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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의 왕국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글.그림, 이지원 옮김 / 창비 / 2011년 8월
이 책은 잠자리 날개처럼 섬세하고, 꽃을 피우기 위한 준비과정인 여자의 '그날'에 대한 이야기다.
빨강으로 상징되는 그날과 잠자리 날개의 섬세함이 딱 맞아 우리집에서 찍은 꽃무릇 사진으로 시작하고 마친다.^^
여자아이들의 통과의례를 '왕국'으로 설정하고 환상적인 그림으로 보여준다.
내가 37년 전에 치뤘던 '그날'의 경험보다
우리 딸들이 맞이했던 그날의 축하파티와 실반지를 건넸던 기억이 뻐근하게 떠오른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는 초경을 맞은 여자 아이의 심리에 초점을 맞춰 풀어간다.
최대한 색채를 절제하고 바탕에 여러가지 꽃문양을 넣어 복잡한 심경을 표현한 듯하다.
생리대를 건네는 엄마의 손, 손끝의 빨강 매니큐어가 상징적이다.
'이날부터 여자아이는 자기 왕국의 주인이 된다'
매달 빠짐없이 치뤄내야 할 그날을 '왕국'으로 명명하다니
역시 상상력이 뛰어난 이보나씨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딱딱하고 불편한 왕좌, 무거운 왕관은 머리를 누르고
저주받은 개구리가 된 공주처럼 못생긴 나를 발견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 왕국에서 여자아이는
세찬 강줄기와 아무렇게나 떨어지는 폭포와 폭발하는 화산을 만난다.
강줄기와 폭포와 화산이란 낱말에서 그날 몸으로 느끼는 감각과 감정 변화가 감지된다.
그 왕국의 강줄기와 폭포와 폭발하는 화산은 여자만 느낄 수 있으리라.
독사과를 먹은 공주처럼 아프고, 유리산 꼭대기에 갇힌 공주처럼 외롭고
높은 탑에 갇혀 마법에 걸린 공주처럼 졸립기도 하다.
세계 명작의 공주를 등장시켜 그날을 겪는 '왕국'의 공주를 이야기한다.
은유와 상징으로 불편하고 괴로운 그날의 상황이 절절하게 그려진다.
차갑게 얼어붙은 심장, 깨진 얼음 조각에 베인 손가락의 상처와 빨간 피
자기가 아이인지 눈의 여왕같은 어른인지 종잡을 수 없다.
'내 마음 나도 몰라' 갈팡질팡하며 여자는 그날을 겪어내야 한다.
제일 마음에 든 장면이다.
속옷을 입는 뒤태에서 여자아이의 손길과 마음결까지 감지된다.
그때가 되면, 완두콩 한 알에도 신경이 곤두선다는 표현은 머리끝이 쭈뼛했다.
완두콩으로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여자의 그날을 상징하다니, 놀랍다!!
왕국의 주인이 되고 싶지도 않지만, 결코 그 왕국에서 도망갈 수도 없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면, 여자아이는 왕국을 다스리는 법을 알게 된다.
왕관과 베일을 쓰는 법, 불편한 왕좌에 부드러운 방석을 놓는 법도 익힌다.
발에 맞지 않던 큰 구두가 꼭 맞는 것처럼 몸도 마음도 편안해진다.
조각조각 보여주는 그림에서 새로운 의미를 깨닫고
자기 왕국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진정한 여왕이 된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오래전에 초경을 치뤄서 그 불편함과 두려움을 망각했을 엄마들과
화성남자로 금성여자를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아빠를 비롯한 남자들이 보면
여자의 그날을 잘 이해하지 않을까?^^
여자의 감정이 얼마나 섬세하고 복잡한지, 그날을 맞는 여자의 심리를 알아주기에 좋을 책이다.
물론 초경을 맞게 될 또래나 이미 과정을 겪은 여자아이들의 필독서로도 추천한다.
이 책을 여러번 보고 또 봤더니 무심코 지났던 표지 그림의 의미가 새삼 다가왔다.
이보나씨는 폴란드보다 한국에서 더 유명하다고 우리나라 독자와의 만남에서 말했다는데
이 분의 그림책을 보면 볼수록 점점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고 읊었던 미당 서정주의 국화꽃이 아니라도 좋다.^^
오히려 절집 마당이나 뒷산에서 숨죽여 피어나는 꽃무릇처럼
사랑하는 이를 만나 생명을 잉태할 그날을 준비하는 여자의 고통을 이해한다면, 위대한 그녀들을 축복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