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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왕
니콜라이 바이코프 지음, 김소라 옮김, 서경식 발문 / 아모르문디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 '위대한 왕'을 읽으며 어릴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분명 이런 줄거리의 만화를 본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캄캄한 밤, 길을 걷다 호랑이와 마주친 사내는 용기를 내어 호랑이를 응시한다. 도전적이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눈빛은 호랑이를 압도했고, 호랑이는 조용히 한곁으로 길을 비킨다. 긴장감이 넘치는 위험 속에서도 당당한 자세를 지키는 사내와, 맹수이면서도 상대의 인성을 꿰뚫어보며 본능을 자제하는 호랑이의 모습이 기억에 남았었다. 그리고 마지막, 높은 산꼭대기에 잠자듯이 누워있는 호랑이를 그 사내는 찾아간다. 그리고 통곡했던 것 같다. 유독 그 두 장면만이 잊혀지지 않고 남아있는 만화...그리고 이 책은 바로 그 원작을 완역한 책이다.
이 이야기는 광활한 만주의 침엽수림을 배경으로 러시아 작가가 쓴 작품이며, 문체가 아름답고 유려하다.
--어린 새싹들이 회색과 암갈색 풍경 위로 에메랄드빛 음표처럼 고개를 내밀었다. 야생 벚나무와 사과나무들이 곗곡과 산비탈에서 다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하얀 은방울꽃도 어둡고 깊은 숲 속에서 봉오리를 터뜨렸다. 크리스털처럼 맑은 숲의 공기가 땅이 내뿜는 온갖 개화의 향기로 가득 찼다. (p 20)--
이렇게 자연의 모습을 표현하는 생생한 문장으로 시작하니, 청명한 공기 속에서 새벽 안개와 함께 파릇파릇 생명력을 자랑하는 식물들의 모습이 절로 그려져서 책의 내용 속으로 빠져들게끔 준비 완료 자세가 갖춰졌다. 저자가 직접 그렸다는 삽화도 펜으로 그린 듯 섬세하게 이야기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어 내용을 살려준다.
훗날 왕으로 불리게 되는 주인공은 한국의 호랑이로, 왕이 어미의 뱃속에서 탄생되는 순간부터 내용이 시작된다. 왕과 여동생의 어린 두 남매를 먹이고 보호하기 위해 사냥을 하고 산책을 시키는 등의 어미의 행동은 구체적이고 흥미롭게 나타나있다. 주변에 호랑이가 있음을 알아챈 인간들로부터 멀리 떨어지기 위해 새끼를 하나씩 물어 다른 곳으로 운반하기도 한다. 새끼들이 어느 정도 자라자 살아있는 오소리를 동굴로 가져와 산 먹이를 잡는 법을 교육시키는데, 죽음을 감지하고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는 오소리와 새끼호랑이들의 싸움이 긴박하면서도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밖의 다른 동물들의 이야기들도 재미있다. 산전수전을 다 겪어 멧돼지들의 우두머리로 통했던 '갈라진 귀'는 한번의 실수로 무리로부터 멸시당한다. 모두가 '갈라진 귀'를 따돌리는 새에 어느덧 젊은 멧돼지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나서자 늙은 멧돼지는 혼자만의 길을 나선다. 마치 사람들의 세계와도 같은 멧돼지 사회의 일면을 들여다보며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겁없이 펼쳐지는 다람쥐와 담비와의 싸움 장면도 참 흥미롭다. 다람쥐를 쫓다 분에 차 씩씩대는 성질을 호랑이 앞에서도 죽이지 못하는 담비를 재미있어하며, 오히려 나무 위 작은 동물들을 부러워하는 호랑이의 모습이 진실하고도 소박한 권세자 같았다.
이 책에서는 '위대한 왕'의 생애와 동시에 인간들의 개발로 황폐해져 가는 산림과 동물들의 분노를 다룬다. 엄격한 먹이사슬의 위계질서 하에 나름의 질서를 지키며 살아가던 동물들은, 다른 생명체는 아랑곳하지 않는 인간들의 오만한 개발로 아파하고 신음한다.
--예전에 이 자유로운 황무지의 초록 언덕에는 순록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수많은 야생 동물들이 살았지만, 이제는 금속으로 만든 번쩍이는 날쌘 용이 끊임없는 굉음을 내며 굴러다녔다. 용은 긴 철로를 따라 거대한 꼬리를 뒤에 끌고 다녔다. 고막을 찢을 듯 삑삑거리는 용의 소리는 숲의 신성한 평화를 깨뜨렸고, 타이가의 모든 야생생물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미로 같은 산과 깊숙한 숲 속으로 도망쳤다.(p170)--
인간이 만든 총이라는 무기로 속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산 꼭대기에 가서 조용히 숨을 거두는 위대한 왕의 모습은 이 책이 쓰여진 당시의 정치적 의미, 즉 구미열강 앞에서 쇠락하는 아시아 민족들의 위기로 보여질 수도 있다. 당시의 일본인들은 인간의 새로운 개발로 위대했던 호랑이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침략의 당위성 인정으로 해석하며 환영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겐 오직 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동물들의 터전이 앗아지는 비극을 보여주어, 지구의 주인은 인간만이 아닌 생명체를 가진 모두라는 시각이 느껴진다. 책이 준 감동과 의미가 충분히 깊어 굳이 또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은 고집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과 세밀한 묘사로 숲 속 동물들의 세계를 여과없이 보여준 이 책은 기대하지 않았다가 뜻밖의 수확을 거둔 듯한 기쁜 마음을 갖게 해주었다. 많은 책들 속에서도 특별히 아끼는 보물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