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분 역사를 안다.
인강으로 에브라임 국사를 들었으니까. 그래서 잠깐 공무원 준비 할 때 선생님이 말씀 세게 하시는 게 적응이 잘 안 됐다. 대학생이 되어 이후 사촌동생이나 학생들에게 추천해주면 내 말에 설득력이 없었는데 그건 전한길 선생님 암흑기 때여서 그랬던 거 같다. ^^;;



‘가난해져 보면 착한 아내가 생각나고,
나라가 어려워져 보면 충신을 알게 되고,
세찬 바람이 불어오면 강한 풀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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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하락장에서도 통하는 논리 같다. 나는 상승장보다 하락장에서 더 종목 보기가 쉬운데, 하락장에 주가 안 빠지고 버티는 애들에 상승장에선 날아갈 가능성이 커서 하락장을 좋아한다. 물론 떨어지는 칼날은 잡지 않는 게 좋지만 요즘같은 하락장에선 버티는 애들 몇개 갖고 있으면 참 든든하다. 상승장보다 하락장에서 종목고르는 게 참 좋다.

명절 때 카페에 올라온 이야기다. 설날 큰집에 갔는데 큰아버지가 너 요즘 뭐 하냐 해서 공무원 공부한다 하니까 "야, 너 안 돼. 너는 떨어져"라고 했다더라. 큰아버지의 그 이야기를 듣고 부글부글해서 바로 집으로 왔는데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거다. 내가 댓글로 그러면 니 생각이 옳고 큰아버지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그랬다. 큰아버지한테 멋지게 복수하라고.
누구든 나보고 안 된다고 말하거든, 한번 보여주는 것이다. "큰아버지 이게 뭔지 아십니까?" 합격증 딱 들고 다음 명절 때 가서 해냈다는 것을 보여주어라. 큰아버지가 뭐라고 하겠나? "그래. 너 참 훌륭하다. 고생했다. 멋있다"라고 할 거다. 내가 잘되는 것이 최고의 복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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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강사 시절, 나는 소위 잘나갔다. 대구 지역 출신 강사 최초로 EBS 방송 강사가 되고, 강의 평가도 EBS 강사 전체에서 1등을 했다. 강사와 직원을 합쳐 100명이 넘는, 대구에서 가장 큰 학원인 유신 학원 이사장도 했다. 내가 집필한 교재도 전부 베스트셀러였다. 『에브라임』이라고 당시 EBS 방송 교재보다 이 책이 더 많이 나갔다. 그러니까 나는 베스트셀러 작가, 인기 스타 강사, 이사장, 출판사 대표이사를 하고는 그 뒤로 다 실패했다. 학원 실패, 출판사 부도, 인기 강사 추락. 메가스터디 꼴찌 강사까지 갔다. 어떤 사람이 캡처해둔 게 아직도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다. ‘전한길 메가스터디 꼴타’ 잘나가던 30대 초반 전한길은 엎어지고 부도나고 25억 빚더미에 앉았다. 나와 친했던 사람들 중 내가 실패한 걸 기뻐한 애들도 많았다. 내가 망한 걸 가지고 저희들끼리 수근거렸다. "야, 전한길이 망했대. 아이고 어떡하냐?" 그러면서 자기들 위안으로 삼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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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으로 받아들여라. 항상 최선을 다하되 무조건 목숨 걸고 해라. 그랬는데도 떨어질 수 있다. 떨어지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 하면 된다. 모든 것은 생각에 달렸다. 마인드 컨트롤.

‘가난해져 보면 착한 아내가 생각나고,
나라가 어려워져 보면 충신을 알게 되고,
세찬 바람이 불어오면 강한 풀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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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한테 드리고 싶은 메시지는 딱 하나다. "자기 자신한테 실망하지 마라"는 것이다. 나도 책도 내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강의도 하고 덕분에 명성도 얻게 되었지만, 여전히 내가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않는다. 지눌 스님이 이야기했지 않나. 깨닫고 노력하고 작심 3일, 또 노력하고 또 작심 3일, 노력하고 돈오(깨닫고)하고 점수(노력)하고 돈오하고 점수하고 깨닫고 실천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업그레이드 해가면 되는 거다. 절대 스스로에게 실망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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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3 때 나는 대학을 가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고, 공부도 안 했다. 대학에 안 가고 시골 가 있다가 우리 아버지께서 등록금 마련해놓고 우시는 것 보고 충격 받아서 나왔다고 했잖은가. 그 재수할 때는 집에 1년간 안 들어갔다. 그동안엔 친구 다 끊고 그냥 1인 1실 고시원에 처박혀서 공부만 했다. 모의고사도 1년간 한 번도 안 쳤다. 자가 진단 해보면 안다. 단원마다 문제 평가가 있는데 다 풀리면 되는 거다. 그렇게 혼자 독하게 했다.
점심 저녁에는 만둣국만 먹었다. 소화가 잘되니까. 만둣국만 먹으며 미친 듯이 공부했더니 수학을 제외하곤 모든 과목에서 거의 100점이 나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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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영하는 사람들을 참으로 존경한다. 내가 못하는 일을 잘하시는 분들이니까. 그게 구멍가게든 작은 식당이든 쉽지가 않다. 몇몇 사람들은 늘 적대적으로 경영자와 근로자의 갈등을 부추기려고 한다.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은 경영 못 한다. 근로자가 없으면 경영자가 있을 수 없고 경영자가 없으면 근로자가 있을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존재하니까. 이렇게 서로 존중하고 챙기는 문화가 필요한데, 이 사회에는 꼭 갈등을 부추기는 조직이나 단체들이 있다. 어쨌든 좋은 문화 만들면서, 열심히 경영하시는 분들 보면 존경심이 생긴다. 실제로 망해보니 잘 알겠다.
수업료를 너무 비싸게 냈다. 한 10년은 또 다 날아갔으니까. 월세 생활에 신용불량 생활에 아주 바닥 생활을 또 했지 않은가? 그러다가 다행히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학생들 수강료 낸 거 아깝지 않도록 항상 몇 배를 내가 돌려주겠다 생각하면서 더 많이 더 열심히 더 열정적으로 수업한다. 내 성격하고도 딱 맞아떨어진다. 퍼주는 자. 많이 주면 이걸 무조건 학생들이 알아준다. 나한테 딴 게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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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하는 이유는 영어도 그렇고 한국사도 그렇고 그냥 개념을 이해하고 반복하면 수험이 너무 쉽다는 거다. "공무원 한국사 공부는 암기입니까? 이해입니까?" 공부가 곧 암기다. 5급 행정고시도 전부 암기다. 옛날에 공자왈 맹자왈 전부 다 외우는 거 아닌가? 내가 판서를 왜 하는가? 하나하나 스토리텔링으로 여러분을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반복만 하면 암기가 되는 거다. 두문 글자, 정말 유치하고 좀 간지럽지만 생선 먹듯이 가시는 발라내고 살코기만 받아들여 자기 유리하도록만 받아주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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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러분을 합격시키는 것이 바로 내가 잘되는 길이다. 여러분이 합격하고 나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가족, 가장 친한 친구, 몇몇 친척밖에 없다. 나머지는 다 배 아파 한다. 겉으로는 축하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배 아파 한다. 경쟁에서는 이기고 봐야 되는 거다. 지고 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나처럼 부도나서 10년 가까이 바닥 생활, 신용불량 생활하고 그 많은 빚쟁이들 찾아오는 굴욕을 당해봐야 이해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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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숙분이 부를 때마다 나경은 속으로 되뇌었다. 나경은 가끔은 아가씨로 또 가끔은 아줌마로 불렸지만 둘 다 자신에게 딱 맞는 호칭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저 아가씨 아닌데요, 라고 대꾸하지도 않았다. 그다음 벌어질 상황이 더 귀찮을 것 같아서였다. 나경은 숙분이나 동네 어르신들이 혼기가 꽉 찬 아가씨로 자신을 오해하도록 놔두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아가씨로 알고 중매를 서겠다고 하면 어쩌지? 재취 자리지만 사람이 참 좋으니 한번 만나나보라며 불쑥 낯선 사람의 사진을 내밀면 어쩌지? 집 앞 골목이나 계단에서 마주친 숙분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설 때면 나경의 머릿속에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스쳐 갔다.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앞서가도 너무 앞서 나간 우려였지만 자신도 모르게 급발진해버리는 망상을 멈춰 세우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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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은 당장 이사 갈 상황이 아닌데도 틈만 나면 부동산 시세를 알아봤다. 재개발 아파트, 주택 청약을 검색해보다가 자신의 처지에는 무엇도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재차 깨닫고는 주변 빌라나 다세대주택, 회사 부근 오피스텔 전월세 시세를 살펴봤다. 초역세권 오피스텔의 월세와 관리비를 내며 살 수 있을까. 감당하려고 하면 못 할 것도 없겠지만 아무래도 너무 비쌌다. 그래도 오피스텔에 살면 주인집 간섭은 안 받겠지? 풀 옵션 9.3평형 오피스텔 내부 사진을 확대해 보면서 나경의 마음은 번번이 조금 기울었다가 현재로 돌아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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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기다려보라며 숙분이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지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지만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엉겁결에 생시를 말해놓고 나경은 뒤늦게 어리둥절해졌다. 세입자 생시는 알아서 뭐 하나? 그런 건 왜 물으시냐고 물어볼까? 나경은 공연히 소파 옆에 놓인 금전수의 새로 돋은 잎사귀를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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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취향들도 점점 어려지는 느낌.

정오가 술을 주문하고 얼마 뒤 작은 백자 호리병과 잔 두 개, 방어회가 나왔다. 운두가 낮은 화려한 접시에 방어회가 부위별로 소담하게 담겨 있었다. 제주산 숙성 대방어입니다. 종업원이 나직하게 말했다. 회에 곁들일 기름장, 생와사비, 무순, 백김치, 파래김이 차례대로 상 위에 놓이는 동안 정오와 나는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다시 미닫이문이 조용히 닫혔다.
정오가 호리병의 뚜껑을 따고 병 주둥이를 내 앞으로 기울였다. 붓글씨로 쓰인 ‘安東燒酎’를 보며 안동소주, 하고 속으로 읽었다. 나는 그가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요즘은 독한 게 오히려 속이 편하더라고.

27/95

그해 겨울방학이 되었을 무렵 정오는 거의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같은 학원으로 수학 특강을 들으러 가고, 돌아오는 길에는 비디오대여점에 들러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와 늦은 밤까지 영화를 봤다. 정독도서관이나 광화문 교보문고에도 자주 갔는데 두 사람은 참고서와 문제집, 소설책을 모두 공유했다. 이따금 말끔한 사복 차림으로 대학로 민들레영토에 가기도 했다. 그곳에서 영화인지 사진인지 정확히 어떤 동호회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다음 카페에서 만난 다른 학교 또래들과 모임을 하고 오기도 했다.

28/95

그리고 언젠가부터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책을 읽고 밤이면 각자의 잠자리에 누워 이어폰을 꽂고 같은 주파수의 라디오를 듣게 되었다. 두 사람을 통해 나는 오스카 와일드, 랭보, 헤르만 헤세, 알베르 카뮈, 프랑수아즈 사강, 전혜린, 기형도, 진이정을 알게 되었다. 셋이서 비디오로 <길버트 그레이프> <아이다호> <중경삼림> <올리브 나무 사이로> <첨밀밀>을 거실 소파에 기대어 보았던 밤도 기억한다. 두 사람이 모아놓은 『KINO』나 『씨네21』 같은 영화 잡지에서 프랑수와 트뤼포, 장 뤽 고다르, 왕가위, 압버스 키어로스타미의 이름을 처음 보았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그 이름이 좀처럼 외워지지 않아 이삼일을 입 속으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두 사람은 <FM 음악도시 유희열입니다>를 즐겨 들었는데 생방송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과 어딘가에서 구해 온 음반을 녹음해 둘만의 카세트테이프를 만들기도 했다. 거기에는 뭔가 연결성이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한 음악들이 녹음되어 있었는데 플레이리스트는 이랬다. 너바나, 쳇 베이커, 사카모토 류이치, 아스토르 피아졸라,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 시규어 로스, 카디건스, 신해철, 유재하.
29/95

무엇이 그토록 그 두 사람을, 그리고 우리 셋을 서로 끌어당기게 했는지 지금도 정확히는 모른다. 우리가 아버지 없는 아이들이었다는 것, 일찍부터 엄마 없는 집에서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익히 알았다는 것, 뭐 하나 특출난 것은 없지만 특별하기를 원하는 평범한 아이들이었다는 것,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볼 뿐이다. 우리 세 사람은 안전한 집에 모여 앉아서 멀리 떠나 있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낯선 언어와 감정이 우리를 꼼짝없이 포위하는 곳으로. 그도 아니라면, 그저 외로운 아이들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오, 오빠 그리고 나는 우리만의 시공간을 만들어갔다.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은 잘 몰랐다. 두 사람은 어땠는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랬다. IMF 시대의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나는 극장에 가 <타이타닉>을 두 번 관람하고 금 모으기 운동에도 동참하는 그런 부류의 아이였다.
3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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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창가로 옮기고 어제 사다 놓은 흰 전지를 깔아요. 음식이 담긴 접시를 하나씩 올려요. 육개장, 미역국, 밥, 시금치무침, 콩나물무침, 무나물, 애호박전, 두부부침, 찹쌀떡, 절편, 딸기. 그리고 언니가 좋아하는 냉동실에서 막 꺼낸 차가운 소주, 늘 태우던 담배 한 갑.
언니. 그날로부터 줄곧 언니에게 묻고 싶었던 말을 오늘도 하지 못할 것 같아요.

18/95

임종은 몇 번인가 아주 가까이 엄마에게 다가왔다가 물러갔다. 나는 그만 엄마가 편안해지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언제까지나 곁에 머물러 있어주기를 바랐다. 그 두 개의 희망이 내 안에서 같은 무게로 번갈아 가라앉을 때마다, 그 일렁임이 내 삶에 멀미를 일으키고 차라리 절망의 편으로 도주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오늘이 아닌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손꼽아보았다. 마땅한 상조와 장례식장을 미리 알아보고, 틈틈이 조문객 명단을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놓았다. 그건 내가 두려움을 외면하는 방식이었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었다.

2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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