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광주에 둥지를 튼지 20년이 막 지났다. 광주살이 3년 만에 입에 착착 감기던 친정엄마 김치보다 전라도 김치가 입에 맞았다. 한 5년만 살고 가야지 생각할 때는 이웃들과도 말을 트고 지내기 싫어서 꼬박꼬박 존대했다. 그렇게 지내다가 남편이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집을 지어 살게 되니 올라가긴 틀렸구나, 맘을 접었다. 누군가 나를 알아줘야 살맛이 나고, 내가 주변부 인물이 아닌 중심 인물이 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순오기였건만, 하나둘 날개를 접고 10년 세월을 삼남매의 육아에 전념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서 아이들 친구 엄마들과 마음을 나누고 정을 나누며 광주사람이 되어갔다. 10년 세월은 이웃들과 미주알고주알 사는 형편을 일일이 고하지 않아도 짐작하고 배려하는 형제같은 사이가 되었다. 좋은 일엔 이웃 사촌이고 궃은 일엔 형제라고 하지만, 내 이웃들은 궃은 일에도 형제같은 끈끈한 정을 나누는 사이다. 내가 광주살이에 정을 주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근저엔 이들이 한몫한다.
사는 게 힘들 때, 누군가 불쑥 가져온 상추 한 다발에 기운이 솟고, 5년째 김장하지 않아도 일년 열두 달 김장김치가 떨어지지 않고 사는 우리집은 사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내가 무언가 필요해서 중얼거리면 하루 이틀 사이에 누군가, 마치 내말을 엿듣기라도 한 것처럼 필요한 그것을 가져온다. 수년간 이런 걸 지켜본 아이들은 '엄만, 정말 무서운 아줌마야!'라고 말할 정도다. 그러면 난 당당하게 말한다.
"이게 바로 엄마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그분의 사랑이야, 까마귀가 엘리야를 먹이듯 하느님이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는 거지!"
내가 불혹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 흔들림을 겪어낸 연후에 옛 어른들 말씀처럼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부끄럽게도 지천명에 도달했다. 하지만 내가 지천명의 도를 다 알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지금껏 살아온 경험으로 세상일은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니고, 혼자만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건 알겠더라.
지난 주말엔 큰딸의 대학등록금과 기숙사비까지 우리에겐 꽤 많은 돈이 필요했다. 돈 마련이 안 된 남편은 보험을 해약하겠다고 전화했다. IMF때 집에서 하던 공부방을 접고 보험회사를 3년 다녔을 때, 노후대책이다 생각하고 큰딸 앞으로 들어논 보장성보험으로 만기가 22세니까 일년만 지나면 되는데 그걸 해약하겠단다. 세아이들 통장에 들어있는 돈이라도 찾을테니 해약하지 말라고 했다. 그날밤, 2층 세입자가 돈이 급해 이사한다기에 우여곡절을 겪고 100만원을 올려 부동산에 의뢰했는데 다음날 바로 계약이 성사 되었다. 그래서 13일까지 마감이었던 딸의 등록금 액수를 계약금으로 받아 등록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런 게 기적이라고 믿는다.
알라딘 대박적립금을 형제들에게 책 한 권씩 나누고 알라딘에 조촐한 이벤트를 할 때, 간곡히 만류하는 서재인이 있었다. 나의 수고로 얻은 것이니 다 풀지 말고, 나를 위해서 쓰라는 사랑의 조언이었다. 진정 그 마음을 알기에 고맙게 접수했지만, 순오기의 복은 나눔에서 온다는 걸 알기에 예정대로 진행했다. 형제들이 속속 책을 신청해서 이제 26명에게 책을 보냈다. 방금 둘째 시누이 가족이 신청한 책이 엄청 비싸서 네 권에 75,000원이나 되기에 전화를 드렸다. 내가 일만원 선에서 신청하라고 했는데 못 들었거나 내가 말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런데 형님이 식구들이 고른 책이니 그대로 보내주고, 당신이 우리 아들 교복을 사준다고 30만원 송금한다고 했다. 내가 이런 경험하면서 '나눔이 복'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런 게 바로 나눔의 기적이라고 믿는다!
내가 비록 6년째 교회출석을 방학중이지만, 난 그분을 믿는다고 고백함에 부끄럽지 않다. 혹자는 내가 교회를 다니면 더 잘 될텐데~ 라면서 출석을 권면한다. 하지만, 내가 잘되기 위해서 교회를 다니는 믿음은 아니라고 본다. 기독교의 진정한 가르침이 왜곡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기복신앙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분의 뜻을 행하고 이땅의 삶이 천국의 삶이 되었을 때,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하신 그분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