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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깔아주는 흥 많은 할머니 - 다섯 손주와 엮어가는 유쾌하고 다정한 날들
최윤순 지음 / 미다스북스 / 2025년 11월
평점 :
나는 매일 손주들이 있는 집으로 출근한다!
프롤로그에서 스스로를 “매일 오후 손주들이 있는 집으로 출근하는 할머니”라고 소개하는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매일 손주 집으로 ‘출근’한다는 이 표현 하나에 작가의 삶과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단순히 가족을 돕는 희생이 아니라, 충분히 고민하고 선택한 또 하나의 ‘직업’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의 엄마, 아내, 할머니보다 본인의 이름 ‘윤순 최’이자 영어 선생님 ‘멜로디’로 불리는 것에 더 익숙했던 저자는 결국 본업을 그만두고 손주들을 돌보는 길을 택한다. 겉으로 보면 흔한 황혼 육아의 결말로 보이지만, 이 책 속에서 그 시간은 훨씬 더 진지하고 단단하다. 아이들 하원 챙기고, 학원 픽업하고, 밥과 간식을 준비하는 하루가 반복되지만, 저자는 그 시간을 단순히 힘들었다고만 쓰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 건강한 관계를 어떻게 유지할지, 돌봄과 육아의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 지치지 않기 위해 계속 고민하고 성장해 가는 모습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본문에서 마음에 오래 남은 대목은 이 문장이었다.
“그때 딸에게 충분히 주지 못했던 사랑을 지금, 손녀에게라도 보상해 주고 싶은 마음이다. 아무나 할머니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손주들을 돌보면서 내가 엄마로 놓쳤던 많은 기쁨을 뒤늦게 배우고 있다. (114p)”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리 사랑’의 표현을 넘어, 오래된 미안함과 자책, 그리고 자녀의 분신 같은 손주 돌봄을 통해 다시 기쁨과 감사함을 느끼는 마음이 애틋하게 전해졌다. 대부분의 부모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딸에게 다 주지 못했다고 느꼈던 감정이 손주에게로 이어지면서, 동시에 과거의 자신과 딸을 함께 쓰다듬는 화해의 장면처럼 다가온다.
세대의 차이를 바라보는 시선도 인상 깊다. 저자는 요즘 젊은 아빠들이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며 시대가 달라졌음을 실감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오롯이 감당해야 했던 1980년대 독박 육아의 시간을 떠올린다. 여전히 집안일과 돌봄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도, 남편에게 당당하게 분담을 요구하지 못하는 마음이 솔직하게 드러난다. 그 지점에서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구나” 하는 안도감과, 한편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기성 세대로서의 씁쓸함이 동시에 밀려오는데, 그 복잡한 감정이 읽는 내내 많이 공감됐다.
이 책 속 저자는 손주 돌봄이 분명 삶의 중요한 축이지만, 그 안에만 자신을 가두지 않는다. 노후의 일상 속에서 건강하게 자신을 우선적으로 돌보고 사랑하는 방법을 실천한다. 손주를 돌보고, 딸들을 챙기면서도 노래대회에 나가고, 피아노를 배우고, 글을 쓰며 자기 삶의 판을 직접 만들어 나간다. 꿈 많은 할머니의 가장 큰 꿈이 여전히 가족의 행복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도 한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지우지 않으려 애쓴다. 그래서 이 황혼 육아의 시간은 '소진'이라기보다 '확장'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이 책에는 큰 사건이나 드라마틱한 전개는 없다. 대신 텃밭에서 밥을 먹는 장면, 제철 채소를 나누어 먹는 순간, 손녀를 위해 동화책을 준비하는 과정, 나비를 쫓아 뛰는 손주들을 바라보는 눈길 같은 사소한 장면들이 조용히 쌓인다. 그 일상들이 모여 한 할머니의 삶, 한 시대를 통과해 온 저자의 다정한 마음결을 보여준다.
세대는 달라도, 아이를 키우고 있거나 손주를 돌보고 있거나, ‘가족’이라는 이유로 나를 자꾸 뒤로 미루게 되는 사람이라면 이 책 곳곳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읽고 나면 내 곁의 엄마와 할머니, 그리고 수많은 여성들의 삶을 한 번 더 떠올리게 된다. 나이 듦이 이렇게 멋진 일일 수 있을까. 책장을 덮고 나면 피아노 치는 흥 많은 할머니처럼 늙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나이 들어서도 나답게 살고 싶은 사람, 그리고 오늘도 누군가를 돌보며 버티고 있는 사람에게 조용히 건네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