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친 막대기
김주영 지음, 강산 그림 / 비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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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삶이 의도되지 않은 대로 향해 갈 때가 있다. 곧게 뻗어나간 길을 걷다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들어올려져 옆으로 패대기쳐진 느낌 같은 것. 이게 뭐지?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아무리 항변해도 되돌아가기 위해선 다시 낮은 자세의 포복으로부터 일어서기를 해야 하는데, 그게 꽤 억울한 거다. 눈앞에 펼쳐지게 될 고난을 예측해보니, 세상의 불행이란 불행은 모두 내 앞에 와 차렷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훅!" 불어서 쉽게 날려보낼 수만 있다면!

위로 하늘 높은 위용을 자랑하고 아래로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깊고 튼튼한 뿌리를 가진 백양나무의 곁가지는 어느날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농부의 손에 의해 부러짐을 당한다. 스스로의 움직임이 제한되어 있는 곁가지는 엄마나무가 끌어올리는 영양분을 먹으며 햇빛을 즐기고 종종 내리는 비에 시원한 샤워를 했을 뿐인데, 무심한 농부의 손길에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기차의 경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고향의 부모님께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싶었던 기관사가 울린 경적이 임신한 암소의 예민함을 건드려 날뛰게 만들었고, 암소를 다스리려 한 농부가 회초리 삼으려고 꺾은 것이 우리의 주인공인 막대기였던 것이다. 막대기는 이제 생명력을 읽고 만 것일까? NO다! 사람들이 하찮게 생각하는 나뭇가지에 불과한 막대기이더라도 아직은 생명력이 엄연히 숨쉬고 있는 '살아있는 것'이다. 막대기는 스스로 꺾여진 상처를 치유하고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자신의 삶을 보듬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고 세상을 바라본다.

이제 막대기의 모험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농부의 집으로 옮겨진 막대기는 농부의 딸인 재희의 종아리를 때리는 회초리의 도구로 사용된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막대기에게 선택권은 없다. 이어서 측간 벽에 얌전하게 세워진 막대기는 자신이 왜 그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처음엔 알 수가 없었지만, 재래식 화장실의 오물을 판판하게 휘젓는 똥친 막대기가 되고 나서야 인생의 막장에 몰린 처지를 깨닫고 당황한다. 팔다리가 없는 막대기는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말라붙은 오물이 숨을 죄어와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랄까? 희망을 잃지 않았던 막대기에게 구세주처럼 다가온 건 평소 흠모하던 재희였다. 재희에 의해 막대기는 논가 봇도랑 한구석에 쳐박혀 그곳에서 오물로 더럽혀진 몸을 씻을 수 있었다. 

우리 막대기의 모험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며칠째 계속 내리던 비에 떠내려간 막대기는 물살의 흐름을 끊고 땅으로 올라가야만 하는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마침내 어딘지 모를 들판에 당도하여 기분좋은 흙의 간지럼을 느끼면서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된  막대기. 이 운명을 결정지은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홍수에 떠내려가던 돼지를 만난 운도 작용했지만, 알아듣지도 못하는 돼지에게 용기를 주는 영감을 불어넣지 않았다면,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고 측간 옆에 맥놓고 서있었다면 다른 싸리나무 가지처럼 천천히 굳어가며 미라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보잘것없는 막대기도 꺾인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숨을 쉬고 있다는 것에 주변을 다시한번 돌아보게 된다. 나의 구조를 바라고 있는, 내게 열심히 신호를 보내고 있는 막대기와 비슷한 존재는 없는지.
또한, 팔다리가 붙어있어 움직임이 가능한 나는 최소한 막대기보다 더 크고 멋진 희망을 가진 채 내려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생각한다. 똥친 막대기가 들려준 긍정적인 생각과 의지, 희망을 듣다 보면...에라, 일어나야 하지 않겠니? 그렇게 움추리고 있지 말고. 주가의 오르내림에 마음 다치기보다는 인생이 그처럼 굴곡있는 곡선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하렴. 측간 옆에서 벗어난 막대기처럼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 또한 마음먹기에 달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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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 - 하늘에 계신 아빠가 들려주는 사랑의 메시지
롤라 제이 지음, 공경희 옮김 / 그책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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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야만 하는 아빠는 다섯 살짜리 딸에게 편지를 쓴다. 작고 귀여운 딸아이의 모습을 앞에 두고, 아이가 12살부터 30살이 될 때까지의 인생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 미래의 딸에게 편지를 보내는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병마와 싸워가며 아이에게 쓴 편지들의 모음은 한 권의 노트에 완성되었고, 그것은 하필이면 엄마가 재혼하던 날 고모를 통해 전달된다. 새 아빠가 영 탐탁치 않던 사춘기 소녀 루이스는 아빠가 남긴 '매뉴얼'에 의지하며 삶을 살아나간다.

책은 루이스의 성장과정을 빠른 템포로 그려내며 친구, 이성문제, 가족관계, 그리고 직장인으로서의 성공과 좌절을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다. 누군가의 충고가 필요한 예민한 문제부터 좌절의 고통스런 시기까지 매뉴얼은 큰 힘이 되었고, 남자들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기도 했다. 개개의 나이마다 가장 고민할 주제에 대해 아빠만의 따스한 감성과 경험을 곁들여 조언한 내용은 아빠의 부재가 가져오는 빈 자리를 메꿔주는 역할을 했다. 엄마의 늦은 임신으로 엄청난 나이차의 배다른 동생을 갖게 된 루이스가 느끼는 소외감조차 매뉴얼이 감싸준다.

그래서일까? 단짝친구 칼라가 애정관계를 중요시하고 남자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에, 루이스는 착실히 앞길을 닦아나갔다. 여행을 많이 하라는 조언에 용기를 얻어 석 달간 자선단체의 주도 아래 미국을 방문하는 경험을 쌓았고, 아빠가 가르쳐주신 면접 요령에 힘입어 원하는 회사에 자신감있게 응시하여 좋은 직업을 얻는 데 성공한다. 30살이 되어 아빠의 매뉴얼을 다 읽은 루이스는 그제서야 엄마와 아빠의 사이가 이혼 직전까지 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재혼한 지금의 남편을 사랑하는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죽어서조차 딸아이의 삶을 바르고 성공적으로 이끌고 싶었던 아빠의 사랑은 매뉴얼의 구절마다 녹아있어 루이스를 감동시켰으며, 시공을 초월한 유대관계를 이어나가는 끈의 역할을 한다. 아빠의 사랑이 고스란히 담긴 매뉴얼을 읽으며 자란 19년간, 루이스는 엄마의 재혼에 부딪힌 삐딱한 마음의 소유자에서 가족과 친구를 어우르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당당한 여성으로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회가 변화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루이스가 사회에 나갈 무렵 태동단계에 불과했던 it산업은 그녀에게 많은 기회를 주어 탄탄대로의 성공을 맛보게 했으나, 곧이어 과열되었던 it 경기가 하강세로 접어듦에 따라 직장에서 잘리고 만다. 그 이후 선택한 직업은 컴퓨터를 이용해 고객이 원하는 대로 보정이 가능한 사진관이라는 점이 우리가 지나온 몇 년간의 세월과 그리 다르지 않은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어 내용에 설득력을 더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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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1 - 상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밀레니엄 (아르테) 1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아르테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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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뒤가 궁금해지는 추리소설을 읽은지가 언제였던지... 많은 분들의 극찬어린 서평을 보고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책이었는데, 역시나라고 할까? 처음부터 끝까지 빠른 전개와 재미있는 내용으로 책을 손에서 놓기가 싫어졌다. 어쩔 수 없이 잠이 올 땐 수면시간이 원망스럽기도 할 정도로, 여건만 된다면 그 자리에서 두 권을 모두 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 

저자의 조국인 스웨덴에서 300만 부가 팔렸고, 이같은 현상은 다른 나라에도 번져가며 '다빈치 코드'와 '해리 포터'를 잠재울 유일한 책이란 찬사까지 얻었다. 10부작까지 기획되었지만, 저자인 스티그 라르손이 3부까지 저술하고는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각 부마다 등장인물이 반복되어 나온다던가 하는 연관은 있지만, 줄거리가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3부작이라 할지라도 끝은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신선하고, 실감날 정도로 구체적이다. 바바리코트를 걸친 판에 박힌 형사가 아니라, 현직 언론인이었다가 오보기사로 고소에 휘말리며 사회적 매장을 당한 인물인 미카엘이 주인공이다. 미카엘은 비록 불륜을 저질러 아내와 이혼을 한 오점은 있지만, 근본적 성격은 이해심도 넓고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도 투철하며 타인을 배려하는 매너 또한 뛰어난 편이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인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다른 어떤 소설에서도 보지 못한 독특한 캐릭터이다. 작은 키에 천재적 두뇌를 지녔으나, 그만큼의 축복과 반비례하는 사회적 부적응성과 폭력성을 지닌 여성이다. 사진 찍듯이 암기해버리고 이해하는 비정상적 두뇌에 문신과 피어싱을 한 외모를 지닌 이 삐딱한 여주인공에게는 비호감도 호감도 생기지 않지만, 그 독특함에 관심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대재벌 반예르 가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린 소녀 하리에트를 추적하는 미카엘은 마침내 조각조각의 단서를 모아 사건의 중심점에 도달해 간다. 그만큼 위험도 늘어만 가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는데, 밝혀진 사건의 연유는 일반인이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파격적인 부분이 있었다. 중반까지 범인이 누구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살짝 뒤를 보기도 하며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책이다. 미성년자 절대 관람 불가의 내용이 많아도 작품의 내용과 겉돌지 않는 까닭에 거부감이 생기지는 않는다.
별 관심없이 막연히 복지국가, 선진국이란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스웨덴이란 나라는 책에서 묘사한 사회 지도층의 검은 비리로 볼 때 가까운 곳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던 점이 의외이긴 했다. 현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2부와 3부도 벌써 흥미진진한 제목이 정해져 있는 상태라서 출판을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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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 뜨는 여자
파스칼 레네 지음, 이재형 옮김 / 부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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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 뜨는 여자'를 읽기 시작하면서 작가가 문장을 풀어나가는 섬세함과 독특함으로 인해 미로를 걷는 것처럼 어지럽기도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내용을 줄줄이 나열하여 읽기 쉽고 속도감이 빠른 소설과는 절대적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라보기만 해도 그 살결이 손가락 씻는 예쁜 물그릇을 차갑고 투명하게 만들 것 같은 아주 갸날픈 쳐녀들의 그 매력적인 연약함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손은 아래팔에 대충대충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게 붙어 있었고, 아래팔은 위팔에, 그리고 잇달아 그런 식으로 붙어 있었다.(p 11)--
--아무리 추한 계집아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꿰뚫고 지나가며 그드의 내부에서 자신을 스스로 모색하고, 어떤 식의 공모로도 결코 축소할 수 없는 욕망으로 말미암아 은은히 반짝이는 삶의 그 경이로운 순간, 뽐므는 그 순간을 거의 무한정으로 연장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었다.(p 28)--
읽다 말고 이게 무슨 소리야 하며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구절들. 그래서 두께가 얇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데 시간이 꽤 걸린다. 소설은 시각적 매체가 아니라서 그만큼의 상상력과 뇌의 활동을 필요로 한다더니, 그야말로 집중과 상상력이 곁들여지지 않으면 그 감칠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내용은 미용업에 종사하는 뽐므라는 아가씨와 대학생인 에므리의 연애담이다. 줄거리의 표면만 보면  신분 차이가 나는 커플 중 위의 계급에 속한 인물이 자신보다 못한 상대에게 싫증을 느끼고 떠나는 것이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함을 훨씬 넘어선 소통과 사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선, 필요한 말밖에는 하지 않았던 아빠의 가출과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가족이라는 편한 공간에서의 소통조차 원활하지 못했던 뽐므의 상태를 알 수 있다. 또한, 지적인 영역까지 교감하길 바랐던 에므리로서는 빗자루와 깡통따개, 빨간 고무장갑이 먼저 생각나는 뽐므와 오랜 기간동안 연인의 관계를 지속하기가 불가능했다. 연인으로부터 버림받고 들어온 뽐므에게 엄마는 많은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되지 않았고, 뽐므는 서러움을 표현하고 위로받기보다 의젓하게 행동하며 수치심을 감추는데 급급했다. 뽐므는 하고픈 말을 속에 담은 채 거식증에 걸려 음식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입원하여 치료중인 뽐므는 문병차 찾아온 에므리에게 담당 의사 선생님을 소개해 주려고 하나, 의사는 못들은 척 계속 걸어가기만 할 뿐이다.
--그는 그녀를 못 보거나 그녀의 말을 못 들은 듯 계속해서 걸어갔다. 그는 다시 정신과 의사, 감시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짐승에게 함부로 먹이를 던져 주지 않는다. '레이스 뜨는 여자'는 그녀의 벤치 위에, 그녀의 창유리, 그녀의 창살 뒤에 다시 앉았다.(p 150)--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한 동명 영화의 엔딩 장면은 관객을 응시하며 많은 이미지를 함축했던 뽐므의 눈길이었지만, 소설의 결말은 뽐므가 에므리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려는 듯 짐짓 웃음까지 보여준 부분에서 끝난다. 뽐므의 미래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불분명하다.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거식증을 회복하고 퇴원할 수 있었을까? 뒷줄거리는 독자들의 몫이다. 소설 속의 사회성과 철학을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하느냐에 따라 그 결말은 바뀌어 저마다 다른 의미의 '레이스 뜨는 여자'를 가슴 속에 품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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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씨들이여, 영원히 안녕
마르셀라 세라노 지음, 권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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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매의 특성을 살려 가족간의 따뜻한 분위기를 그려낸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은 흘러간 시간에 상관없이 지금도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다. 대단한 사건은 나오지 않더라도 개성이 뚜렷한 네 아가씨들이 사는 법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고, 잔잔한 주변의 일들이 친밀감있게 전개되는 까닭에 영원히 아끼는 작품이 되고 말았다. 반면에, 이런 유명한 소설의 아류작들을 접할 때에는 기대감 아니면 조심스러움이다. 혹시나 원작을 뛰어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아니면 원작의 이미지까지 훼손시키는 졸작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읽을까 말까를 반복하게 된다. 

이 책은 '작은 아씨들'의 아류작이라고 평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모티브를 따온 것은 사실이지만, 칠레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네 자매가 아닌 네 사촌들이 펼치는 격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담아내고 있다. 메그, 조, 베스, 에이미와 성격과 분위기조차 비슷한 주인공들이 역시 등장하지만, 모태가 되었던 소설과는 내용면에서 엄연히 거리감을 두고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의 독자성을 확실하게 해준다. 문체도 차이가 난다. 읽기에 부담 없었던 '작은 아씨들'과는 달리 서술형의 문장과 마음속 생각이 형식에 구애없이 나열되는 이 책의 문체는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면를 확실히 더뎌지게 만든다. 그렇다고 그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문장을 음미하며 읽기를 좋아하고, 감정이 풍부하게 묘사되어 있는 글을 좋아한다면 오히려 강점이 될 수가 있다. 이 책의 문장은 내용을 알려주기 위한 수단이기보다, 따로 관심을 가져줘야 하는 독자적 존재로 자리를 지킨다. 따라서, 속독은 피해야 하고, 잘 되지도 않는다.

등장인물의 성격은 '작은 아씨들'과 거의 비슷하다. 전업주부의 삶을 택했지만 아이들이 커가면서 가족으로부터 소외되었다고 생각하는 장녀 니에베스, 활달하고 씩씩하면서 사촌오빠 올리베리오를 사랑하는 아다, 차분하고 헌신적인 성격으로 아프리카에 봉사활동을 떠나는 루스, 아름답고 욕심이 많으며 능력도 뛰어난 막내 롤라.
이들 4명의 시선으로 돌아가며 서술되는 내용은 성격이 다른 사촌 4명의 개성을 더욱 뚜렷이 나타내고, 동일한 사건이 다른 사람에겐 또다른 의미를 띠고 있음을 파악하는 재미도 준다. 마지막 단원은 특이하게도 세상을 떠난 루스가 하늘에서 세 사촌을 바라보며 서술하는 형식이다. 

이 책에서 9월 11일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73년의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와 2001년의 9.11 테러, 그리고 2000년의 9월 11일은 아다가 소설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하이메의 죽음이 있었던 날이다. 칠레의 정치적 환경과 네 사촌들은 무관하지 못하다. 1973년 쿠데타가 일어난 9월에 올리베리오는 군인들에게 잡혀가고, 아다는 영국으로 망명을 떠난다. 비교적 온실 안의 아가씨들처럼 곱기만 했던 원작과는 달리 이 책의 아가씨들은 남미의 열정적인 성향과 여성의 역할이 증대된 사회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원작과의 차별화가 가능했고, 독자적인 내용의 영역을 구축한 관계로 비교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만들었다. 내용 전개가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사건의 줄기가 쉽사리 정리가 되지 않는 면은 있으나, 그것이 혼란이기보다는 다시 한번 읽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나도 이 작품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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