어떤 작품에 대한 사유일수도, 혹은 다른 인문학적 사유일수도 있다. 즉 1930년대 식민지 현실 속에서 생활에 편입되지 않고 문학과 공간을 사유하던 소설가 구보씨와 2010년대 자본주의 현실 속에서 자본과 유리되어 공간에서 문학과 사유를 곱씹는 룸펜 구보는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닮아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 식민지 현실에, 혹은 자본주의적 현실에 나름의 저항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완전한 저항이나 급진적인 저항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보다는 양가적인 감정에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사실 그들은, 그리고 그와 거의 마찬가지인 우리들은 이 현실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 현실의 단물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예를 들어 아이러니하게도 스마트폰의 정보지상주의, 어떤 인간관계의 단절, 사유의 정지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이 스마트폰을 누구보다도 오래 손에 쥐고 있는 자들이며, 그것을 완전히 손에서 내려놓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각종 고가의 물건들을 파는 유리로 만들어진 진열대가 가득한 지하의 아케이드를 돌아보는 다음의 사유는 어떤가. 아...우리는 그 아케이드에 가면 결국 우울하게 나오게 될 자신을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아케이드로 발걸음을 돌리고마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혹은 어쩌면 산책이 그런 것이 아닐까. 즉 우리가 그 현실을 완전히 거부한다면 굳이 그것을 '돌아보러' 나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케이드는 도취의 공간이자 우울의 공간이다. 아케이드는 지상의 빡빡하고 누추한 현실을 잠시나마 망각시켜 주는 판타스마고리, 즉 요술 환등의 성전이지만, 갖고 싶은 상품을 향한 리비도가 이 상품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는 각성과 꼼짝없이 독대하면서 우울이 생성되는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다. 소설 속 여인은 갈구한다. "저걸 가질 수 있다면, 황실의 여인들이 선택할 만한 저걸 가질 수 있다면, 나도 항성처럼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것만 같다.(정미경 <호텔 유로, 1203>)" 환상과 현실, 매혹과 각성이 진자처럼 오가는 곳이 아케이드인 것이다. 아케이드의 쇼윈도는 '거리'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투명한 유리 뒤에서 명품의 특권적 지위와 행인 사이의 '거리(距離)'를 유지시킨다. (p.101)


그러나 소설가가 혹은 저자가 이 양가적 감정에 휘둘리는 누군가, 즉 어쩌면 당신을 등장시킨 것은 그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스스로가 진자처럼 오가면서 이 물신이 지배하는 도시 서울을 기꺼이 걸어가고 있는데 누구를 비판하겠는가. 발터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보고자 하는 것도 그것만은 아니었다. "벤야민은 대도시와 그 속에 매몰된 소비 대중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결코 유토피아적 희망을 끈을 놓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신화된 인간의 욕망이 정치적, 혁명적 실천의 에너지로 전화될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p.268)" 그리고 저자 역시도 홀로 긴 시간 서울 거리를 산책하고 돌아온 구보와 그를 기다리는 지친 노모에게 작은 위안을 선사한 다음, 어떤 희망들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끝낸다. 그것은 공간에 매몰되지 않고 그곳을 꿋꿋이 산책하고 있는 산책자 자신, 혹은 수많은 '나'들을 긍정하는 것이며, 1930년대의 소설가 구보씨와도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며("구보는 좀더 빠른 걸음걸이로 은근히 비 내리는 거리를 집으로 향한다. 어쩌면 어머니가 이제 혼인 얘기를 꺼내더라도, 구보는 쉽게 어머니의 욕망을 물리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작가가 인용한 다음의 문장과도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니 길이 생긴 것이다. (루쉰, <고향>)"

 


덧 1.
사유의 기본은 세심한 관찰이다. 이 책은 적절한 인용도 인상적이지만, 세심하고도 집요한 관찰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구보는 맥도날드에서 고객에게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이 보이지 않는 매뉴얼에 충실히 따랐다. 시장이 반찬인지, 생각보다 맛있었다. 그러나 서둘러 먹을 수 없었다. '패스트푸드'라지만 먹는 과정은 매끄럽지 못하고 지지부진했다. 빵 두 조각이 힘겹게 덮고 있는 고기 패티와 야채 더미를 손에 쥐고 먹는 일이란 여간 힘들고 번거로운 작업이 아니었다. 포장지에 압사당한 야채들이 기필코 틈을 비집고 탈출에 성공하기 일쑤였고, 소스는 노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구보는 포장지 안으로 햄버거를 요리조리 돌려가며 가능하면 토핑을 떨어뜨리지 않고 남김없이 모두 씹어 심키려는 자신의 허기와 맹목적인 식탐에 비애를 느꼈다. 햄버거는 거인 같았고 그걸 감당하기에 자신은 난쟁이 같았다. 구보는 자기가 햄버거를 먹는 것이 아니라 햄버거가 자신을 집어삼킨 것 같은 이상한 기분마저 들었다. 햄버거 속 토마토가 먹잇감을 보고 날름거리는 표독한 독사의 혀 같았다. (p.125)


덧 2.
혹시 어쩌면 누군가 한명쯤은 이 묘사를 보고 한 영화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정성일의 <카페 느와르>는 거의 이와 비슷한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그리고 이 영화 역시도 어쩌면 한 남자의 서울 유랑기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는 주인공 영수(신하균)를 계속 감시하는 것처럼 따라다니는 서울타워이다. 아마도 구보가 드넓은 서울을 돌아보는 와중에도 이 서울타워는 상당부분 그와 함께 했을 것이다. 마지막에 노모에게 돌아가는 것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차이가 있다면 마지막에 이르러 구보는 서울타워에 오르는 반면에, 이 영화에서는 노모에게 돌아온 영수를 여전히 서울타워가 굽어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 영화 <카페 느와르>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비극 버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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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2-28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첫 문단을 보고 서울에도 갈 만한 곳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어디선가 서울을 한바퀴 도는 버스도 있다는 말을 본 적이 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아주 적은 돈으로 도시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듯합니다 산에라도 올라가면 모를까^^

어딘가에 들어가는 데 자격이 필요하다니 조금 우울한 이야기네요 그래도 그런 것에 기죽지 않으면 좋을 텐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은행,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디나 그런 것은 아니니 다행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희망을 찾기를 바라고 이 글을 쓴 것 같군요 산책은 어디에서든 할 수 있고 생각하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도 막을 수 없는 겁니다 하지만 어딘가에 들어가서 깊이 생각한 적은 별로 없군요 그냥 걸을 때나 이것저것 생각하지, 다음에는 어딘가에 들어가면 한번 잘 살펴보고 싶군요^^


희선

맥거핀 2014-03-03 17:52   좋아요 0 | URL
불성실한 서재에 늘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깍제깍와서 얘기도 나누고 그래야 하는데..많이 늦었네요.

저는 아주 가끔 위의 실험을 실제로 행해보고는 합니다. 뭐 의도할 때도 있고, 의도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만, 서울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 서울에서 살고 있고,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서울 거리를 걷는 걸 나름 즐깁니다.

위에 쓰지는 않았지만, (참 갈만한 데가 없다는 것과) 동시에 느끼는 것은 참 이곳은 빠르게 많은 것이 바뀌는 도시라는 점입니다. 그것도 참 이상하게도 늘 갈만한 곳이 제일 빨리 없어지고는 합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명동 거리를 돌아다닐 때 사람이 너무 많아서 참 조용한 데가 필요하다 싶으면 가는데가 있었습니다. 명동의 중앙시네마인데, 참 이렇게 조용해도 되나 싶은 영화관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지요.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 없어진게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꼭 영화관만은 아니고, 서울 거리는 이상하게도 조용한 꼴을 못 보는 듯 싶습니다. 여기 조용해서 참 좋네..하면 이상하게도 요란시끌벅적한 무엇인가가 어느 틈에 들어서 있고는 합니다. 참 왜들 그러나 싶을 정도죠. 그럼에도 아직도 참 좋은 몇몇 군데가 있어서 저는 여전히 서울이 (어느정도는) 좋고요. 앞으로도 가끔은 여전히 산책을 나갈 것 같습니다.

희선님 댓글을 읽다보니 왠지 여유가 조금은 생기는 것 같기도 하네요. 우리 기죽지 말고 살아야겠죠.^^

아이리시스 2014-03-03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2014-03-03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03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4-03-03 18:42   좋아요 0 | URL
새로운 형식 실험 아니고, 맥거핀님, 하고 뭐 써야지 하다가 비밀로 해야될 부분있으니 비밀로 쓰자 하고 바꾼 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hining 2014-03-04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글은 언제나 좋지만 이 글 특히 좋네요. 제 마음에도 쏙 드는(응?) 글, 주제이기도 하고요.

요새 몸이 좀 둔해진 듯 싶어 걷는 양을 늘렸는데 걸을만한 길을 갖는 것도 실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산책 코스가 있는데 한 시간 정도 유령처럼 걷다 오면 미세먼지는 있어도;; 마음은 좀 나아져요. 한 곳에서 오래 살게 되면 반드시 숨은 장소 몇몇은 찾을 수 있고 아직은 나 혼자 바람 쐴 곳이 있다는 것도 안도 될때가 있죠. 산책 코스에 앉아서 책을 읽게 되는 장소가 있는데 거의 앉는 사람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도 별 없다보니 날씨가 좋을 땐 간식을 먹거나 헤드폰을 끼고 가만히 앉아있기도 하는데. 말은 안 되도 저는 그게 '제 자리'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그런 곳들을 찾다보면 가끔 흡연하러 오시는 분과 조우하게 되는 뻘쭘한 상황이.....

맥거핀 2014-03-07 00:33   좋아요 0 | URL
요즘 Shining님 마음에 드는 글들이 늘어가고 있군요. 다행입니다.ㅋ

음..산책코스에 책을 읽을 만한 장소가 있나요? 그것 참 좋습니다. 요즘에는 조용히 책을 볼 수 있는 곳들이 점차 '희귀해진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말 그대로 마음 편히 앉아있을 만한 곳이 참으로 찾기 어렵습니다. 말 그대로 '공유지'라고 부를 수 있는 곳들이 점차 없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집 근처에 나름의 산책코스가 있기는 한데, 책을 읽을만한 장소는 없구요. 그저 거리가 그래도 보기 좋고 조용한 편이라서 가끔 나가고는 합니다. 그런데 요새는 참 공기가 너무 안좋아서 잘 안나가게 되는군요.

안 그래도 공기도 안 좋은데, 담배까지 피면...아무튼 흡연자들이 여러모로 민폐이기는 합니다.

감은빛 2014-03-06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의 글은 언제나 좋지만, 이 글은 특히 더 좋네요!
제가 하고픈 말씀을 요 위에 샤이닝님께서 하셔서 한번 더 따라 씁니다. ^^

저 대략 이십년 전쯤에 혼자 서울에 올라와서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던 적이 있었어요.
신천(여기서 선배한테 술을 얻어 먹었거든요.) -> 잠실 -> 신촌 -> 종로 -> 대학로 등등
혼자였고, 딱히 할 일이 없었고, 서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냥 무작정 걸었어요. 이런 저런 생각들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돈이 없으면 머물 공간이 마땅히 없다는 것.
맥거핀님의 멋진 표현들을 읽으며 새삼 깨닫습니다,

맥거핀 2014-03-07 00:4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칭찬은 언제 들어도 늘 좋습니다.^^

저는 태어나기도 서울이고, 대학도 서울에서 다녔고, 일도 서울에서 했고..아무튼 거의 서울을 벗어나 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서울 거리를 많이 안다고 자부했는데, 점점 또 시간이 흐르다보니 제가 잘 모르는 곳도 참 많더군요. 아무래도 서울에 살아도 늘 가는 곳만 가게 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저자가 책에서 이야기한 장소들은 거의 다 그래도 아는 곳들이라 반가웠습니다.)

요즘에는 시간도 잘 없고, 체력도(...) 없어서 잘 못 그러지만 학교 다닐때는 참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기는 했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다 추억이고, 나쁜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이 많습니다. 같이 돌아다녔던 사람들도 생각나구요. 물론 그 때도 돈은 별로 없었지만요. 그래도 젊다는 패기로 그냥 그래도 즐겁게 다녔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실제로 그런건지, 아니면 제가 패기가 없어져서 그런건지 요새는 돈이 없으면 아예 가기가 겁난다고 해야할까요..그런 곳들이 너무 많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