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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창 시집 - 개정증보판 ㅣ 한국의 한시 14
허경진 옮김 / 평민사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도서관에 갔다 지인이 알려준 <백호 임제 시선>을 찾으러 들른 서가에서 눈에 들어온 시선이 있었다. 겨우 한자 까막눈만 면한 눈에 '매창'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련한 이름이었다.기생이었고, 송도 '명월'을 논할 때 항상 언급되었던 이가 부안 '매창'이었다. 이름만 들었을 뿐 시선을 만나지는 못했는데 인연은 이렇게 불현듯 오는 모양이다.
매창은 부안에서 계유년에 태어났다고 해서 계생으로 불렸다고 한다.기생이 된 후 애칭으로 쓰인 것은 계랑이다. 스스로 '매화 핀 창가'라는 의미로 '매창'이라는 호를 지어 불렀다는 기록이 『매창집』발문에 전한다.
시는 글을 쓰는 사람의 굽이 굽이 휘돌아 치는 내면을 사려둔 똬리를 풀어내는 것이어서 시를 읽을 때에는 자연히 그 사람의 내면을 문장으로 더듬는데 헌주름 위에 새주름이 잡히더라도 그 헌주름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매창의 시에서는 그리움이 묻어난다. 그리움은 내일 돌아올 그린이에 다한 옅은 그리움은 아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그린이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그리움을 먹고 자라서 서글픔과 시름이 되고 한탄이 된다. 기생이라는 신분에서 받아들였어야 할 천형이었을 받아들임과 떠나보냄은 흔한 일이이다.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어쩌면 기생의 최고의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매창은 지금도 매화 핀 창가에서 '동짓달 기나긴 밤 허리를 잘라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그리운 님오시면 굽이굽이 필'(황진이 시조)요량을 하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매창의 그리움은 어떤 그리움이었을까? '어젯밤 찬 서리 내려 / 가을 날시어 기러기는 울어예고 / 남의 옷 다듬질 하던 아낙네는 / 걱정되어 다락에 올랐어라 / 하늘 끝까지 가신 님은 / 편지 한 장도 보내지 않으니 / 높다란 난간에 홀로 기대인 채 / 남모를 시름만 그지없(어라)<가을날에 님 그리워하며>'는 그리움이었을까? 소나무처럼 늘 푸르자 맹세했던 날 / 우리의 사랑은 바닷속처럼 깊기만 했어라 / 강 건너 멀리 떠난 님께선 소기도 끊어졌으니 / 밤마다 아픈 마음을 나 홀로 어이할(까나)<옛님을 그리워하며>'지 모르는 그리움이었을까?
매창은 정자에 올라 떠나간 이를 그리워 한다. '사면 들판에 가을빛이 좋기로 / 혼자서 강언덕 정자에 올랐어라 / 어디서 온 풍류객인지 / 술병을 들고 날 찾아오(네)<강가 정자에 올라>' 는 풍류객이 그리움의 달래주지는 못한다. 그리운 이를 기다리는 사람은 차츰 차츰 말라간다. 시름시름 앓아간다.
'긴 뚝 위의 봄풀 빛이 너무나 쓸쓸해서 / 옛님이 오시다가 '길 잃었나' 하시겠네 / 예전에 꽃 만발해 같이 즐기던 곳도/ 산에 가득 달만 비추고 두견새 우는구나 / 지난해 오늘 저녁은 즐겁기만 해서 / 술잔 앞에 이 몸은 춤까지 추었지 / 선선의 옛님은 지금 어디 계시고 / 꽃잎만 그 봄인 양 섬돌 위에 깔렸네<봄날의 시름>'라고 말하는 매창은 같이 노닐었던 공간에서 기억으로 살며 혹시나 길 잃어 오지 못하실지도 모르다면 시름시름 앓기도 하고 '비 뒤에 찬바람이 댓잎자리에 들고 / 한바퀴 밝은 달은 다락 머리에 걸렸어라 / 외로운 방에선 밤새도록 귀또리가 울어 / 이 내 마음 부서지고 시름만 가득 쌓이네 / (중략) / 고요히 사려는 나의 뜻 / 세상 사람들은 아지 못하고 / 제멋대로 손가락질하면 / 잘못 알고 있(어라)<시름에 겨워>'다고 항변해 보지만 세상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는 울림이어서 말하는 사람의 속내만 타들어 간다. 속이 타 들어가는 고통은 겪지 않은 사람은 말 못한 괴로움 매창의 견딤은 애처롭기가지 한데 떠난 님은 '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 구슬 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을 적시(누나)<내 신세를 한탄하며> '는 매창의 마음을 알기는 하는지 모르는지 애석하게 편지 한장도 없다.
자기를 키운 것의 팔 할이 바람이라고 고백했던 시인이 있었는데 매창 생의 팔 할을 차지한 것은 떠나간 임에 대한 그리움과 눈물'이다. 평생을 살면서 그녀의 생 속으로 틈입한 그리움과 눈물을 '독수공방 외로워 병든 이 몸에게 / 굶고 떨며 사십 년 길기도 해라 / 인생을 살아야 얼마나 산다고 / 가슴속에 시름 맺혀 옷 적시지 않은 날 없(네)<병들고 시름에 겨워>라고 고백한다.
몸을 섞어 나눈 사랑도 징그럽게 징하지만 , 마음을 나누어 나눈 사랑은 지독하다. 매창이 그렇게 사랑했던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촌은 유희경이다. 유희경은 매창과의 조우에서 소문으로만 듣던 매창을 만나고 보니 선녀가 하강한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고 다 때가 있는 법이니 만난 것도 인연이고 운우의 정을 나눠보자고 속삭이기도 했다. 만남이 있으면 대칭되는 곳에는 이별이 있는 법이다. 매창과 촌은은 헤어진다. 헤어져 지내면서 길을 걸으며 길 가면서도 매창이 생각난다고 말하기도 하고 서울과 부안이라는 물리적 거리 때문에 보지 못하지만 보고싶은 마음이 애가 끊어질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마음을 나눈다는 것은 애가 끊어질 정도로 지독하다.애가 끊어질 정도의 그리움의 고통은 눈물이 되고 눈물은 시가 되었다. 눈물 한 방울은 점점 퍼져나간다. 지금의 젊은 남녀들은 이 눈물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을까?
남녀 간의 사랑이 헐값에 팔리는 요즘 - 애벌레님의 표현에 대한 오마쥬 - 시대의 남녀가 하룻밤 살내음으로 채워진 사랑을 천형처럼 감내해야 했던 기생이 한 사람을 평생 그리워 하며 살아갔던 마음을 알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