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들
김중혁 지음 / 창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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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 작가의 장편 소설이다. 김중혁 작가의 첫 소설집 펭귄 뉴스를 읽은 기억은 있는데 사실 내용을 기억하기는 힘들다. 활자들을 읽어내느라 그랬을 터였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제목만 남고 이야기들은 녹아내렸다. 이 이야기와 저 이야기가 이종교배를 하듯 한다. 생성되고 사멸된다. 그렇게 김중혁 작가의 이야기는 내 기억의 뒤편 이야기의 한 켜를 조신하게 지켜왔다.

<좀비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좀비라는 소재와 그것도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이다.
좀비라는 것이 흔히 죽은 사람을 살리는 초자연적인 힘 마법으로 되살아나 시체를 이르는 말이라고 김중혁은 책의 앞머리에 친절하게 적어두었다. 또한 무기력한 사람 얼간이 멍청이라는 뜻도 있다고 병기해두었다. ‘세상의 모든 좀비들에게’라는 묘비명과도 같은 문장이 첫 머리를 지키고 있다. 그렇다면 좀비가 아닌 자들은 읽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인데 안타깝게도 삶의 모든 순간 한 순간이라도 무기력하지 않은 인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좀비들이다. 좀비라는 개별이 아니라 좀비들의 군집체인 좀비들이다. 개별이 대중성 혹은 익명성을 획득하는 순간인데 익명성 속으로 개별이 함몰될 때 안타깝게도 괴물들은 탄생하게 되는 모양이다. 개별이 익명성 뒤로 숨어드는 시기에 사는 우리들은 어쩌면 좀비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익명성과 대중성 속에서 인간되기란 가능할 것인가? 박상륭 식으로 한 번 말해보자면 ‘아흐 누가 저 독룡의 아가리에서 공주를 구해낼 것인가’정도 되겠다.

김중혁은 책의 말미에 좀비들에 대해서 ‘이것은 좀비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잊고 있던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라고 쓴다. 이야기의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 좀비들이긴 하지만 말마따나 현재의 이야기가 아니라 겪었던 이야기다. 잊혀져가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좀비들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사실 좀비이기 전에 사람이었고 가족도 있었고 아버지이기도 어머니이기도 했고 아들이고 딸이기도 했다. 남겨진 사람들에게 잊혀질래야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잠시 잊혀진듯 가라앉은 기억의 편린들을 감당하고 있다.

‘특별한 죽음은 없다. 특별한 죽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죽음을 동경하고 두려워하지만 세사에 특별한 죽음은 없다.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고 0이다.어머니의 죽음도 , 형의 죽음도 , 홍혜정의 죽음도 나에게 조금 특별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곧 나 역시 그 죽음들을 잊을 것이다. 죽음들은 평범해질 것이고 , 쉽게 잊혀질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책의 한 부분이다. 죽음에 관한 서사는 내 관심 중에 하나다. 작가들이 죽음에 대해서 선언해 왔다. 그러나 결국 아무리 특별하게 볼래도 특별할 것이 없다. 특별한 것이 없는 것에 대해 특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도 힘들다. 사실 더 힘든 것은 살아 있는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인데 김중혁은 죽음에 대해서 서술하고 나서 삶에 대해서 이렇게 쓴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0이 되지 말고 , 쉽게 소멸하지 말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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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극장 문학과지성 시인선 190
강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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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시인의 <키스>를 먼저 읽고 시간이 지나간 후에야 <처형극장>을 읽는다. <키스>를 읽었을 때 푸른색의 이미지를 느꼈다면 이번 시집 <처형극장>을 읽을 때는 죽음의 이미지가 시집 전반을 뱀처럼 휘감고 있는 이미지를 느꼈다. 연대를 따져보면 <처형극장>이 먼저 출간 되었고 <키스>가 출간되었다. 그렇다면 죽음의 이미지가 만연해 있는 것이 먼저였고 그나마 정제되고 단련된 모습의 <키스>가 뒤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깊어지지 않았고 옅어져서 세상에 제법 적응해가는 것 같아 보인다.




현실은 ‘신들도 도망 다니’는 곳이지만 시인은 ‘세상의 근골을 읽’으려 애쓴다. 드러난 세상의 표피들이 아니라 표피 뒤에 숨겨진 진피 혹은 이면을 읽으려 한다. 시인으로 태어나게 된 자들의 공동된 숙명 혹은 천형이다. 내가 보기에 젊은 강정이 읽은 세상은 그리 살만한 곳이 못 된다. 세상의 근골을 탐사하는 강정은 그 기저를 잠식하고 있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어떤 식으로 우리 세상에 드리워져 있는가에 대한 탐색이 시작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죽기 위해서 목을 매달고 있다. 정말 죽을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자문한다. ‘연극 속에서 죽기를 원한다. 연극은 내 정말 삶일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흔히 시쳇말에 인생은 연극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수사를 그대로 차용한다. 그렇다 죽지 않는다면 연극은 끝이 나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계속 되는 삶을 향해 ‘이런 제기랄 이렇게 맥도 못 추고 다시 살아야’한다고 찬탄한다.




현재의 삶 속에서 죽음의 수용은 기민하게 이루어지는데 ‘모든 사소한 죽음을 수락’하려고 한다. 죽고싶은 삶이다. 죽음이 현실을 외면하는 가장 안전하고 완전한 방편일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시인 강정은 죽음을 노래하고 경외하고 숭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면의 시들을 읽다보면 죽음이 지배하는 삶에 대해서 약간 빗겨나 있다. 죽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당해야 하는 것이 천형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연극이 끝나는 지점일지라도 그는 무대에서 내려오려 하지 않는다. 되려 죽을 수 있을까라고 사람들에게 묻는다.




인간들이 살아내는 삶의 연대기를 대충 구획해 보면 유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로 대분할 수 있을 것인데 세상에 태어난 그 순간부터 죽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생을 살아가지만 청년기에서 죽음의 수용은 커다란 파문이며 굴절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무의식의 한 부분이 의식적인 부분으로 명징화되는 순간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추상화되어서 의미가 모호하다가 청년기가 지나서 명징해진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인간의 끝을 스스로 인식한다는 것 말이다.




‘팔다리가 묶여 있’지만 ‘벗어나고 싶지 않다‘ 벗어나고 싶지 않은 곳에서 ’이곳에서 죽‘으려고 한다. 처형당하는 극장에서 말이다.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담담히 받아들인다. 강정의 시가 다행스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외면하면서 침울하게 혹은 경박하게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나아간다. 개진하는 것이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것이다.




강정의 시집 <처형극장>을 읽으면서 죽음 이외에 시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적화자에게 아버지는 공포와 억압 혹은 두려움의 존재다. ‘아버지가 외출하셨다. 나는 자유다’라고 말하며 ‘이제는 엄마가 된 계집들 불러모아 떼씹을 벌이’겠다고 하고 ‘침묵이 나를 만들었음을 알았을 때에도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다. 여기서 지루하게 콤플렉스니 뭐니를 따져도 재미없는 일이다. 식상한 비유처럼 식상한 수사며 이론이다.




시의 좋은 구절들이 별빛달빛처럼 많겠지만 마지막 시의 마지막 연을 한 번 보자 ‘바다와 노을이 섞여 피가 되는 곳/ 다시 바다에서 /입관과 재생의 절차가 다시 , 거기서 , 개진되었다’고 쓴다. 태초에 모든 생명이 시작되었다던 바다는 이미 거대한 자궁이다. 자궁 속에서 강정 같은 이 많이 태어나거나 사산되거나 할 것이다. 죽고 태어나고 살고가 반복된다. 아 이 얼마나 지루하고 멸렬하고 다분한 삶을 언제까지 반복하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역시 시에 대해서 쓰는 것은 어렵다. 글을 쓰기 위해 뽑아둔 몇 문장들을 다 써보지도 못하고 글을 마무리 짓는다. 많은 문장들은 욕심이고 헛된 것이다.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바람 사이로 죽음의 기운이 불어와도 좋겠다. 바람이 이끄는 쪽으로 그저 나아갈 것이다. 죽겠다고 죽고싶다고 죽는 것이 그리 쉬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죽음을 대면할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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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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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이라는 글쓰는 이가 있었더랬다. 소설가도 아니고 시인도 아니지만 시와 소설들에 대해서 글을 쓴다. 그렇다. 비평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문학의 언저리에서 책을 읽어 왔지만 문학을 논하는 글들을 잘 읽지 못한다. 세간에서 말하는 비평집들 말이다. 또한 비평집을 읽고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도 힘들어 한다.

 

신형철 씨의 글은 <몰락의 에티카>를 처음 접했고 두 번 째가 <느낌의 공동체>였다. <몰락의 에티카>의 경우에는 700 쪽이 조금 넘는 분량을 자랑하는 두꺼운 책이다. <느낌의 공동체>는 <몰락의 에티카>에 비하면 얇은 축에 속하는 약 400 쪽의 분량이다. 쪽 수만으로도 두 권 다 읽기 만만한 분량은 아니다. 다행스러운 것이라면 모든 쪽이 하나의 주제를 관통하는 것이 아니다 분절되어 있어 읽는 호흡을 끊어 갈 수 있다는 점이다.

 

<몰락의 에티카>의 경우에는 평론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지만 <느낌의 공동체>의 경우에는 에세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다. 두 권을 다 읽어보면 사실 <느낌의 공동체>가 그냥 에세이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몰락의 에티카>에 비하면 에세이집에 가깝다고 말해야 옳다.

 

<느낌의 공동체>는 신문 지면을 통해서 발표된 글들을 모은 것이다. 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서 문화 전반에 대해서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물론 신형철 자신의 본분인 문학에 대한 이야기 소외받고 있지만 굳건히 문학의 한 축을 지키고 있는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한국어로 시를 쓰는 사람은 많다. 별처럼 많고 별처럼 많은 이야기를 한다. 평론가의 역할은 독자의 눈에 띄지 않는 작품과 작가들을 발굴하여 독자들에게 알리는 것이리라. 개인적인 바람을 덧붙이자면 쉽게 쉽게 이야기하여 독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신들만의 직어정신으로 무장한 언어들을 끌어들이지 않고 쉽게 썼으면 한다.

 

사실 <느낌의 공동체>를 읽다가 보면 조금 아쉬운 것이 있는데 감질맛만 나게 썼다고 하는 말로 설명이 될지 모르겠지만 궁금증과 호기심을 슬쩍 부추겨 놓고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신문 지면을 통해서 발표된 것이니만큼 지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알고 있기 때문에 안타깝고 감질맛 나는데 사람이 참 간사한 것이 <몰락의 에티카>를 읽으면 너무 상세하고 심층적인 분석으로 기가 질린다는 것이다. <몰락의 에티카>와 <느낌의 공동체> 중간 정도의 글들을 만나 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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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 효형출판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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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이왕주 

효형출판




얼마 전부터 산행을 하고 있다. 동네 어귀의 가파른 시멘트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그늘진 산등성이가 보인다. 동네를 비추던 따가운 햇볕도 시끄러운 소음도 그 그늘진 산등성이로 들어서면서 아무것이 아닌 것이 되고 나는 같은 세계의 시간을 살지만 다른 공간을 걷는 사람이 된다. 한 시간의 길을 따라 걷다보면 많은 생각들이 피어올랐다 사라진다. 명멸하는 것은 짧은 생각들이다. 분분하게 일어났다가 명멸한다. 적막 속에서 침묵한다. 침묵은 모든 생각들을 삼키고 그저 태초의 혼돈처럼 내재화된 숨소리만 거칠게 반복한다. 그렇게 약 한 시간을 오르다보면 몇 개의 산을 지나 산마루에 이른다. 계단을 타고 꼭대기에 이르면 올려다 보이는 것은 하늘과 구름이고 내려다보이는 것은 사람이 사는 군락과 식물이 사는 군락뿐이다. 바람이 스친다. 한참을 눈을 감고 바람의 흔적을 느낀다.




숨을 고르고 가져온 책을 읽는다. 바람이 스친다. 스치는 바람 사이로 책장을 넘긴다. <철학 , 영화를 캐스팅하다>를 읽는다. 오랫동안의 침묵은 일종의 비워내는 행위가 되어 쓸데없는 헛으로 배운 것들 조금씩 생각한 것들을 덜어내기에 적당한 방법이다. 내 비워진 일부분에 몇몇의 문장을 채운다. 채워지는 문장도 있고 넘쳐 흘러내리는 문장도 있다.바람이 문장을 거르고 날려가지 않은 문장들만 겨우 주워 섬긴다.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는 이왕주 씨가 쓴 글이다. 이왕주 씨는 <쾌락의 옹호>라는 책을 통해서 처음 만났다. 만났고 매료되었다. 그의 문장은 철학자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추상적 언어 속에서 사유하는 것이 아니었다. 두루뭉술하지도 않았고 둘러 가는 것보다는 바로 나아가는 글쓰기를 보여주었다. 수사와 비유의 현현이 아닌 날렵한 글쓰기였던 탓에 담백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세계 1위의 미스터 근육맨의 근육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생활의 달인들이 가질 수 있는 생근육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말이다.




사실 책 내용은 제목에서 다 나왔다. 철학 , 영화 , 캐스팅 이 세 가지가 중요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책은 영화와 영화와 관련된 철학의 한 테제에 대한 설명이 아우러진 모습을 취했다. 예를 들어보자면 트루먼 쇼에서 들뢰즈 이야기 하기 , 메트릭스에서 샤르트르 이야기하기 등이 있다.




철학은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른다. 알려고 해도 그 문을 쉬이 열어주지 않아 그저 그 문 언저리를 기웃거린다. 한 사람의 철학적 사유를 알기에도 너무나 많은 시간과 공력이 걸린다. 하물며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세세한 것까지 다 알려고 한다면 이미 나는 무덤 속에 들어가 있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참으로 재미없는 일이다.




철학이라는 개념과 학문이 가지는 일반인들의 알 수 없는 공포감과 답답함이 어렵다는 편견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견고해지고 있다. 이런 시간의 층위를 깰 수 있는 것은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나야한다. 내부에서 철학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개념을 설명하고 일상적인 것으로 되돌리는 것 일종의 해체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은 일반인들이 아니라 철학의 견고히 단진 사람들의 몫이다.




철학은 영화를 캐스팅했다. 영화를 데려왔다. 데려와서 무엇을 했을까? 자기의 몸뚱이를 깎고 모양을 만들어 영화의 빈자리에 맞춰 넣었다. 한 편의 영화가 탄생하는 것이다. 사실 여기서 나는 의문을 느낀다. 영화가 철학은 캐스팅한 것은 아닐까하는 물음이다. 나는 정확한 답을 말할 수 없다. 대충 배웠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일련의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철학이 영화를 캐스팅하든 영화가 철학을 캐스팅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왕주 시는 영화를 캐스팅 했다. 철학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선택한 영화들을 호명하고 분류하고 적당한 철학자들의 언명들을 불러 모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철학이라는 것이 저 멀리 허황하고 공허한 곳에서 울고 있는 거대한 공포가 아니라 생활 전반에 흩어져서 일반인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만들었다.




책을 읽다보면 좋은 표현들이나 생각해 볼 문장들이 봄날의 꽃눈처럼 돋아난다. 돋아나는 꽃눈들은 개인의 취향에 맞게 선별되고 취하거나 버린다. 이런 의미에서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던 문장을 하나 옮겨 적으면서 <철학 , 영화를 캐스팅하다>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인생이 정말 한 편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멋진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는 왼손 쓰는 삶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왼손을 으스러뜨리려는 폭력은 도처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왕에 한 편의 그림으로 남게 되는 삶이라면 멋진 그림으로 남아야 하지 않겠는가. 보라 지금 당신의 왼손은 어느 주머니 속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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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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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백과사전과 같이 정형화된 문자라면 읽고 암기하는 것으로 문자의 소용은 다하게 된다. 이야기는 안타깝게도 문자 너머에 있다. 문자와 문자들 - 음절과 음절들 - 이 설핏 보면 획일적인 배열에 불과해 보이는 것이 이야기지만 - 음악도 소음의 배열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는 없다. - 문자가 개체가 아니라 군집체가 되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언명처럼 이야기는 태어난다.








이야기에는 보통 외면과 내면이 공존한다. 외면만이 있는 이야기도 있고 내면과 외면이 공존하기도 하고 때로는 적나라하게 내면이 드러나기도 하는 이야기도 있다. 이야기의 외면을 읽는 것을 구조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면 내면을 읽는 것은 의미의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며 내면이니 외면이니 객쩍게 몇 자 적어 본 것은 김언수의 <설계자들>에 대해서 말해보기 위해서다. 외면은 간명하다. 래생이라는 사람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다. 특이한 것이라고는 래생이라는 이름과 그의 직업 정도다. 來生 - 아직 오지 않은 생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며 , 사람을 죽이는 것이 직업이다. 그렇다면 내면은 어떤가?








내면을 탐사할 때부터 책 읽는 자의 유일한 특권이 발동한다. 짧지 않은 시간을 들여서 문자를 읽으며 눈을 혹사시킨 것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다. 오독 , 지극히 개인적인 읽기가 바로 그것이다. 행과 행 사이 행간을 거닐 수 있는 것이 오독이다.








사창가로 돌아가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걸 여자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알면서도 돌아갔다. 우리는 더럽고 역겹지만 자신이 발 디딘 땅을 결국 떠나지 못한다. 돈도 없고 먹고 살 길도 없는 것이 그 원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우리가 이 역겨운 땅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그 역겨움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역겨움을 견디는 것이 저 황량한 세계에 홀로 던져지는 두려움을 견디는 것보다 두려움의 크기만큼 넓고 깊게 번지는 외로움을 견디는 것보다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추가 살려준 여자를 수소문한 래생이 그녀가 사창가로 돌아갔다는 것에 대해서 서술하는 부분이다. 여자는 특별한 곳 - 원래 자신이 기거하고 밥벌이를 하던 곳이 아닌 곳 - 을 찾아가지 않고 익숙한 공간으로 회귀한다. 익숙한 공간이 자신의 목숨에 치명적인 것을 알면서도 익숙한 곳으로 돌아왔고 결국 익숙한 공간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 죽음이 두려웠겠지만 익숙한 공간이었으므로 그나마 견뎌낼 수 있었고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익숙함이란 마취제와 같은 것이다.








익숙함이 외로움과 두려움을 견디는 것보다 쉬운 일이긴 하다. 특히 두려움을 견디는 모험보다는 익숙함 속에서 역겨움을 견디는 것이 쉬운 일이다. 그래서 여자는 돌아왔고 역겨움을 견뎠으며 래생도 공장에서 다시 개들의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래생이 다시 돌아온 것도 특별함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창가의 여자와 닮아 있다.








래생의 친구인 정안이 죽은후 래생이 정안에 대해서 회상한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삶을 살겠다는 정안이 죽었다. 기계처럼 가볍고 모호고게 살겠다던 , 사랑도 증오도 배반도 상처도 그리고 추억도 없이 살겠다던 공기처럼 그 자리에 내가 없는 듯이 살겠다던 정안이 죽었다.








정안이 꿈꾸었던 것은 지극히 평범한 삶 너무나도 평범해서 기억조차 남길 것 없는 그런 사람을 바랬다. 모든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남기려고 애쓰고 노력할 때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지운다. 특별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해지기를 원했다. 평범한 것은 요원하기만 했다.








사창가의 여인과 래생과 정안의 평범한 것은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갈구하는 것이었지만 이룰 수 없는 - 여자는 평범함에 도달했지만 죽임을 면할 수 없었고 , 래생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긴장 속에서 살았고 정안은 평범함을 꿈꾸었지만 이루기도 전에 죽었다. - 것이기도 했다.








개들의 도서관장인 너구리 영감은 도서관의 진정한 주인은 먼지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먼지는 아주 작아서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것인데 한 줄기 빛이 어둠 속을 투과하게 되면 그 빛이 지나가는 면적만큼은 어둠 속을 부유하던 먼지들이 선명하게 , 명징하게 드러난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존재라고는 없고 오로지 적막과 침묵만이 존재하는 도서관 그 곳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 먼지다. 세상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나아가고 있고 역사라는 것은 몇몇의 사람 중에서 몇몇의 이름만을 기억하고 수많은 이름을 뒤편으로 폐기시킨다. 하지만 세상과 역사를 받치고 있는 것은 몇몇의 두드러진 이름이 아니라 뒤편으로 폐기된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다.








래생은 책을 읽었다. 아주 어렸을 적에 개들의 도서관에서 혼자 책을 읽고 글을 깨쳤다. 책을 읽던 래생에게 너구리 영감이 한 말은 이렇다.








책을 읽으면 부끄럽고 두려운 삶을 살 것이다. 그래도 책을 읽을 것이냐








책을 읽으면 부끄럽고 두려운 삶을 살까라는 물음이 밀려온다. 아마도 부끄럽고 두려울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뿐만 아니라 표면 저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까지도 알게되어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이브가 그랬던 것처럼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게 될 것이다. 책은 지구의 톱니바퀴를 빼내는 일이기는 하지만 책 읽는 모든 환자들은 책 읽기를 멈추지 않을 것 같다. 래생이 처음으로 너구리 영감에게 당당히 책을 읽겠다고 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을 것이고 , 사람이 죽는 것보다 그 위 혹은 그 뒤의 진실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하는 한 세계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움직이는 세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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