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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봄날
박상률 글, 이담 그림 / 휴먼어린이 / 2011년 5월
5월 12일, 알라딘과 휴머니스트가 제공하는 고전문학 광주 강연에 갔다가 굉장한 걸 발견했습니다.
드디어 나왔습니다!
80년 5월을 증언하는 최고의 그림책이요!
해마다 5월이면 읽었던 어떤 5월 문학보다 충격이 컸습니다.
80년 5월 전남대생이었던 박상률님이 글을 쓰고
폭죽소리,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등으로 친숙한 이담 화가의 그림으로 태어났습니다.
80년 5월 살아있는 모든이에게 각인된 한 장의 사진
'아빠의 봄날'은 이 사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젊은 아빠의 영정사진을 가슴에 품은 아이
화난 듯 겁에 질린 듯한 얼굴입니다.
왜 아빠 사진을 들고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어린 아이.
사진 속의 아빠와 아이는 닮았습니다.
탕!탕!탕!
캉!캉!캉!
탓!탓!탓!
난데없는 총소리와 개짖는 소리가 마을을 흔들고
헬레곱터 날개 도는 소리가 마을을 뒤흔들었습니다.
총소리라니~ 무슨 일일까요?
북쪽의 김일성이 쳐내려 와 전쟁이 터진걸까요?
아빠는 딸기밭에서 일하다 놀라 가슴이 벌렁거립니다.
물주전자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마셔도 진정되지 않습니다.
전쟁이 났다면 군인들이 싸움터로 달려 나가야지
왜 조용한 마을에 탱크를 앞세우고 나타났을까요?
스무 해 가까이 혼자서만 대통령 노릇을 하던 이가
자기 부하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고 비상사태라더만
뭔 큰일이 또 생겼나 봅니다.
탕!탕!탕!
캉!캉!캉!
탓!탓!탓!
어?
강아지가 달려 나오다 맥없이 주저앉고
병아리가 날개를 퍼덕거리다가 픽 쓰러지고
소가 불에 덴 듯 놀라 날뛰었습니다.
집 밖으로 달려 나온 마을 사람들도 그 자리에 거꾸러졌습니다.
무슨 일일까요?
군인들은 확성기에 대고 외칩니다.
"지금은 비상사태입니다!
모두들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기 바랍니다.
불순분자들이 마을에 숨어들어 선량한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군인들은 나라를 구하려는 마음 하나로 일어섰습니다.
대한민국 국군은 나라의 안정과 국민 여러분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섰습니다.
불순분자들을 소탕하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이 방송을 듣는 즉시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기 바랍니다.
여럿이 모여 있으면 불순분자로 여길 것입니다."
이게 시방 무슨 소리일까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이 소리가......
총소리에 놀라 고개 숙인 딸기들은 아예 고개를 쳐들 생각도 못합니다.
더러는 목이 꺾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흙을 딛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딸기지만 느낌으로 다 압니다.
딸기도 총소리와 화약냄새가 무서운 것입니다.
아빠는 일손을 멈추고 서둘러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마을어귀에 서자 군인들이 아빠를 둘러쌌습니다.
"몸에 지닌 무기를 내려놓으라!"
세상에, 농부의 삽이 무기라니요?
아빠는 하도 기가막혀 삽으로 땅바닥을 치며 따졌습니다.
"반항하지 말라! 이미 명령이 내려졌다!"
아빠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삽으로 땅바닥을 두어번 쳤더니, 무기를 들고 덤볐다고 총을 쏘겠답니다.
허~~~~
아빠는 그러든 말든 대거리하지 않고 마을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군인들은 놓아주지 않고 아빠의 삽을 빼앗고 밀쳤습니다.
탕!탕!탕!
캉!캉!캉!
탓!탓!탓!
아빠와 동네 사람들이 쓰러졌습니다.
군인들과 개와 헬리곱터는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떠났습니다.
군인들이 휩쓸고 지나간 뒤론 짐승을 기르거나 딸기밭을 가꾸는 일도
모두 전설 속의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는 마을에서 짐승을 볼 수 없고 딸기를 볼 수도 없었습니다.
사진 속의 아빠와 마을 사람들은
무슨 까닭으로 죽은지도 모른 채
마을 뒷산 언덕바지에 묻혔습니다.
사진 속의 아빠는 서른 살이었습니다.
나이 서른이면 봄날인데
아빠는 그런 봄날에 가꾸던 딸기밭도 그냥 두고
자기 닮은 아이도 그냥 두고
울부짖는 아내도 그냥 두고
정든 마을도 다정했던 이웃도 그냥 두고 멀리 떠났습니다.
이 아름다운 봄날에.......
아이는 아빠가 집으로 돌아와 놀아줄 날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아빠만큼 자랐습니다.
그리고
마을에서 일어난 오월의 전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빛고을 광주의 슬픈 전설, 80년 5월의 진실을.......
권력에 눈 먼 몇몇 정치군인들은 힘자랑을 하며
빛고을을 짓밟고 국민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그리곤 자신들의 시커먼 속셈을 숨기고
제멋대로 대통령과 장관 등 벼슬자리를 나누어 가졌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사진 속의 아이는 자기가 낳은 아이와 놉니다.
아이한테는 할아버지인 아빠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사진 속의 아빠를 닮은 아들과 놀아주는 아빠.
아들과 손자가 노는 것을 지켜보는 사진 속의 아빠는
어딘지 닮았습니다.
아빠와 아들과 손자는 서로서로 닮았습니다.
이제 5월 광주는 전설 같은 옛날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진실이 밝혀진 지금도,
사람들은 그냥 잊고 싶어합니다.
모두가 잊고 싶어한다고 정말 잊어질까요?
우리도 80년 5월 광주를 잊고 그냥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걸까요?
다시 봄날인데도......
화려하게 조성된 국립묘지에 묻히길 거부하고
소박한 구 묘지에 묻혀 있는 이들도 기억해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