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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평점 :
지난 달 내게 폐경조짐이 보여서 2005년 황순원문학상을 받은 '언니의 폐경'이 보고 싶었다.
'언니의 폐경'을 먼저 읽었는데, 무슨 남자가 직접 폐경이라도 겪은 것처럼 폐경기의 여성심리를 잘 그려냈는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하긴 남자도 폐경을 겪는다니 육체적인 경험은 없어도 심리적으론 같을지도. 어쩌면 아내의 폐경을 지켜보며 리얼리티를 살려냈을지 모르지만 정말 대단한 작가다. 이래서 김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단 말이지.^^ 비행기 사고로 남편의 죽엄을 끌어내는 현장에서도 울지 않은 언니가, 죽엄을 싣고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 왈칵 쏟아져 나온 핏덩어리에 오열하는 장면은 정말 감정이입이 되었다. 한밤중 잠결에도 왈칵 쏟아지는 느낌에 깨어나 잠들지 못했던 그 심란함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처럼 쿨하게 이혼하는 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강산무진'은 조선 후기 화가 이인문의 '강산무진도'에서 따 온 제목이다. 간암 진단을 받고 조용히 이생의 끝을 준비하는 남자를 그린 '강산무진'도 깔끔하게 감정이입이 된 작품이다. 이혼한 아내에게 줄 위자료 잔액을 챙겨주는 남자, 마지막 남은 돈을 가지고 미국의 아들에게 가는 모습은 참 가슴 시린 쓸쓸함이다.
'머나먼 속세'는 권투 챔피언 김득수와 대결을 벌이는 나를 주인공으로, 대결의 사각링인 현재와 과거를 기억하는 장면으로 교차된다. 권투장면은 어찌나 실감나게 묘사됐는지 TV에서 지켜보던 권투장면이 떠올라 포즈를 따라 하게 되더라.^^ 인간 삶의 고뇌를 짧께 압축해 놓은 단편의 매력이 물씬 드러나서 좋다. 김훈의 필력은 일찌기 경험했지만, 기자였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겠단 생각이 들었다.
'화장'은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작품이라 궁금했었다. 2년 동안 뇌종양을 앓던 아내를 보내고, 마음 속에 키워 온 또 하나의 사랑이 독백으로 진술된다. 주인공은 화장품 회사의 상무로 아내의 장례를 치루지만 전립선염으로 소변을 보지 못해 고통 당한다. 그 와중에 회사 일까지 감당해야 하는 중년 남자의 삶은 녹록치 않다. 화장(火葬)과 화장(化粧) 두 가지 소재로 중의적 의미를 잘 살려냈다. 뇌종양으로 고통받는 아내를 목욕시키고 시중들며, 마음 속의 그녀 '추은주'를 사랑하는 중년 남성의 심리를 잘 드러냈지만, 여자라서 그런지 어째 배신감이 든다.
'배웅'은 택시 운전을 하는 김장수(47세)가 예전에 장수식품이란 하청업체를 운영할 때 경리를 보던 윤애를 공항으로 배웅하는 이야기다. 엄밀히 말하면 불륜임에도 그냥 자연스런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중년 남성들에게 여자를 품는 건, 몸이 원하는 걸 자연스럽게 수행하는 행위인가 보다. 그들은 5년 만에 만나 차를 마시고 따뜻한 냄비우동을 먹으며 사는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곤 다음날 공항까지 택시로 태워다 줄 뿐... 택시 회사 사납금과 맞물려 배웅의 의미는 잘 살아나지만, 남자들이 아내를 두고 밖에서 헛짓을 하는 게 전반적인 현상인가 싶어 편치 않았다.ㅜㅜ
'항로표지'는 소라도 등대장 김철(40세)은 육지에 나가 살기 위해 준교사자격증을 취득하고 강원도 산골 중학교의 국어선생으로 가게 된다. 후임자를 구할 때까지 남은 두 달을 버틴다. 무림전자의 재무관리상무였던 송곤수(55세)는 외환위기 직후 50억의 부도로 회사가 쓰러졌다. 연대보증으로 자신의 재산도 날리고 계약직 임시직원으로 소라도 등대장으로 온다. 인생에서 풍랑을 만날때항로표지를 제대로 짚어내기가 수월치 않은가 보다.
'뼈'는 AD4세기 경의 철기와 뼈를 발굴하는 지방대학 교수와 조교인 오문수의 이야기가 직조된다. 대학원에 등록만 해놓고 논문 주제도 정하지 않은 채 허송세월로 여자를 탐하던 그가, 기원사에서 만난 석정과 살림을 차렸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고향그림자'는 살인미수범 조동수를 검거하러 고향에 온 형사는 뻔히 지켜보면서 잡지 않는다. 치매에 걸린 노모와 조동수의 모친이 유년기의 추억과 겹치기 때문일까?
여기 수록된 단편은 교차진술이 많다. 자기 일에 열중하면서도 마음으론 딴 생각하는 현대인의 삶을 보여주는 듯. 돈과 일,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지만 버거운 삶의 진술이 묵직한 것에 눌린 듯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