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 심리학의 핵심은 우리 자아가 서로 충돌하는 부분들로 분열되어 있다는 점이 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 몸에 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특정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으면서도 종종 서로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위원 여러 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와 비슷합니다. 마음의 분할은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 마음은 서로 상충하는 목적을 갖고 작동하는 모듈의 결합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119 긴급구조대원이 들려준 기이한 사례가 이런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다리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을 구조하는 어느 대원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놀라운 일은 사람들이 차를 다리 한쪽에 세워두고, 차 문을 잠근 뒤 다리에서 뛰어내린다는 점입니다. 마치 다시 돌아올 것처럼 말이죠.”



다시 돌아올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차 문을 잠글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갖고 작동하는 모듈의 결합체라, 항상 차 문을 잠그라고 말하는 마음은 다른 마음에 영향받지 않습니다. 마음은 제각기 독자적인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현대 정신과학에서 이해가 안 되는 문제는 정신이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졌다는 성질이 입증되었다는 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마음의 본질이 입증되었음에도 어찌 된 일인지 다들 우리가 한결같이 일관된 사람이라고 믿는다는 점입니다. 혹은 일관된 사람이어야 한다고 남을 강요한다는 점입니다. 일관되지 않은 남은 믿을 수 없고 나도 남이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길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일관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이율배반적인 존재입니다. 뉴스를 보면서, 주택 공급이 안정화 되어 전반적으로 주택 가격이 낮아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하다가도 내 집값이 떨어지는 건 참지 못합니다. 나이는 천천히 먹어야 하지만, 주말은 빨리 와야 합니다. 사람은 일관되지 않은 다중인격체입니다. 

 















또한, 프로이트의 양심 이론은 우리가 태어날 때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프로이트 역시 인간이 본래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 마음은 ‘원초아(이드)-자아(에고)-초자아(슈퍼에고)'로 구성됩니다. 초자아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결정합니다. 원초아가 인간 육체와 관련된 본능이라면, 초자아는 사회에서 배우는 규범이 내재된 상징입니다. 



프로이트는 초자아에서 생긴 두려움이 죄책감을 만들어낸다고 보았습니다. 초자아는 기본적으로 자아에 대한 검열자나 재판관 역할을 합니다. 비록 양심의 명령이나 도덕적인 자유의지인 듯 보이지만, 결국 사회에서 형성된 초자아가 검열하는 과정입니다. 자아에게 초자아란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훈육 등으로 생긴 사회의 질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를 테면 우리나라 중학교 3학년 도덕 교과서에서 파업에 대한 논의는 이런 훈육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교과서는 ‘자신 권익을 지키기 위해 파업한다’는 입장과 ‘시민에게 불편을 주면서 파업하는 것은 나쁜 일’이라는 입장을 먼저 대립시킵니다. 그 다음, 이 두 입장을 절충하여 “자신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해 시민생활에 불편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마지막 수단으로 파업하는 행위는 나쁘지 않다”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이는 파업하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모든 파업은 직간접적으로 시민생활에 불편을 끼칩니다. 그리고 파업 효력은 바로 그런 불편에서 나옵니다. 아무리 격렬하게, 아무리 오랫동안 파업을 해도 시민생활에 아무런 불편도 끼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파업하는 노동자 호소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모든 파업이 시민생활에 불편을 끼침에도 성숙한 시민사회가 이를 용인하는 까닭은 우리 모두가 언제라도 마지막 수단으로 파업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훈육된 초자아의 영향에 따라, 우리는 같은 노동자로서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응원하기보다 내일 아침 출근길의 불편함부터 떠올리게 됩니다.
















프로이트 주장에 따르면, 주체 내면에서 도덕적 의지나 양심의 가책이 생기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주체의 자유의지라고 볼 만한 증거가 없습니다. 도덕적 의지나 양심의 가책은 초자아 기능에 불과하며, 초자아란 시대 요구에 따라 자신 마음에 형성된 ‘흔적’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내 마음에 생생하게 울려 퍼지는 양심의 소리란 단지 시대유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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