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보았던 영화, 《바그다드 카페》
이 소설이 그 영화와 일맥상통한다니 대충 그 분위기를
알 것 같다

다들 연체된 인생이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내일을 향해 조금씩 걸어가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치명적으로 술을 부른다
작가는 구질구질한 세상을 기분좋게 웃으며 건너가는 법을 알고 그것을 소설로 묘파해냈다. 실로 고수의 솜씨다.
오작가가 사는 8평 옥탑방은 퍼시 애들론의 영화 <바그다드 카페>와 일맥상통하는 공간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끌어안아 그 공간을 사랑이 충만한 지상 최대의 낙원으로 만들어가려는 따뜻한 시선은 각기 다른 공간을 완벽하게 같은 곳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자기 개발서를 읽는 건 자기를 주도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냥 읽고 있으면 면죄부가 생기는 느낌. 자본주의 사회의 성경이 바로 이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기 개발서대로 살진 않는다. 그건 성경 말씀대로 살진 않지만 천국에 간다고 믿으며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심리와 비슷한 거다.
그래, 루저의 푸념이다. 하지만 루저가 너무 많다. 나도, 옆의 김부장도,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석의 아버지도 모두 루저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다 지면서 살고 있다. 지면서도 산다. 어쩌면 그게 삶의 숭고함일지도 모르겠다.
옛날에 공자님 말씀 중에 ‘덕불고 필유린‘이라고 했어. 덕이 있는 자는 결코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말이야
지난 몇 개월, 함께 먹고 자다시피 한 이 빈대 기생충 바퀴벌레들......같지만, 사실 ‘입구멍‘이라는 식구.그동안 이들을 미워하고 꽁했던 내 소갈머리는 뜨거운 태양에 소독되고 시원한 파도에 세탁되고 있다.
사랑은 어떻게 오고 어떻게 가는가? 어떻게 오고 간 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나? 사랑에 대한 서로의 정의가 다르다면 그것은 사랑인가, 아닌가? 인생에서 가장 적절한 순간에 다다른 사랑이란 게 있을까? 아니면 적절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사랑도 인생도 타이밍이다.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한 시나리오는 과녁을 빗나간 화살이고, 시나리오 작가는 무명일 따름이다. 이름을 얻는다는 건 신용을 얻는다는 것. 그것이 바로 크레딧이고 영화가 끝나면 올라오는 글씨들이다. 지인들에게 그 글씨를 보여주고 싶었으나, 쉽지 않았다.
나는 이 느긋하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쓰고 싶어졌다.
나는 스토리텔러다. 10년 넘게 이야기를 써오며 배우고 또 배우는 것이 있다면 바로 ‘진실을 이야기에 담는 기술‘이다. 진실과 상관없이 기발한 이야기는 많지만 그것은 나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다른 기술들은 금세 배울 수 있지만, 진실을 담는 기술은 배웠음에도 숙달되지 않는 ‘늘 새로운 도구‘다. 이 새로움이 내 삶을 돌아보게 한다. 내 삶을 수시로 해체하여 떨구어진 벽돌들을 모아 이야기라는 집을 짓다 보면 언젠가는 나만의 스타일을 장착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또 쓸 뿐이다.
ㅡ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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