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탄생 - 문자라는 기적
노마 히데키 지음, 김진아.김기연.박수진 옮김 / 돌베개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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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완유세설령 - 내 블로그 이름이자 내 방이름이다 - 에 들어 앉은지 일 주일이 지나고 있다. 산책을 하고 뒹글거리다 심심해져서야 책 한 장 읽는다. 책을 읽기에는 날씨가 좋았고 꽃들은 더 화사했다. 흰색과 붉은색 보라색 노란색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탓에 꽃 따라 다니르라 글 한 자 볼 여가가 없었다. 꽃이든 계절이든 한 철이었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은 절정의 순간에 절명하는 묘리를 수천년 혹은 수만년의 생을 통해 체득한 모양이었다. 꽃이 시드니 다시 칩거한다. 꽃 무더기의 죽음을 맞았을 때 나는 생명 없는 것이 생명을 가지게 되는 비의(秘意)를 파헤치는 책을 읽고 있었다. '<한글의 탄생> - 문자라는 기적'이 바로 그것이다.

 

  노마 히데키라는 분이 쓰신 일본인을 위한 한글 교양서라고 들었다. 일본인을 위해 일본어로 쓰였다가 다시 한국어로 번역된 점이 재미있다. <한글의 탄생>은 아시아 태평양상 대상을 수상한 책이다. 발행부수가 약 400만부 정도 된다고 역자 후기에 써 놓았다. 부러운 일이다. 우리나라 인문 교양서의 1쇄 발행부수는 초라하기 기지없는 숫자다. 그나저나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니 대단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노마 히데키는 훈민정음의 탄생을 말하기 전에 맹아가 싹트던 시대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어사에서 음독과 훈독 순독과 역독 구결과 이두까지 찬찬히 설명해 둔 부분이 가장 먼저 자리 잡는다. 언젠가 성경 책을 읽다가 도저히 읽히지 않아 덮은 기억이 있는데 예수의 족보를 읊는 대목이었다. 근원을 찾아서 다시 내려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술술 읽히지도 않는다. 문자의 기원을 찾고 만들어지기까지 중첩된 시간과 인식을 기술하는 것도 이와 달라보이지 않는다.

 

  읽으면서 일반 교양서적의 테두리는 벗어나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했다.일반 언어학을 익힌 적이 있는 일반 교양인에게는 쉬울 수도 있겠다.  쉽게 풀어 쓴다고 썼으나 접해보지 않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생경한 것들이 지뢰처럼 깔려 있었다.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지뢰를 헤치고 나아가야 앎에 대한 쾌감이 증폭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계속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소리가 있었고 훈민정음이라는 문자체계가 완성되기 전까지 한자의 영향권 아래에서 지내다가 소리가 형태를 얻게 되는 것이 훈민정음의 창제다. 한반도 우리의 소리가 우리의 형을 가지게 된다. 무형이 유형화 되고 유형화된 것은 고착되게 마련이다. 무형에서 유형이 되는 것 또한 찰나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유형의 것이 고착되어 널리 쓰이는 것 또한 찰나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긴 시간을 견뎌낸 문자체계 훈민정음은 주시경 선생에 의해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옷을 갈아입고 오늘에 전해지고 한반도에서 쓰인다. 소리가 형태를 얻어 영원히 살게 되었다.

 

  태어나면서 체득해서 쓰고 있는 모어화자들은 자신들의 문자언어가 얼마나 위대한지 알지 못한다. 원래 가진 것을 눈여겨 볼 사람은 없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동경할 따름이다. 영어를 일본어를 중국어를 동경한다. 그러나 자신의 모어는 따로 배우려 들지 않는다. 노마 히데키는 일본인이다. 일본인이지만 한글에 대해 공부했다. 책을 썼다. 읽히는 책을 썼다. 한반도에 날고 긴다는 한글학자들이 있다. 노마 히데키가 어깨를 비견할 수 없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다. 하지만 노마 히데키만큼 글로써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된다. 딱딱하지 않고 유려하고 부드럽다. 이 책이 다른 언어학 교양서와 다르게 읽히는 이유다. 가장 사소한 차이이면서 가장 큰 차이다. 좀 더 과하게 말해보자면 얼치기 국어학 박사의 논문보다 더 재미있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한반도에서 한글을 노마 히데키처럼 설명하고 이야기할 사람은 없는 것일까?

 

  오랫만에 좋은 책을 만났다. 예전에 <말하는 꽃 기생>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엉망이었다. 기생을 한 쪽으로만 평가했고 창기만을 주로 썼다. 인문 교양서가 아니라 인문 가십서였다. 이 또한 한국인이 쓰지 않고 일본인이 썼다. 왜곡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도 조금은 걱정했다. 왜곡된 시선은 없는가 조심스레 읽었다. 다행히 왜곡되고 편향되지 않은 읽을만한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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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309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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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들은 오래된 배경처럼 먼지들을 켜켜이 덮어쓰고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사람들은 눈길 한 번 스쳐갈 뿐 발걸음 잠시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책들의 세상을 유유자적 노닐다가 맨몸으로 빠져나오기 민망했다. 시간만큼의 먼지를 이고지고 있는 시집 한 권을 뽑아 값을 치렀다. 많은 시집들이 별처럼 빛났다. 별은 빛나고 있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별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 , 눈에 아름답게만 보이는 별을 선택할 것인지 태생적으로 아름다운 별을 선택할 것인지 생각했다. 빛나는 것은 이러나 저라나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일터 허수경 시인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을 선택했다.







허수경 시인의 시집을 대면하는 것은 세 번째다. 첫 번째가 <빌어먹을 , 차가운 심장>이었다. 매우 유명한 시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별은 개인의 마음에 뜨는 것이었다. 내가 볼 수 있는 별이 있고 있으나 볼 수 없는 별이 있는 것이라 내게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은 보이지 않는 별인 듯 했다. 다 읽지 못했다. 두 번째 시집이 허수경 시인의 시집으로 한참 고역을 치루고 있을 때 멀리 사시는 찐따 형님께서 건네신 두 번째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이었다. 내게도 빛나는 별들의 노래가 들리는 것 같았다. 세 번째 시집이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이다. 이번 시집은 연마된 느낌의 조약돌 같은 느낌이라고 해두어야 할 듯하다.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탓이다. 외부에 의해서 깎인 것인지 스스로 깎은 것인지 부드러워져 있었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反전쟁시라고 부르고 싶다고 말한다. 反전쟁시라고 해서 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있거나 반대의 의견을 전면에 배치하지 않는다. 세련되게 아름다웠던 시절을 노래한다. 그것으로 전쟁이 없던 시대를 그리워한다. 어느 한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지금 이 공간이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조건 반사의 행동이다.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 시기에 전쟁이 없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허수경 시인은 그러한 시도를 제 1부에서 하게 되는 것 같다. 표준어로 한 편의 시가 등장하고 다음에는 ‘진주 혹은 내말로’라는 부제를 달고 똑같은 내용의 방언으로 한 편의 시가 등장한다.












앞에 소개되는 표준어로 된 시들은 단정하다. 뒤에 소개되는 방언으로 된 시들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는 측면에서 촌스럽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낱말들이 불려나와 독자로 하여금 생경하기는 하지만 어디선가 언젠가 들어본 것 같은 느낌을 끌어낸다. 표준어로 쓴 시가 현재의 시간을 장악하고 있다면 방언으로 쓴 시는 과거의 시간을 장악한다. 과거의 시편들에서는 이상하게도 소월의 느낌도 묻어나고 백석의 느낌도 묻어난다. 아름다웠던 시절 그 시절의 아름다운 시들이 불러일으키는 리듬감이 묻어난다.












시집을 뒤져봐도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이라는 표제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 좀 가져다 주어요>라는 시에서 “아이들 자라는 시간 청동으로 된 시간 / 차가운 시간 속 뜨겁게 자라는 군인들 // 아이들이 앉아 있는 땅속에서 감자는 / 아직 감자의 시간을 사네”라는 구절이 나온다. 청동의 시간은 군인들이 자라는 시간이다. 호메로스의 고전 <일리아스>를 읽다가 보면 청동으로 만든 창을 들고 살육의 전쟁을 벌이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청동은 삶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와 살상을 위해 고대로부터 존재해왔던 것 파괴와 살상의 상징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대척점에 있는 땅속의 감자가 사는 감자의 시간은 파괴와 살상이 없는 것의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땅 속에서 자라는 감자는 어느 순간 아이들로 바뀌어 읽힌다. 아직은 감자의 시간을 살고 있는 어린이들을 지키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 않을까? 허수경 시인이 “우리는 촛대 저 물렁거리는 밝음 아래 대지에 떨어지는 붉은 콩 같은 기름을 받는 말을 견뎌내는 촛대”(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 우리는 촛대 중에서 , 허수경 시인)라고 쓴다. 이미 자라서 어린이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린 우리가 어린 것들을 위해서 해 줄 일은 말을 견디고 기름을 받는 일이다. 그것들이 떨어져 땅 속에서 자라고 있을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게 하는 일이다. 태양처럼 한 줌의 햇볕으로 아이들을 싱그럽게 자라게 하지 못할 양이면 달처럼 아스피린 같은 달처럼 , 삼키면 속이 다 훤할 것 같은 달이라도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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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과 들판의 별 문학과지성 시인선 337
황병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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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이민하 황병승의 시집 순으로 읽는 요즘이다. 김경주의 저 멀리 있는 세계와의 시차는 단정하지만 단정해서 빈틈이 없었고 이민하의 환상성은 서정성에 길들여지고 세뇌되어진 시단의 족속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변형이다. 틀을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딛는 순간 발바닥에는 어떤 형태로든 상처가 남는다. 마지막 황병승의 시들을 읽는다. 전통적인 시의 서사와 서정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 지워진 명왕성처럼 아득하다. 시의 새로운 지평이기도 하고 거대한 실험이기도 한 황병승의 시에 대해서 말하고자 어듬더듬 글머리를 연다. 글머리를 여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말하지 않아도 그만인 것을 왜 주저하면서 최초의 한 음절을 뱉어내려고 고통스러워하는지 내 스스로도 의문이다. 내가 풀어야 할 의문의 내 문제이니 접어두고 황병승 시인의 시집이나 읽는다.



황병승을 읽으면서 샤먼의 제의를 생각한다. 구술되어 전해지는 무가를 생각한다. 긴 서사는 웅얼거림에 가깝다. 웅얼거림은 분출이다. 잇닿는 것이다. 하늘과 인간을 잇닿는 것이다. <트랙과 들판의 별>을 읽다가 보면 뒤죽박죽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뒤죽박죽은 샤먼의 접신을 닮아 있다. 조금 과장을 해보자면 황병승의 시들 초입에 ‘눈보라 속을 날아서’가 등장하는데 ‘snow storm'은 코카인 파티 , 마약에 취해 황홀해진 상태’를 가리키는 속어라는 설명이 나온다. 접신은 하늘과 신에 닿은 취해 황홀해진 상태에 다르지 않다. 황병승은 샤먼이다.




샤먼 혹은 당골 혹은 만신들에도 전공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황병승 시인이 이번 시집 <트랙과 들판의 별>에서 주로 이야기 한 것은 읽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읽기로는 인간의 삶이고 글쓰기다.




먼저 인간의 삶에 대한 문장들을 읽어보면 ‘죽음 , 그런 것은 지우고 다시 써버린다 / 탄생 그런 것은 시시해서 지우고 다시 써버린다.’(황병승 [트랙과 들판의 별] - 이하 생략 - , ‘엽차의 시간’ 중에서)죽음도 탄생도 경외시 되고 축복되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그저 지우고 다시 써버려야 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살아간다는 것 , 때때로 누군가 완전히 죽여주는 것’(썸 비치들의 노래’ 중에서) 이라고 말한다. 탄생과 죽음은 이미 축복과 경외와 두려움을 박탈당했고 탄생과 죽음의 극점들을 연결하는 ‘삶’마저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죽음으로 내몰아 주는 것 , 죽여주는 것은 타인에게는 행복을 주는 행위지만 자신에게는 그만큼의 고통을 수반하는 일인데 , 일종의 보살행이라고 읽힌다. 마지막으로 ‘태어나는 것처럼 나쁜 것은 없다’(회전목마가 돌아간다 sick fuck sick fuck 중에서) 고 선언한다. 태어나는 것은 개인의 불행이지만 태어남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행복일 수 있지만 삶을 살아야 하는 자에는 어디까지나 나쁜 일이다. 태어나고 살고 죽는 것이 고통스럽기만 하다.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하고 살아낸 이상 죽음을 맞는 것이 순리다. 피할 수 없는 순리다. 황병승은 인간의 삶에 대해서 ‘소원이 하나 있다며 그것은 한 번만이라도 생긴대로 살고 싶은 것 하지만 그게 안돼서 말처럼 쉽지 않아’(눈보라 속을 날아서 (하) 중에서) 라고 말한다. 천만번 백만번 맞는 말이다. 사람들의 삶이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서로를 이해하며 보듬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황병승 시인은 단호하게 잘라 말한다. ‘내가 당신을 이해한다고 되는 것’(어린이날기념좌절어린이독주회‘ 중에서)이 아니라고 말한다. 일방적인 이해는 이해가 아니라 어쩌면 물리력 없는 정신에 가하는 치명적인 폭력이다. 당신과 내가 서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말이다. 황병승 시인에게 한 말씀 보태자면 ‘태어나지마라 죽는 것이 고생이다. 죽지마라 태어나는 것이 고생이다 죽고 사는 것이 모두 고생이다’라는 원효 선사의 게송 한 자락 읊어주고 싶어진다.




글쓰기에 대한 것을 살펴보자면 ‘더는 글 따위는 쓰지 말자 나는 어쩌다 어둠 속을 떠도는 시인 나부랭이가 되었나’(헬싱키 중에서)고 자탄한다. 그리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청체불명의 글쓰기, 창피하게도’(‘잔디는 더 파래지려고 한다’중에서) 시인들이 시인이 되고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언어를 제련하는 사람이 되고 언어의 뼈를 찾는 사람이 되어서 죽을 때까지 하는 고민이고 그 고민은 어둠 속을 떠도는 것과 같다. 그 답은 요원한 곳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발을 들여놓았으니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걸어 전지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방법은 단 한가지 어둠 속일지라도 글을 쓰는 것이다. 글을 씀으로 존재한다. 그들에게 지나온 기은 언어들이 쓰러지고 빗어낸 길이다. 글을 쓰는 시를 쓰는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스스로 짊어진 천형이다. 존재하고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글을 써 내려간 사람이 황병승 시인이다. 코카인 파티에 취해 환상 속으로 접어들어 접신의 상태에서 써내려간 언어들은 세련되기도 하고 투박하기도 하고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니 일반인들의 눈에는 이 글이 죽었는지 살아있는 글인지 알 수 없다. 세련됨 속에 숨겨진 의미들은 장막 너머로 숨어버려 찾아내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황병승 시인은 <여장남자 시코쿠>에 이어 두 번째 시집을 써냈다. 글쓰기를 통한 존재의 확인이라고 해두어도 좋겠다. 관조라고 해도 좋겠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할 수 없는 글들을 쏟아낸다. 쏟아낸 글들은 시가 되어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죽었던 글들을 사람들이 살려내고 살았던 글들이 사람들에 의해 죽기도 할 것이지만 시간의 중첩이 있은 후에야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시집에서는 어떤 말들을 웅얼거릴지가 궁금해진다.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창피함을 버릴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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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문학과지성 시인선 347
이민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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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하는 이야기지만 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조심스럽다. 소설은 작가와 떨어진 , 드러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시는 작가와 떨어질 수 없는 속살이라고 하거나 상처라고 해야할 것들을 대면하여 시선을 돌리지 않고 직시해야하는 까닭이다. 공감과 전이는 치명적이다.



어떠한 창작물이든 작가가 생산한 순간 해석과 해설에 대한 소유권을 박탈당한다. 해석과 해설에 대한 소유권은 창작물을 읽는 사람 , 수용하는 사람 즉 독자의 권리이자 의무가 된다. 신형철 씨의 해설을 읽다가 보면 이것에 대한 언급을 한고 있는 대목이 있다.




창작자는 작품을 통제할 수 없다. 작품이라는 결과는 창작자의 의도를 초과할 수 있고 , 수용자의 해석은 그 결과를 또 한 번 뛰어넘는다.




-<몰락의 에티카> ‘어제의 상처 오늘의 놀이 내일의 침묵’




창작자가 만들어 낸 작품은 작가가 생각하지 않았던 방향의 극한으로 치닫을 수 있기도 하고 극한에 이른 의미들은 수용하는 개별자들의 환경들에 굴절되어 수용되며 이러한 수용은 원래의 굴절범위를 훨씬 넘어서 처음에 의도하지 않았던 위대한 결과에 이르기도 한다는 말일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시는 읽히는 사람들의 오독에 의해서 개별적으로 수용된다는 말일 듯하다. 시가 뿜어내는 다양한 의미들과 기호들 이미지들이 개인이라는 굴절체를 만나 산란되거나 집중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니 읽는 자들이여 미치고 발광한다고 손가락질 받을지라도 오독하라. 천만편의 시들 중에 자신에게 맞는 한 편의 시를 찾고 졸한다 해도 좋은 것일지니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오독(誤讀)한다.



이민하 시인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신형철 씨의 <몰락의 에티카>를 통해서다. <음악처럼 스캔들처럼>이라는 제목을 기억하고 젊은 시인들의 세로운 시의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을 읽었던 것이다. 신형철에 의해서 뉴웨이브 새로운 물결로 명명되어진 부류의 시인이었다. 이름을 알게 되고도 많은 시간이 지났다. 신형철 씨의 해설로 만나는 단편적인 - 단편적이라는 말은 해설을 용이주도하고 논리적으로 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들을 가져와 쓰기 때문이다. - 시들이 아니라 <음악처럼 스캔들처럼>의 완전한 시를 만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의 길이에 한 번 놀라야 했고 , 이미지들의 모호함에 한 번 더 놀라야 했다.



내가 찾아낸 시의 환상성 혹은 이미지의 모호함의 문장은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예를 들자면 ‘달이 내 몸에 마지막 빨대를 꽂았지요 나는 노란 분화구가 되어 불멸의 이름을 얻었지요’ 같은 문장이다. 환상성에 더 가까운 문장인데 달이 빨대를 꽂았을 때의 느낌은 어떤것일지 궁금해지는 문장이다. 달이 가진 노란색의 이미지가 내 몸에서 피어나 출혈하듯 번진다. 시를 이야기하며 소설가들을 가져다 쓰긴 뭣하지만 황정은의 몽환적 환상성과 김태용의 그로테스크한 환상성과는 또 다른 이민하 시인의 환상성이다.



‘밤새 키보드를 두드리며 편지를 썼는 걸. 그래. 어둠이 더 밝은 시대에 잠은 죽음보다 못한 타이밍이지’라는 <악수놀이>의 한 문장을 읽는다. 어둠이 밝음보다 더 밝은 시대에 잠은 죽음보다 못한 타이밍이라는 웅얼거림에 마음이 쓸린다. 잠든다는 것 그것은 죽음의 다른 이름이다. 죽음의 예행연습일 터였다. 위안을 받는 것 죽음의 제의와도 같은 잠들만이 겨우 어두운 시대를 살아내는 방법이다. 죽지 못하고 잠들어야 하는 타이밍 순간의 찰나 찰나의 어긋남이다. 슬픈 일이다.



신형철 씨의 해설의 제목은 어제의 상처 오늘의 놀이 내일의 침묵이다. 세 부분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이민하 씨의 시집은 사실 3악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3악장을 굳이 나누자면 어제 오늘 내일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신경 써서 읽지 않아도 좋다. 다만 눈에 띠는 것은 2악장의 대부분이 ‘~ 놀이’로 끝나는 놀이 연작으로 읽히는 것은 신형철 씨의 언술과 상통한다. 놀이의 방법은 언어를 통한 말과 의미의 유희다. 유희의 산물은 때론 발랄해보이지만 우울함을 기저에 깔아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세세하기 설명하기 힘들다. 전체적인 이미지들이 거대한 의미를 만들기 때문일까 시들의 전반에 숨겨놓거나 드러내놓은 이미지의 편린들이 전체의 그림판에 두고 봤을 때 어떤 그림을 이미지를 만들어내는지 궁금하기는 한 시인이다. 아직까지 해밝이가 시작되지 않은 산 운무가 가득하여 그 산의 선명하고 명징한 굴곡을 드러내지 않는 그런 산의 이미지다. 환상성을 입은 시들 ,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환상성을 입은 글들의 이면은 환상성의 농도와 정비례로 피폐하다고 생각한다.



3악장의 끝에 다다르면 이민하 시인은 “당신이 들은 건 그의 신음도 소파의 한숨도 아니고 당신의 독백일 뿐이죠. 매일 밤 복도를 지나는 당신은 고집스런 변장술사 이긴 이야기는 3인칭들의 끝말잇기놀이지난 겨울에 끝난 것일 수도 있고 ,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죠”라고 쓴다. 이제까지 시가 드러낸 낱말의 표면 의미와 이면 의미 속에서 유유히 혹은 뽐내듯이 오독하던 독자들에게 날리는 이민하의 훅이다. 오독해온 모든 것들이 당신의 독백일 뿐이라고 아무리 다양하고 논리적인 오독이라도 창작자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는 독자들의 독백 , 독자들이 읽고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의 독백이다.



다시 이민하 시인은 “침묵의 음역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의 노이즈는 계속됩니다.” 위로와도 같은 말이다. 침묵의 음역이란 것이 존재할까? 침묵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면 가장 흔히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존 케이지의 4분 33초라고 생각한다. 음역뿐 아니라 이민하 시인이 말하는 침묵에 도달하기 까지 계속되는 노이즈도 설명 가능하다. 침묵은 소리 없음이 아니라 거대한 소리다. 너무나도 많은 소리들이 모여서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소리의 형체도 가지지 못하고 노이즈에도 미치지 못하는 광할한 소리다. 절대 침묵 , 침묵의 음역에 도달할 대까지 너와 나 뿐이 아니라 우리의 노이즈가 필요하다. 침묵은 소리가 없고 소리가 없는 침묵은 거대하다. 거대한 것은 쉬이 그 형체를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이민한 시인의 시가 일반적인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청음범위를 넘어선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민하 시인의 시집 <음악처럼 스캔들처럼>을 다 읽었다. 이해되기 쉽지 않은 시들이다. 서정성의 세례를 받은 내가 읽기에는 아직은 머뭇거리게 되는 시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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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담 문학과지성 시인선 354
김경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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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시인의 <기담>을 읽은지 오래되었다. 오래되었지만 짚어보면 <시차의 눈을 달랜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기담> 순으로 두서없이 읽었으니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책에서 어떤 감흥을 받았을 때 평론을 적는 것과 산문을 적는 것은 그 방법이 다르다. 하나는 느낌을 명제화해서 어떤 의제로 만들어내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그 느낌을 나누는 것이다.’라고 <느낌의 공동체>를 출간한 신형철 평론가는 말했다.1)

느낌은 희미하지만 근본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만큼 공유하기 어렵다. ‘느끼다’라는 동사에는 ‘서럽거나 감격스러워 울다’라는 뜻이 있다. 어쩌면 사유와 의지는 그런 느낌의 합리화이거나 체계화일지도 모른다2)고 신형철 평론가는 <느낌의 공동체> 발문에 밝히고 있다.

느낌을 나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개인이 대상에 인지해서 가지게 되는 느낌은 개인에게는 명징한 이미지이겠지만 언어의 외피를 입는 순간 추상성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느낌을 나누는 것은 나누는 그 순간부터 어려워진다. 어려워지지만 근본적인 것은 상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것을 다른 방법으로 어휘로 느낀다는 것을 개개인이 느끼게 된다. 느낌은 그렇게 나누어지고 공유된다.

김경주 시인의 시에 대해서 느낌을 나누어 볼까 싶어 시작한 말머리에 신형철 씨의 이야기만 봄날 곡식 낱알 뿌리듯이 부려놓은 꼴이 되고 말았다. 부려놓은 말들의 씨앗에서 어떤 것들이 피어나게 될지 궁금하기는 하다. 그저 느낌을 나눈다고 신형철 씨의 말을 빌려온 것이 아니다. 신형철 씨가 자신의 두 권의 책 < 몰락의 에티카>와 <느낌의 공동체>의 지면을 할애한 사람3)이 김경주 시인이다. 두 지면을 통해 신형철 씨가 나누고자 한 느낌은 <나는 외로운 사람이다>에 한정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그것이 개인적으로 안타깝다. 지금 내가 느낌을 나누려고 하는 것은 김경주 시인의 두 번 째 시집 <기담>이기 때문이다.

시와 시인 그리고 시집이라는 언어들이 암묵적으로 가지는 의미라고 생각하는 ‘서정성’을 기대하고 김경주의 시집과 시들 - 구태여 시집과 시를 분간해서 쓴 이유를 사족처럼 붙인다면 시집은 시를 담아내는 커다란 궤일 뿐 시집이 시를 설명할 수 없고 시가 시집에 귀속 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시는 한 편의 시로 유약한 듯 보이나 하나의 세계를 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을 만난다면 시쳇말로 식겁을 하게 된다

시집을 펼치면 시인이 시들을 읽어주기 전에 말하는 , 일방적인 선언과도 같은 언사들이 있기 마련이다. 시집의 처음이 아니라면 마지막에라도 꼭 등장한다. 시집의 해설은 읽지 않아도 시인의 말을 꼭 읽어야 한다는 것이 시집을 읽어온 자의 감이라면 감이다.



내가 시를 쓰는 일은 피부에 살았던 기억이 전혀 없는 설계도를 새겨 넣고 , 그 설계 안으로 들어가보는 일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가난한 파충류는 곧 몸에서 열을 뱉어내고 그것을 먹기 시작한다.) 그러나 시를 쓰건 쓰지 않건 시를 생각하는 행위에는 , 언어를 열고 보면 그 속에 존재하는 멀미와 미로 때문이라도 언어 속의 가로등과 진피가 재구성 되어야 한다. 그것은 실험이하고 보기에는 혁명에 가깝고 , 혁명에 가깝다고 보기엔 너무나 원초적인 주저함에 가까워서 우리는 조금씩 열렬한 불순물에 가까워질 뿐이다. 너무 선명한 고해가 피로해서 나는 도처에 어지럽혀져 있다. 여기선 그 혈액을 흔들어 보기로 한다.




바람은 한 번도 목장을 갖지 못했고 목장은 한 번도 바람을 가두지 못했다.

이 시집을 세계에 활공하는 두두에게 바친다.




무엇인가를 쓴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시를 쓴다는 것이 피부에 설계도를 그리고 안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쓴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언어와 낱말로 설계를 구축하고 조망하는 일이다. 없음에 기원을 둔 있음이다. 태조에 인간이 있었듯이 태초에 시가 있었을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태초의 언어를 찾아 떠나는 퇴행이다.

언어로 구축된 표피들을 걷어내고 들여다보면 ‘실험이라기보다는 혁명에 혁명이라기보다는 원초적인 주저함에 가깝다’. <기담>에 얽힌 시들은 시형식의 실험이다. 실험을 빙자한 혁명의 전사(全射)4)로 읽어도 무방하다. 원초적 주저함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인의 생각이고 시에 비춰진 것에는 주저함이란 없다. 앞으로 나아간다. 실험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기 마련이다. 완벽한 성공 완전한 실패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의 차이를 견뎌 시간의 중첩된 어느 시점에서는 실험이 아니라 전설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을 견뎌낸다면 말이다. 이미 시를 쓴 선배 ‘이상’이 이룩한 그 경지 말이다.

‘바람은 한 번도 목장을 갖지 못했고 , 목장은 한 번도 바람을 가두지 못했다’라는 문장은 언어들은 한 번도 시가 되지 못했고 시들은 언어를 가두지 못했다라고 읽힌다. 김경주 시인의 실험은 자신이 의도한 것을 이뤄내지 못한 듯하다. 이뤄내지 못하고 사산된 기록들을 <기담>이라는 시집에 담은 모양이었다.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도 한 편의 추한 이이기도 아닌 기이한 이야기(奇談)다. 이야기를 담아내지 못한 그릇을 깨어야 할 것인가 그릇 안에 차거나 넘치게 담아낸 사람을 호통쳐야 하는 것인가는 애석하게도 객체일 수밖에 없는 읽는 사람들의 몫인 듯하다.

김경주 시인의 실험의 주무대는 장과 막 무대가 존재하는 연극이다. 아주 사소한 것일지 모르지만 보통 부로 나누어지던 것이 막으로 나누어진다. 기담이라는 연극은 3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가 가지는 서정성 서정성을 넘어서는 서사성 서사성을 극단까지 몰고간 형태라고 보여지는 연극 지문과 대사들이 <기담>이라는 연극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다. 연극 대본을 보면 처음에 지문과 해설이 나온다. 무대의 상황 설명을 위해서다. <기담>이라는 시판일 시작되기 전에 때와 장소 등장인물들을 해설하면서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사이’에 대해서 설명한다. 나는 ‘사이’를 ‘차이’로 오독하고 마는데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말미(末尾)의 시 ‘비정성시’탓이다. ‘비정성시’는 김경주 시세계의 생명수(生命樹)라고 생각하는데 <시차의 눈을 달랜다>를 처음 읽었을 때 이해되지 않던 관념 속에서 유영하던 시들이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의 말미를 읽었을 때 연계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시인 김경주는 전천후다. 목련의 처연한 죽음과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똑같은 톤으로 노래하고, 시나리오와 희곡과 장시의 경계를 무람없이 오간다. 서정에 능한 가객인가 싶다가도 다시 보면 이렇게 치열한 사색가가 또 없다5)’고 <느낌의 공동체>를 통해 신형철은 김경주를 평가한다. 시나리오와 희곡과 장시의 경계를 무람없이 오간 것은 그의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서 시작되었고 <기담>에서 진행중이고 <시차의 눈을 달랜다>에서도 이루어진다. 이러한 형식의 파괴라고 불릴 수 있는 작법은 그의 시가 충분히 낮익지않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시를 통해 실험하고 실험이라기 보다는 혁명에 가까운 몸짓을 한다. 곡진하게 밀고 나간다.

시인의 시는 결과물이다. 결과물은 연필 끝을 통해서 고착되는 순간 시인의 것이 아니다. 읽는 독자의 것이다. 이제까지 일반 독자가 아닌 사람들이 김경주 시인의 시를 어떻게 읽었는가에 대해서 어눌하게 풀어놓았으나 이것은 내 것 즉 독자의 것이 아니다.

<기담>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표제시 ‘기담’이 아니라 그 다음에 나오는 시의 한 구절이다. ‘식물은 자기 안의 짐승으로 토하다 가는 거고 / 인간은 피를 토하고 죽는 것이 아니야/ 자기 안의 식물을 모두 토하고 가는 거지’(짐승을 토하고 죽는 식물이거나 식물을 토하고 죽는 짐승이거나)였다. 식물과 동물 ( = 인간) , 서로의 대척점에서 죽음 즉 끝을 맞이할 때 쏟아내는 것 속의 것, 내면은 상반되는 것이다. 식물은 동물성을 동물은 식물성을 쏟아낸다는 것 절묘한 표현이며 서정성의 극한이라고 생각했다.

김경주 시인의 첫 시집 <나는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서 ‘사이와 차이’ 외에도 한 가지 얻은 이미지가 있다면 음악이 김경주 시의 저변에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었는데 이번 시집 < 기담>에서도 소리 혹은 음악에 관한 언술이 보인다. ‘어머니와 나는 같은 피를 나누어 가진 것이 아니라 똑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주저흔)고 말하거나 이 세상에 사람으로 진하게 흘러나와서 사람으로 연하게 버티는 일은 우는 일박에 없는 것인데 전생에 한 번은 이곳에 와서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자신의 전생을 울고 갔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어머니에게 물려 받은 울음을 운다는 것 , 세대가 전승 된다는 것은 피가 아니라 소리로 가능하다. 소리는 울음이다.

<기담>에서 김경주 시인은 언어와 문체에 문장에 대해 고민하는 부분들을 가끔 보게 된다. ‘잠 속에 한 육체를 업고 지나가다가 백 년은 봄에 이륙할 것 같은 문체를 본적이 있다. 문체라니 . 문육(文肉)이다.’ ( 구름이 백 년 전을 지나갔던 것일까? 꽃밭에 묻은 양배추인형) ‘다른 피를 밴 구름 / 연필이 마신 등고선들 / 떠오르는 순간 장례를 치르는 문장 / 음울한 한 짐승의 물방울’(풍선의 장례) , 시간보다 우위에 있는 ‘공간’으로서 , 촛불은 여기서 한 번도 썩은 적이 없고 저기서 ‘언어처럼 우리가 흙으로 묻을 수 없는 색으로 부유한다’‘허락된 이 지면으로 지금 이 천공(天工)을 언어에 허락할 수 있을까? 언어여 나는 언제나 네게 차가운 질(膣)이었다. (다섯 개의 물체주머니를 사용하는 자연시간 - 벽의 숙주는 틈이다 안으로 어떻게 들어갔을까?) 연필 끝을 통해서 드러나는 언어들 그 언어들을 지면(紙面)에 안착시키는 것은 흙으로 묻어 은폐하려해도 할 수 없는 언어다. 이러한 언어들은 김경주 시인을 통해서 생산되는데 대부분의 언어들은 떠오르는 순간 장례를 치러야 하는 운명이다. 사산되는 언어들에 대해서 김경주 시인은 ’잠 속에서조차도 문체를 잊지 못하고 절규한다. ‘문체’가 아니라 ‘문육’이라고 선언하다.

김경주 시인의 시들을 읽으면서 연필에 대해서 생각한다. 의미가 언어가 되어 나오는 도구다. ‘연필은 잡념의 생식기’(연필의 간) , ‘알겠다 연필 속에서 물새들이 활공하는 소리 들린다’/ ‘그것은 눈부신 문자의 활공 같은 것’(물새들의 초경) ‘나방 속에 떠다니는 얼음들이 연필심 속으로 무너져 내렸다.’(사랑해야 하는 딸들) ‘위액을 토하는 연필’(내시경) 과 같은 문구들이 산재한다. 김경주 시인은 관념론자6)에 가깝다고 한다. 의미들이 부유하고 그것은 부유할 뿐 쉬이 고착되어 언어가 되지 못한다. 언어가 되려다가도 그대로 무너져 내리기 일쑤다. 잡을 수 없는 것을 겨우 잡아내어 무너지지 않게 써내려 가는 작업을 시라고 할 수 있고 시를 쓰는 사람을 시인이라 부른다.

김경주 시인은 ‘비정성시’를 생명수로 삼아 뻗어나간다. 시라는 기본 서정을 놓고 시의 형식의 극단으로 치닫는다. 시이기도 하고 희곡이기도 하고 시나리오이기도 한 그의 시들이다. 그의 시는 한 편의 사람에게는 신선하게 느껴질 것이고 한 편의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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