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의 탄생 돌베개 한국학총서 11
강명관 지음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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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녀의 탄생』을 다 읽었다. 쉬이 읽을 수 없을 것을 알았지만 생각보다 오래 잡고 있었다. 사이에 다른 책을 안 읽은 것은 아니니 몰입해서 읽었다고는 말할 수 없고 몰입이 그리 쉽게 되는 책도 아니다. 두꺼운 책을 한 권 읽었으니 쉴 생각이었고 그렇게 했다고 생각했다.


  『열녀의 탄생』은  총 8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교양서’라기보다는 ‘논문’같다. 1장에서 문제 제기를 하고 8장에서 마무리한다. 그 사이는 담론의 발생과 전파 의식화 과정을 좆는다. 그 궤적을 좇아 보면 이렇다.


  고려와 조선의 국가 교체기 조선의 권력을 잡은 남성들이 유교적으로 이상화된 여성상을 설정하고 유포하게 된다. 열부 , 열녀 , 절부의 개념인데 모두 여성의 희생을 강조하는 - 성적 억압과 성적 종속- 모델을 선전한다. 국가가 개입한 이런 모델은 포상과 벌을 동반하는데 벌은 애매하게도 여성에게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아들들에게 가해진다. 지금으로 말하면 권력 내부로의 진입 자체를 완전히 막아버리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완벽하게 시행된 것은 아니었고 관례화되기까지 - 저자의 어조를 빌려 여성의 대뇌에 세뇌하듯이 남성들의 자기합리화 및 자기세뇌라고 하고 싶었지만 참는다. -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이루어진다.


  공포되고 내면화되고 의식화되기까지 국가(권력)에 의한 규제와 상만으로는 될 수 없었고 교화의 방법으로 서적 반포와 교육을 실시한다. 『소학』『삼강행실도』열녀편 『내훈』이 교재로 쓰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 권 모두 하나의 책이 온전한 책이 아니라 발췌하고 모아서 만든 책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 편집한 책은 편집자의 의도가 암암리에 깔려있다. 세 권 모두 유교적 여성 이상형을 언급하는데 수절 신체 훼손 종사(따라 죽음)의 형태로 진행된다. 약을 먹으면 내성이 생기는데 열녀도 그러했다. 처음에는 수절로 열녀가 될 수 있었으나 그 시기가 지나자 신체를 훼손 즉 단지와 할고 - 단지는 손가락 자르기 , 할고는 살 베어 구워 먹이거나 뼈가루 피 먹이기 - 더 독해져야 열녀가 될 수 있었고 종국에는 죽음이라는 극단적 방법 말고는 열녀가 될 수 없었다.


  임병 양란이 있으면서 교육에 의해 내면화된 여성관을 시험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여성들은 교육에 힘입어 강요 없는 자살을 선택한다. 책에서 읽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겁탈을 당하기도 전에 겁탈을 염려해서 자진한다. 남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성적 종속성의 기제가 여성에 의해서 가시화되어 발현된다.


  양란 이후 국가 주도로 의식화 내면화가 진행되지 않는다. 이미 국가 권력의 손에서 넘어와 개인 혹은 집안의 자기학습의 단계에 들어서고 여성이 여성을 교육하는 단계에 이른다. 양란 이후 여성의 성적 종속은 가부장제에 따르는 것으로 변모하는데 시집살이에서 여성은 절대 종속을 교육 받는다. 이러한 교육은 문학 작품에 반영되는데 규방가사가 대표적이다.

규방 가사 외에도 전의 형태로 침투되었는데 『숙향전 숙영낭자전』 등이 대표적이다. 소설의 주 소비층은 여성이었고 그 소설의 내용이 열녀 혹은 가부장제 종속 혹은 유교 남성상의 구현이라면 당연히 여성은 그것을 받아들인다. 권력에 봉사하는 문학이다.


  열녀의 개념이 신체 훼손과 신체 포기로 나가면서 남성 사회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이는데 의도한 것 보다 여성들이 더 나아가버린 것이었다. 목숨의 포기는 유교적 이념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그 잔재는 남아 있어서 나는 작금을 살아가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도 자신들도 모르게 유교적 세계관이 내제한다고 생각한다. 생체 정보만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 정보다 유전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열녀는 만들어진 것이다. 탄생은 했고 거의 절멸의 순간에 들어섰으나 - 현상적으로는 완전히 사라졌으나 문화 유전자 속에는 아직까지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닌듯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권력과 윤리 교육 책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국가 권력은 윤리를 지키는 것인지 아니면 윤리를 탄생 시키는 것인지 윤리와 권력은 별개인지 상호 관련성이 있다면 어떻게 전개되는지 교육은 권력에 봉사할 때 어떻게 되는 것인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책에 쓰인 문자는 그대로 진실이 되어 이념화 되고 내면화 되었을 때 그 책의 문자들은 정말 다 믿을만 한 것인지 누군가의 기호에 따라 유도되고 편향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다. 텍스트는 하나였는데 풀리지 않는 많은 문제들이다. 굶주림을 해갈하듯 다른 텍스트들을 살펴야 할 것이지만 지금은 쉬어야 할 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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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만필 - 상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1
김만중 지음, 심경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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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만필』에 대해서 말해보기  


  서포 김만중 선생이 쓰신 만필이다. 만필은 수필이다. 수필이라고 지금의 가벼운 신변잡기적인 수필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서포 선생이 쓰신 만필은 선생의 입장에서는 잡기에 불가한 것일지는 몰라도 읽는 사람에겐 - 특히 후대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 수필이 아니라 교술(敎述- 문자 그대로 가르치는 글이다)이며 논설에 - 무지한 내가 보기에는 옛날에는 이정도의 글을 수필 만필이라고 불렀나? 싶다. - 가깝다.


  서포 김만중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친숙한 이름이다. 어머니의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하룻밤에 완성했다는『구운몽』희빈 장씨와 인현왕후에 대한 이야기라고 알려진 『사씨남정기』등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사족으로 갖다 붙이자면 김탁환 소설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에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서포 선생은 다방면으로 박식했던 모양이다. 『서포만필』 - 나는 문학동네 판으로 읽었다. 이 판은 두 권으로 되어 상 하로 나눠져 있다. 서포만필은 서지학적으로 2권 1책으로 되어 있다. - 에는 역사를 필두로 해서 천문 역학 문학 종교 풍수 기타등등 모든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상권의 주된 서술은 상고사와 경전에 대한 이야기이며 하권에서 문학의 비평에 치중한다.


  서포 선생의 언술을 읽어보면 유학자이면서 유학의 교조나 다름없는 주자의 학설을 맹신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반박 - 예전에는 이러하였는데 지금은 스승의 학설을 반박하면 퇴출을 맞는다. 슬픈 현실이다 - 하고 여타의 학문을 배척하지 않으나 무조건적 수용도 하지 않는다. 여타의 학문을 비판할 때 논리를 따라가보면 무조건적 베타적 배격이라든지 비판이 아니라 잘 알아야 말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거꾸로 말하자면 이미 자신의 학문은 물론이거니와 여타의 학문도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반증한다.


  문학동네 본 『서포만필』은 번역문이 먼저 제시되고 원문을 병기하고 다시 평설이 따르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번역문을 읽다가 보면 깨알같은 주석을 만날 수 있다. 주석은 보통 출전을 밝히는 것이 상례지만 도움이 될만한 정보들을 제시한다. 어떤 장에서는 주석과 본문이 전치되어 주석을 읽는 것인지 본문을 읽는 것인지 혼동될 지면이 매우 많다. 문장의 뜻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것들을 알아 간다는 의미에서 나무 같은 책읽기고 텍스트를 간단히 넘어서는 글 읽기를 경험할 수 있다. 또한 평설은 번역 편찬자의 보충 설명으로 원문에서 필요한 부분이나 현재의 의미들을 확인한다.


  역사를 공부하는 자들은 상권을 열심히 읽어 서포 선생의 학문하는 법을 배울 것이며 문학하는 자들은 하권을 읽어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죽어 지금 없으나 그의 글들은 남아서 유령처럼 후세 사람을 가르친다. 그 가르침은 시대를 벗어나 무한한 시간을 살아내고 있다.


  약 천여 쪽이 넘는 문장을 읽는 일은 지난한 일이다. 많은 문장을 읽었으나 많은 문장을 유실했다. 처음부터 모든 문장을 다 담으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가물거리는 뼈와 화석만 남아서 기억 속에 내가 『서포만필』을 읽었다는 기억과 독서 목록에만 남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 흔적만으로 어디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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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
한지혜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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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혜 소설가의 『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를 다시 한 번 읽어보려고 책을 펼쳤다.  

 

  「소리는 어디에서 피어나는가」단편을 읽는다. 어느날 소리를 잃어버린 화자와 병신과는 씹하지 않는다는 하반신 마비의 남자의 이야기다. 남자는 병신과는 씹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남자는 여자를 병신이라고 하지만 병신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병든 것은 남자 자신이다. 여자는 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들으며 소리는 듣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어느 밤 여자는 잠결에 천둥이 치는 소리를 들었다. 아주 크고 무섭고 요란한 소리였다. 어느 곳에서 벼락이 내리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종말이 있다면 , 어쩌면 그 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너무 무서워서 엄마를 찾았으나 ,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가위에 눌린 것은 아니었다. 몸 어느 한쪽이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저 요란한 빗소리 천둥소리가 여자의 귀를 무섭게 덮쳤다. 그 밤에 여자는 고막이 어디쯤에 위치한 기관인지 비로소 알았다. 그게 찢어질 것 같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알았다. 소리가 너무 크니 두통도 생겼다. 생각해보니 눈을 뜰 수도 소리를 칠 수도 없었던 것은 두통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귓속이 요란해지니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고 머리가 너무 아프니까 몸의 모든 기관이 무기력해졌다. 여자는 한참을 소리와 싸우다가 어느 순간 지쳐 잠이 들었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고 노곤한 잠이었다.


  가족들도 일일이 눈을 마주쳐야만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을 조금씩 귀찮아했다. 상대를 이해할 수 없기는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말의 억양 높이 어조 그걸로 알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들을 수 없으니 모든 언어가 형식으로만 다가왔다. 알아듣기는 하지만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는 없었다.

 

 

4월이 오면 그녀도 오겠지」를 읽었다.


  그러나 류가 나의 사랑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것도 사랑이었을까에 대해서는 스스로에게도 묻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무언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리움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7년 동안 만난 적 없이 헤어지기만 했다. 생각해보니 그것도 연애였다. 그런 식의 연애도 가능하는 걸 나는 류를 통해 배웠다.


  결혼 이후 외로워지는 건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끔 했다. 직장을 그만둔 후 대화 상대는 남편이 유일했다. 우리는 어떤 분야든 화젯거리로 삼을 수 있었고 대화가 많은 부부였지만 , 각자의 마음에 있는 사랑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었다.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의미가 없었고 , 지나간 사랑을 말하는 건 더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외로웠다.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기까지 세 번을 헤어졌고 류와 만났다 헤어지기를 세 번 했다. 결혼을 한 후에 찾아오는 외로움과 그리움들 결혼을 하면 사랑하던 사람도 사랑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일까?

 

  「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편을 읽는다. 모호해지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 외로움과 고독함이 화자를 지배했을 것이다. 한지혜의 소설은 세 편 연속으로 결여라는 말을 떠올려 보게 만든다. 「4월이면 그녀도 오겠지」「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에서는 결혼 후에 오는 외로움과 고독 상대방의 부재 있어도 없는 없어도 있는 존재에 대한 결여가 도드라진다. 다음에 이어지는 「미스터 택시 드라이버」에서 아버지가 부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필적 고의에 관한 보고서」는 살아있는 남편을 사망 신고하고 자기는 일 년 전에 실종 신고를 하고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고 선언한 뒤 사라져버리는 여인에 대한 기록이다. 사건 일지 형식으로 진술을 모아 놓은 형식이다. ‘부재하는 존재들’은 배우자들이다. 가정은 부모 즉 어미와 아비 남편과 아내를 기본으로 자식까지 통칭 가족이라고 하는데 ‘부재’한다. 어느 한 쪽이든 여기서는 보통 남편들이 부재한다. 부재의 흔적 결여의 흔적이 여기서도 보인다.


  사랑하는 당신 , 나는 오늘 당신을 죽이기로 했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당신은 늘 집에 없는 존재 같아서 나는 늘 혼자 허허벌판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 나 혼자 살고 있는 이 집에는 온통 당신 흔적뿐입니다. 당신이 죽은 이후 조금이라도 당신과 상관이 있는 물건을 모두 버린다면 내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비로서 했습니다. 무척 슬프고 참담했습니다. 신발장 구석에서 오래된 이 구두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저는 결국 또 주저앉았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을 죽이기로 한 것은 부재하기 때문이다. 집에 없는 존재다. 하지만 존재는 없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남는다. 그러나 하이힐을 발견하면서 죽이기로 결심한다. 하이힐은 아내인 내가 남편을 만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호그와트로 가는 기차역 벽과 등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미스터 택시 드라이버」에서도 가정은 기형적이고 불완전하고 존재는 부재로서 존재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버지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든 있는 존재로 두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필요에 의해서는 실종처리를 해버리기도 한다. 화자인 나는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솔직히 고백하면 몇 번인가 스텔라를 본 적이 있다. 술에 취했을 때 길을 잃었을 때 도망치고 싶을 때 손을 흔들면 별처럼 노랗게 전조등을 밝히며 택시 한 대가 다가온다. 은빛 스텔라다. 깜짝 놀라 안을 들여다보면 성마른 중년 남자거나 늙은 노인이거나 어쩌다 깜짝 놀랄 만큼 예쁜 여자 기사가 운전대를 잡고 있다. 별생각 없이 타고 가다가 목적지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서 문을 닫을 즈음 나를 향해 기분 좋게 손을 흔들어 주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들이 변장한 아빠였음을 깨닫게 된다. 스텔라가 아직 건재한 걸 보면 아빠는 스텔라와 단순한 밀월 여행을 즐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음에 혹 아빠를 또 만나면 인사를 해야지 스텔라에게도 안녕 하고 말해줘야지


  사라진 아버지의 존재는 매워진다. 처음부터 없어도 되었던 것처럼 하지만 완전히 잊혀지진 않는다. 화자인 나는 아버지를 만나면 인사를 하겠다고 말한다. 어디에도 있으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들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모두의 아버지들이 거리에 가득하다. 인사를 하자 아버지 안녕하세요.


  막상 내 인생에 대해서 쓰려고 보니 그건 이미 누군가의 인생이었다. 내가 쓰고 싶었던 글도 이미 누군가가 먼저 썼다. 내 이름은 K 그러나 어쩌면 R이거나 P이거나 혹은 Q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살아온 이력이란 매우 다양해 보이지만 사실은 비슷한 멜로디의 변주와도 같다. 누구와도 섞이지 않은 고유한 인생은 정말 존재하지 않는걸까. 죽기 전에 나는 그 이야기를 찾아보고 싶었다.


「세상의 모든 거짓말」은 고스트 라이터 유령작가가 화자다 ‘당신의 이야기가 필요합니다’라고 전해지는 메일로 시작하는데 읽다가 보면 어떤 것이 진짜 이야기이고 어떤 것이 가짜 이야기인지 모호해진다. 나의 삶을 이야기해도 그 순간 타인의 삶이 되어버리고 타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순간 내 삶도 거기에 녹아든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가 사는 삶의 주체가 내가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제가 끝난 후 목각으로 대신한 두 개의 주검은 모두 불에 태워져 가루가 되었다. 노인은 강물에 뿌려졌고 아이는 나무 밑에 뿌려졌다. 강물에 뿌려진 삶은 어린 물고기의 몸속에 들어가 그 자체가 되었고 나무에 뿌려진 삶은 나무가 되어 자라며 늙었다. 그렇게 그들은 못다 한 삶을 마저 살았다. 원래의 삶은 아니었으나 아무도 죽지 않았고 아무도 사라지지 않았다. (실종 발췌)


「실종」은 노인과 아이가 실종되면서 벌어진 상황을 서술했다. 분명히 존재했으나 감추어지고 은폐된 존재들이 된다. 어쩌면 이들의 실종은 타인들 - 여기서 타인들은 가족들이다. - 이 오매불망 바라왔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아야 하는 존재들 「미필적 고의에 의한 보고서」에 등장하는 부재하는 존재가 되는 순간이다.


  이상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평온해졌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기뻤다고 당신은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산 퍼즐이 이가 빠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퍼즐을 완성하지 못한다면 평생 동안 자신이 불량 퍼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테고 , 조각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더라도 그것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자신들의 부주의로 사라진 것이라 믿으며 자책할지도 몰랐다. 조각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건 당신이 유일한 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당신은 전지적 존재가 된 느낌이라고 했다.


  투명인간은 당신이었을 것이다.


「당신이 그린 그림은」에서는 상상임신을 한 화자가 등장한다. 그의 저녁을 준비하다가 잊은 것이 있다면 잠시 다녀오겠다고 하고 돌아오지 않는다. 화자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린다. 상상임신을 자각하지만 증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사라진다는 일 있던 것이 하나 빠져버리는 것은 얼른 표시가 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만 개 혹은 천 개의 퍼즐을 맞추다보면 하나 쯤 티가 나지 않는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인지 있다가 잃어버린 것인지 조차 가물가물하기 마련이다. 항상 같이 있던 존재가 남편이었던 존재가 법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 남편이 투명인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 속에 자라고 있는 존재 자체도 투명한 아이라고 생각한다. 투명한 존재의 생산이라 존재는 하지만 드러나지 않는다. 중첩되는 이야기들이다.


 하루는 파출소에 있는 여자아이를 데리러온 아빠가 아이에게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이사를 해야겠다. 가족을 꾸리려고 해 아이의 인상이 대번에 찡그려졌다. 이제 가족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먼 곳을 바라보며 아빠가 말했다.


 혹 가족이 없으세요?

 - 없기는 기억이 없지

 아무것도요?

 이 집도 기억하고 이 집에서 살던 사람들도 기억하고 이 골목도 기억하지. 오고 가는 사람도 기억하고 , 봄 , 여름, 가을 , 겨울과 그 계절에 일어난 일들도 다 기억하고 내가 보았던 일은 다 기억해

그럼 자신에 대한 기억만 없는 거에요

그런 셈이지


 낮선 골목길에서 할머니와 여자아이는 조우한다. 그리고 기다린다. 할머니는 딸을 여자아이는 동생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가족이란 두 여성에게 이미 행복한 공간이 아니라 절망의 공간이다. 또한 지긋지긋한 공간일 뿐이다.

  내면이 아니라 외면을 기억한다는 것은 존재의 사멸을 말한다. 내부가 아니라 외부만 기억한다. 외부를 기억하기 시작하는 순간 자기에 대한 기억은 없다. 어떤 일들이 있었고 어떤 시절을 지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순 있어도 그 이야기 속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어떤 존재로 남아 있었는지는 말할 수 없다. 그들의 존재를 설명하고 증명할 딸과 동생이 자신들에게 올 때까지 이들의 존재는 없음 그리고 부유하는 존재일 뿐 명명되어지지 않은 존재일 뿐이다.


   버스르 타고 다니다 보면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물건을 파는 사람과 소매치기와 어여쁜 처자와 겉은 멀쩡한 변태 사내와 나이 어린 학생과 등 굽은 노인이 섞여서 서 있다가 싸움이 붙기도 하고 눈이 맞기도 합니다. 버스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삶을 상상해서 적는 일은 매우 즐겁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록을 다 끝내고 나면 그 사람들의 삶을 대신 살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한 생의 피로가 찾아옵니다. 그러면 나는 나무 그늘 밑에 발랑 누워 잠시 하늘을 봅니다. 누워서 숨을 고르다 보면 좀 괜찮아집니다.


  「뛰뛰빵빵은 어느 날 말을 잃어버린 남자가 버스를 타면서 일어난 일들을 적은 기록이다. 한 여자를 관찰하기도 하고 여러 사람의 삶을 써내려가기도 한다. 글로 사람의 삶을 대신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한 생의 피로감을 느낀다고 한다. 타인의 삶을 사는 것도 힘든 일인데 자신이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이겠는가?


  화자인 나는 불미스러운 오해로 버스를 타지 않다가 다시 버스를 타기로 결정한다. 이유는 ‘당신은’이라고 적힌 편지의 답장을 그녀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나는과 당신은 이라고만 적힌 편지와 답장들은 무한한 가능성이라고 읽고 싶어진다. 생이라는 것이 삶이라는 것이 지치고 힘들고 피곤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살아봐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듯하다. 가리워진 아직 쓰지 않은 편지를 채우는 것은 읽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어도 좋을 듯하다.


 어영부영 한지혜 소설집에 대한 이야기하기를 마친다. 지난한 일이다. 그냥 읽고 즐기면 될 것을 분해하고 들여다본다. 원래의 형태가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씁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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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의 규칙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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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글들을 몇 편 읽은 모양이다. 가장 최근에 읽은 것이 <명탐정 갈릴레오>이고 그 전에 <명탐정의 규칙>과 <마구>를 읽었다. 오늘 생각해볼 것은 <명탐정의 규칙>이다. 명탐정이 되려면 꼭 지켜야 할 것들이 나열된 소설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들을 보면 일련의 추리소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그 정점은 <방황하는 칼날>인 듯하다. 트릭 해결을 통한 사건 해결이 아니라 그 사건이 일어난 이야기에 무게를 두고 있다. 사건이 아니라 사건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펼치기 위해 ‘히가시노 게이고’는 <명탐정의 규칙>을 통해 ‘자기 반성’ 혹은 ‘추리 문학’의 반성을 꾀했다. 


  <명탐정의 규칙>에는 오가와라 반조 형사와 명탐정 덴카이치가 등장한다. 당연히 덴카이치가 주인공이고 오가와라 반조 형사는 조연이다. 이 책은 이제까지 추리 소설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던 상황의 제시와 해결을 그대로 답습한다는 것에서 식상하다. 이 책은 등장인물들이 이야기 속에서 걸어나와 이야기 구조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식상함과 신선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식상한 사건에서 걸어나와 식상하다고 이야기하는 주연과 조연을 상상해보면 블랙코미디다. 이 소설은 추리 소설이지만 블랙코미디다. 철저한 자기 비판이 가능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완벽할 때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세계는 사건이 중심에 있지만 식상한 트릭의 해결에서 한 발 나아가 사건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괄목할만한 성과다.

 

  히기시노의 책 <마구>와 <명탐정 갈릴레오>를 더 읽었다고 썼다. 처음에는 <명탐정의 규칙>보다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나고 나니 기억에 남는 것은 <명탐정의 규칙>이다. <마구>는 살인의 동기를 설명하는데 부족함이 있었고 , <명탐정 갈릴레오>는 문제 해결에 물리학을 도입했다는 것이 신선하긴 했으나 사건의 발생 트릭의 해결이라는 추리 소설의 큰 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식상했고 쉽게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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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의 바깥 창비시선 335
이혜미 지음 / 창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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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미의 시집 <보라의 바깥> 첫 시의 첫 문장은 묵직하다. ‘어떤 문장은 사라지기 위해서 태어‘난다고 쓴다. 소멸은 부재이며 겪어 낸 자가 없으므로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소멸은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소외되는 것이다. 금(線) 바깥으로 나아가는 행위다. 안은 바깥을 동경한다. 바깥은 안을 동경한다.


  시인은 ‘나는 도망친다. 빛으로부터’(보라의 바깥 중에서)라고 말한다. 자발적 도피다. 빛은 더 이상 안온하고 건전하며 긍정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빛의 입장에서 보면 더 이상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것은 ‘있으면서도 없는 것’(0번 중에서)과도 같은데 시인은 ‘잉여가 이토록 아름다운 것’(사라질 권리)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바깥으로 걸어나갈 때 스스로 획득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은 가시의 거리 - 붉음과 보라의 사이 적외선과 자외선 사이 - 에서는 확인 할 수 없다.


  이혜미 시인의 글을 읽으면서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넘치지 않음에 있었다. 흥분하거나 냉소적이지 않은 시선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서서히 집중해서 듣게 되는 낮은 목소리 말이다.


  바깥에서 보면 세계는 ‘개연성 없이 흩날리는 저 무수한 의미’(토요일의 주인)들에 불과하다. 이러한 의미들은 ‘휘발하는 것만이 우리의 경전’(제 3 통증)인 것처럼 가볍다. 어둠으로 도망해서 보는 밝음의 단면은 부나방처럼 사라져가는 가련한 존재들의 광란이다. 침참하고 퇴적되며 고요하지 못한 것들은 휘발하고 산화하여 사라져간다.  

 

  이것에서 저것 되기는 죽음의 통례를 치른다. 죽음은 한 존재의 끝인 동시에 시작이다. ‘빛이 저물며 어둠을 잉태’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침몰하는 저녁 중에서)  ‘하나의 삶이 수많은 죽음을 표절’(청록색의 여인 중에서) 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어둠의 세계로 접어드는 것이다. 어둠은 시인의 몸 전체를 이루고 있다. 순록의 뿔에 관통되는 순간 ‘줄줄 흘러 나오는 내 속의 어둠’(블랙 아웃)이라고 고백한다.

예전에 이혜미의 시집을 읽으면서 잠깐 기록한 것을 찾아보니 이렇게 적어두었다. ‘어떤 문장은 사라지기 위해 태어납니다’ 이혜미의 <보라의 바깥> 첫 시 얼음 편지의 첫 구절이다. 노래로 말하자면 처음부터 고음을 때리고 감정을 펌프질하는 문장이다. 오랜만에 쓰는 표현인데 나와 채널이 맞는 문장이다. 내 솥 끝 입가에서 사라져버린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수없이 사산된 문장들을 사산시킨 나를 위로하는 문장이다. 나는 위로를 받았으나 시인이 걱정이다. 초장부터 이리 강하게 때려버리면 종장은 어찌 감당할까 싶다.


  사라질 권리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누군가 심어두고 떠난 가시를 기억하는 입 속은 이미 부재가 사는 집이다’ 이 문장에서 내 기억은 기형도를 불러냈다. 어제는 ‘입 속의 검은 잎’ 하루가 지나서는 ‘빈집’까지 불러낸다. ‘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 하나가 나는 두렵다’고 쓴 기형도는 ‘빈집’에서 ‘사랑을 잃고 ’ 쓰면서 ‘사랑 빈집에 갇혔네’로 마무리한다. ‘입과 부재가 이혜미의 시에서 돋아나 내 기억 속 몇 편의 시들을 불러낸다. 이제 나도 기억이 퇴적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나 또한 누군가의 기억 한 켠에서 퇴적될 것이다. 어떤 이의 기억에도 남지 않게 되는 순간 영원한 소멸 즉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혜미의 시와 기형도까지만 이야기하려 문득 죽에에 대한 술회까지 이르게 되었다.


  시간이 지난 뒤에 읽는 기록은 부끄럽다. 또 한 편의 책 읽기는 이렇게 어영부영 끝내려고 한다. 시를 읽는 건 언제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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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끄러미 2015-05-21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