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 효형출판 / 200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이왕주 

효형출판




얼마 전부터 산행을 하고 있다. 동네 어귀의 가파른 시멘트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그늘진 산등성이가 보인다. 동네를 비추던 따가운 햇볕도 시끄러운 소음도 그 그늘진 산등성이로 들어서면서 아무것이 아닌 것이 되고 나는 같은 세계의 시간을 살지만 다른 공간을 걷는 사람이 된다. 한 시간의 길을 따라 걷다보면 많은 생각들이 피어올랐다 사라진다. 명멸하는 것은 짧은 생각들이다. 분분하게 일어났다가 명멸한다. 적막 속에서 침묵한다. 침묵은 모든 생각들을 삼키고 그저 태초의 혼돈처럼 내재화된 숨소리만 거칠게 반복한다. 그렇게 약 한 시간을 오르다보면 몇 개의 산을 지나 산마루에 이른다. 계단을 타고 꼭대기에 이르면 올려다 보이는 것은 하늘과 구름이고 내려다보이는 것은 사람이 사는 군락과 식물이 사는 군락뿐이다. 바람이 스친다. 한참을 눈을 감고 바람의 흔적을 느낀다.




숨을 고르고 가져온 책을 읽는다. 바람이 스친다. 스치는 바람 사이로 책장을 넘긴다. <철학 , 영화를 캐스팅하다>를 읽는다. 오랫동안의 침묵은 일종의 비워내는 행위가 되어 쓸데없는 헛으로 배운 것들 조금씩 생각한 것들을 덜어내기에 적당한 방법이다. 내 비워진 일부분에 몇몇의 문장을 채운다. 채워지는 문장도 있고 넘쳐 흘러내리는 문장도 있다.바람이 문장을 거르고 날려가지 않은 문장들만 겨우 주워 섬긴다.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는 이왕주 씨가 쓴 글이다. 이왕주 씨는 <쾌락의 옹호>라는 책을 통해서 처음 만났다. 만났고 매료되었다. 그의 문장은 철학자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추상적 언어 속에서 사유하는 것이 아니었다. 두루뭉술하지도 않았고 둘러 가는 것보다는 바로 나아가는 글쓰기를 보여주었다. 수사와 비유의 현현이 아닌 날렵한 글쓰기였던 탓에 담백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세계 1위의 미스터 근육맨의 근육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생활의 달인들이 가질 수 있는 생근육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말이다.




사실 책 내용은 제목에서 다 나왔다. 철학 , 영화 , 캐스팅 이 세 가지가 중요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책은 영화와 영화와 관련된 철학의 한 테제에 대한 설명이 아우러진 모습을 취했다. 예를 들어보자면 트루먼 쇼에서 들뢰즈 이야기 하기 , 메트릭스에서 샤르트르 이야기하기 등이 있다.




철학은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른다. 알려고 해도 그 문을 쉬이 열어주지 않아 그저 그 문 언저리를 기웃거린다. 한 사람의 철학적 사유를 알기에도 너무나 많은 시간과 공력이 걸린다. 하물며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세세한 것까지 다 알려고 한다면 이미 나는 무덤 속에 들어가 있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참으로 재미없는 일이다.




철학이라는 개념과 학문이 가지는 일반인들의 알 수 없는 공포감과 답답함이 어렵다는 편견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견고해지고 있다. 이런 시간의 층위를 깰 수 있는 것은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나야한다. 내부에서 철학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개념을 설명하고 일상적인 것으로 되돌리는 것 일종의 해체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은 일반인들이 아니라 철학의 견고히 단진 사람들의 몫이다.




철학은 영화를 캐스팅했다. 영화를 데려왔다. 데려와서 무엇을 했을까? 자기의 몸뚱이를 깎고 모양을 만들어 영화의 빈자리에 맞춰 넣었다. 한 편의 영화가 탄생하는 것이다. 사실 여기서 나는 의문을 느낀다. 영화가 철학은 캐스팅한 것은 아닐까하는 물음이다. 나는 정확한 답을 말할 수 없다. 대충 배웠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일련의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철학이 영화를 캐스팅하든 영화가 철학을 캐스팅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왕주 시는 영화를 캐스팅 했다. 철학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선택한 영화들을 호명하고 분류하고 적당한 철학자들의 언명들을 불러 모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철학이라는 것이 저 멀리 허황하고 공허한 곳에서 울고 있는 거대한 공포가 아니라 생활 전반에 흩어져서 일반인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만들었다.




책을 읽다보면 좋은 표현들이나 생각해 볼 문장들이 봄날의 꽃눈처럼 돋아난다. 돋아나는 꽃눈들은 개인의 취향에 맞게 선별되고 취하거나 버린다. 이런 의미에서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던 문장을 하나 옮겨 적으면서 <철학 , 영화를 캐스팅하다>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인생이 정말 한 편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멋진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는 왼손 쓰는 삶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왼손을 으스러뜨리려는 폭력은 도처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왕에 한 편의 그림으로 남게 되는 삶이라면 멋진 그림으로 남아야 하지 않겠는가. 보라 지금 당신의 왼손은 어느 주머니 속에 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