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광장 / 구운몽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평점 :


올해로 팔순을 맞은 원로 작가 최인훈 선생을 처음 접한것은, 언제인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도 않는 오래 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통해서 였다(어라! 제목이 얼마전에 읽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비슷하다). 어떤 내용인지 기억도 희미한 이 중편소설(사실 그때 읽은 게 고 박태원의 작품인지 최인훈의 패러디인지 모르겠다)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흥 또한 남아있지 않다. 가끔씩 최인훈 선생이 소설가 최인호와 헷갈리기까지 한 문외한이었음을 고백한다.

 

분단문학이라면 [태백산맥]이 기억날 뿐 뾰족히 골라 읽은 기억도 없다. 특별히 이데올르기 문제로 고민한 세대도 아니거니와 사실 나의 젊은 시절은 조국의 분단 현실이나 좌우 이념 대립 따위에 신경쓸 만큼 무엇을 겪은 시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보여준 선배들의 일방적인 꼭두각시 놀음에 운동권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 쌓여갔던 기억이 난다. 마치 본질은 숨긴 채 과장 허위광고로 물건을 떠맡기려는 외판원 같다고 여겼었다.

 

오늘 [광장]을 마쳤다. 아니 시작했다고 봐야 할까. 나와 달리 굴곡진 현대사의 한복판에 있었던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 이야기다. 남과 북, 그리고 나약한 인간의 이야기다. 지적으로 꽉 찬 젊은이의 이념과 사랑의 슬픈 진혼곡이다.    

 

윗목에 놓인 책장에 마주선다. 한번 죽 훑어본다. 얼른 뽑아보고 싶은 책이 없다. 4백권 남짓한 책들. 선집이나 총서, 사전류가 아니고 보면, 한 책씩 사서는 꼬박 마지막 장까지 읽고 꽂아놓고 하여 채워진 책장은 한때 그에게는 모든 것이었다. 월간 잡지가 한 권도 끼지 않았다는 게 자랑이다. 그때그때, 입맛이 당긴 책을 사서 보면, 자연 그 다음에 골라야 할 책이 알아지게 마련이다. 벽 한쪽을 절반쯤 차지하고 있는 이 책장을 보고 있으면, 그 책들을 사던 앞뒷일이며, 그렇게 옮아간 그의 마음의 나그네길이, 임자인 그에게는 선히 떠오르는 것이고, 한권 한권은 그대로 고갯마루 말뚝이다. 43p

 

주인공 이명준의 지식 수준이 어떠할 지 짐작하고도 남음직한 대목이다. 1960년 처음 이 소설을 발표할 당시 저자의 나이 겨우 스물다섯이었다고 하니 추측하건데 이명준의 책장은 저자의 책장이었을 것이다. 이명준의 지적 수준은 25세의 저자 최인훈의 지적 수준을 대변한다.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읽기가 쉽지 않아 여러번 접었다 폈다 할 만큼 노력과 인내가 필요했던 이유다.

 

내가 읽은 광장은 1960년 판이 아니라 그 후 여섯 개의 판본 중 최종 판본이라고 볼 수 있는 1989년판이다. 요즈음은 오히려 더 불편한 우리말 표현*이 다수 있는 것도 쉽지 않았고, 호흡이 짧으면서도 익숙치 않은 문체에 적응하는데도 다소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낯섬이 익숙해지는 어느 순간 탄력을 받게 되자, 전에 읽었던 어떤 소설보다도 강한 흡입력을 느끼며 이명준의 동선을 따라가고 있는 나를 보았다.

 *작가는 1976년 개정판을 내면서 한자어를 비한자어로 고치는 작업을 했다고 밝힌다.

 

'광장'과 '밀실', 남과 북, 현실과 이상, 혁명과 반동... 여러가지가 서로 대치점에 있을 수 밖에 없었던 비극의 시대를 온몸으로 받아냈던 이명준의 선택을 살피는 것으로 리뷰를 갈음하고자 한다.

 

1. 월북

 

이명준의 아버지는 조국이 해방되던 해 월북했다. 단둘이 남은 어머니도 곧 돌아가시고 홀로 남게 된 이명준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은행원으로 가정 형편이 괜찮은 변00 댁에서 지내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특별한 애착이 없었던 그에게 형사가 들이닥쳐 대뜸 아버지에 대해서 물으면서 폭행을 가한다. 아버지가 최근 방송으로 대남 선전을 한다는 이유에서다. '젊고 가난한 철부지 책벌레'에 불과했던 그는 아버지의 월북과 철학 전공학생이라는 이유때문에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게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는 어떻게 맞이했으면 좋을 지 어리둥절한 어떤 풍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원칙도 절차도 없이 공권력으로부터 그에게  가해진 린치는 자신에게는 법적 보호장치도 작동하지 않음을 깨닫게 했다.

그즈음 마음을 준 윤애의 알쏭달쏭한 태도도 명준의 혼란을 가중시킨다. 위로를 원했지만 서로가 원하는 것이 같지 않은 듯한 느낌. 문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애간장만 태우다가 결국 발길을 돌리고 마는 고약함 같은 관계? 기별도 없이 인천 윤애 집에 들렸다가 아애 며칠 묵게 되었을 때 그 며칠이 꼭 그랬을 것 같다. 명준은 윤애에게 아주 작은 암시도 없이 대뜸 월북선을 탄다.

도대체 무슨 기대를 가지고 갔을까? 아버지를 만나러? 만나서 따질려고?

 

그가 본 북한은 상상했던 그런 곳과는 전혀 달랐다.

명준이 북녘에서 만난 것은 잿빛 공화국이었다. 이 만주의 저녁 노을 처럼 핏빛으로 타면서, 나라의 팔자를 고치는 들뜸 속에 살고 있는 공화국이 아니었다.  ~~ 학교, 공장, 시민회관, 그 자리를 채운 맥빠진 얼굴들. 그저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아무 울림도 없었다. 혁명의 공화국에 사는 열기 띤 시민의 얼굴이 아니었다.

 

~~어느 모임에서나, 판에 박은 말과 앞뒤가 있을 뿐이었다. 신명이 아니고 신명난 흉내였다. 믿음이 아니고 믿음의 소문뿐이었다. 월북한 지 반년이 지난 이듬해 봄, 명준은 호랑이굴에 스스로 걸어들어온 저를 저주하면서, 이제 나는 무얼 해야 하나? 무쇠 티끌이 섞인 것보다 더 숨막히는 공기 속에서, 이마에 진땀을 흘리며, 하숙집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넋두리인 듯 쏟아내던 북녘땅의 모순들 속에 유일한 위안은 발레리나 은혜였다. 그녀의 육체를 탐하던 명준은 공연차 모스크바로 가려던 은혜를 설득 끝에 그녀로부터 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끌어낸다. 그래도 조바심이 났던 명준은 1950년 전쟁발발 전 은혜가 모스크바로 떠났다는 것을 저녁신문을 보고 알게된다.

 

2. 중립국

 

전쟁발발후 공산군 정치보위부 일원으로 서울로 돌아온 명준은 변태식의 아내가 된 옛 연인 윤애를 만난다. 철저한 악인이 되려던 명준은 그것도 제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게되고 태식과 윤애를 놓아준다. 간호병사가 된 은혜를 다시 만난 것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 낙동강 전선 어디쯤이었다. 명준은 전세 변화에 몰려 낙동강 전선에서 포로로 붙잡혀 거제도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북으로 갈 것인가. 남으로 갈 것인가. 양측의 갖은 회유와 협박 속에서 명준은 오로지 중립국만을 되뇌인다. 왜?

 

싸움이 멎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명준은 깊은 수렁에 빠졌다. 북으로 돌아갈 생각은 아예 없었다. 아버지가 전쟁중에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알 수는 없었으나, 설령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 한 가지만으로 북을 택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살 테지. 효도 같은 걸 하기엔, 현실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리고 북녘 같은 데서 살붙이란 무엇이던가. 그러고 보면, 이제 그가 북으로 가야 할 아무 까닭도 없었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은혜도 없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회에 들어 있다는 것은 풀어서 말하면 그 사회 속의 어떤 사람과 맺어져 있다는 말이라면, 맺어질 아무도 없는 사회의, 어디다 뿌리를 박을 것인가. 더구나 그 사회 자체에 대한 믿음조차 잃어버린 지금에. 믿음 없이 절하는 것이 괴롭듯이, 믿음 없이 정치의 광장에 서는 것도 두렵다.

 

아무런 추억도 없는 아버지는 명준에게 더이상 '맺어진' 어떤 관계가 아니었다. 북에서 맺어진 유일한 관계인 은혜는 '낙동강에 물이 아니라 피가 흘렀다'는 유엔군의 공습에 전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있다면 악연이 있을까, 맺어진 관계가 없기는 남쪽도 마찬가지였다. 윤애는 친구 태식의 아내가 되었고 태식과는 사상적으로 적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남의 체제가 그를 용납하기에는 한계를 넘어서 버렸기 때문이다.

 

중립국.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땅. 하루종일 거리를 싸다닌대도 어깨 한번 치는 사람이 없는 거리. 내가 어떤 사람이었던지도 모를 뿐더러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

 

명준은 맺어진 맺어질 아무도 없는 사회인 북을 단념하면서 맺어질 관계는 고사하고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 조차 없는 중립국을 원하고 있다. 그래서 '병원 문지기'라도 좋고, '극장 매표원', '소방서 감시원'따위의 별 생각없이 몸만 쓰는 단순 노동으로 살아가는 상상을 한다.

 

그래서 결정된 곳이 인도. '타고르'호에 몸을 싫고 물살을 가른다.

 

3. 자살, 아니면 재회?

 

명준의 신경을 거스리며 타고르호 옆을 따르는 두마리 갈매기, 환각처럼  그를 괴롭히던 흰색 어미새와 새끼새. 일렁이는 파도 때문인가, 혼란스러운 자의식 때문인가, 구토를 하면서도 총구를 겨누자 '다른 한 마리의 반쯤한 작은 새'가 눈에 들어 왔고 이내 그 새가 누구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

 

사람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 성격까지도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성격을 골라잡다니! 모든 일이 잘 될 터이었다. 다만 한 가지만 없었다면. 그는 두 마리 새들을 방금까지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무덤 속에서 몸을 푼 한 여자의 용기를, 방금 태어난 아기를 한 팔로 보듬고 다른 팔로 무덤을 깨뜨리고 하늘 높이 치솟는 여자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 만 그들의 사랑을.~~

 

자기가 무엇에 홀려 있음을 깨닫는다. 그 넉넉한 뱃길에 여태껏 알아보지 못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피하려 하고 총으로 쏘려고까지 한 일을 생각하면, 무엇에 씌웠던 게 틀림없다. 큰일날 뻔했다. 큰 새 작은 새는 좋아서 미칠 듯이, 물 속에 가라앉을 듯, 탁 스치고 지나가는가 하면, 되돌아오면서, 그렇다고 한다. 무덤을 이기고 온, 못 잊을 고운 각시들이, 손짓해 부른다. 내 딸아.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옛날, 어느 벌판에서 겪은 신내림이, 문득 떠오른다. 그러자, 언젠가 전에, 이렇게 이 배를 타고 가다가, 그 벌판을 지금처럼 떠올린 일이, 그리고 딸을 부르던 일이, 이렇게 마음이 놓이던 일이 떠올랐다. 거울 속에 비친 남자는 활짝 웃고 있다.

 

명준과 은혜만의 은밀한 공간인 굴안에서 그들이 마지막 만나 사랑을 나누고 났을 때 은혜는 수줍게 고백했다. 딸을 낳을 거라고. 은혜의 기름진 배 아래 '그들의 딸이라고 불릴 물고기 한 마리가 뿌리를 내렸다'고. 그렇다. 은혜가 고백한 그 날을 마지막으로 명준은 은혜를 더 이상 만나지 못했고 전사 소식만을 들었다. 그런데 그 아내가 무덤속에서 몸을 풀고 새가 되어 딸과 함께 자신을 따르고 있다.  명준은 더 이상 중립국으로 갈 이유가 없어졌다. 자신이 맺은 여자와 딸이 손짓해 부르고 있는 이상 그가 가야 할 곳은 한 곳이다. 자신을 온 몸바처 유일하게 사랑했고 자신 또한 사랑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감정으로 탐했던 은혜와, 그리고 둘의 사랑의 결실인 얼굴도 못본 혈육이 있는 곳, 더 이상 형이상학적인 이념 따위로 현실에서 버림받지 않아도 되는 휴식의 공간으로 간다.

 

이명준의 세번의 선택과 그를 기다리는 운명, 어느 것하나 보장되는 것이 없다. 선택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스스로의 단호한 투자라고 본다면 언제나 리스크가  클 수 밖에 없는 법이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한걸음이라도 나아 갈 수 있을까.

 

올바른 선택을 위한 다양한 질문이 준비되고,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다면 지금의 선택은 다른 선택을 위한 충분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명준은 길지 않은 짧은 한살이를 살면서 비겁하게 굴지 않았다. 그는 누구에게도 휩쓸리지 않고 자기 내면의 질문을 찾아 여행하는 '오디세우스'였다. 명준은 어디에선가 행복할 것이다. 그가 한 최종 선택은 결국 그를 구원할 것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