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소녀시대 지식여행자 1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내게 '프라하'는 까를 다리의 로맨스나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이 떠오르는 지명이다. 거기에 '소녀시대'가 붙었으니 당연히 프라하 소녀들의 로맨스 쯤으로 짐작했었다. 그러나 이 책은 프라하의 연인이나 까를 다리의 로맨스와는 거리가 멀다. 당시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였지만, 로맨스 보다 찐한 소녀들의 우정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펼쳐진다. 프라하 소녀들의 발랄과 순수한 호기심에 동감하며, 아득하게 멀어진 나의 소녀시대를 추억하는 부작용이 따른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닌 논픽션으로, 2002년 제 33회 '오이 소이치 논픽션상'을 받았다. 요네하라 마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다른 책보다 먼저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마리의 소녀시대 성장 배경과 체험 뿐 아니라 당시 동유럽 정세와 공산주의의 부침을 알려주는 세계사 공부도 시켜줘, 반공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졌던 내 유년기 학습효과-공산주의자는 뿔난 도깨비 쯤으로 생각했던-를 비워내는 역할도 했다. 공산주의자들도 우리네와 다르지 않은 성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발견했으니까.^^


  내가 엄마의 태중에 있던 1960년 1월, 요네하라 마리는 프라하 소비에트 학교에서 소녀시대를 시작한다. 아버지가 일본 공산당 대표로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 편집위원으로 프라하로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마리는 체코 학교가 아닌 외국 공산당 간부 자녀 전용 러시아 학교에 다녔다. 처음엔 마리도 러시아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1964년 11월까지 5년의 공부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갈 땐 완벽한 러시아어를 구사했단다. 그 덕분에 훗날 동시통역가로 눈부신 활약을 했고.  


<프라하의 친구들, 리차(앞줄 맨 오른쪽) 아냐(뒷줄 맨 오른쪽)
야스나(뒷줄 왼쪽 두번째) 요네하라 마리(앞줄 왼쪽 두번째)>
  

  프라하 소비에트 학교에서 만났던 세 친구- 그리스인 리차, 루마니아인 아냐, 유고슬라비아인 야스나와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따뜻한 인간애를 풀어놓았다. 소녀시대를 함께 지낸 친구들의 우정과 추억을 진술하는 마리는 참 행복해 보였다. 동유럽 공산세력의 몰락을 접하며 친구들의 안부가 걱정된 마리는 1995년 11월, 추억의 노트를 들고 불원천리 프라하를 찾는다. 간간이 편지를 주고 받다 단절되고, 헤어진지 30년만에 친구를 찾아 나선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마흔이 넘으면 어린시절 친구를 찾게 된다. 마흔은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키우느라 정신없는 세월을 보내다 아이들로부터 한 숨 돌리는 때이기도 하다. 우리도 마흔이 넘어 초등 친구를 찾아 동창회와 반창회로 모였고,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들까지 만나게 됐다.   


  우리의 꿈이 자라고 추억이 어린 고향과 서울에서 번갈아 만났고, 인천, 논산, 광주, 수원, 대전 등을 돌며 희미한 옛사랑을 떠올리는 유년의 추억여행은 즐거웠다. 마리도 인생의 연륜이 깊어진 나이에 뜨거운 포옹과 감격으로 친구를 다시 만났다. 마리의 추억여행은 마치 내 친구를 만나는 것 같은 감정이입으로 눈시울이 뜨거웠다. 나도 초등 단짝 금봉이를 30년 만에 만나고, 둘만의 오붓한 만남을 위해 2002년 부산으로 찾아갔었다. 영도 바닷가 그녀의 아파트에서 밤새워 추억을 얘기하다, 바다에서 불쑥 솟아오르던 찬란한 태양을 맞이하던 아침은 참으로 황홀했으니 리차가 자랑하던 그리스 바다가 부럽지 않았다.^^     

그건 말야. 정말 쨍하고 깨질 듯이 파래. 단 한 점의 구름도 없는 새파란 하늘이. 또 새파란 바다에 비쳐서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지는 거야. 파도는 방금 빨아 넌 냅킨처럼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고, 정말이지 마리한테도 보여주고 싶어.(44쪽)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 시절 사진과 추억의 노트(일본에 돌아갈 날이 잡힌 한 달 전부터 추억의 노트를 만들어 반에 돌렸다. 반 친구들은 거기에 각자의 메시지를 써 주었다)  

  1974년 4월 중학교 2학년, 충청도 시골에서 인천으로 전학한 내게도 마리의 '추억 노트'에 버금가는 편지 꾸러미가 있다. K군 P군의 핑크빛 연서를 비롯해 빛바랜 친구들의 편지는 마르지 않는 추억의 보물창고다. 2001년 아이러브스쿨에 동아리방을 개설하고 저녁마다 출석해 친구들과 소통하던 때, 빛바랜 편지를 개봉해 전국을 들썩이게 했던 또 하나의 추억이 있다. 편지 공개 덕분에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서 만난 후 소식이 끊겼던, 뉴저지에 사는 중학교 단짝 친구를 찾아 인터넷의 위력을 실감했었고, LA에 사는 머슴아 친구가 10년 후에나 공개하라며 호주 여행길에 보낸 엽서도 담겨 있다. 이제 곧 개봉해도 되는 10년이 다 돼간다.^^ 이런 에피소드 덕분에 마리의 추억 노트에 공감하고, 그녀의 추억 이야기에 완전 몰입해 같이 울고 웃었다.
 

  그리스인 리차는 소녀들의 성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빠꼼이였고, 수학을 못해 피타고라스와 유클리드를 선조로 둔 그리스인 후예가 맞냐는 조롱을 받아도, 위대한 문명에서 태어난 것도 골치 아프다며 쿨하다. 나도 수학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리차의 몸무게 에피소드는 정말 배꼽을 잡게 했다.^^  리차는 특혜가 아니라 자기 실력으로 의과대학을 나와 독일 나우하임에서 이주노동자들의 건강을 돌보는 의사가 되었다. 그리스 출신의 노동자 2세와 결혼해 다운증후군 큰아들과 작은 아들을 키우지만, 다운증후군 아들은 보통 애들보다 몇 배 더 행복하게 해주는 천사라고 말한다. 그리스 하늘을 그리워하면서도 돌아가지 못함을 그리스 본국 방송을 보는 것으로 대신하는 듯. 미체스 오빠가 불러온 가족의 불행은 그동안 수많은 여자들을 울려서 그 벌을 받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쿨한 리차는 휴머니즘이 살아 있는 예전 그대로였다.  


  루마니아인 아냐는 차우셰스쿠 정권의 고위직에 있는 아버지 덕에 특권을 누리며 유별난 애국심을 가진 양 행동했지만, 그녀는 능수능란한 거짓말쟁이였다. 특혜를 당연시 여기는 공산당 고위직들의 행태는, 우리나라에서도 면면이 이어져온 지도자들의 행태와 다르지 않다. 그들의 공산주의 사상은 삶과 동떨어져 있었다. 이런 특혜를 거부하고 가난함을 택한 아냐의 오빠가 정직하고 인간적이고다. 영국인에서 공부하고 영국인과 결혼해 런던에 살면서, 러시아어를 다 잊고 유창한 영어를 쓰는 아냐의 루마니아 사랑은 속절없다. 자신의 삶을 위해 스스로 거짓을 택하는 아냐는, 속좁은 민족주의가 세계를 불행하게 한다고 말한다. 마리는 그런 아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마음의 방을 넓힌다.   


  일본의 판화가 호쿠사이를 숭배하며 그림에 재주 있고 공부 잘하고, 발표도 완벽했던 유고슬라비아의 야스나는 마리가 가장 사랑한 친구였다. 외교관의 정석대로 행동하는 아버지와 자유로운 어머니에게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다. 아버지가 중학교를 졸업한 어린 나이에 파르티잔이 되게 한 보그다노비치 선생님의 이야는, 진정으로 학생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감동이다. 야스나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은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소박하고 심성 고운 야스나는 능통한 언어실력으로 공무원이 되었지만, 유고슬라비아 무슬림이란 이유로 따돌림을 당한 아픔에 소리없이 온몸으로 우는 야스나를 꼭 안아줄 뿐이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공기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야스나, 아버지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마지막 대통령이었지만, 그들은 어떤 특혜를 누리지 않았다. 아냐네 가족의 귀족같은 생활과 완전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야스나의 아버지는 공습의 위험속에서도 조국을 떠나지 않은 진정한 지도자였다.   

(1995년 11월, 추억의 노트를 들고 프라하 시절 친구들을 찾아나서다)


  동유럽 이데올로기의 부침에 따라 자신의 삶을 뜻대로 운행할 수 없었던 프라하의 소녀들. 시대적 흐름이나 역사적 사건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헤아려보는 마리와 친구들의 이야기는, 하얀 도시 베오그라드의 폭격을 진술하며 막을 내린다. 14세기 발칸 연합군이 오스만투르크군에 패할 때 '하얀 도시'라 이름 붙인 터키 병사들과 달리, '하얀 도시'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지 않은 미국과 나토 군의 폭격기는 1993년 3월, 베오그라드시에 폭격을 퍼부었다.      

급격히 내려간 기온 때문에 강의 수온과 차이가 있어, 강의 수면에서는 우유빛 안개가 피어 올랐다. 하얀 안개에 휩싸인 도시는 때마침 밝아온 태양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그 아름다움에 터키 병사들은 전의를 잃고 그날의 습격은 중지되었다. 이리하여 이 도시는 '하얀 도시'라 불리게 되었다.(178쪽)

 
  고향을 떠나 봐야 애향심이 생기고, 나라를 떠나 봐야 애국심이 생긴다고 한다. 요하네라 마리가 첫머리에 적은 글과 같은 마인드가 우리에겐 부족하다. 툭하면 GNP와 OECD 순위를 들먹이지만, 세계인과 더불어 사는 세상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 같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존중하고, 이주 노동자와 외국인 신부들을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는 부끄러운 자화상은 바꿔야 할 때다. 마리 여사가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통해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다른 나라와 문화를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존중하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때의 내셔널리즘 체험은 내게 이런 걸 가르쳐주었다. 다른 나라, 다른 문화, 다른 나라 사람을 접하고서야 사람은 자기를 자기답게 하고, 타인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고 애를 쓴다는 사실.  


*2006년 5월 25일, 56세에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난 요네하라 마리를 기억하고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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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7-27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못 읽어본 책인데요....
그런데 언니두 등록하고 추가 수정하셨어요? 저두 시간이 모자라서 등록 우선하구, 이제야 추가 수정 완료를... 아하하.

순오기 2010-07-27 21:32   좋아요 0 | URL
제가 워낙 게으름의 극치에 이르는 사람이라 항상 마감날 마감시간에 동동 거리죠.ㅋㅋ
그전에는 어떻게 써야 하나~ 생각이 안 나서요.ㅠㅠ

라로 2010-07-27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도 마리여사의매력에 빠지신거?????ㅎㅎㅎ

순오기 2010-07-27 21:33   좋아요 0 | URL
미식견문록하고 요거만 읽었지만, 나는 이 책이 더 좋았어요.^^
대단한 책은 한 두개씩 읽고 있는 중인데...워낙 두꺼워서 언제 다 볼려나?ㅋㅋ

양철나무꾼 2010-07-27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리홀릭,마리 폐인이 여럿 등장했는 걸요~^^

순오기 2010-07-27 21:33   좋아요 0 | URL
하하~ 달랑 두 권만 읽고 마리 홀릭이나 폐인이라기엔 민망하지만
마리 여사 정말 대단한 분이에요!^^

글샘 2010-07-27 0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리여사 폐인 원조였던 저에게는 이번 리뷰대회가 더이상 좋을 수 없답니다.
이미 올린 리뷰를 다시 올리진 않았지만, 남의 리뷰를 읽는 일도 마리 여사 책 읽는 이상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
순오기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역시 사람은 자꾸 다른 나라 다녀 봐야, 객관적 시선을 가질 수 있는 모양이에요.

순오기 2010-07-27 21:35   좋아요 0 | URL
글샘님은 마리 폐인 원조셨군요.^^
저는 이제야 마리여사에게 주목하는 후발주자에요.
다른 나라를 많이 다녀보긴 어려우니 책으로 대신합니다.ㅋㅋ

건조기후 2010-07-27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책 너무 재밌고 좋았어요. 혼자 업돼서 바로 냉큼ㅋ 리뷰도 썼는데 결국 쓰다 말아서 임시저장만 돼있다는..ㅎ 시간되는대로 마저 쓰고 올려야겠어요.
저도 공기가 되고 싶다던 야스나의 말이 정말 먹먹했어요. 자기가 보스니아 무슬림인지 전혀 자각도 없는 소녀의 삶이 바로 그 이유때문에 위협당해야 한다는 것.. 정말 너무 슬프고 어리석은 일이에요.

순오기 2010-07-27 21:38   좋아요 0 | URL
헉~ 왜 임시저장만 하셨어요? 어여~ 올려보세요!^^
시대의 흐름에 희생되는 세대들이 있지요.
우리나라는 58년 개띠들이 박지만 때문에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죠.^^
공기가 되고 싶은 야스나...참 가슴이 아팠어요.ㅠㅠ

루체오페르 2010-07-27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데올로기 안에서의 사람의 인생역정...여러 생각이 듭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순오기 2010-07-27 21:39   좋아요 0 | URL
인생역정에 이데올로기 만큼 큰 영향을 끼치는 것도 드물겠죠.
읽으면서 참 좋았는데 리뷰를 쓰는 일은 역시 어려워서, 느낀만큼 풀어내지 못했네요.ㅜㅜ

마노아 2010-07-27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네하라 마리의 책을 많이 읽지 못했지만 이 책이 가장 좋았어요. 뭉클하기도 했고 씁쓸하기도 했고요. 참 다재다능한 분이었는데 너무 일찍 세상을 뜨셨어요.ㅜ.ㅜ

순오기 2010-07-27 22:14   좋아요 0 | URL
아~ 마노아님도 이 책 좋았군요.
나는 미식견문록과 요것만 봤으니 다른 책과 비교할 순 없어서...
그러게요, 좀 더 살았다면 독자에게도 좋았을텐데...

자하(紫霞) 2010-07-28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의 리뷰를 보니 이 책 관심이 생기네요~
어린 시절 친구들과의 추억은 기억 저편에 저장되어있어요.
가끔 들쳐 볼 수 있게 말이죠~ㅎㅎ

순오기 2010-07-28 15:30   좋아요 0 | URL
기억 저편에 저장된 어린시절 친구들과의 추억을 풀어보세요.
혼자만 들추지 말고...^^

비로그인 2010-07-28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닷!

순오기 2010-07-28 15:30   좋아요 0 | URL
마가님, 이거닷!ㅋㅋ
요네하라 마리 보세요,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