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삼림>의 개봉일은 95년 9월 2일이었다. 물론 나는 이 날짜를 기억하지 못한다.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겨우 날짜를 알았을 뿐이다.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개봉일로부터 한참 지나고 아마도 98년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이 날짜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날짜를 기억도 못하는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이 영화를 보기 전후의 일들은 꽤나 난삽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와 관련지어서는 하나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학회 사람들과 영화를 보러 갔었다. 영화관에 간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하는 소규모의 영화제였다. 학교는 외대였고, 날짜는...아마도 봄이나 가을이었던 것 같다. 새벽에는 꽤나 추웠으니까. 밤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나는, 야외에 대형의 스크린을 걸어놓고 하는 그런 영화제였다. 말이 영화제였지, 지금 돌이켜보면, 그저 대학의 영화동아리에서 주관하는 작은 행사였었던 것 같다. 거기에 왜 가기로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 학회의 누군가가 외대에 친구가 있었거나, 우연히 PC통신 게시판에서 그런 내용을 보았거나, 우리 학회에 영화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었거나...하는 그런 시덥잖은 이유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다른 기억이 모두 틀렸다고 해도 지금 하나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우리가 매우 화면 가까이에 앉아서 영화를 봤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화면은 매우 컸다는 것이다. 스크린에 배우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 그 배우의 코가 적어도 웅크리고 앉은 나 정도의 크기는 되었으니까. 왜 그렇게 가까이에서 영화를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자리가 없어서였을 수도 있고, 그 곳의 구조가 이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나의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모두 세 편이었는데, 가장 처음에 나온 영화는 롱테이크가 무던히도 반복되는 영화로, 무언가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영화였다. 조금 늦게 도착하여 영화의 줄거리도 전혀 모르는데다가, 바라보는 화면은 곧 나를 지루하게 만들었으므로 꾸벅꾸벅 졸다가 옆의 친구가 옆구리를 찔러 다시 일어나서 보다가, 다시 졸다가 하는 것을 반복하였다. 아주 훨씬 나중에야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그 영화는 차이밍량 감독의 영화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영화가 <하류>였는지, <구멍>이었는지 모르겠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물 때문에 지루했던 기억이 있으므로 <구멍>이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미묘한 관계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여 <하류>같기도 하다.

 

두 번째 영화부터는 비교적 생기를 가지고 졸지 않고 영화를 즐기며 볼 수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같이 갔던 일행 중에 한 친구가 계속 영화를 보며 비명을 질러대는 통에 졸음이 올래야 올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영화는 나 역시도 지금까지 본 공포영화 중에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그리고 아직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압권 장면 중 하나일 듯한 피바다가 되는 방과 ‘REDRUM’ 그리고,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에 가장 강렬하게 남는, 거대한 스크린에 클로즈업으로 비췄던 잭 니콜슨의 눈빛. (아마도 그 스크린이 과도하게 컸던 것으로 기억되는 것은 클로즈업된 잭 니콜슨의 눈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영화가 끝나고 난 후 다들 너무 공포에 떨어 피곤해진 데다가, 새벽도 꽤 이슥해지는 터라 우리 일행도 자리를 뜰 준비를 하였다. 그러자 영화제 관계자 한 명(아마도 그 동아리 학생 중의 하나인 듯한)이 살짝 다가와 우리를 잡았다. 그리고 미끼를 던졌다. “이 영화도 보고 가세요. 아주 야한 영환데.” 글쎄. 왜 우리를 잡았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많은 관객들이 이미 빠져나갔으므로 우리라도 잡아야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말에 이끌렸는지, 새벽이라 갈 곳도, 갈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정말 많지 않은 관객 속에서 그 날의 마지막 영화이자, 상당히 야하고 상당히 슬픈 영화를 보았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부기 나이트>. 포르노스타의 등장과 씁쓸한 몰락, 그리고 퇴장. 우리는 초반에는 은밀한 웃음을 교환하며 좋아하다가, 곧 속았다고 생각했고, 종국에는 우리도 역시 씁쓸해졌다. 그리고 슬퍼졌다.

 

슬퍼서 그랬는지, 아니면 마지막 장면에 쇼킹을 받아서 그랬는지 우리는 그곳을 나오며, 학교 앞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씩을 사서 몰락한 포르노스타 마냥 편의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차가 다니는 시간을 기다리며 나눠 마셨고, 나는 다시 우리 학교 앞까지 와 비디오 방에 가서 이 영화 <중경삼림>을 보다 잠이 들었다. 아마도 다음날 오전 수업을 기다리며 시간이나 때우자는 심산이었겠지만, 학교에서 수업이나 제대로 들었는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그래서 이 영화 <중경삼림>은 어느 날 TV에서 이 영화를 하는 것을 발견하고 비스듬히 누워 볼 때까지 내 기억 속에는 초반부의 임청하의 까만 선글라스와 노란 가발로 기억되거나, 뚝뚝 분절되던 이상한 화면(‘스탭프린팅’이라 불리우는)으로 기억되거나, 차이밍량과 <샤이닝>과 <부기 나이트>와 그저 한 세트로 기억되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 기억을 되새기며 비스듬히 누워서 보다가, 어느 순간 자리에 앉았고, 그 영화가 좋아졌다. 그 후에 나는 이 영화를 주기를 가지고 습관적으로 반복해 보게 되었고, 내 기억 속에서 기억은 다시 <중경삼림>의 내용들과, 그리고 다른 영화들과 합쳐지고 분절되고, 더욱 난삽해져만 갔다.

 

 

 

이 모든 기억을 다시 떠올린 이유는 며칠 전 정성일 평론가의 음성해설로 <중경삼림> DVD를 다시 보았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사놓은 DVD인데, 그 동안 이런 음성해설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보게(듣게) 되었다.

 

정성일 평론가의 목소리는 꽤나 차분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히 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가진 수많은 이야기들을 빨리 청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욕심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음성해설에서 정성일 평론가는 책 한 권으로 내도 될 만한 분량의, 수많은 알려진,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들려주는 동시에, 중간중간 의미 있는 장면을 짚어주는 것 또한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의 배경과 영화의 주제를 다시 되새겨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지만, 영화를 여러 번 본 나도 놓치고 지나갔던 장면들(예를 들어, 영화의 전반부에 왕정문이 가필드 고양이 인형을 안고 가게에서 나오는 장면이라든가)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는 그런 재미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도대체 정성일 평론가는 대본을 써놓고 이 이야기들을 읽어내려 가는 것일까, 아니면 영화를 보면서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영화에서 평론가의 음성해설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평론가의 음성해설이란 결국 누군가의 하나의 영화를 본 감상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 되었지, 왜 이것을 본다(듣는다)는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난삽한 예전의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떠올리게 된 것은 정성일 평론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성일 평론가가 해설 중간에 왕가위와 차이밍량을 비교하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주문해 놓은 <스틸라이프> DVD가 보고 싶어졌다. 그 DVD에도 정성일 평론가의 음성해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 2008년 4월 30일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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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11-28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의 기억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그 기억은 만년으로 해도 되겠습니다...

맥거핀 2013-11-28 00:56   좋아요 0 | URL
오...왠지 그 말을 하는 금성무의 얼굴을 상상해버렸습니다. Mephistopheles님이 닮았다고 믿을께요.

Mephistopheles 2013-11-28 09:29   좋아요 0 | URL
죄송합니다. 기대에 못미치겠군요..(이참에..페이스오프를..??)

맥거핀 2013-11-28 22:29   좋아요 0 | URL
그냥 금성무로 기억하고 싶어요. 제 판타지를 위해. 훗.^^

넙치 2013-11-27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 극장에 가기 전후의 기억으로 방부처리 돼는 거 같아요. 저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는데 너무 좋아서 왕가위 영화에 한동안 충성심을 바쳤는데 나이들고 다시 보니 내가 뭐 때문에 열광했었는지 궁금한 적이 있답니다.-.-;;어렴풋하게 짐작은 하지만 그 나이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사실이기도.ㅎㅎ;

맥거핀 2013-11-28 01:00   좋아요 0 | URL
네..영화라는 게 참 시간이 지나면 영화의 내용보다는 정말 그와 관계없는 다른 기억, 때로는 아주 사소한 것으로 대체되죠. 저도 기억에 남는 영화는 대체로 개인적인 추억이 관계된 영화들입니다. 그래요? 저는 왕가위 영화는 옛날에도 좋았고, 지금도 좋고, 다시 봐도 좋아요. 물론 그 때 좋은 이유와 지금 좋은 이유는 다르겠지만요.^^

감은빛 2013-11-27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역시 맥거핀님의 글은 참 좋네요.
저는 [동사서독]을 교수님 추천으로 보고 나서,
이 영화를 봤습니다.
그 시절엔 영화란 때려 부수거나, 날아다니거나, 총질하는 액션 영화 위주로 보았고,
간혹 야한 장면이 조금 들어간 공포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동사서독], [중경삼림], [타락천사]를 주욱 이어서 봐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어요.

이 글 읽고 나니, 다시 찬찬히 보고 싶어지네요.

맥거핀 2013-11-28 01:05   좋아요 0 | URL
음..<동사서독>을 추천하는 교수님이라..어떤 분이실지 궁금하군요.

아무튼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참 90년대적인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용적으로 볼 때도 홍콩반환이라는 상징적인 사건을 앞둔 홍콩의 어떤 분위기가 녹아들어가 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혼돈과 과잉, 그러면서도 어떤 특유의 정서가 있다랄까요..그 때 극장에서 보았어야만 훨씬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쉬워요.

감은빛 님의 좋은, 인간미 나는 글들도 잘 읽고 있습니다. 추위에 건강 잘 챙기세요.^^

2013-11-27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중경삼림, 95년에 개봉관에서 봤어요. 그치만 밤샌 후 이전 영화의 기억을 안고 피폐한 상태로 비됴방에서 비몽사몽 본 맥거핀 님 경험이 추억으로선 더 훌륭한 듯요.ㅎㅎ 스틸라이프는 역시 개봉관에서 봤는데, 잠과 꿈 사이사이로 스틸 사진처럼 장면 장면 끊긴 채로 봤지요..ㅋ

맥거핀 2013-11-28 01:28   좋아요 0 | URL
드디어 진짜가 나타나셨군요. 개봉관에서 이 영화를 보신 분. 섬님도 그 당시 개봉관에서의 추억을 생각해보면 여러가지 얘기거리가 많이 나오실 것입니다요. <스틸라이프>는 저도 개봉관에서 보기는 했어요. 저도 좀 멍하니 봤던 것 같구요. 마지막 장면에서 이건 뭐지 싶어서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납니다.

섬님 오랜만..잘 지내세요?

2013-11-28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개봉관 추억. 이러면 뭐 줄줄이 안 나올 영화가 어디 있겠습니까? 요즘 책도 안 읽고 영화도 많이 안 보는데, 지난 얘기나 반추하며 서재 생활을 해 볼까나요~ㅋㅋ 스틸라이프는 그렇게 좋게 본 것도 아닌데 장면 장면의 기억은 남더군요. 배경이 남다른지, 영화가 남다른지 모르지만요.^^
저는 왜 맨날 오랜만일까요? 자주 글 좀 남겼으면 하며, 저 자신에게 바라는 소망이~ㅋ 잘 지내긴 합니다. 가을도 좋았고, 겨울도 좋고~~

맥거핀 2013-11-28 22:40   좋아요 0 | URL
섬님도 보따리를 풀어놓으면 여러 재미있는 추억이 많이 나올듯 한데요. (뭐 지방이 더하지만) 서울에도 참 사라진 영화관들도 많고 해서요. 사라진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늘 애틋한 마음이 듭니다.

스틸 라이프는 영화를 볼 때에는 무슨 얘기인가 좀 어리둥절했는데, 영화를 보고 여러 글들을 읽으며 뒤늦게서야 많이 생각하게 된 영화입니다. 그게 남다른 영화라는 증거일까요?

잘 지내신다니 좋습니다. 좋아요.

네오 2013-11-28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플픽 일대종사네요,,왕가위를 이야기하면 추억을 안 말할수는 없죠,,ㅋㅋㅋㅋ 저도 중경삼림으로 그의 필모를 시작했지만 아니 어쩌면 내 희미하게나마 영혈남아일수도 있겠군요,,저는 처음중경삼림보고 친구들에게 타란티노뻬껴네 하며 주절주절 떠든게 생각이 나네요,, 그이후 마음을 고쳐잡고 그를 다시 숭상하긴 했지만 지금은음 별로 그렇게 많이 좋아하지는 않아요^^,,누군가가 왕가위 베스트를 뽑아길래 저는 그러한 마음에 동참하고자 일위 2046, 이위 동사서독, 그리고 삼위는 화양연화 이정도요,,(앗 나도 한번 추억에 젖어 왕가위를 써볼까나;;;;;)

맥거핀 2013-11-28 22:47   좋아요 0 | URL
아..왕가위 영화하면 다들 누구나 추억 한가지 씩은 있으신 모양입니다. 저만의 왕가위이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가 없군요. 아..<열혈남아>도 있었죠. 영화보다는 음악이 더 생각나는 영화...

왕가위 베스트라..저도 심심한데 꼽아볼까요. 1위는 중경삼림, 2위는 일대종사...3위는 이거 참 애매한데...2046하고 아비정전 중에 무엇을 꼽아야할지...

Shining 2013-11-28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거 저를 위해(?) 가져오신 글인가요? 어쩐지 뿌듯해지는데요(웃음).

저는 가장 처음 본 영화가 중경삼림이었던 것 같고 극장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네요; 비디오나 비디오나 비디오로...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는 작년엔가 VOD로 봤는데 기억 나는 장면은 블루베리 케이크였던가 밖엔;; 그의 영화는 (제게) 영화의 제작이나 개봉 시대가 아니라 제 머릿속에 90년대에 대한 관념 자체. 몇 번이고 돌려본 비디오의 낡은 줄과 약간 튀는 소리까지도 하나의 영화처럼 기억이 되요. 그러고 보니 왕가위에 대한 추억을 쓰라면 페이퍼 몇 개쯤은 다들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감독인 것 같아요. 회상같기도 하고 회한같기도 한 추억.

저는 DVD를 구매해도 코멘터리를 잘 안 보고 안 들어요. 이상하게, 그렇게 되네요.

Shining 2013-11-28 21:26   좋아요 0 | URL
저도 대학에서 하는 영화를 하루에 세 편 몰아서 본 적이 있어요, 하루는 세 편 다 뮤지컬 영화였고 하루는 또 다른 주제였고 그랬는데. 다같이 영화를 봤는데 일행의 반은 잤고 나머지 반의 반은 지루해 죽는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저는, 낯설고 이상하지만 좋았는데 말이죠. 그래서 저도 모르게 난 좋았는데, 라는 말을 삼키고 말았어요. 다같이 같은 영화를 본다고 결코 같은 감수성을 가질 수 없다는 아주 단순하지만 뼈 아픈 사실을 깨달은 시간이었죠. 근데 이상하죠? 그 영화가 무슨 영화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요. 장면은 대충 기억이 나고 마음 먹고 찾으면 찾을 수야 있겠지만 이제는 뭐, 모르면 어떠냐 싶은 마음이에요(하하).

나중에 보니 브레송 영화의 한 장면은 트뤼포 것으로 기억하고 잠깐 본 자료 때문에 에릭 로메르의 영화 한 편을 다 본 줄 알고 착각도 하고. 생각해보면 제대로 본 영화가 무엇인지,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도 계속 영화를 보고 느낀다고 생각하고 기억한다고 믿는게. 가끔은 신기해요 제 자신이.

덧) 댓글이 길고 중언부언이라 죄송합니다(꾸벅).

맥거핀 2013-11-28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hining님이 예전 왕가위 영화 얘기하시길래, 예전에 썼던 글이 생각이 나서요. 근데 요즘에 무슨 왕가위 회고 주간인가요? 서울에도 왕가위 영화 특별전하던데..별 관심없었는데, 예매자들 대상으로 왕가위 친필 싸인 DVD를 준다는 이벤트에는 좀 혹하긴 했습니다.

아무튼 왕가위는 가히 90년대의 아이콘이라 불릴만하죠. 당시 영화 좀 본다 하는 친구들은 왕가위 얘기 안하는 친구들이 없었죠. 이제는 좀 지나간 옛이름 같이 여겨지기도 하지만, 얼마 전에 일대종사 보고는 와...그래도 왕가위다,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

아..그렇군요. 저는 코멘터리를 무척 좋아하는 편이라, 어떤 영화들은 코멘터리를 듣기 위해 DVD를 구입하기도 합니다. 물론 또 그중 상당수의 영화들은 아이 참 정말 내용 허접하네, 싶은 코멘터리들도 많지만..아무튼 확실히 칭찬만 하는 코멘터리보다는 까는(?) 코멘터리들이 재미있기는 해요.^^

맥거핀 2013-11-28 23:21   좋아요 0 | URL
네..같은 영화를 봐도 다들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나쁨에도 농도가 있고, 또 좋음에도 농도가 있죠. 아무튼 그 때는 대학 잔디밭에 턱 앉아서 영화를 보던 그런 때였으니까요. 지금은 추우니, 바닥에 풀 뭍으니, 소리가 제대로 잘 안들리니 불평하면서 안보겠죠. (쓰다 보면 슬플 줄 알았는데, 감정이 메말랐는지 안 슬프네요.)

근데 이상하게도 예전에 대학 때 이러저러 본 영화들은 기억이 잘 나는데, 최근에 영화관에서 본 영화들은 잘 기억이 안나요.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것도 약간 그와 관련된 부분이 있는데, 이제 기억보다는 기록에 의존하게 되요. 그리고 기록해 놓지 않은 것은 이제 다 잊어버리고 맙니다. 예전에는 기록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지만 이상하게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하고는 했었는데...영화들이 나빠진 것인지, 아니면 내 기억력이 나빠진 것인지, 아니면 훨씬 둔감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아마도 맨 마지막 이유 때문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