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다른 곳에 밀란 쿤데라 전집 3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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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춧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난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같혔네

시인은 사랑을 했고 , 사랑의 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이전에 너무 조숙했던 체념에서 확실히 벗어났다. 어니의 테니스 라켓이 이제는 그녀를 풀 죽게 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마침내 몸으로 살았고 그녀는 그렇게 사는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 새로운 삶이 속임수 약속이 아닌 다른 것이길 오래 지속되는 진실이길 소망했다..

삶을 다른 곳에를 읽으면서 내가 처음 밑줄을 그은 문장이다. 처음에 시인이 탄생했고 그 과정에서 그녀의 어머니의 연애사가 들러나는 부분이었다 시인은 말과 언어로 생을 지탱하고 구체화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내 생각인데 그 대척점에서 말이나 언어가 아니라 몸으로 삶을 인식하는 지점에 시인의 어머니가 있다는 것은 약간은 아이러해보였으나 그 것으로 충분히 좋았다.

밀란 쿤데라 읽기 세 번 째 [삶은 다른 곳에] 를 읽는다. 처음 [농담]과 두 번 째 [우스운 사랑들]을 시간을 들여 고되게 읽은 기억이 있다. [농담]을 이야기할 때도 밝힌바 있지만 약간의 트라우마가 있었고 , 그것을 견디며 읽는 일이 지난했다. 다행히 세 번 째여서인지 아니면 [삶은 다른 곳에서]의 서사와 사건이 내 취향이어서인지 전작에 비해 조금 빨리 읽을 수 있었다.

몸에서 떨어져 나와 세상에 던져진 자들은 그 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 그늘을 벗어나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구축하는 일이며 , 이러한 일은 그 혹은 그녀가 속해있던 한 세계가 무너지지 않고서는 가능해보이지 않는다.

사랑의 시작 , 그것은 완벽하게 통제되는 세계의 균열이다.

달콤한 사랑이란 우리가 성인으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그리고 아이였을 때는 알지 못했던 유년의 좋은 점들ㅇ르 깨달으며 가슴 아파하는 그 나이가 될 때 그 때 태어난다.

달콤한 사랑 이것은 성인의 나이가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공포다.

달콤한 사랑, 이것은 다른 사람이 어린 아이로 다뤄지는 인공적인 공간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시도다.

달콤한 사랑 이것은 또한 사랑이 따르는 육체 요소들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랑을 어른들의 세상 (사랑은 기만적이고 억압적이며 육신과 책임으로 무겁게 짓눌려 있는 세상)에서 빼내어 여인을 어린 아이로 간주하고자 하는 시도다.
180쪽

안타깝게도 달콤한 사랑이란 표현은 지독한 공포로 읽힌다. 사랑은 인간의 삶의 한 변곡점이 되기에 충분하다. 세상의 고난과 공포를 체득하는 변곡점 말이다.

이 책은 야로밀의 연애사이며 어머니와 여자친구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다. 나는 이러한 어머니를 영화에서 본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야로밀의 여자친구 빨간머리 아가씨와 어머니의 대결은 영화에 비하면 장난 수준이지만 어머니의 상실감과 질투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자기의 살과 피가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시하게 될 때 , 그런 살과 피를 타인에게 양도해야 할 때 일어나는 감정은 질투이자 분노이지 않겠는가?

야로밀은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난 사랑에 어중간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 사랑할때는 서로에게 모든 것을 다 줘야 하는 거야 198쪽

야로밀의 이러한 사랑은 맹목적이고 폭력적이고 관음적으로 변질된다.내가 지켜본 야로밀의 사랑은 자신은 하나도 내어 놓은 것 없는 상대방에게만 바라는 불구의 사랑이었고 비겁했고 치졸했고 옹졸했다. 피학적 관능이랄지 가학적 관능관능이란 것은 조르쥬 바티유의 [에로티즘]에게 맡겨 볼 만한 일이다.

시인은 말로 절을 - 서양에서는 성 정도가 될 듯 하지만 - 쌓는 일이라고 정희성 시인이 노래한 적이 있다. 야로밀에 대해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늘 거울의 벽에 둘러 싸여 그 너머를 보지 못한다". 그렇다 시인은 결국 자기가 만든 성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그가 만든 성과 세계는 현실이 아니라 가공의 세계다. 그가 노래하는 세계는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현장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 아니 사람이 살아낸 삶은 시인의 성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거울 너머 그 테두리 넘어 말이다.

온전히 시의 세계를 살던 야로밀은 빨간 머리가 늦게 온 날 어쩔 수 없이 넘어가려던 거짓말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 한 사건은 자신의 완전한 세계에서는 읽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었으므로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한다. 결국 맞이하는 것은 파국이었다. 스스로 맞이한 파국은 결국 자기가 만들어낸 서사시의 주인공으로서 삶과 야로밀의 삶을 산다. 작가는 이렇게 쓴다 " 야로밀은 자신의 분신 자비에를 만들어내 그와 더불어 또 다른 삶 , 꿈과 같고 모험에 찬 다른 삶을 지어- 내가 보기엔 이 부분이 삶은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해도 좋을 부분이지 싶다. - 냈다. 현실의 부정과 회피로 선택한 자비에로서의 삶을 살았다는 야로밀은 행복했을까? 분리하지 않고서는 , 부정하지 않고서는 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아내고자 했던 야로밀은 죽었다. 자가가 만든 세계에서 추방되고 유폐되어 절멸했다. 야로밀이 살아낸 한 삶은 허무하다. 스스로 만들어낸 세계에서 살다간 한 시인의 삶은 행복했을까?

글의 처음도 시로 시작했으니 마지막도 시로 마무리해보기로 한다.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이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해메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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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민 2022-08-29 0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8쪽 대사는 야로밀의 대사가 아닐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