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버트 그레이프
라세 할스트롬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출연 / 익스트림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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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5일, 별 특별할 것도 없는 날. 모처럼 아내가 영화를 보잔다. 선택권은 늘 내 차지. 티-브로드에서 영화목록을 검색하다가 눈에 딱 들어오는 걸 발견했다.  "이거, [길버트 그레이프] 볼까?" '보자'와 '볼까?'는 뉘앙스에서 굉장한 차이가 있다.

 

1993년 작품이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니 패거리들과 한참 영화보러 다니던 때다. 허나 검색해 보니 국내 개봉은 이듬해인 1994년 6월 11일로 나온다. 딱 군대 입대시기와 겹친다. 그 무렵이면 영화를 보러 돌아다닌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보지 못하고 있다가 우연이지만 오늘에야 운좋게 기회가 온 것이다.

 

다음의 간단 스토리는 '다음 영화'에서 발췌했음을 밝힌다.

인구 1091명이 사는 아이오아주 '엔도라'에 사는 길버트 그레이프(Gilbert Grape : 죠니 뎁 분)는 식료품 가게의 점원으로 일하며 집안의 가장으로써의 역할과 가족들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욕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에게는 남편이 목 매달아 자살한 이후의 충격으로 몸무게가 500파운나 나가는 거구인 어머니(Momma : 다레네 캐이츠 분)와 정신 연령이 어린 아이 수준인 저능아 동생 어니(Arnie Grape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과 34살의 누나(Amy Grape : 로라 해링턴 분)가 있고, 16살로 한창 멋내기를 좋아하는 미모의 여동생 엘렌(Ellen Grape : 매리 케이트 쉘하드트 분)이 있다. 틈만나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하는 동생 어니는 어머니의 엄청난 몸무게와 함께 집안의 골칫거리이다. 그러나 형의 말은 절대적으로 따른다. 여동생 엘렌 또한 항상 불만에 쌓여 사는 길버트가의 또하나의 골칫거리다.

길버트에게는 터커(Tucker Van Dyke : 존 C. 레일리 분)와 보비(Bobby McBurney : 크리스핀 글로버 분)라는 두 친구가 있다. 터커는 패스트푸트 연쇄점을 개업해서 돈도 많이 벌고 밀크쉐이크도 많이 먹는게 꿈이다. 만나면 항상 친지들의 안부를 묻는 보비는, 아버지가 장의자를 하고 있어서 영구차를 운전하고 있다. 길버트는 최신식 패스트푸드랜드를 싫어하기 때문에 오래된 램슨씨의 식품점에서 일한다.

한편, 캠핑족 소녀 베키(Becky : 줄리엣 루이스 분)는 자동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엔도라에 머무르게 되고, 우연히 가스탱크에 올라 가 있는 어니를 따뜻하게 대하는 길버트를 보게 되고, 그의 순수한 마음에 호감을 갖게 된다. 길버트 또한 같은 또래의 여자인 베키에게 끌리게 되고 둘은 서로의 내면을 아껴 주는 순수한 사랑을 하게 되는데...

아주 작은 시골 마을, 해마다 지나가는 캠핑카 행렬 정도가 신기한 구경거리가 될만큼 평범하지 못해 지루한 일상들. 가장의 자살과 맏이의 가출. 우울증으로 인한 폭식으로 '물밖에 나온 고래'가 되어 아이들의 놀림감으로 전락해 버린 어머니와 저능아가 포함된 4남매. 얼핏보면 이미 붕괴되어 버렸어야 할 가족의 일상사가 잔잔하게 진행된다. 무엇이 이 가족을 결속시키는 지 의아할 정도다. 게다가 이건 미국의 이야기가 아닌가. 서로에 대한 책임감인지 사랑인지 모를 그 무엇이 길버트를 지배하고 있다. 베키가 묻는다.

 

"네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니? 가족들 말고 너만을 위한 것 말이야"

 

한국이라는 사회에서는 무수한 길버트가 있음을 안다. 자신을 희생하여 동생의 학비를 벌었던 어머니, 가족을 위해 평생 동안 두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다녔던 아버지 등. 한국적 정서에서는 이렇게 자신을 희생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그런 가정형편을 딛고 그런 숭고함에 힘입어 부끄럽지 않은 사회의 일원이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들을 위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은퇴로 내몰려 축 처진 어깨, 초라한 몰골로 공원을 배회하는 베이비 붐 세대는 또 얼마나 많은가.

 

미국의 정서는 다르다. 누군가가 가족 공동체를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문화는 낯설다. 절망적인 현실에 너나 할 것 없이 같이 시들어 가지 말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 과감히 굴레를 벗어던지라고 강요한다. 진정한 행복을 찾아 가라고 한다. 적어도 나는 여태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길버트 가족의 모습은 낯설지만 아름다워 보인다. 4남매 중 누구하나 절망하지 않는다.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기 몫을 한다.

 

길버트는 어니의 열여덟번째 생일을 앞두고 꼬질꼬질한 어니를 목욕시키려고 하지만 지난번 목욕때 욕조에 장시간 홀로 방치된 적이 있었던 어니는 필사적으로 목욕을 거부한다. 길버트는 흥분한 나머지 심하게 어니를 때린 후, 트럭을 몰고 어디론가 질주한다. 아마 이 영화의 결정적 장면이 아닌가 한다. 얼마가지 않아 멈춰선 길버트. 한참을 생각한 후 차를 돌린다. 그리고 다음날 성대하게 차려진 생일 파티.

 

베티의 질문에 대해 길버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거? 가족들 말고 나만을 위한 거? 글쎄..." 영화는 떠난 베키가 돌아와 길버트와 재회하면서 희망적인 메시지를 남긴 채 막을 내린다. 치유가 무엇인지, 희망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수작을 봤다.

 

p.s. 지금 헐리우드에서 없어선 안될 중년 배우들인 조니 뎁,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줄리엣 루이스의 풋풋한 연기는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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