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당시 정치가였던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1748~1836)는 시민이 자신 경제 활동에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근대 산업사회에서 각 시민이 공적 업무에 지속적으로 참여할 시간을 마련하기 쉽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게다가 공공 업무가 날로 전문적인 식견을 요구하게 된다는 점에서 대의제가 바람직하다고 보았습니다. 시이예스는 대의제란 선거로 권한을 위임받은 전문가 집단이 공공의 관심사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을 바치도록 구성된 정부 형태로서, 근대 사회 조건에 적합하다고 보았습니다.



시이예스 지적처럼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모든 평의회위원이나 판사 뿐 아니라 대부분 행정관도 전문가가 아니라 보통 시민이 맡았습니다. 실상 아테네인은 대의제를 모르진 않았으나 거의 대의제를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시이예스 논거와는 달리 아테네인들은 비전문가가 정치를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테네인은 명성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 지배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실제 정치에서 모든 ‘보통’ 시민의 확인을 얻는 걸 중요시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주요 관심은 통치의 능률보다 시민 의사를 존중하는 민주주의에 있었습니다. 어떠한 행정이나 입법, 사법 문제에서도 최종 책임은 시민에게 있었습니다. 가령 민회 법령도 ‘민회’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민’에 의해서 통과된다는 공식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전문성을 중시하지 않은, 아마추어 중심이었습니다. 민주주의가 발달할수록 정책결정에 특별한 전문성을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다수의 일반적인 상식에 바탕을 둔다는 관념으로 옮겨갔습니다. 이것이 추첨제나 윤번제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모든 관리 선출이나 법정 구성은 추첨제로 결정되었습니다. 추첨에 따라 가난한 사람도 취임하여 보수를 받을 수 있으며 재판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추첨은 기회 균등을 의미했습니다. 
















아테네인이 내린 가정은 만약 전문가가 정부에 관여하면 불가피하게 그들이 지배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테네인들은 집단의 정책 결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지식과 기술을 가진 것 자체가 권력의 근원이 된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이점을 갖게 된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전문가로 이루어진 평의회, 즉 전문 행정관이 민회를 좌지우지할지도 모르고, 법정에서 전문가들은 다른 판사들의 중요성을 축소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문제가 헤아리기에 너무나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에 정치는 수많은 싱크탱크와 법률가, 회계사, 대학교수들이나 감당해야 할 문제라고 여깁니다. 시민이 바로 정치 주체라고 상상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이 정치 주체라는 사실을 잊은 우리는 자신을 대표하지 못한 채 오직 전문가들이 내린 처방에 따라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만 셈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이 옳다고 여긴다면, 차라리 가장 똑똑한 정책 전문가들이 모인 싱크탱크에 아예 정치를 외주 주면 되지 않을까요? 
















전문가에 의지하는 일은 민주주의 정신에 어긋납니다. 민주주의란, 세부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는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할 수도 있지만, 일반 시민이 사회의 중대한 결정을 직접 내릴 능력이 있다는 생각에 기반 합니다. 일반 시민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그 어느 전문가보다도 명확히 이해하는 만큼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전문가에 대해 잘못된 가정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문가가 일반 시민과 같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기에 우리를 대변해줄 거라 믿고 맡겨두어도 괜찮다는 가정입니다. 우리는 전문가는 객관적이고 사심이나 편견이 없이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인간 마음이란 부자인지 가난한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권력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더욱이 전문가들은 자신이 내린 결론의 타당성을 지나치게 확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각 분야 전문가는 다른 분야 전문가의 조언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 전문가가 함께 결정해야 하는 문제는 각 전문가의 목소리가 너무 커져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한 분야만 파고든 전문가보다는 전문 지식을 조금씩 공부해가며 자신 견해를 개발한 일반인이 종합적인 시각으로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습니다(전문교육을 받으러 입학한 대학에서 교양교육까지 시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전문가들이 인간의 새로운 상상이나 행동, 능력을 제약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과거 원리에 갇혀 있는 전문가들은 세상에서 가장 상상력이 부족한 자들이거나 상상에 금기를 부여하고 차단해야만 자신 지위를 보존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는 자신 분야를 빗대어 이렇게 말합니다. “경제학은 경제학자들이 연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경제적인 이익이라는 동기가 절대화되어 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러한 잘못된 믿음을 다시 상대화할 정신적인 능력을 잃어버리고 상상은 우매한 제약에 갇혀버렸다.” 

















마이클 샌델은 고대 아테네 같은 사례뿐 아니라 최근 사례를 보더라도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의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라고 지적하며, 영국 사례를 듭니다. 1945년 윈스턴 처칠(1874~1965)의 보수당을 눌렀던 영국의 클레멘트 애틀리(1883~1967) 내각은 장관 가운데 일곱 명이 탄광 갱부 출신이었습니다. 매우 유능하다고 평가받은 외무장관 어니스트 베빈(1881~1951)은 전후 세계질서의 설계자 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는 열한 살 때 학교를 중퇴하고 노동조합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하원 의장과 부수상을 지낸 허버트 모리슨(1888~1965)은 열네 살 때 중퇴하고 지방정부에서 일하며 명망을 쌓았는데, 런던의 대중교통 시스템을 개발한 공로가 컸습니다. 보건부 장관 어나이린 베번(1887~1960)은 열세 살에 중퇴한 뒤 웨일스에서 광부로 일했고, 장관이 되어서는 영국 국민의료보험 제도를 수립했습니다. 



20세기 영국에서 가장 개혁적인 정권으로 평가되는 애틀리 정부는 노동계급에 힘을 실어주었으며, 애틀리 전기 작가는 “영국의 새로운 사회계약에 쓰일 윤리 언어를 마련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마이클 샌델은 “정책 결정이 ‘스마트하냐 우둔하냐’ 문제로 여길수록 ‘스마트한 사람(전문가나 엘리트)’이 결정하고, 일반 시민이 토론과 결의를 하는 일에서 배제하는 게 옳다고 여겨지지 마련”이라며, ‘정치 엘리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정치인이나 기업가와 같이 제너럴리스트가 필요한 영역에서조차 스페셜리스트가 득세함에 따라, 우리 사회는 나아갈 방향을 상실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좁은 분야를 다루는 전문가는 전체를 다룰 수 있는 지성인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도 전문가가 사회 전반에 과도하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전문가 특유의 분열적인 사고가 오늘날 우리 사회 위기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참여하는 시민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에는 직업 정치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치철학자 클로드 르포르(1924~2010)는 ‘정치’(politics)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을 구분했습니다. 그가 말한 ‘정치’는 오직 주어진 현실이 전부라는 생각을 가리킵니다. 이런 생각에 이르면 이미 주어진 세계 너머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정치의 유일하고 정당한 대표/대의 장소는 의회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정당화하려고 애를 써도 일부 시민에게 오직 열등한 권리만이 부여되고 있는 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온갖 불평등이 사라지는 ‘위험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이 대의 민주주의의 DNA 자체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반면 ‘정치적인 것’은 이미 주어진 세계를 우연한 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정치’와 구분됩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전부라고 알고 있는 세계가 시작되고 또한 끝나는 계기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는 주어진 현실을 넘어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것’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원리와 규칙을 새롭게 창안하는 실천으로서의 정치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민주주의에 대해 전혀 다른 전망을 낳게 합니다.



현재 삼권 분립을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훌륭하고 지혜로운 인물이 대통령이 된다한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삼권 분립이란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더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막는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가 훌륭한 인물을 뽑아 옳은 일을 하도록 시키는 체제라고 오해할 경우, 선거는 ‘매번 실망하기 위해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는 이벤트’밖에 될 수 없습니다. 훌륭한 사람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는 일보다 민주주의 제도를 제대로 발전시키는 게 훨씬 중요합니다. 사람이란 요소보다 제도라는 구조가 우선합니다. 

















민주주의를 ‘선거’라는 현존하는 방식에만 한정하여 규정하면, 부정투표 방지 등 절차상의 문제만 고민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정적이고 중요한 민주주의 본질은 이 한계 밖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한계를 깨닫지 못한다면, 기존 이데올로기만이 강화됩니다. 민주주의를 선거로 한정하여 우리가 희생당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선거는 귀족과두정입니다. 공자와 달리 노자는 ‘귀족과두정’을 반대했습니다. 공자와 노자 정치철학의 핵심 차이는 ‘귀족들의 존재 여부’에 있습니다. 공자 세계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귀족들, 아니 공자 기대치로 보면 ‘군자’ 개념입니다. 공자는 윤리학적 상상력이 풍부했지만 정치학적 상상력은 그만큼 풍부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노자가 꿈꾼 세계는 성왕과 성인이 국가를 통치하는 세계이며,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중간 귀족 계층 – 노자 용어로는 ‘현자들’ -이 존재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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