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을 위한 독서클럽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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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노란 표지의 작은 그림들이 눈에 익살스럽게 들어왔다. 뭔가 아기자기한 내용들을 담고 있을 듯한 분위기였다.
책을 펼치면 성마리아나 학원의 독서클럽을 소재로 한 다섯 장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이 연속성 없이 펼쳐진다. 별 인기도 없이 소수의 인원들로 맥을 이어오며 정사에는 절대로 남지 않을 학원 내의 비밀을 자기들만의 비밀 독서클럽지에 기록해온 회원들을 중심으로, 즐거운 학원 명랑물의 분위기를 갖춘 내용이 은근히 풍자를 곁들이며 전개된다. 그러다 마지막 장에서는 변화된 사회에 맞춰 독서클럽도 막을 내리고, 앞장에 나왔던 등장인물들의 현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각 이야기간의 연결고리를 잇는다. 끝이 모호하지 않은 명확한 마무리여서 속이 시원해진 끝맺음이었다. 

책의 모든 곳에서 사춘기 여학생들의 심리를 읽을 수 있다.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 조금은 과장된 부분도 있고, 일본 작가의 이야기인 만큼 우리 실정과는 다른 부분도 많다. 그래도 여학생들만의 세상에서 동성에게 끌리고, 끼리끼리 어울리며 뭔가 다른 점이 있으면 쉽게 자신들의 세상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폐쇄성은 지난 학창시절을 돌이켜봤을 때 수면 밑에 은근하게 존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2장인 '성녀 마리아나 실종사건'이다. 프랑스인의 몸으로 일본에 건너가 성마리아나 학원을 세운 마리아나 수녀의 소녀 시절이 펼쳐지는데, 상당히 그로테스크적인 의외의 상황으로 발전되면서 흥미를 더해갔다. 마리아나의 오빠인 미셸이 운영하는 음험한 중고책 서점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그려질 것 같았으니, 묘사도 매우 훌륭했던 것 같다. 얼굴 외에는 닮은 점이 별로 없지만, 애틋한 정이 오고 가는 오누이의 모습에서 따뜻함도 느껴졌고, 세계대전 후에 바뀌어진 사회상이 그려져 조금은 진지하게 읽었던 부분이다.

3장 '기묘한 손님들'에서는 가장 일본적인 냄새가 많이 났다. 그 바람에 쉽게 동화돠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먼 시공간을 뛰어넘어 갑자기 일본 10대들의 신문화를 이해하기가 벅찬 점이 있었다.

책의 내용 중 특별했던 점은 클럽활동이 학교생활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거의 유명무실하다시피 했고 지금도 크게 다를 바 없는 우리의 학교 실정과 비교하면, 이 학교의 아이들은 생활의 많은 부분을 클럽에 투자한다. 일본의 학교가 원래 이런지, 소설 속에서만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비밀일지와 같은 기록을 후배들에게 계속 전해줌으로써 역사를 잇는 작업은 꽤나 매력적으로 보인다. 공부하느라 힘든 우리의 아이들로서는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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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1 - 시대를 일깨운 역사의 웅대한 산
한승원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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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을 읽으면서 초기에 든 느낌은 '그리움'이었다. 진실로 백성을 생각하는 참된 정치가의 모습을 지닌 정약용이 그립고, 노론의 강대한 힘에 맞서며 바른 정치를 펴셨던 정조가 그리웠다. 조선의 역사를 발전적인 모습으로 한참을 끌어당기셨던 두 분의 업적이 없었다면, 미래는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니 그같은 분들이 한차례 더 나와 전성기를 구가했었다면 어땠을까...군신간에 믿음과 존경이 오가는 보기 좋은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할 수만 있다면 2008년을 고이 접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데, 내가 있는 곳은 어디쯤일까.

소설 '다산'에서 정조를 만나고, 희미하게나마 사도세자의 흔적까지 밟을 수 있었던 것은 덤으로 얻은 즐거움이었다. 사도세자를 그리 만든 노론이란 정치집단에 깊은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그같은 이익집단의 존재와 이기경의 배신과 같은 사건들이 자꾸 현재의 정치 현실과 오버랩되어진다. 역사서를 읽는 또다른 재미이다.

진리를 추구하던 학문에의 열정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유학의 논리를 뛰어넘어 천주교의 교리와 맞닿으며 새로운 깨달음을 구했다. 천주교의 이론을 빌린 주자학의 해석은 기존의 학문에 갈등을 느끼던 정약용과 진보적 남인 세력들에게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했고, 한번 천주교로 빠졌던 전력은 내내 노론으로부터의 공격 대상이 되어 유배길로 오르는 원인이 된다. 지금도 다산의 사상은 깊이 존경받으며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다산비결'의 혁신적인 내용은 당시 조선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평등과 개혁 사상을 내포하고 있어, 그의 사상이 시대를 뚫고 먼저 한참을 앞서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의 형제들 또한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다.
4살 터울의 형인 정약전과의 우애는 깊고도 깊어 함께 유배길에 올라 이별을 나누면서도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까봐 마음 졸이던 행동이 잘 나타나 있다. 행여나 근심 속에 약주로 몸을 버릴까 서로 잔소리도 잊지 않는 형제는 그 예감이 맞아떨어져 이후 다시 보지 못한 채 정약전이 먼저 눈을 감게 된다. 정약전은 흑산도의 유배생활 도중 '자산어보(현산어보)'를 남겼다. 조만간 이 책을 읽어볼 생각이다.
한편, 천주교를 학문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던 정약용과는 달리 깊은 신앙으로 모든 것을 걸었던 정약종은 순교의 길을 택했다. 총명했던 정약용의 어린시절과는 별개로, 바로 윗형이면서 동생에게 뒤져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열등감과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내쳐진 경험이 있는 아픈 기억을 안고 사는 정약종의 삶은 내내 가시를 씹는 것처럼 편안하지 못했다. 그의 억눌린 소외감은 천주교의 하나님을 만나면서 절대적 신앙의 경지에 도달하여 순교도 그 무엇도 겁내지 않는 신념으로 승화한다.

저자 한승원은 다산을 매우 아끼는 작기라고 한다. '다산' 집필에 앞서 '흑산도 하늘길'에서 정약전을, '초의'에서는 제자였던 초의스님을 소설로 그려냈었다. 이런 작업들은 모두 '다산'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나왔으며, 그 대단원의 결과물이 '다산'인 셈이다. 짤막하게 나누어져 있는 단원들의 스피디한 전개로 지루할 틈없이 읽어내려가게 만든 힘은 오랜 시간을 거친 준비작업의 힘이자 결과라고 여겨진다.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역사를 바로 보게 만드는 소설가의 힘은 크고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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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펭귄클래식 19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최진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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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클래식의 두 번째 책으로 만난 '첫사랑'은 투르게네프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한다. 어머니와 강제결혼을 해야 했던 가난한 가문 태생의 아버지는 가정과 아들에게 모두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예의바르게 대했고, 투르게네프는 그런 아버지를 사랑하면서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바라봤다. 이 점은 소설 속 블라디미르와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와 닮아 있다. 

한 소년이 사랑에 눈을 뜨면서 겪는 심리의 변화, 맹목적인 열정이 이성을 갖추는 단계로 변화하는 과정을 그려낸 이 소설은 점차 붕괴되어 가는 러시아의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몰락한 공작가의 딸로서 남자들의 애를 태우며 그들의 감정을 조종하던 지나이다의 행실은 어찌 보면 한심한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진짜 사랑에 눈을 뜨면서부터는 앞뒤 사정 가리지 않고 열중하는 순정파이기도 하다. 물론 상대가 유부남이라는 것에서 도덕적 비난이 따르지만, 뛰어난 외모에 영리함을 갖춘 그녀는 최소한 된장녀는 아니었던 셈이다.

항상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첫사랑의 여인에 대한 애태움, 그녀의 행동거지 하나에 감정의 파란이 들썩이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블라디미르가 원래 해야만 했던 공부는 뒷전이 되고 만다. 왠지 사랑에 빠진 듯이 보이는 지나이다로부터 의심의 눈길을 거둬들일 수 없었던 그는 밤에 아버지의 존재를 목격하여 충격을 받았고, 이어 누군가의 투서로 아버지의 외도가 어머니에게까지 알려지며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투르게네프가 이 소설을 처음 썼을 때에는, 아버지와의 불화로 고아의 입장이나 마찬가지가 된 블라디미르가 다른 아저씨의 집에서 사는 것으로 설정되었다고 한다. 이후 작품을 개작하면서, 사랑하는 여인인 지나이다에 대한 마음과는 또다른 차원의 애정의 대상인 아버지를 질투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독특한 관계로 바뀌었다. 사랑의 완성인지 실패인지를 따지는 결과론을 떠나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복잡다난한 감정의 하나로 사랑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개작의 결과가 더 맛깔스럽다고 생각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어 사랑을 완성하기는 커녕, 지나이다의 배신(그 혼자만의 생각으로는)의 대상이 아버지였다는 충격에도 불구하고 블라디미르는 차츰 제자리를 찾아간다. 아버지와 지나이다의 사랑은 그의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강력하고 원숙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후 대학을 졸업한 후 직업을 정하려는 시점에서 우연히 듣게 된 지나이다의 사망 소식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젊은 날의 사랑과 아픔을 떠올리게 한다. 첫사랑은 블라디미르의 남은 인생동안 그가 영원히 품고 있을 수밖에 없는 추억으로 가슴속에 포개진다. 사랑은 최고점의 클라이맥스를 넘어서는 순간 한풀 꺾이며 식혀진 열정이 되는, 마치 변화하는 생물체처럼 행동하는 감정이지만, 휘몰아치는 열정의 힘이 지배하는 첫사랑의 순간만큼은 누구에게나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자리잡기 마련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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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 (반양장) 펭귄클래식 3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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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박사와 하이드'는 초등학생용 세계명작에도 나올 만큼 대중적인 소설이지만, 성인용으로 나온 책을 정식으로 읽어보긴 이번이 처음이다. 펭귄 클래식 시리즈 중에서 처음 읽어보는 책이라 번역은 성의껏 되었는지, 안의 구성은 어떠한지 따위가 은근히 궁금하기도 했다. 일단 형식면에서 합격점을 주었다. 판본에 관한 내용의 서문과 뒤편에 나오는 지킬박사 분석에 관한 글, 그리고 저자인 스티븐슨이 소설 집필 과정을 쓴 '꿈에 관하여'와 같은 충분한 배경지식이 나를 만족시켰다. 번역도 훌륭하다. 몇 페이지를 읽어내리기도 전에 이 책은 속독으로 읽으면 안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괴기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주변풍경을 그려내는 문장이나 심리상태 등의 묘사가 충분히 작품이라 손꼽힐 만큼 수준 이상이어서 문장을 음미하며 읽어야만 제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킬은 왜 하이드로 변신하는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던 것일까? 갑자기 성선설과 성악설이 생각난다. 인간의 본성이 어느 것에 더 가까운지 모르겠지만, 누구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갖고 있다면 나쁜 면을 억누르고 좋은 점을 발현시키기 위해 교육을 받고 교양을 쌓는 것이리라. 그러나 젊은 시절 쾌락을 맛본 지킬은 의사라는 신분에 걸맞게 철저히 도덕적으로 무장된 모습을 보이지만, 내면에서 꿈틀대던 방탕한 악마적인 면도 또한 자신의 다른 모습이기에 약물까지 만들게 된다. 이 부분이 현실성이 떨어져 비판을 받았다고는 하나, 인간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악마적 성향을 분리하여 보여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설정이었던 것 같다. 도덕성에 상처를 주지 않고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으며 두 삶을 영위하던 지킬은 악의 힘이 점점 커지면서 약물의 힘을 빌리지도 않고 가끔씩 튀어나오는 하이드의 존재로 파멸의 길을 걷는다. 

어쩌면 지킬과 하이드는 우리 생활에서 동떨어진 소설 속의 일만은 아니다. 다중인격 쟝애라는 병은 한 몸 안에 전혀 다른 여러 개의 인격이 있어 하나의 인격이 활동할 동안 다른 인격은 그 기억으로부터 분리된다고 한다. 어떠한 충격이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리시켰던 자아가 나중에 나타난다는 원인 면에서의 차이는 있으나, 인간의 분열된 자아의 존재면에서 동질성이 있다.
또한, 어떤 일을 앞두고 마음 속에서 천사와 악마가 싸우는 설정은 만화나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분열된 자아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내면의 여러 인성을 내보이는 점에서 조금은 닮아 있다.
하이드라는 존재는 인간이 쉬쉬하며 감추고 싶었던 부분일지도 모른다. 완벽하지 못한 인간의 한계상 갈등을 빚는 여러 인성이 존재하고 나쁜 쪽으로 치닫는 인성이 분명 내부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것을 지킬박사처럼 외부로 발현시켜 욕구를 충족시키기보다 억누르고 순화해 나가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

이외에도 두 편의 단편이 더 있다. '시체 도둑'은 짤막하고 으스스한 내용이 추리소설처럼 재미있었고, '오랄라'는 심리를 장황하게 다룬 면이 조금 지루했고 감정 이입이 잘 되지 않은 면은 있지만 스티븐슨의 작가적 역량이 충분히 드러난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흡혈귀라는 설정을 나중에서야 알고 조금 당황했다. 피를 보고 손가락을 물어뜯던 장면에서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으니, 어지간히 둔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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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 버틀러의 사람들
도널드 맥카이그 지음, 박아람 옮김 / 레드박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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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봤을 때의 감동은 몇 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만든지 오래 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동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될 만큼 생생하던 배우들... 지금도 가끔씩 기억나는 몇몇 장면을 다시 돌려 보고 싶어지는 영화다. 유난히 기억에 남던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의 마지막 장면 이후엔 스칼렛과 레트 버틀러가 만나 뒤늦은 사랑을 이어갈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궁금증을 채우기 위해서 어설픈 속편이 나오는 건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혹시나 원작의 이미지까지 깎아먹진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레트 버틀러의 사람들'은 그런 점에서 독자의 염려를 말끔히 씻어준다. '야곱의 사다리'로 실력을 인정받은 도널드 매케이그의 작품이고, 이미 해외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하여 걱정따위는 접어두고 읽을 수 있었다. 스칼렛에 초점이 맞춰졌던 영화와는 달리 레트 버틀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점도 색다르게 보였다. 두툼한 책을 한장한장 읽어나갈 때마다 영화의 장면이 오버랩되기도 했고,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이 채워지면서 더 풍부한 이야깃거리와 배경으로 떠올라 머리 속에 차곡차곡 쌓여나갔다. 뿐만 아니라, 남북전쟁 당시의 미국 상황을 재연했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분노를 역사책을 보는 것보다 숨쉬듯이 가깝게 느낄 수도 있었다.

레트 버틀러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의식이 없는 사람이다. 지나친 솔직함으로 남북전쟁에서 남부가 패배할 거라고 말하여 사람들로부터 미운 털이 박히는 주변인의 성향이 강하다. 그런가 하면 사생아의 아버지란 의심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감싸준 신사이자 의리의 사나이로 등장하여 영화에서 그려지던 것보다 훨씬 속깊은 인물이란 걸 알 수 있다.

레트의 여동생인 로즈메리 버틀러라는 인물이 구체적으로 부각된 점도 이 소설의 특징 중 하나이다. 로즈메리는 아버지와 의절관계이다시피 한 오빠를 존경하고 따르며, 가족과 연결하는 끈과 같은 역할을 한다. 훗날 멜라니와 교분을 쌓으면서 주고 받는 장문의 편지들에서 멜라니와 애슐리의 심리상태와 두 번의 결혼 후 홀로 꿋꿋이 설 만큼 강해진 로즈메리의 변화를 상세히 느낄 수 있다.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지 않아 원작의 분위기는 어떤지 알 수 없으나, 최소한 이 책에서 인종 차별의 시각은 찾아볼 수 없다. 되려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시체마저 참흑하게 훼손되고 마는 투니스라는 인물을 통해 인종차별의 부당함을 역으로 고발하고 있다. 광기가 서렸다고 표현될 만큼 흑인에게 집단 분풀이를 하던 백인들과 KKK단의 등장은 역사의 비뚤어진 부분을 그대로 보여주며 미국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만 같다. 때로는 한 편의 문학작품의 힘이 법조항 하나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더 많이 움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부분은 이 소설의 긍정적인 면이라 볼 수 있다.

오래 전 본 영화에서 레트 버틀러의 이미지를 새롭게 쌓아올리며 끊어진 필름을 연결토록 해준 '레트 버틀러의 사람들'은 남북전쟁을 전후하여 급변하는 미국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다양한 인간 군상, 인물의 심리상태를 비교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팬이라면 아마도 더욱 반가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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