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선택할 수 없는 문제일 뿐 아니라, 물질적 부(富)를 추구하는 행복은 절대적 빈곤보다 더 민감한 상대적 빈곤 문제를 일으킵니다. ‘오늘날 가장 궁핍하게 사는 사람조차 수백 년 전 왕보다 더 잘 사는 데 몇몇 사람이 엄청 잘 사는 게 뭐가 그리 대수로운가?’라고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큰 빈곤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 듀런트(1885~1981)는 “가난은 부(富)에 의해 만들어지며, 부가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까지 우리는 가난이 가난인 줄 모른다”라고 말합니다.

















과거에 평범한 사람은 부자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잘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누구든 백만장자가 어떻게 삶을 사는지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은 부자들의 호화로운 삶을 비정상적일 정도로 크게 보도합니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서 어마어마하게 돈이 많이 부자들의 집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자 ‘소셜 미디어로 생긴 불만’이라는 증상이 생겼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평생 절대 소유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괴로울 정도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든 다른 형태의 대중적 노출이든, ‘소셜 미디어로 생긴 불만’은 보통 사람이 소유한 것을 하찮게 보이도록 합니다. 비록 그 사람이 객관적인 기준에서 삶을 넉넉하게 누리고 있고, 인류 역사 전체 기준에서 극히 잘 사는 사람일지라고 그렇습니다. 

 















사회운동가 홍세화(1947~ )는 “성공한 자의 거머쥔 부를 동경하는 것은 ‘90퍼센트 사람들’이 덥석 문 당근이다. 그 가능성은 로또복권 당첨 확률에 불과하지만, 모두 성공 예감으로 뜀박질하도록 내몰아 기대하는 미래상으로만 자신을 일치시키고 오늘의 자신을 배반하도록 한다”라고 말하며, 그 이면을 깨달아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내 생각은 내가 주체적으로 형성한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이 나에게 갖도록 요구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간파해야 한다.” 
















그렇다면 상대적 빈곤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모든 사람을 가장 가난한 사람만큼 가난하게 만들어 간단히 평등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명백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은 원래대로 가난하지만, 나머지 모든 사람은 해를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평등을 추구하는 일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인정한다고 해서, 불평등을 그냥 받아들여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불평등이 용인될 수 있는 경우가 언제인가 하는 점입니다. 불평등은 결과적으로 아무도 더 나빠지지 않고, 더 나아지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만 허용될 수 있습니다. 이는 정치철학자 존 롤스(1921~2002)가 ‘차등 원칙’(difference principle)이라고 부른 것과 유사합니다. 불평등은 가장 못사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경우에만 허용될 수 있다는 원칙입니다. 하지만 이 원칙이 이상적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사회에서 불평등이 더욱 민감하게 감지되고,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웃이 더욱 부유해지면, 자신이 더 못살게 되는 것이 아님에도 부의 차이를 점점 더 의식하게 되고 불만족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등과 불평등을 오로지 물질 관점에서만 보는 것은 끔찍한 실패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은 상대적입니다. 사람들은 자신 행복을 판단할 때, 자신 실제 상황을 과거 혹은 현재의 사회적 경험에 비추어 비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행복이 상대적이라면 국가가 객관적으로 경제를 개선하고 부양한다고 해서 반드시 국민이 행복해진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무슨 일이든 쉽게 적응하며, 행복은 객관적으로 충족되지 않기에 국가의 경제 정책이 국민 행복 증대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만족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 인간의 행복은 객관적 조건보다 우리 자신의 기대에 더 크게 좌우된다. 여건이 극도로 좋아진 후에도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자신 운명에 주관적으로 만족하도록 하고 사회 불만을 막고자 보편적 기본소득을 도입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의 기본적 필요’가 무엇이든지간에, 일단 한 번 누구에게나 그것을 무료로 제공하면 사람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보편적 기본소득 덕분에 빈곤층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의료 서비스와 교육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들은 전 지구에 불평등이 만연한 것에 극도로 분노할 수 있다."


 

행복이라는 "목표를 진정으로 달성하려면 보편 기본소득은 다른 의미 있는 일과 더불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일 이후(이외) 만족스런 삶을 사는 방법,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더라도 삶의 만족도를 높일 방법을 먼저 찾아야 한다. 보편 기본소득과 더불어 강력한 공동체와 의미 있는 삶의 추구를 결합해야 한다.“ 
















유발 하라리가 언급한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더라도 삶의 만족도”를 높인 사회가 요즘 일본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일본 젊은 층 대다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취직률은 저조하고, 저임금에 시달리고, 워킹푸어로 일하고, 현대판 홈리스라고 볼 수 있는 피시방에서 난민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젊은이들은 삶이 만족스럽다고 느끼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일본 20대 젊은 층이 느끼는 생활 만족도와 행복 지수는 78.3퍼센트까지 상승했습니다. 일본 중학생과 고등학생 95퍼센트가 자신은 행복하다고 답했습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꽤 높은 만족도입니다. 1980년 절정기를 맞았던 일본의 ‘입시 전쟁’이 상징하듯 ‘좋은 학교, 좋은 회사, 좋은 인생’이라는 중산층 꿈으로 일본 전체가 압도되던 시기는 지났습니다. 1990년대 이후 중산층 꿈이 무너짐과 동시에 기업의 정식 구성원이 되지 못한 젊은이가 증가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젊은 층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요즘 일본 젊은이는 예전만큼 자동차를 구입하지 않습니다. 술도 많이 마시지 않습니다. 해외여행도 그리 즐기지 않습니다. 유학생 수도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선거 때 투표하러 가는 젊은이 수도 현저하게 줄고 있습니다. 사회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는 대규모 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태어난 지역에 애착을 느끼는 젊은이가 증가하고 있고, 대도시권으로 이동하는 인구수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2011)의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1985~ )는 그 원인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 없다고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고 느낀다.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될 때, 지금 행복하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세속적 물질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 그 자체가 오히려 불행의 원인일지도 모릅니다. 해마다 소비자 구매 심리를 자극하는 더욱 매혹적인 상품이 나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물건을 소유하는 기쁨보다 물건을 갖지 못하는 비참함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1754년에 이미 루소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세상 물질을 갖지 못한다면 불행하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세상 물질을 소유한다고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내면의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해서 오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무언가 주어지는 행복은 지속시간이 짧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 원했던 승용차를 사더라도 만족감이 반년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은 무슨 일이든 쉽게 적응합니다. 인간의 행복에는 설정점(set point)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행복감은 기저수준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결국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행복을 계속 누릴 수는 없습니다. 마치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처럼 아주 잠깐만 바닥을 벗어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흔히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새로운 상황에 곧 적응하리라는 사실을 매번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노인들은 대게 건강 문제로 고통을 많이 겪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인이 젊은이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을 들으면 매우 놀랍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만성 질병에 잘 적응하는 편입니다. 인간은 미래에 자신이 어떻게 느낄지 예측하는 데 매우 서툽니다. 우리는 자신 감정의 반응 강도와 지속시간 모두를 크게 과대평가합니다. 
















흔히 쾌락주의자로 잘못 알려진 철학자 에피쿠로스(BC 341~270)는 행복을 대부분 사람과는 다르게 규정했습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정서 차원에서 행복을 떠올립니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 측면에서 행복을 규정했습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습니다. ‘문제(~taraxia)가 없다(a~)’는 뜻입니다. 우리가 만족을 느낄 때는 어떤 것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바로 불안이 없을 때입니다. 행복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합니다. ‘다행’(多幸)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의미에서 쾌락은 인생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쾌락 뒤에는 필연적으로 불쾌감이 뒤따르며, 인간의 참된 목표인 고통의 부재로부터 멀어진다는 점이 그의 요지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정주의자’였습니다. 불필요한 욕망을 필요한 욕망으로 착각하면 고통이 생깁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갈망에 비해 그 성취감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쾌락으로 시작된 것이 고통으로 끝납니다. 에피쿠로스는 유일한 해결책이 욕망을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제안합니다. 

















부처(BC 560?~480?)는 우리 행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괴로움이 되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한 사람의 번영은 보통 다른 사람의 궁핍이나 배제에 의존합니다. 나라가 부유해지면 항상 불평등이 불행을 초래하기 마련입니다. 작가 버나드 맨더빌(1670~1733)이 말한 것처럼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다수 사람이 가난하고 불행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상주의’라고 부르는 이러한 논리는, 한 사람의 손실이 다른 사람에게 이득이 된다는 뜻입니다. 중상주의자가 해줄 수 있는 최고 조언은, 예컨대 임금은 낮출수록 좋다는 점입니다. 값싼 노동력은 경쟁 우위를 창출해 수출을 증진시키기 때문입니다. 맨더빌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노예가 허용되지 않는 자유 국가에서 가장 확실하게 부를 창출하는 것은 부지런히 일하는 빈곤층 다수”입니다. 

 















멘더빌이 이렇게 거리낌 없이 주장했던 이유는 빈곤층이 형편없는 사람들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입니다. “동료 노동자와의 경쟁에서 패한 노동자는 나태와 우둔이라는 죄를 뒤집어쓰고 빈곤이라는 형벌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영국 전 총리 마거릿 대처(1925~2013) 역시 빈곤을 ‘인격의 결함’이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빈곤을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은 그럴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 언젠가는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현대사회에는 ‘긍정적으로 사고하라!’는 신앙이 있습니다. 이 같은 낙관주의에 사로잡힐 경우 우리 모두에게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됩니다. 나아가 내 자신 감정을 다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냉담하게 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부처는 “괴로움의 현실이 우리 삶 전체에 완전히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고통을 느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불교는 삶의 목표로써 내면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삶의 현실인 변화의 고통[生老病死]을 깨닫고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가져오는 뭔가를 얻자마자 곧 그것을 잃을까봐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늘 욕망의 대상을 쫓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결국 그것 때문에 불행해질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부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고정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도 실제로는 순간순간 변화한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실체에 대한 믿음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욕망을 낳고 또 그 욕망은 고통을 가져온다. 만족스러운 순간은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도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영원히 좌절하는 것이다.” 
















철학자 스베냐 플라스푈러(1975~ )는 인간이 고통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성장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실패를 겪은 사람은 그것이 왜 실패했는지 생각하고, 무엇을 더 배워야 하는지 고민하여, 다시 일을 시작할 때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장애나 시스템 오류라고 생각해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려고만 한다면, 인간은 자기 실존과의 중요한 연결 지점을 잃고 말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을 한계가 있는 존재로 인정할 때 자아를 갖게 된다. 인간이 그 한계와 고통을 경험하고 자신 인생과 사회가 대체 왜 이러한지 근거를 캐물어야 한다. 고통은 생각을 낳는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그 고통을 억지로 참는 사람은 성과(成果)의 강요에 굴복하고 마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2014)와 『호모 데우스』(2016)에서 행복은 달성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다스려야 할 마음 상태라고 말합니다. 행복을 갈망하지 않으면 현재 순간에서 만족을 찾을 수 있고, 스트레스와 불만을 피할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행복이 주관적 느낌이라고 믿기 쉽고, 자신이 행복한지 비참한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고 믿기 쉽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다. 사람들의 기대가 충족되었느냐의 여부, 쾌락을 즐기는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행복을 갈구하면 쉬지 않고 그런 감각을 쫓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마침내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고 해도 그 감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과거의 행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행복을 갈구할수록 점점 더 스트레스와 불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BC 460?~380?)는 행복은 재산이나 물질적 재화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의 쾌락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짧고, 고통을 산출하고, 반복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적 행복은 쾌락의 절제와 삶의 균형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덜 욕구할수록 덜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행복 역시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만족의 느낌이 아니라 우리의 성숙된 삶 전체의 문제였습니다. 성숙된 삶은 교육을 받고 습관화를 통해서 달성할 수 있습니다. 즉 덕이 있는 행위를 하도록 훈련받고 또 이를 꾸준히 실천하여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위를 반복하여 우리 본성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우리는 정의로운 행위를 하여 정의로워지고, 절제 있는 행위를 하여 절제 있게 되고, 용감한 행위를 하여 용감해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같은 행위와 덕을 행복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 누구도 성인군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할 때마다, 다음에 선한 일을 할 가능성이 많은 인물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건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인간 본성은 존재 유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 자체가 사회에서 만들어가는 산물입니다. 인간 본성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구성되는 과정에 있으며, 생성하는 존재로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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