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버트 그레이프
피터 헤지스 지음, 강수정 옮김 / 막내집게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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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전에 봐서 줄거리는 간곳없고 조각조각의 이미지로만 남아있는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 기억은 희미해져버렸지만, 삶의 고통과 보람을 독특하게 표현해낸 수작이라는 좋은 느낌을 갖고 있다. 당시에 막 떠오르기 시작하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지능이 모자란 동생 역을 맡아 화제를 불러일으켰었고, 여러 영화에서 묘한 매력을 보여주던 줄리엣 루이스가 베키 역할을 맡아 제법 맡은 역을 잘 소화해냈었던 것 같다.

영화로 한번 접해본 경험이 있어 익숙하고 만만한 느낌으로 집어든 책은 영화보다 직접적으로 인물의 감정을 알 수 있는 묘사의 장치 덕분에 그들의 삶을 좀더 가까이서 관조하게 한다.
아버지의 자살에서 비롯되었던 것일까? 이 가족들의 빙빙 겉돌며 뭉치지 못하는 가족애는.
집의 대들보에 목을 맨 아버지의 모습은 어린 아이들에게 평생의 충격으로 다가왔고, 어머니는 무엇엔가 허기진 듯이 음식에 탐닉하다가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거대한 몸집이 되어 버렸다. 그런 어머니와 장애아인 동생 어니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에이미 누나와 길버트는 젊은 시절의 화려함도, 꿈도 펼칠 겨를이 없다. 현실적 문제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집을 떠나 나름대로 성공한 삶을 살며 일년에 한번이나 찾아오며 경제적 원조로 할일을 다 했다고 여기는 래리 형과 재니스 누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삶이다. 

장녀인 에이미는 자신의 애인까지 넘본 재니스를 쉽게 용서할 만큼 가족애가 강하다. 어느덧 30대의 나이가 되었음에도 이성에 대한 관심을 오로지 엘비스 프레슬리에게서 풀며, 가족의 곁을 지킨다. 주인공인 길버트는 동생 어니를 끔찍하게 위하면서도 집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또는 가족이 몽땅 바뀌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안고 있다. 그러면서도 집을 떠난 자신의 자리가 과연 새로운 장소에 있을런지에 대해선 확신이 없다.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했던 카버부인과의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결단력을 보여주다가도 카버부인에게 기대어 외부세계로 향하고픈 기대 또한 버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의 양면처럼 말이다. 이런 점은 세상을 향한 은근한 냉소가  길버트를 따라다니는 까닭이라고 보여진다.

길버트의 집이 있는 엔도라에 패스트푸드점이 첫선을 보여 마을사람들의 관심을 끌 때 그는 그곳을 거부한다. 인간적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작은 규모의 램슨식품점에서 일하면서 경쟁업체인 거대한 푸드랜드를 쓰레기 하치장이라고 증오하는 길버트에게 햄버거와 패스트푸드점이 마음에 들 리가 없다. 길버트가 지긋지긋해하면서도 집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그의 마음에 근본적으로 인간의 정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니의 18세 생일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던 어머니는 생일 파티 후 편안한 죽음을 맞는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길버트는 갈등이 많았던 여동생 엘렌에게도 처음으로 마음을 여는 모습을 보인다. 어머니의 주검을 사람들의 조롱 속에 내보내기 싫었던 그들은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을 어머니의 주검과 함께 태운다. 이제 길버트의 가족은 발목을 붙잡던 가족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성립해나갈 수 있을까? 과거의 갈등을 뒤로 하고 새로운 인생을 향해 나아가게 될까? 결과는 알 수 없지만, 과거의 암담함을 딛고 서로간에 한층 성숙한 관계를 유지하며 성장해 나갔을 것 같다. 그들의 행복한 후반기 인생의 모습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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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이야기들
쥘 르나르 지음, 박명욱 옮김, 김연주 그림 / 문학동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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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당무'의 작가 쥘 르나르가 쉬트리라는 곳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쓴 책이다. 작가가 보는 자연과 동물의 세계는 어떨까, 일반인보다는 더 독특한 감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고, 한적하고 평화로운 시골의 정취도 함께 느껴보고 싶어 읽어보았다. 

역시..쥘 뤼나르가 관찰하여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동물들의 얘기들은 하나같이 정겨웠다. 닭, 거위, 공작, 물파리, 풀뱀, 나비 등 각각의 동물과 곤충들에 대한 이야기가 형식없이 자유로이 펼쳐진다. 딱딱한 설명글이 아니라, 감성을 담은 글이다. 때로는 짤막한 이야기글의 형식으로, 또는 에세이로, 어쩔 땐 간단한 메모 형식의 글로 선을 보이기도 한다. 피식 웃음이 지어지는 유머와 함께 동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군데군데 엿보인다. 

족제비라는 동물을 이도랑에서 저 도랑으로, 이 굴에서 저 굴로 유료교습을 하러 다니는 시간제 가정교사로 비유한 글은 매우 재미있었다. 숲 속에서 꽤나 유심히 관찰한 결과 후에 나온 생각이 아닐까 한다. 키우던 강아지였던 데데슈의 죽음이나 암소 브뤼네트에 대한 이야기는 생활 속의 실화라서 더욱 가슴이 찡한 면이 있었고, 새를 키우지도 않으면서 빈 새장에 모이와 물을 준비하는 펠리스의 얘기도 인상적이다.
--"나는 이 새장을 볼 때마다 내 관대함에 긍지를 느껴. 물론 새를 한 마리 넣어둘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그냥 이렇게 비워둬. 내가 마음만 먹으면, 갈색 개똥지빠귀나 폴폴 날아다니는 멋쟁이 피리새 같은 수많은 작은 새들 중 어느 하나는 노예가 되고 말 거야. 하지만 내 덕분에, 최소한 그중 한 마리는 자유를 누리는 거지. 영원히 말이야."--(p159~160)

그러면서도 사냥을 즐기는 모습은 좀 모순적이었는데, 뒷부분의 해설에서도 그 내용에 대한 언급이 있는 걸 보면 다른 이도 그렇게 느꼈나보다. 책에는 사냥을 즐기는 자신에 대한 반성과 혐오도 담고 있다. 덕분에 사냥이란 행위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되었는데, 목적 없는 사냥은 생명이 있는 것을 죽이는 행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 행동에 무의식적으로 숨어있는 쾌감이라도 있다면 깊이 반성해야 할 행위가 사냥이 아닐까 한다. 쥘 르나르가 사냥을 즐겼던 것은 책의 내용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엔 감점의 요소가 되었지만, 그래도 솔직한 반성이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이 책의 역자도 동물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다. 역자 후기에 나온 10여년간 세상을 함께 한 강아지 쎄리의 이야기는 '자연의 이야기들'의 연장선인 것처럼 가슴에 와닿았다. 사람에게 신뢰를 보내는 동물의 눈빛을 느낀 사람이라면 이 기분을 알 거다.

프랑스에서는 이 책이 받아쓰기용 교재로도 쓰이는 모양인데, 아이들은 받아쓰기를 하면서 동시에 동물에 대한 친근감과 사랑도 배우게 될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자연과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키워줄 만한 내용을 아이들의 교재에 많이 넣었으면 좋겠다. 재미있고 감동적이라 아이들의 관심을 끌만한 내용으로, 잠자리나 메뚜기의 다리를 재미로 떼는 아이들을 더이상 보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다. 역사 교과서 우향우 시키기 전에 모두 어린이로 돌아가 이 책을 읽어보라고!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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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들의 책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존 코널리 지음, 이진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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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데이빗을 따라 잃어버리고 있었던 동화속 세상을 한바탕 여행하고 나니, 어린 시절 가슴 속에 간직했었던 환상의 세계가 생각난다. 아끼는 사물에 특정한 영혼을 부여하여 나만의 상상 세계를 꾸미던 재미. 그것들은 데이빗이 그랬듯이 현실에선 불가능한 동화 속 이야기를 흉내낸 것에서 비롯되었다. 대부분 권선징악으로 끝나던 얘기들은 착한 것과 나쁜 것의 차이 만큼은 엄격하게 구분지어줘서 훗날 학교에서의 도덕 시간이 필요없을 정도의 선악 개념을 심어줬었다. 이제는 모든 동화가 식상할 만큼 다 아는 이야기인데도 친숙한 향수 때문인지 읽는 것이 여전히 즐겁다.

이 책에서는 작가가 창조해낸 이야기 속에 옛 동화들이 패러디되어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원작보다는 잔혹하고 어둡지만, 그 나름대로 이야기로서의 존재 가치가 있는 내용으로의 변환이란 생각이 든다. 오래 전에 일본작가가 동화의 원작은 사실 이런 것이라며 내놓은 책을 기대하며 샀다가 사람들을 자극하는 선정성만을 강조한 걸 보고 "속았다."를 연발했는데, 이 책에서의 변환된 동화는 그런 상업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각기의 동화들이 소설의 이야기 흐름에 묻혀 자연스럽게 하나의 이야기로 융화되는 느낌이었던 것도 이 소설의 완성도를 높여주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데이빗의 마음의 변화다. 새엄마와 이복형제를 시기하던 데이빗의 어린 마음은 다른 세상에서 모험을 겪으며 성장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넓은 마음으로 훌쩍 자라 있었다. '꼬부라진 남자'에게 영혼을 빼앗겨 유리병 속에 갇혀 있었던 애나를 대하는 조심스러운 행동에서는 동생을 시기하던 데이빗의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데이빗이 집으로 돌아가려는 이기적인 마음만 가득했다면 어린 동생 조지가 애나를 이은 다음번 희생자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애나를 대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느끼면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데이빗에게 새엄마와 아빠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며 심리전을 펼치던 '꼬부라진 남자'는 결국 자신이 희생물로 고른 데이빗이 심적 성장을 거듭한 탓에 생명 연장에 실패하고 만다. 사실 '꼬부라진 남자'의 설정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하여 누구일까 궁금했었는데, '룸펠스틸트스킨'에 나오는 난쟁이의 좀더 악한 모습의 변형이라는 것을 읽고 나서야 뒤늦게 무릎을 쳤다. 그밖에도 늑대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루프, 어린아이의 몸에 동물의 얼굴을 접합하는 여자 사냥꾼, 트롤 등의 등장은 기괴한 환상의 세상이 갖는 이미지 형성에 한몫을 담당하며, 데이빗이 나아가는 모험의 여정에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네 귀퉁이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을 갖게 하는 상상력의 결집판 [잃어버린 것들의 책]을 읽는 동안 모처럼 동화 속 세상을 신나게 날아다니는 기분이 들어 즐거웠다. 잃어버린 것들을 찾은 것은 데이빗뿐만이 아니고, 이 책을 통해 동화 속 세상을 훑고 온 독자들 모두가 아닐까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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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하지 무라드 - 톨스토이의 붓끝에서 되살아난 슬픈 영웅 이야기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조윤정 옮김 / 페이지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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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인물을 소재로 한 '하지무라드'는 톨스토이가 남긴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러시아편에 있다가 반대편인 카프카스의 샤밀 편으로 가 싸우던 하지무라드는 샤말의 미움을 사 다시 러시아에 투항했다. 샤밀의 손이 빨랐던 탓에 가족을 함께 데려오지 못하여 고민하던 그는 결국 가족을 구하기 위해 다시 러시아를 탈출하다 죽음을 맞는다. 혁혁한 무공을 세운 용감한 영웅으로 존경을 받았던 하지무라드이지만, 가족에 대한 애정 앞에는 어찌해볼 수 없었던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것이다.

전쟁통의 우울함 속에 하지무라드의 고민이 더해지고 주변 인물들의 밝지 않은 일상이 더해져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분위기의 소설이지만, 톨스토이의 장점인 인물 묘사의 탁월함으로 생명력을 부여받은 인물들의 생기가 작품을 활력있게 한다.

책의 내용은 하지무라드가 러시아에 투항하는 시점부터 그려져 있어 과거에 구체적으로 어떤 무공을 세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외경심이나 구경하러 오는 동네 꼬마들을 보면 사람들에게 전설같은 영향력을 끼쳐왔음을 알 수 있다. 하지무라드를 수행해 함께 러시아로 투항한 다섯 명의 병사들은 여전히 그를 중심으로 뭉쳐 있었고, 그와 함께 죽음을 맞았다.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던 병사들의 일편단심은 하지무라드라는 인간을 파악하는 한 방편이 된다. 그를 만나 호감을 느끼던 많은 사람들도 생각보다 부드럽고 아이같은 그의 미소와 점잖은 태도에 경계심을 풀었으나, 러시아의 정책 책임자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들은 의심하는 태도를 쉽게 풀지 못했다. 러시아의 전폭적 협조만 있었어도 그가 가족을 위해 러시아를 떠날 일은 없었겠지만, 어쨌든 결과는 그들이 예상했던 대로 다시 러시아를 등지고 카르카스로 향한 것으로 나타나 믿을 수 없는 사람이란 빌미를 준 것은 억울하고 안타깝다. 

샤밀로부터 아들의 눈을 장님으로 만들겠다는 협박을 당한 하지무라드는 더이상 러시아의 협조만 바라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무조건 탈출을 감행한 절박함은 가족을 해치는 어떤 손길도 용납할 수 없었던 진한 가족애에서 비롯되었다. 가만히 앉아서 가족의 슬픈 소식을 듣는 것은 어떤 조건에서라도 지켜야 할 대상을 보호하는 마음이 강한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을 맞으면서도 후회는 없었다.  

하지무라드의 일관되고 고집스러운 신념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를 비롯한 지배층 인간들의 자기중심적이고 안하무인적인 태도와 비교되며, 생명력 강한 꽃 타타르처럼 고고한 모습으로 마음 속에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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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우리
수산나 알라코스키 지음, 조혜정 옮김 / 상상공방(동양문고)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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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표지의 그림이 예뻐서 '돼지우리'라는 제목과 좀처럼 어울리지가 않아 보였다. 그러나, 표지의 소녀인 레나가 흰 고양이와 함께 앉아있는 지붕의 건물은 '돼지우리'라고 불리는 스웨덴의 임대아파트이다. 레나의 가족은 핀란드에서 더 나은 삶을 찾아 스웨덴으로 이주해왔으며, 경제적 기반이 허약한 탓에 살던 곳보다는 천국인 이 아파트에 입주했다. 보기 흉한 것들을 가려버리는 밤의 효과인지 창문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근심어린 표정은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저 밤풍경을 만끽하는 사람들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다.

처음 책을 넘기면 조금은 충격적인 내용이 나온다.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 뿌띠가 새끼를 낳으면 레나의 부모는 그즉시 물에 빠뜨려 죽인다. 그중 한 마리를 남겨두고 띠뿌라고 이름지었다가 그 고양이가 새끼를 낳으면 또 물에 빠뜨려 죽이는 것의 반복이 이어진다. 잘못 생각하면 동물 학대주의자가 아닌가 싶지만, 레나의 부모는 다만 그 많은 고양이들을 키울 수가 없는 형편이라는 이유로 하기 싫은 행동을 하는 것일 뿐이다. 죄없는 새끼고양이까지 죽여야 하는 현실은 앞으로 펼쳐질 순탄치 못한 삶, 현실을 현명하게 풀어나가지 못하는 우둔한 삶을 예고하는 듯 했다.

레나가 새 보금자리에서 새 친구를 사귀고 이웃들과 관계를 맺어나가는 일상적 광경을 책은 영화를 보여주듯이 묘사한다. 곧 마음에 맞는 친구를 찾은 어머니의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수다를 훔쳐듣는 레나는 그 이야기들 속에서 어른의 세계를 배우기도 하고, 남편없이 혼자 사는 친구 오쎄의 어머니가 애인과 만나는 장면을 엿보기도 한다. 가난, 되는대로의 삶, 그래도 따뜻함이 흐르던 분위기는 곧 반전으로 치닫는다. 이웃끼리 모여 친목을 다지는 자리는 곧 술판이 되어버리고, 삶에 지친 레나의 아버지는 서서히 알콜중독에 빠져 집안을 공포 분위기로 만든다. 레나의 어머니는 함께 술을 마시는 방법으로 고단한 삶에 대적할 뿐 돌파구를 찾지 못하여, 레나와 형제들은 의지할 곳 없이 고통의 나락으로 빠져든다. 정부의 도움을 받으며 알콜중독 치료를 받은지도 여러 번, 알콜중독이란 것이 이렇게 끈질긴 것이구나 싶을 정도로 레나의 아버지는 음주를 반복한다. 지겹고도 끈적끈적하게.

부모가 각각 병원과 보호소로 떠나자 정부의 공인 가정부가 레나의 집에 온다. 말끔히 청소하는 건 물론이고 맛있는 음식, 그리고 어디서부터인지 새 침구들을 배달시켜 집안을 정리해준다. 복지국가 스웨덴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안정을 되찾은 레나의 집으로 다시 돌아온 부모님은 예전의 좋았던 모습으로 돌아가는 듯 하다가도 끝내는 레나의 마음에 배신감을 심어주곤 했다. 음주기간과 금주기간의 끝없는 반복으로 인해, 짧게 찾아온 금주기간의 평온함은 언제까지 갈지 모른다. 레나는 좀더 나은 환경을 찾아 집을 옮기는 철새처럼 집으로부터의 독립을 준비하며 내일을 준비한다.

제3자의 시선으로 묘사한 프리드햄 이웃들의 희망없는 삶을 따라가며 돌파구가 보이지 않음에 같이 답답해했다. 그들의 삶에 나까지 매몰되어가는 것 같아 책을 읽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처절하게 망가져가는 레나의 아빠와 무력하게 생을 마감하려 하는 엄마 밑에서 10대 초반의 어린 소녀의 선택권은 그리 넓지 못하다.
삶을 파괴하는 알콜, 알콜과 가까워지게 만드는 세상.
그러나, 레나는 그런 세상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다. 부모세대와는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 분명한 레나의 단단하게 여문 정신을 만난 것은 책의 결말이 준 선물이다. 문제아가 될 수도 있었던 문제의 환경이었지만, 환경에 굴복하지 않은 채 심지를 굳히고 솟아오르는 단단한 새싹과도 같았다. 레나가 어린 시절에 경험한 고생이 상처가 되기보다는 교훈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은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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