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이외 다른 분야라면 시대나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진리’가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과학은 회의주의(상대주의)를 거부합니다. 과학은 객관적입니다. 엄밀한 탐구 방법과 증거에 기초합니다. 과학자들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검증합니다. 같은 결과가 반복해서 나오고 방법상 어떤 오류도 없다면 가설은 이론으로 살아남습니다. 이 규칙은 엄격히 적용됩니다. 따라서 과학에서 진리를 찾는 데는 특별한 변명거리가 필요치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어떤 진리를 말하는 것일까요? 같은 진리일지라도 시대마다 서로 달라 보였습니다. 과학사를 살펴보면 결국 잘못되었다고 판정되는 이론들이 널려 있습니다. 평평한 지구나, 천동설, 에테르, 우주상수 같은 오류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과학은 이런 오류를 인식하고 수정하면서 나아가지만, 시간이 지난 뒤 수정된 이론조차 오류로 판명되곤 합니다. 이처럼 과거에 완전무결해 보이던 과학 이론도 결국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기에 오늘날 이론들 역시 언젠가는 오류임이 밝혀질 수도 있습니다.



물리화학자 마이클 폴라니(1891~1976)는 과학이 계속 수정 가능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안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새로운 관찰과 실험이 과학의 발견 과정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대개 과대평가되어 있다.” 과학을 발전시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라기보다는 알려진 사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 내지는 알려진 사실을 의미 있게 설명해주는 새로운 체계의 발견입니다. 이런 발전은 “종종 게슈탈트적 성격을 갖는 것이어서 전에는 아무 의미가 없던 무언가가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과학에 적용되는 이러한 관점은 정치나 경제, 법, 종교, 교육 같은 모든 분야에 적용됩니다. 삶의 어떤 측면이든 한 세대 진리가 다음 세대에 이르면 오류로 밝혀지는 일이 워낙 많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개인 삶에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모두 나이가 들면서 자신 신념 중 일부를 버립니다. 우리는 이론을 세웠다가 어느 순간 그것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확신할 수 없는 감각이나 제한된 지적인 능력, 들쑥날쑥한 기억력, 복잡한 주변 환경 때문에 우리는 지속적으로 잘못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사실 과학이란 사물의 본질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아닙니다. 현상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발견하려는 노력입니다. 곧 과학의 목표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 사이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실재는 그 관계뿐이다”라고 수학자 푸앙카레(1854~1912)는 말했습니다. 과학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입니다. 우리는 열과 빛, 전기 그 자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관찰과 인식된 범위 안에서 발생하는 조건과 법칙을 알 따름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전자가 질량과 전하가 있는 실체라고 생각하지만, 전자는 전자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일 뿐입니다. 전자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전자장 일부분에 해당하는 형상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전자의 물리적 속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과학자는 전자 같은 외부 대상을 연구하지만, 그들이 다루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닙니다. 과학자는 전자의 속성 같은 순전히 인위적인 수학 법칙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과학에서 말하는 자연 법칙이란 자연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자연을 이해는 과정에서 만들어 낸 ‘모델’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는 게 더 타당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매일 매순간 접하는 에너지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에너지가 정말로 무엇인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에너지는 우리가 관찰하는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관찰한 것에 질서를 부여할 때 사용하는 하나의 개념일 수도 있습니다. 
















유전자 역시 구체적인 실체라기보다 상당히 추상적인 개념이며, 인간이 만들어낸 ‘모델’에 가깝습니다. 생명체 정보를 암호화한 디지털 코드, 즉 DNA 염기 서열 형태로 압축하여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한다는 생각은 하나의 모델일 뿐입니다. 모델과 사실은 일치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인류가 구상한 가장 멋진 ‘이야기’ 중 하나일 뿐입니다. 물질의 참된 본질은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갈릴레이는 “낙하하는 물체에 가속도가 생기는 이유를 찾는 일이 연구에 필수가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과학 탐구는 궁극적 원인을 찾는 형이상학과 분리되어야 하며, 물리적 원인을 찾는 일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과학자 임무는 원인을 캐는 게 아니라 현상을 수량화하는 것입니다. 뉴턴에게도 근본 원인을 설명하는 대신 수학을 강조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의 천체 역학에서 중요한 물리 개념은 중력인데, 중력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빈 공간에서 수백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두 물체가 서로 끌어당긴다는 설명은 신뢰할 수 없어 보였습니다. 중력의 물리적 실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뉴턴에게 중력은 인력(引力)인 반면, 아인슈타인에게 중력은 공간의 휘어짐입니다).



과학은 근본 원리를 이야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수학으로 서술하는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뉴턴 역학에서 행성 궤도 같은 이체(二體)문제는 멋지게 서술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삼체(三體)문제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립니다.*** 궤도를 도는 물체의 운동은 물리법칙으로 완전히 결정되지만, 우리는 결코 초기 조건을 충분히 알 수 없기에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긴 시간에서는 초기의 위치와 운동이 조금만 달라져도 현재의 태양계에서는 엄청난 차이를 만듭니다. 수학자들은 삼체문제를 풀려고 수백 년 몸부림쳤고, 일부 진전이 있긴 했지만 완전히 푸는 데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베이컨이 지적했듯 자연의 정교함은 인간의 꾀를 훨씬 넘어섭니다.



사람들은 날씨 같은 거대한 복잡계는 예측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중력으로 상호 작용하는 삼체처럼 단순한 복잡계도 마찬가지로 예측을 못 한다는 점입니다. 결정론과 예측 가능성을 순진하게 믿었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우주와 지구 영역을 떠나 생명과 인간 영역으로 넘어오면 우연은 더 만연하고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경제와 사회, 세포 행동에서부터 면역계와 유전자, 뇌, 의식 작용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대 가장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다소 진전을 이루겠지만, 큰 진전은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과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자연의 법칙’이란 개념은 16~17세기 사이에 처음 나타났습니다. 그 이전에는 이런 개념이 거의 없었습니다. 16세기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만들어지고 여기에 ‘입법자로서의 신’이라는 기독교적인 생각이 접목되면서, ‘자연의 사물에까지 법을 만들어 부여하는 신’이라는 개념이 받아들여졌습니다. 데카르트가 자연의 법칙이란 개념을 처음 사용한 과학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신이 우주를 만들 때 법칙을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우주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자연법칙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감각과 이성 모두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생물이 대체 어떻게, 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우주의 보편법칙을 이해하고 발견할 수 있을까요? ‘우주의 보편법칙을 이해하는 인간’이라는 관념은 우연히 진화한 인간 존재에게 너무나 많은 능력을 부여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에 대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인간에게 우주가 이해된다는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주 역사 138억 년을 1년으로 보면, 1월 1일 0시에 빅뱅이 일어나 우주가 탄생했습니다. 지구는 9월에야 생겼습니다. 지구에 생명체가 생긴 때는 9월 25일쯤입니다.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21시 45분에야 인류는 두 발로 걷기 시작했고 23시 59분 59초경에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처음 올려다보았습니다. 근대 과학의 역사는 우주 달력에서 단 1초입니다. 뉴턴 시대에도 그랬던 것처럼, 어느 시대 과학자든 자기 시대 과학을 최첨단이라고 여기면서 완성 직전 단계에 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의 감각 기관 중 우리 눈만 보더라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눈은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눈이 아니라 뇌를 통해 사물을 봅니다. 우리 눈에 들어오는 시각 정보는 초당 11메가바이트에 달하지만, 우리가 정말 뇌로 ‘보는’ 것은 고작 초당 60비트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직 소수 정보만이 뇌로 이동합니다. 뇌는 정신이 쏟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매우 빠른 속도로 나머지를 추측합니다. 우리는 망막으로 본 불완전한 대상을 상상으로 메워 생생한 대상으로 바꿔줍니다. 



시각이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망막과 상상이 함께 만듭니다. 그러한 과정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합니다. 우리 뇌가 끊임없이 이미지를 산출하여 머릿속에서 세상을 만든다는 측면에서 우리가 깨어있더라도 뇌는 항상 꿈을 꾸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 뇌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습니다. 우리 뇌는 현실을 잘못 해석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합니다. 

















실재를 알기 위해서는 뇌 안에 이미 세계를 바라보는 기존 지식과 경험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눈을 통해 뇌에 들어온 신호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뇌는 무질서한 신호를 분류하고 재배열하고, 때론 무시하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실재는 뇌가 만들어 냅니다. 우리 두뇌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패턴에 맞도록 우리가 지각한 내용을 자동으로 끼워 맞춥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말을 인용하면, “당신은 보고자 하는 것만 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세계를 그려냅니다. 우리 바깥에 독립된 외부 세계가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의 반영이고, 우리가 만들어냅니다. 물리학자 스티브 호킹(1942~2018)은 “과학이란 제한된 일부 모형에 불과하며, 그 모형과 우리가 실제 얻은 관측결과를 관계 짓는 규칙의 집합일 뿐이다. 과학 이론은 우리 마음속에만 있을 뿐, 그 이외 어떠한 실재(그것이 무엇을 뜻하든 간에)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말했습니다. 
















----------


* 마이클 폴라니가 보기에 이는 기독교의 산물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 개별적인 진리를 넘어서는 ‘초월적 진리’가 있다는 전통 내지는 이념을 심어주었습니다. ‘저 바깥에’ 존재하는 진리가 발견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폴라니는 과학의 전통 내지 객관적, 초월적 진리에 대한 추구의 기저에는 기독교 이념이 깔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 양성자나 전자가 전하를 띠었다고 말할 때 중성자에 없는 에너지가 가득 차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하의 정의는 전하를 띤 입자가 다른 입자를 밀어내거나 끌어당길 때 전하를 띠었다고 간주됩니다. 어느 물리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하라는 것은 일종의 태도와 같다.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누구는 카리스마가 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 삼체문제의 공간 상태는 18차원입니다. 우선 한 물체의 운동을 나타내려면, 6 가지 정보가 필요합니다. 3차원 공간이기에 위치를 나타내는 좌표 3개와 각 좌표의 속도를 나타내는 수 3개가 필요합니다. 전체 물체가 세 개이니, 이들 상태를 모두 나타내려면 6 X 3 = 18차원이 필요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