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도쿠가와 시대 내지 그 이전 시대가 ‘정체’되었다가거나 ‘폐쇄적’ 혹은 ‘쇄국적’이었거나 ‘봉건적’이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소리다. 1853년 페리 제독의 내항이 일본을 ‘개국’시켰다는 주장이나 1806년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은 도쿠가와의 유산과 급격한 단절을 이루었다는 주장은 수정되어야 한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 일본도 하루아침에, 아니 한 세기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일본 도시화는 획기적이었다. 1550년 이후 한 세기 반 동안 일본에서는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가 하나에서 다섯으로 늘었다. 18세기에 이르면 일본 도시 인구는 중국이나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많았다. 오사카와 쿄토, 에도(토쿄) 인구는 각각 적어도 100만을 넘었다. 특히 에도 인구는 130만에 육박했다. 일본 인구의 6~13%가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에 살았다. 반면 당시 유럽의 도시인구는 2%에도 미치지 못했다. 일본 인구는 세계인구의 겨우 3%였지만, 10만 이상이 거주하는 도시에 거주하는 비율은 무려 8%나 되었다."<리오리엔트>

















"메이지 유신 이전 도쿠가와 시대에는 전국적으로 260여 개의 지방마다 영주가 있었다. 이 지방 영주를 다이묘, 또는 번주라고 하고, 그들이 다스리는 봉건국가를 번이라고 한다. 이처럼 반독립적인 번이 다수 존재했다는 점은 막말기의 변혁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각 번들 간의 경쟁의식이 강했다. 다수의 정치에서 생존을 위한 부국강병의 경쟁, 생존의 경쟁 의식을 갖고 치열하게 노력했다는 점이 대내외 위기에 민감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였다.”<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일본의 정치와 사회 체제의 분권화와 다양성이 중국에서 나타난 것보다는 훨씬 다채로운 대응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러한 다양성 덕분에 시행착오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성공적으로 대응하였다. 예를 들면, 번 대부분은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에 너무 작거나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충분한 수의 번들이 다양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 엄격한 계급 구분도 영향을 끼쳤다.”<동양문화사(하)>
















"일본의 봉건제는 유럽의 봉건제와 유사한 면도 있지만 몇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우선 센고쿠(戰國)시대 이후 일본의 봉건제는 쇼군과 다이묘가 주종 관계에 있지 않았다. 유럽의 왕-제후 관계와 달리 일본의 쇼군은 가장 강력한 무가(武家)일 뿐이다. 천황 위임을 정통성의 근거로 하지만, 그 위임은 힘에 기반한 것이었고, 결국 통치 근원이 되는 것은 무력이고 실력이었다.



제한적 권위의 통치자로서 쇼군은 다이묘들에게 세금을 징수할 수 없었다. 다이묘들의 충성 서역은 전시에 쇼군을 군사적으로 지원할 군역만을 의무화하였다. 일반적으로 중앙 권력이 강성해지면 지방의 사적 무력 보유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통치체계가 정비되지만, 일본은 그럴 수 없었다. 군역이 계약의 기초이므로 다이묘의 무력 보유를 금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극상이 난무하는 센고쿠시대를 거치면서 충성 맹서는 약속의 무게를 잃은 지 오래다. 쇼군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군역 의무가 쇼군 안전을 위협할 수도 있는 패러독스 상황에서 쇼군은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위해 군역을 다른 형태로 부담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쇼군이 군역의 연장선상에서 성곽 축성, 제방이나 도로 건설 등 전쟁 기간시설 관련 공사에 다이묘가 인력과 자재 등을 제공하도록 의무를 부가한 것이 천하보청(天下普請)이다.



이에야스는 쇼군 자리에 오른 후 바로 천하보청을 발령한다. 히비야이리에 매립사업을 비롯하여 소토보리(에도성 바깥쪽 해자) 조성, 에도성 축조, 고카이도 정비 등에 전국 다이묘를 동원한 것이다. 천하보청은 쇼군 통치의 상징이자 다이묘 견제책이기도 했다. 이에야스는 다이묘들의 천하보청에 대한 순응 정도를 다이묘의 충성심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저항 가능성이 높을수록 더 많은 의무를 부과하고 순응할수록 의무를 경감하였다.



각 다이묘는 천하보청에 따른 재정 압박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정해진 기일 내에 높은 완성도로 사업을 완료할 수 있도록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에 실패할 경우 신임을 잃는 것은 물론, 더 큰 부담이 되어 돌아오거나 처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이묘들이 천하보청의 명을 받아 공사에 임하기는 하지만 공사 완료에 필요한 자재와 기술을 보유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각자 부족한 자재나 기술을 번끼리 거래하거나 전문가들을 인력 시장에서 구해야 했다. 기존에 없던 자본이나 자재, 전문 인력에 대한 수요가 생겨나고 시장에서 거래되기 시작했다. 



천하보청은 각 번의 통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천하보청 수행을 위해서는 번의 자원 동원력이 향상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다이묘가 천하보청의 압박을 견디기 위해 행정력 강화와 세수 증대를 위한 새로운 땅 개간 등 통치체제 정비에 힘을 기울여야 했다.



천하보청의 묘미는 국가에서 거둔 국부가 고스란히 인프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만약 쇼군이 중앙의 군주로서 징세, 즉 화폐나 현물 형태로 생산량의 일정 부분을 거두어 갔다면 그 과정에서 많은 비효율과 왜곡된 자본 축적이 발생했을 것이다. 일본은 천하보청에 따라 세금 징수가 아니라 ‘결과물’ 형태로 의무를 부과했기에 관리비용 등의 매몰비용이나 착복으로 인한 증발 없이 모든 투입이 실물 인프라로 이어졌다. 



일본으로서는 쇼군이 다이묘를 견제해야만 하는 정통성 딜레마를 겪고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행운이었다. 전근대 유럽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소수의 중앙 지배층을 정점으로 하는 다단계의 착취적 구조를 기본으로 한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하고 통치에 민주성이 결여된 전근대이기에 세금은 비효율성도 높고 생산력 확대를 위한 재투자에도 사용되기 어려웠다. 세금은 누군가의 금고로 들어가 사치로 낭비되거나 다 쓰이지도 못하고 소멸되는 국부의 무덤이었다.



일본은 중앙의 징세권이 없었다는 사정이 천하보청과 맞물려 전혀 예기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우선 천하보청에 동원된 자원은 중앙 지배층에 이전되어 축적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지방 지배층인 다이묘들은 자본 축적의 기회는커녕 악몽 같은 상황에 처했다. 번 정부는 동원 인부들에게 노임을 지급하고 자재를 구매하기 위해 끊임없이 재정을 지출해야 했다. 천하보텅 비용 마련을 위해 빚을 내야 하는 다이묘도 있을 정도였다. 말단에서 세금 형태로 걷히는 생산물은 천하보청을 거치면서 노임이나 자재 대금 형태로 제분배되었다. 이러한 직접적인 자원 투입 결과로 높은 수준의 공공인프라가 창출되자 한층 더 경제활동이 촉진되고, 이는 다시 말단 세금 납부자의 생활 개선으로 이어졌다. 천하보청이 의도치 않은 국부 인큐베이터가 된 셈이다.<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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