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그린 SF 소설이나 영화의 무대는 대부분 ‘음울한 디스토피아’다.

현실적인 이유는 아마도 작품성 때문일 것이다. 옛날 옛적 이야기처럼 행복하게 잘 살았다로 끝나는 미래 이야기란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는가?

 

SF 장르가 가지는 독특한 매력이 몇 가지 있다. 우선, 배경이 가상의 공간이다. 일단 현실이 아니기에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을 마음대로 배치해도 된다. 현실에서는 담기 힘든 것들을 넣어도 딱히 따지기가 힘들다.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런 저런 현실적인 제약들을 제거한 백지에서 의도한 것들만 알맞게 맞추면 된다.

 

또한, 현실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성격이 탈거된 가상의 공간에서 필요한 사람들로만 구성된 내용으로 자신의 철학을 핵심적으로 담기가 좋다. 광활한 우주공간의 한정된 우주선에서 특정 몇 명의 우주인들에게 벌어지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철학적 질문을 자유롭게 던질 수 있다. 결국, SF 공간이란 작가가 스토리 전개 상 꼭 챙겨야 할 귀찮은 리얼리티가 소거된 편리하고도 자유로운 원고지 같은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작품의 배경 상 SF가 자주 다루는 철학의 주제는‘존재론’에 치우칠 수 밖에 없다. 지지고 볶는 현실의 리얼리티가 갖고 있는 지저분한 일상의 관계가 사라진 미래의 특정 공간은 정해진 세트와 등장인물이 특정 주제에 몰두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작가는 이처럼 단순하게 배치된 세트장에서 마음껏 현실을 비판할 수 있다. 비록 무대는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없는 가상의 공간이지만 어디까지나 주제는 현재인 것이다. 현재의 문제를 그대로 구현한 미래란 당연히 어둡고 칙칙할 수 밖에 없다.

 

조지 오웰의 ‘1984’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류의 작품들에 나온 것처럼 파편화되고 원자화된 개인은 전체주의로 귀결된다. 민주주주와 개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종착역이 다시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이 사라진 전체주의가 되는지에 대한 중간 설명은 생략되곤 한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문명이 결국 공헌한 것이 인간 존엄성의 말살이라는 것은 최악의 가정이긴 하지만 과학과 인간의 관계를 극도로 부정적인 상황에서 본다면 생각해 볼 것이 많다.

 

나와 똑 같이 생긴 복제품을 만났을 때, 누가 진짜인가?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자신의‘로봇다운 권리’를 주장한다면?

 

머리를 제외한 신체가 기계로 되어 있다면 나는 인간인가? 사이보그인가?

 

인류의 멸망을 앞두고 탈출할 우주선을 대기시킨 외계인이 “너희 종족이 구원받을만한 가치를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한다면?

전부 살 수는 없으니 몇 명만 추리라고 한다면 누구를 탈출시킬 것인가?

 

구식 총과 칼 대신 광선검과 전자총으로 무장했을 뿐,

탱크나 비행기 대신 우주선으로 갈아탔을 뿐.

겉만 우주적이고 알맹이는 그대로 지구적인 SF의 세계는 재미와 함께 굳이 어려운 주제를 깔아 놓지 않아도 성찰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흘러넘치는 매력적인 곳이다.

 

그래서 난 SF를 좋아한다.

 

추신

유토피아는 현실을 부정하고 미래를 지향한다.

반유토피아 즉, 디스토피아는 반대로 그 미래를 부정한다.

그러므로 당초 유토피아가 부정한 현실로 회귀한다.

현실에 눈을 감은 미래란 당연히 디스토피아인것이다.

그래서 오늘을 부정하며 바꾼 현실이 다다르는 곳은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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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2015-12-23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f 문학을 아주 좁게 읽어보았지만 필립K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가 참 좋더라구요. 완전히 현실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만들었을 때 오히려 가장 현실과 밀접해보이기도 하고, 매력적인 장르인 건 확실!

책을베고자는남자 2015-12-23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로 영화로 많이 보다 보니 의외로 책은 못읽었답니다. SF의 최대 장점이 아무래도 시각적인 효과이다 보니 책보다는 영화에서 위력적이지요.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은 늘 들었는데 아직까지 보지 못했네요. 꼭 한 번 볼 요량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