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버트 그레이프
라세 할스트롬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출연 / 익스트림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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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5일, 별 특별할 것도 없는 날. 모처럼 아내가 영화를 보잔다. 선택권은 늘 내 차지. 티-브로드에서 영화목록을 검색하다가 눈에 딱 들어오는 걸 발견했다.  "이거, [길버트 그레이프] 볼까?" '보자'와 '볼까?'는 뉘앙스에서 굉장한 차이가 있다.

 

1993년 작품이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니 패거리들과 한참 영화보러 다니던 때다. 허나 검색해 보니 국내 개봉은 이듬해인 1994년 6월 11일로 나온다. 딱 군대 입대시기와 겹친다. 그 무렵이면 영화를 보러 돌아다닌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보지 못하고 있다가 우연이지만 오늘에야 운좋게 기회가 온 것이다.

 

다음의 간단 스토리는 '다음 영화'에서 발췌했음을 밝힌다.

인구 1091명이 사는 아이오아주 '엔도라'에 사는 길버트 그레이프(Gilbert Grape : 죠니 뎁 분)는 식료품 가게의 점원으로 일하며 집안의 가장으로써의 역할과 가족들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욕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에게는 남편이 목 매달아 자살한 이후의 충격으로 몸무게가 500파운나 나가는 거구인 어머니(Momma : 다레네 캐이츠 분)와 정신 연령이 어린 아이 수준인 저능아 동생 어니(Arnie Grape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과 34살의 누나(Amy Grape : 로라 해링턴 분)가 있고, 16살로 한창 멋내기를 좋아하는 미모의 여동생 엘렌(Ellen Grape : 매리 케이트 쉘하드트 분)이 있다. 틈만나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하는 동생 어니는 어머니의 엄청난 몸무게와 함께 집안의 골칫거리이다. 그러나 형의 말은 절대적으로 따른다. 여동생 엘렌 또한 항상 불만에 쌓여 사는 길버트가의 또하나의 골칫거리다.

길버트에게는 터커(Tucker Van Dyke : 존 C. 레일리 분)와 보비(Bobby McBurney : 크리스핀 글로버 분)라는 두 친구가 있다. 터커는 패스트푸트 연쇄점을 개업해서 돈도 많이 벌고 밀크쉐이크도 많이 먹는게 꿈이다. 만나면 항상 친지들의 안부를 묻는 보비는, 아버지가 장의자를 하고 있어서 영구차를 운전하고 있다. 길버트는 최신식 패스트푸드랜드를 싫어하기 때문에 오래된 램슨씨의 식품점에서 일한다.

한편, 캠핑족 소녀 베키(Becky : 줄리엣 루이스 분)는 자동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엔도라에 머무르게 되고, 우연히 가스탱크에 올라 가 있는 어니를 따뜻하게 대하는 길버트를 보게 되고, 그의 순수한 마음에 호감을 갖게 된다. 길버트 또한 같은 또래의 여자인 베키에게 끌리게 되고 둘은 서로의 내면을 아껴 주는 순수한 사랑을 하게 되는데...

아주 작은 시골 마을, 해마다 지나가는 캠핑카 행렬 정도가 신기한 구경거리가 될만큼 평범하지 못해 지루한 일상들. 가장의 자살과 맏이의 가출. 우울증으로 인한 폭식으로 '물밖에 나온 고래'가 되어 아이들의 놀림감으로 전락해 버린 어머니와 저능아가 포함된 4남매. 얼핏보면 이미 붕괴되어 버렸어야 할 가족의 일상사가 잔잔하게 진행된다. 무엇이 이 가족을 결속시키는 지 의아할 정도다. 게다가 이건 미국의 이야기가 아닌가. 서로에 대한 책임감인지 사랑인지 모를 그 무엇이 길버트를 지배하고 있다. 베키가 묻는다.

 

"네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니? 가족들 말고 너만을 위한 것 말이야"

 

한국이라는 사회에서는 무수한 길버트가 있음을 안다. 자신을 희생하여 동생의 학비를 벌었던 어머니, 가족을 위해 평생 동안 두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다녔던 아버지 등. 한국적 정서에서는 이렇게 자신을 희생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그런 가정형편을 딛고 그런 숭고함에 힘입어 부끄럽지 않은 사회의 일원이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들을 위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은퇴로 내몰려 축 처진 어깨, 초라한 몰골로 공원을 배회하는 베이비 붐 세대는 또 얼마나 많은가.

 

미국의 정서는 다르다. 누군가가 가족 공동체를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문화는 낯설다. 절망적인 현실에 너나 할 것 없이 같이 시들어 가지 말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 과감히 굴레를 벗어던지라고 강요한다. 진정한 행복을 찾아 가라고 한다. 적어도 나는 여태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길버트 가족의 모습은 낯설지만 아름다워 보인다. 4남매 중 누구하나 절망하지 않는다.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기 몫을 한다.

 

길버트는 어니의 열여덟번째 생일을 앞두고 꼬질꼬질한 어니를 목욕시키려고 하지만 지난번 목욕때 욕조에 장시간 홀로 방치된 적이 있었던 어니는 필사적으로 목욕을 거부한다. 길버트는 흥분한 나머지 심하게 어니를 때린 후, 트럭을 몰고 어디론가 질주한다. 아마 이 영화의 결정적 장면이 아닌가 한다. 얼마가지 않아 멈춰선 길버트. 한참을 생각한 후 차를 돌린다. 그리고 다음날 성대하게 차려진 생일 파티.

 

베티의 질문에 대해 길버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거? 가족들 말고 나만을 위한 거? 글쎄..." 영화는 떠난 베키가 돌아와 길버트와 재회하면서 희망적인 메시지를 남긴 채 막을 내린다. 치유가 무엇인지, 희망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수작을 봤다.

 

p.s. 지금 헐리우드에서 없어선 안될 중년 배우들인 조니 뎁,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줄리엣 루이스의 풋풋한 연기는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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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강신주가 스피노자가 정리한 48가지 감정을 그의 뛰어난 사유로 풀어썼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각각의 감정과 부합되는 자신의 독서목록을 연결하면서 저자의 어드바이스를 추가했다. 감정의 종류가 이토록 다양하다는 것도 새삼스럽거니와 세계 문호들의 작품들을 간접적으로노마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좋았다. 아직 세상이 깨어나기 전 늦은 새벽에 오랜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기에 적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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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강신주의 감정수업-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19,500원 → 11,300원(42%할인) / 마일리지 0원(0%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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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광장 / 구운몽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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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팔순을 맞은 원로 작가 최인훈 선생을 처음 접한것은, 언제인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도 않는 오래 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통해서 였다(어라! 제목이 얼마전에 읽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비슷하다). 어떤 내용인지 기억도 희미한 이 중편소설(사실 그때 읽은 게 고 박태원의 작품인지 최인훈의 패러디인지 모르겠다)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흥 또한 남아있지 않다. 가끔씩 최인훈 선생이 소설가 최인호와 헷갈리기까지 한 문외한이었음을 고백한다.

 

분단문학이라면 [태백산맥]이 기억날 뿐 뾰족히 골라 읽은 기억도 없다. 특별히 이데올르기 문제로 고민한 세대도 아니거니와 사실 나의 젊은 시절은 조국의 분단 현실이나 좌우 이념 대립 따위에 신경쓸 만큼 무엇을 겪은 시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보여준 선배들의 일방적인 꼭두각시 놀음에 운동권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 쌓여갔던 기억이 난다. 마치 본질은 숨긴 채 과장 허위광고로 물건을 떠맡기려는 외판원 같다고 여겼었다.

 

오늘 [광장]을 마쳤다. 아니 시작했다고 봐야 할까. 나와 달리 굴곡진 현대사의 한복판에 있었던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 이야기다. 남과 북, 그리고 나약한 인간의 이야기다. 지적으로 꽉 찬 젊은이의 이념과 사랑의 슬픈 진혼곡이다.    

 

윗목에 놓인 책장에 마주선다. 한번 죽 훑어본다. 얼른 뽑아보고 싶은 책이 없다. 4백권 남짓한 책들. 선집이나 총서, 사전류가 아니고 보면, 한 책씩 사서는 꼬박 마지막 장까지 읽고 꽂아놓고 하여 채워진 책장은 한때 그에게는 모든 것이었다. 월간 잡지가 한 권도 끼지 않았다는 게 자랑이다. 그때그때, 입맛이 당긴 책을 사서 보면, 자연 그 다음에 골라야 할 책이 알아지게 마련이다. 벽 한쪽을 절반쯤 차지하고 있는 이 책장을 보고 있으면, 그 책들을 사던 앞뒷일이며, 그렇게 옮아간 그의 마음의 나그네길이, 임자인 그에게는 선히 떠오르는 것이고, 한권 한권은 그대로 고갯마루 말뚝이다. 43p

 

주인공 이명준의 지식 수준이 어떠할 지 짐작하고도 남음직한 대목이다. 1960년 처음 이 소설을 발표할 당시 저자의 나이 겨우 스물다섯이었다고 하니 추측하건데 이명준의 책장은 저자의 책장이었을 것이다. 이명준의 지적 수준은 25세의 저자 최인훈의 지적 수준을 대변한다.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읽기가 쉽지 않아 여러번 접었다 폈다 할 만큼 노력과 인내가 필요했던 이유다.

 

내가 읽은 광장은 1960년 판이 아니라 그 후 여섯 개의 판본 중 최종 판본이라고 볼 수 있는 1989년판이다. 요즈음은 오히려 더 불편한 우리말 표현*이 다수 있는 것도 쉽지 않았고, 호흡이 짧으면서도 익숙치 않은 문체에 적응하는데도 다소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낯섬이 익숙해지는 어느 순간 탄력을 받게 되자, 전에 읽었던 어떤 소설보다도 강한 흡입력을 느끼며 이명준의 동선을 따라가고 있는 나를 보았다.

 *작가는 1976년 개정판을 내면서 한자어를 비한자어로 고치는 작업을 했다고 밝힌다.

 

'광장'과 '밀실', 남과 북, 현실과 이상, 혁명과 반동... 여러가지가 서로 대치점에 있을 수 밖에 없었던 비극의 시대를 온몸으로 받아냈던 이명준의 선택을 살피는 것으로 리뷰를 갈음하고자 한다.

 

1. 월북

 

이명준의 아버지는 조국이 해방되던 해 월북했다. 단둘이 남은 어머니도 곧 돌아가시고 홀로 남게 된 이명준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은행원으로 가정 형편이 괜찮은 변00 댁에서 지내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특별한 애착이 없었던 그에게 형사가 들이닥쳐 대뜸 아버지에 대해서 물으면서 폭행을 가한다. 아버지가 최근 방송으로 대남 선전을 한다는 이유에서다. '젊고 가난한 철부지 책벌레'에 불과했던 그는 아버지의 월북과 철학 전공학생이라는 이유때문에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게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는 어떻게 맞이했으면 좋을 지 어리둥절한 어떤 풍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원칙도 절차도 없이 공권력으로부터 그에게  가해진 린치는 자신에게는 법적 보호장치도 작동하지 않음을 깨닫게 했다.

그즈음 마음을 준 윤애의 알쏭달쏭한 태도도 명준의 혼란을 가중시킨다. 위로를 원했지만 서로가 원하는 것이 같지 않은 듯한 느낌. 문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애간장만 태우다가 결국 발길을 돌리고 마는 고약함 같은 관계? 기별도 없이 인천 윤애 집에 들렸다가 아애 며칠 묵게 되었을 때 그 며칠이 꼭 그랬을 것 같다. 명준은 윤애에게 아주 작은 암시도 없이 대뜸 월북선을 탄다.

도대체 무슨 기대를 가지고 갔을까? 아버지를 만나러? 만나서 따질려고?

 

그가 본 북한은 상상했던 그런 곳과는 전혀 달랐다.

명준이 북녘에서 만난 것은 잿빛 공화국이었다. 이 만주의 저녁 노을 처럼 핏빛으로 타면서, 나라의 팔자를 고치는 들뜸 속에 살고 있는 공화국이 아니었다.  ~~ 학교, 공장, 시민회관, 그 자리를 채운 맥빠진 얼굴들. 그저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아무 울림도 없었다. 혁명의 공화국에 사는 열기 띤 시민의 얼굴이 아니었다.

 

~~어느 모임에서나, 판에 박은 말과 앞뒤가 있을 뿐이었다. 신명이 아니고 신명난 흉내였다. 믿음이 아니고 믿음의 소문뿐이었다. 월북한 지 반년이 지난 이듬해 봄, 명준은 호랑이굴에 스스로 걸어들어온 저를 저주하면서, 이제 나는 무얼 해야 하나? 무쇠 티끌이 섞인 것보다 더 숨막히는 공기 속에서, 이마에 진땀을 흘리며, 하숙집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넋두리인 듯 쏟아내던 북녘땅의 모순들 속에 유일한 위안은 발레리나 은혜였다. 그녀의 육체를 탐하던 명준은 공연차 모스크바로 가려던 은혜를 설득 끝에 그녀로부터 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끌어낸다. 그래도 조바심이 났던 명준은 1950년 전쟁발발 전 은혜가 모스크바로 떠났다는 것을 저녁신문을 보고 알게된다.

 

2. 중립국

 

전쟁발발후 공산군 정치보위부 일원으로 서울로 돌아온 명준은 변태식의 아내가 된 옛 연인 윤애를 만난다. 철저한 악인이 되려던 명준은 그것도 제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게되고 태식과 윤애를 놓아준다. 간호병사가 된 은혜를 다시 만난 것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 낙동강 전선 어디쯤이었다. 명준은 전세 변화에 몰려 낙동강 전선에서 포로로 붙잡혀 거제도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북으로 갈 것인가. 남으로 갈 것인가. 양측의 갖은 회유와 협박 속에서 명준은 오로지 중립국만을 되뇌인다. 왜?

 

싸움이 멎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명준은 깊은 수렁에 빠졌다. 북으로 돌아갈 생각은 아예 없었다. 아버지가 전쟁중에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알 수는 없었으나, 설령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 한 가지만으로 북을 택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살 테지. 효도 같은 걸 하기엔, 현실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리고 북녘 같은 데서 살붙이란 무엇이던가. 그러고 보면, 이제 그가 북으로 가야 할 아무 까닭도 없었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은혜도 없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회에 들어 있다는 것은 풀어서 말하면 그 사회 속의 어떤 사람과 맺어져 있다는 말이라면, 맺어질 아무도 없는 사회의, 어디다 뿌리를 박을 것인가. 더구나 그 사회 자체에 대한 믿음조차 잃어버린 지금에. 믿음 없이 절하는 것이 괴롭듯이, 믿음 없이 정치의 광장에 서는 것도 두렵다.

 

아무런 추억도 없는 아버지는 명준에게 더이상 '맺어진' 어떤 관계가 아니었다. 북에서 맺어진 유일한 관계인 은혜는 '낙동강에 물이 아니라 피가 흘렀다'는 유엔군의 공습에 전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있다면 악연이 있을까, 맺어진 관계가 없기는 남쪽도 마찬가지였다. 윤애는 친구 태식의 아내가 되었고 태식과는 사상적으로 적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남의 체제가 그를 용납하기에는 한계를 넘어서 버렸기 때문이다.

 

중립국.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땅. 하루종일 거리를 싸다닌대도 어깨 한번 치는 사람이 없는 거리. 내가 어떤 사람이었던지도 모를 뿐더러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

 

명준은 맺어진 맺어질 아무도 없는 사회인 북을 단념하면서 맺어질 관계는 고사하고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 조차 없는 중립국을 원하고 있다. 그래서 '병원 문지기'라도 좋고, '극장 매표원', '소방서 감시원'따위의 별 생각없이 몸만 쓰는 단순 노동으로 살아가는 상상을 한다.

 

그래서 결정된 곳이 인도. '타고르'호에 몸을 싫고 물살을 가른다.

 

3. 자살, 아니면 재회?

 

명준의 신경을 거스리며 타고르호 옆을 따르는 두마리 갈매기, 환각처럼  그를 괴롭히던 흰색 어미새와 새끼새. 일렁이는 파도 때문인가, 혼란스러운 자의식 때문인가, 구토를 하면서도 총구를 겨누자 '다른 한 마리의 반쯤한 작은 새'가 눈에 들어 왔고 이내 그 새가 누구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

 

사람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 성격까지도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성격을 골라잡다니! 모든 일이 잘 될 터이었다. 다만 한 가지만 없었다면. 그는 두 마리 새들을 방금까지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무덤 속에서 몸을 푼 한 여자의 용기를, 방금 태어난 아기를 한 팔로 보듬고 다른 팔로 무덤을 깨뜨리고 하늘 높이 치솟는 여자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 만 그들의 사랑을.~~

 

자기가 무엇에 홀려 있음을 깨닫는다. 그 넉넉한 뱃길에 여태껏 알아보지 못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피하려 하고 총으로 쏘려고까지 한 일을 생각하면, 무엇에 씌웠던 게 틀림없다. 큰일날 뻔했다. 큰 새 작은 새는 좋아서 미칠 듯이, 물 속에 가라앉을 듯, 탁 스치고 지나가는가 하면, 되돌아오면서, 그렇다고 한다. 무덤을 이기고 온, 못 잊을 고운 각시들이, 손짓해 부른다. 내 딸아.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옛날, 어느 벌판에서 겪은 신내림이, 문득 떠오른다. 그러자, 언젠가 전에, 이렇게 이 배를 타고 가다가, 그 벌판을 지금처럼 떠올린 일이, 그리고 딸을 부르던 일이, 이렇게 마음이 놓이던 일이 떠올랐다. 거울 속에 비친 남자는 활짝 웃고 있다.

 

명준과 은혜만의 은밀한 공간인 굴안에서 그들이 마지막 만나 사랑을 나누고 났을 때 은혜는 수줍게 고백했다. 딸을 낳을 거라고. 은혜의 기름진 배 아래 '그들의 딸이라고 불릴 물고기 한 마리가 뿌리를 내렸다'고. 그렇다. 은혜가 고백한 그 날을 마지막으로 명준은 은혜를 더 이상 만나지 못했고 전사 소식만을 들었다. 그런데 그 아내가 무덤속에서 몸을 풀고 새가 되어 딸과 함께 자신을 따르고 있다.  명준은 더 이상 중립국으로 갈 이유가 없어졌다. 자신이 맺은 여자와 딸이 손짓해 부르고 있는 이상 그가 가야 할 곳은 한 곳이다. 자신을 온 몸바처 유일하게 사랑했고 자신 또한 사랑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감정으로 탐했던 은혜와, 그리고 둘의 사랑의 결실인 얼굴도 못본 혈육이 있는 곳, 더 이상 형이상학적인 이념 따위로 현실에서 버림받지 않아도 되는 휴식의 공간으로 간다.

 

이명준의 세번의 선택과 그를 기다리는 운명, 어느 것하나 보장되는 것이 없다. 선택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스스로의 단호한 투자라고 본다면 언제나 리스크가  클 수 밖에 없는 법이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한걸음이라도 나아 갈 수 있을까.

 

올바른 선택을 위한 다양한 질문이 준비되고,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다면 지금의 선택은 다른 선택을 위한 충분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명준은 길지 않은 짧은 한살이를 살면서 비겁하게 굴지 않았다. 그는 누구에게도 휩쓸리지 않고 자기 내면의 질문을 찾아 여행하는 '오디세우스'였다. 명준은 어디에선가 행복할 것이다. 그가 한 최종 선택은 결국 그를 구원할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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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 (양장) - 우리의 일기장을 채울 따뜻한 일상의 조각들
탄줘잉 엮음, 김명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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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일이 어찌 49가지 뿐이겠나마는, 이런 책도 있다. 책장 한켠 아내가 나를 만나기 전에 소장하고 있던 책들 틈에 이 책이 있었다. 좀 가볍게 읽을 것이 없을까 하던 차에 잘 되었다 했다. 중국의 젊은 에세이 작가가 일상에서의 소소한 에피소드나 기존부터 있었을 법한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둔 것인데 이게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일종의 버킷리스트 같은 '나만의 취미 갖기', '소중한 친구 만들기', '고향 찾아가기' 등 49가지의 목록이 나름 심상치 않은 생각의 꼬리물기를 자극했지만 내용은 그야말로 평범했다. 아니 잔잔했다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다. 오히려 이 책의 미덕은 책 내용에 있는 에피소드가 아니라 각각의 목록이 나만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마중물 역할을 해주는 것에 있다는 생각이다.

 

가령  '혼자 떠나 보기' 대목에서 고등학교 까까머리 때 낯선 시외버스를 집어타고 무턱대고 어디론가 떠났던 추억이 떠오르는 식이다. 당시 나는 갈 방향을 찾지 못하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 버스는 나를 옥천의 어느 5일장 한복판으로 안내했다. 지금으로부터 25년전 90년대 초반의 시골 장터는 그야말로 정겨운 풍경으로 남아있다. '쌍두사'를 보여주겠다며 사람을 유혹해 놓고 감질맛나게 애간장을 녹이던 약장수며, 한여름 들에서 달구었을 붉은 얼굴의 촌부들, 그리고 '뻥이요'를 외치던 뻥튀기 장수의 목청이 참으로 우렁차다고 느꼈었다. 장터 끝마루 쯤 자리잡은 시골 영화관의 촌스러운 그림 간판도 불명확한 윤곽으로 떠오른다. 그때 나는 그 낯선 공간에서 무엇을 가지고 돌아왔는지  다시 생각에 잠겨 본다. 그게 무엇이었지? 무엇이었더라? 잘 떠오르지 않는다. 글로 잘 표현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다음날 학교가는 발걸음이 꽤나 가볍게 느껴졌었다는 것 뿐... 맞다. 혼자 떠나 본다는 것은 익명의 공간에 나를 떨구어 놓고 새로운 실험을 하는 것과 같다. 안해본 것을 해보고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어보고 익숙치 않은 느낌에 젖어보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 아마도 다른 많은 독자들도 이 책을 읽을 때, 49가지 할 일 중에서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한 추억과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한 아쉬움, 몇가지는 앞으로 꼭 해보겠다는 다짐들이 동시에 떠오르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렇게 좋은 느낌으로 리뷰를 작성하는 중에 인터넷에서 아쉬운 뉴스가 하나 검색된다. 요즘도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표절과 관련한 소식이다. 아무래도 아래 기사 전문을 옮겨 놓는 것으로 리뷰를 마쳐야 할 것 같다.

베스트셀러 서적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에 대해 법원이 저작권 침해 판결을 내렸다. 서울고법 민사5부(부장판사 황한식)는 중국 출판사인 선양원류사가 위즈덤하우스와 교보문고 등 대형 서점 8곳을 상대로 낸 저작권 침해금지 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고 5일 밝혔다.

재판부는 “위즈덤하우스와 각 서점은 책의 판매를 중단하고 선양원류사에 4억원을 배상하라”며 “위즈덤하우스가 선양원류사의 허락 없이 45개 이야기를 선별해 출판한 것은 이야기 각각에 대한 저작권을 침해한 행위”라고 말했다.

중국 작가 탄줘잉·왕징은 전래 미담과 창작 이야기를 묶어 2003년 선양원류사에서 ‘일생에 해야 할 99가지 일’을 출판했다. 한국 출판사 위즈덤하우스는 선양원류사와 출판권 계약을 맺은 북경공대출판사와 판권 계약을 체결하고 2004년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를 펴냈다. 책의 이야기 중 45가지는 탄줘잉·왕징의 책에서 발췌한 것이었다.

이 책은 110여만부가 팔렸고, 선양원류사는 ‘위즈덤하우스와 한국의 서점이 저작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소송을 냈다. 위즈덤하우스 측은 ‘일생에 해야 할 99가지 일’이 기존에 있는 이야기를 수집한 것이기 때문에 창작물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10.7.5. 쿠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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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문학 베스트 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가형 옮김 / 해문출판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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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더위에 지친 요즘, 쫄깃쫄깃한 스릴을 느끼고 싶다면 그녀의 세계로 들어가 보라. 생각 이상의 최고를 경험할 것이다. [텐 리틀 인디언스]로도 알려져 있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읽는 순간 낯설지 않은 여러 장면들이 당신 앞에 펼쳐질 것이다. 1939년에 세상에 나온 이 작품은 이후 전 세계의 무수한 영화, 드라마, 추리소설, 희곡, 만화, 게임, TV쇼 등에 영향을 주면서 우리 주변에 숨쉬어 왔음을 알게 될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1891년 영국 데번 주 시골 마을에서 미국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녀가 어렸을때 일찍 죽었고 그후 어머니 밑에서 가정교육을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에 푹 빠져 지냈다고 한다. 게다가 운이 좋게도 저명한 추리소설 작가 이든 필포츠(1862~1960)를 이웃으로 두어 그의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 아마도 이때 추리소설 작가로의 그녀의 이력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1920년 첫 장편소설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을 발표하자 마자 그는 단번에 스타작가의 반열에 올랐고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그로부터 19년 후에 발표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총 66편의 장편과 150여편의 중·단편 중 국내 독자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2011년 이후 종이책 판매량 기준, 황금가지 제공)이 바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이다.  이 작품은 엘러리 퀸의 [Y의 비극],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과 함께 세계 3대 추리소설 혹은 세계 3대 미스터리 소설로 손꼽힌다. 전세계적으로는 1억부 이상이 팔렸으며, 1945년에는 동명의 영화(르네 클레르 감독)로도 만들어졌다.

 

외딴섬, 8명의 손님과 2명의 하인, 열꼬마 인디언 인형, 예고된 살인, 미궁에 빠진 사건, 그리고 파국. 아래의 인디언 동요를 잘 기억하시길...

 

열 명의 인디언 소년이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

한 명이 목이 막혀 죽어서 아홉 명이 되었다.

 

아홉 명의 인디언 소년이 밤늦게까지 자지 않았다.

한 명이 늦잠을 자서 여덟 명이 되었다.

 

여덟 명의 인디언 소년이 데번을 여행했다.

한 명이 거기에 남아서 일곱 명이 되었다.

 

일곱 명의 인디언 소년이 장작을 패고 있었다.

한 명이 자기를 둘로 잘라 여섯 명이 되었다.

 

여섯 명의 인디언 소년이 벌집을 가지고 놀았다.

한 명이 벌에 쏘여서 다섯 명이 되었다.

 

다섯 명의 인디언 소년이 법률을 공부했다.

한 명이 대법원으로 들어가서 네 명이 되었다.

 

네 명의 인디언 소년이 바다로 나갔다.

한 명이 훈제된 청어에 먹혀서 세 명이 되었다.

 

두 명의 인디언 소년이 햇빛을 쬐고 있었다.

한 명이 햇빛에 타서 한 명이 되었다.

 

한 명의 인디언 소년이 혼자 남았다.

 

그가 목을 매어 죽어서 아무도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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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기 2017-06-15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억 부 이상이 팔린 명실공히 최고의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이자, 출간 이래 항상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미스터리 소설! 세계 3대 추리 소설 중의 하나이자, 수없이 많은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된 최고의 미스터리이며, 애거서 크리스티 자신이 뽑은 제일 좋아하는 작품 목록의 1위에 올라 있다. 외딴 섬에 저마다 숨기고픈 비밀이 있는 열 명의 손님이 초대를 받는다. 저택의 곳곳에 섬뜩한 내용의 동요 가사가 든 액자가 걸려 있고, 그 동요에 맞춰 10명의 손님들은 차례차례 죽음을 맞이하는데…….

“애거서 크리스티가 쓴 중에 가장 대단한 소설이며, 앞으로 논리적 설명을 갖춘 미스터리를 이야기할 때마다 대대로 이 작품이 언급될 것이다.” _ 《뉴욕 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