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뜨려던 건 아니었는데’ 1편의 주인공은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조카를 위해 뜬 돌고래 스웨터였다. 표현하고 싶었던 건 푸른 바다를 유유히 헤엄치는 돌고래였건만, 돌고래와 바다의 경계를 이루는 부분에서 장력 조절에 실패해 쭈글쭈글한 스웨터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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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영하는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한 뒤 역자 후기에서 작품을 이렇게 요약했다. "표적을 벗어난 화살이 끝내 명중한 자리들."* 김영하의 말을 빌려 나는 망한 뜨개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예상을 벗어난 바늘이 끝내 빚어낸 이야기라고.




* 「표적을 벗어난 화살이 끝내 명중한 곳에 대하여」, 문학동네, 2009, 242쪽.

같은 도구와 방법으로 같은 일을 수십만 번 한다는 게 어떤 일일지 상상해보자.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이어가야겠기에, 그 지루함을 어떻게든 극복해야겠기에 찾아낸 방법이 문어발인 것이다. 그러니까 문어발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포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기 위해 지루함을 줄이려는 노력이다. 마라토너는 42.195킬로미터를 완주하기 위해 페이스메이커를 두고 그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페이스를 유지한다. 페이스메이커가 없다면 42.195킬로미터는 훨씬 고된 길이 될 것이다. 뜨개인은 문어발이라는 페이스메이커의 도움으로 더 많은 것을 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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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인은 예외 없이 정직한 이 결말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한 코가 옷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챔 없이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그 과정에 온전히 책임지는 사람이다. 뜨개인은 매 순간 내가 무엇을 왜 뜨는지 알고 그 결과물도 머릿속에 그릴 줄 안다. 어떤 실로 어떻게 뜰지를 스스로 정하고 잘못 떴을 때도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일은 없다. 잘못된 코를 수정하기 위해 유를 무로 돌릴지언정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도안이라는 원문을 실이라는 수단으로 옮겨내는 일. 한 코 한 코 짚어가며 뜨다 보면 어느새 코 막음을 하게 되는 일. 그래서 완성한 옷의 첫 코부터 마지막 코까지 통째로 이야기가 되는 일. 내가 생각하는 뜨개는 이런 것이고 그래서 뜨개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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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뜨개 작가이자 뜨개 커뮤니티의 운영자인 스테파니 펄 맥피는 뜨개가 중독의 대상인지 아닌지 단언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뜨개인마다 체질과 능력과 경험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어떤 사람이 뜨개 중독인지를 보려면 그에게서 실을 빼앗았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봐야 하는데, 그건 뜨개인으로서 차마 못 할 짓이라고(그는 진정한 뜨개인이다). 대신 뜨개에 ‘관여’된 정도를 네 단계로 나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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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다고 덜컥 수세미부터 시작할 게 아니었다. 코바늘 기초부터 알아야 했다. 코바늘 기초를 검색하니 목록 맨 위에 김라희가 있었다. 자네 코바늘 한번 모질게 배워보지 않겠냐는 유튜버 김라희의 권유로 사슬뜨기부터 시작했다. 자기 키만큼 사슬뜨기를 하고, 다시 자기 키만큼 짧은뜨기를 하고 다시 자기 키만큼 한길긴뜨기를 하라는 김라희의 자코빡(‘자네 코바늘 한번 빡세게 배워보겠는가’) 영상은 다시 봐도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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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편한 사람이 되는 게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서점가에 심리 치유 에세이가 쏟아지고 그 많은 사람이 심리상담사를 찾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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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트가 있는 것 같다.

˝I Knit So I Don’t Choke People.˝
오해일 수도 있는데 ㅋㅋ 이 부분을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내가 뜨개를 하지 니(남의) 목을 조를 순 없잖아?

실을 쥐거나 뜨개를 하면서 실을 늘어뜨리고 있는데 choke를 쓰니깐 그 그림이 좀 웃기다.

얀볼을 왜 사? 그 돈으로 실을 더 사지. 송곳으로 구멍만 뚫으면 빈 고추장 통도 얀볼이 되는걸. 그랬던 내가 만 원에 가까운 해외 배송료를 감수하고 얀볼이라는 물건을, 심지어 세라믹으로 된 무거운 얀볼을 구매한 이유는 순전히 거기에 적힌 문장 때문이었다. 나는 감히 이 문장이 뜨개의 정수라고 믿는다.

"I Knit So I Don’t Choke People."

나는 뜨개 덕분에 다른 사람을 숨 막히게 하지 않는다. 오랜 취미 방랑에 종지부를 찍고 뜨개에 정착한 비결이 바로 이 문장 안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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