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라고 생각하는 환상이 있다. 

그렇기에 모든 일을 자기중심으로, 

다시 말해 자신 필요나 목적 중심으로 

생각하게 된다.” 

- 질 들뢰즈





논란이 있지만 우리나라 법은 술 마신 뒤 저지른 범죄에 대해 처벌이 관대하다. ‘심신미약’(diminished responsibility) 상태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보고 정상을 참작해 준다. 비슷하게 프랑스는 치정 범죄에 처벌이 가벼운 편이다. 이성이 감정을 억누를 수 없는 ‘극한 상태’에 있었기에 자유의지가 발휘될 수 없었다고 감안해 준다. 그렇지만 이러한 몇 가지 심신미약 상태를 제외하면 법은 인간 의식이 항상 특정 행동을 지시하는 ‘정상’ 상태에 있기에 인간을 자신 행동에 대해 온전히 책임이 있는 존재로 생각한다. 



고대 로마인들 또한 정신이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면책해 주었다. 범죄자가 자신 의지로 통제할 수 없었다고 판단되면 무죄가 선고되었다. 로마나 현대 사회의 이러한 판결은 멀리 아리스토텔레스의 법제 개념에 근거한다. 사법당국이 용의자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범죄 행위뿐 아니라 행위자 동기를 증명해야 한다. 이 같은 행위자 동기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죄지은 마음’(라틴어로 mens rea)이라고 표현했다. ‘죄지은 마음’을 달리 말하면, 시민은 자신이 의도한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만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플라톤 이래로 서구 사회는 인간 영혼과 마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자유의지가 있기에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고 믿었다. 근대 서구 시민사회는 자유의지를 기반으로 모든 개인이 타인 인격을 존중하고 선과 악에 대해 스스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주체라고 전제하며, 인권을 부여했다. 특히, 근대 서구 사상을 연 데카르트는 ‘의심할 수 없는 생각하는 나’의 ‘내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 자유의지를 논리의 공리(公理)로 삼았다. “1)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 2) 결정론에 지배받는 존재는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다. 3) 순수한 물리적 존재는 결정론의 지배를 받는다. 4) 따라서 인간은 순수하게 물리적 존재만은 아니다.” 
















칸트의 도덕법칙도 개인이 자유로운 자신 양심 속에서 스스로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가 생각하는 도덕법칙은 개인의 자율적인 의지와 분리할 수 없다. 개인 스스로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 칸트의 정언명법(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위 하라)인데, 당시에 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던 칸트는 신이나 자연법칙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필연 상황에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칸트는 자유의지가 존재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알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는 세계 – 칸트 용어로는 물자체 혹은 본체계, 예지계, 초감성계 –에 있으며, 인간은 신이나 자연법칙의 필연성 제물이 아니라 언제나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우리는 칸트 사고를 통해 자유의지가 얼마나 답하기 어려운지 문제인지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 생각과 달리, 인간이 자유롭게 의지를 발휘하여 자신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고대에는 인간의 자유의지 개념이 거의 전무했다. 히브리인들 운명론은 <구약성서>에서 엿볼 수 있다. “인간은 변덕스러운 운명의 희생자다. 노력과 성공 사이에는 어떠한 필연적 관계도 없다.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더라.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해서 늘 잘 되는 것도 아니더라.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전도서> 9:11).”



예수 이후 신학자들 사상도 히브리인들 운명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간은 신의 결정론에 맞서 자신 운명을 바꿀 자유의지가 없었다. 사도 바울은 율법적인 노력으로 구원을 확보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므로 장차 다가올 삶에서 인간이 맞게 될 운명은 전적으로 신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신학도 신의 전능성을 기조로 삼았다. 그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는 것은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갖는 중요성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구원을 스스로 얻어낼 만큼 의지가 있다면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내려올 필요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혁명을 일으킨 루터도 인간은 누구도 자신 선행으로 구원을 바랄 수 없다고 보았다. 오히려 구원은 오직 신의 은총일 뿐이며, 선행이든 계율 준수든 신의 마음에 들기 위한 개인 노력과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천국으로 가기 위해 기도할 뿐이며 그 이상의 일을 할 수는 없다. 루터에게 있어 구원받을 자의 선택은 오로지 주어지는 것, 개인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칼뱅도 구원이란 신이 내린 은총의 산물일 뿐이며 인간 업적이나 자격에 구애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누가 구원받고 누가 단죄 받을지는 예정되어 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성례(聖禮)도 아무런 효험이 없다. 그래도 신자는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은총을 받기 위한 수단이 전혀 아니다. 인간은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자신 운명을 바꿀 수 없다.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들 영혼에 신의 축복이나 저주의 낙인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바울부터 아우구스티누스나 루터, 칼뱅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각자의 생활 태도나 노력과 상관없이 오직 신이 구원받을 사람을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기독교 전통 사상은 신의 전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게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라면 신은 거기에 얽매이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 능력을 인정해야만 한다. 구원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구제하다’는 의미가 되며, 따라서 신의 무한한 힘에 한계가 생기게 된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신이 세상 모든 것의 주재자라면 악의 존재 역시 신이 주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이 정의롭다면 그의 힘으로 방지할 수 있는 고통과 악이 왜 발생하도록 그대로 두는 것인가? 신이 전능함에도 불구하고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정의롭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에 다음 세 가지 견해가 병립하기 매우 어렵다. ‘신은 정의롭다’ ‘신은 전능하다’ ‘악은 존재한다.’



이 난제를 푸는 방법 하나는 인간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진다. 만약 신이 어떤 규범을 세웠을 뿐 아니라 개인에게 그것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자유를 부여했다면, 우리는 옳은 것 대신 잘못된 것을 선택한 것에 책임져야 한다. 나쁜 일을 한 자는 현세 또는 내세에서 신의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그의 고통은 악이 아니라 위반에 대한 징벌이다. 따라서 중세시대에 교회는 자유의지를 다시 불러들였다. 교회 예식과 절차(세례, 기도, 미사 참석, 성가 참례 등)를 강조한 것이다. 사실 신학적으로 ‘행함을 통한 구원’이라는 생각, 자유의적인 생각은 이미 배경에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가톨릭에서는 예식과 성례를 잘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유대교에서는 신의 율법을 잘 기키고 시나이 산의 계명(십계명)을 준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렇듯 종교에서도 자유의지 여부가 답하기 얼마나 어려운지 문제인지 알 수 있다.
















철학에서 보면 인간 자유의지를 증명 없이 공리로만 사용한 데카르트나 증명에 실패한 칸트와 달리 스피노자와 흄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음을 설득한다. 흄은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 때 책임이 있다. 그런데 결정론(필연성)이 참이라면 인간 행동과 욕구, 사상 등 모든 것은 인과 법칙에 의해 결정되고 인간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 반면 결정론이 거짓이라면 사건은 인과 법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생기는 일이며, 이것도 인간 통제력을 넘어선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흄의 환경론(필연성과 우연성)에 인간 내면의 메커니즘을 덧붙여 결국, 인간이 의지를 자유롭게 발휘할 수 없다고 논증한다. 인간은 비록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우리 사고와 행위를 규정하는 욕망을 의식하면서도 그 욕망을 일으킨 원인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비유한다. “만일 공중으로 던져진 돌멩이가 그 순간 의식을 갖게 된다면, 그 돌멩이는 자신이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있다고 상상하게 되리라.” 스피노자가 보기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자신 ‘의지’대로 선택하고 행동한다고 여기지만, 이는 다만 그때그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충동에 따라 결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의 요점을 당시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인간은 자기 바깥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에 의해 미리 결정되지 않는 한 자유롭다. 하지만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그런 조건은 성립하지 않으므로,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자유란 어떤 행위나 결정이 외부에서 귀결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 행위자의 본성에서 귀결된 것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가 신만이 자유롭다고 말한 것은 옳다.” 
















근대 철학자들의 논증뿐 아니라 첨단 장비를 이용한 현대 신경과학자들도 흄과 스피노자 주장을 지지하며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워한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2018)에서 이 같은 실험 결과를 정리하여 설명한다. “사람들은 자신 뇌 안에 갇혀 있으며, 또한 사회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자신의 핵심적 정체성은 뇌신경망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환상이다. 최신 과학 이론과 최신 기술 장비에 따르면 정신은 어떤 경우에도 조작에서 자유롭지 않다. 심지어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이상인 자유와 사랑, 창의성조차 다른 누군가 목적을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 정신은 조작된 산물이다. 우리는 우리 밖의 세계를 통제할 수 없으며, 우리 자신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우리가 통제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자유의지가 없다. 우리 욕망이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의 마술 같은 발현이 아니라 생화학적 과정의 산물이다. ‘자아’는 허구적 이야기다. 우리 정신 안에 스토리텔러가 있어서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바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한다.“ 
















우리는 오늘 점심 식사로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의식적으로 결정한다고 생각하기에 우리에게는 분명히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점심 메뉴를 고르는 아주 간단한 일조차 엄청나게 많은 요인에 좌우된다. 연구 결과는 한 종(種)의 수준에서 보나, 개인 수준에서 보나 식욕은 대체로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유전자 안에 새겨져 있으며 뇌 회로도 이미 그런 식으로 배선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식욕은 오랜 세월 동안 특정 음식을 더 맛있다고 여기도록 진화해 온 생물학적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어 당신이 태어나기 수십 년 전 친할아버지가 어떤 음식을 좋아했었는지가 오늘날 당신 음식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태어난 네덜란드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있었다. 이 연구는 1944년에서 1945년 사이에 1년 동안을 거의 굶다시피 살았던 독일 점령 치하의 가족에서 태어난 아동들과 독일 점령지가 아닌 덕분에 식량 조달이 훨씬 용이한 환경에서 태어난 아동들의 건강을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 수정 당시 영양 상태가 심각하게 불량했던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동들은 나중에 비만과 당뇨병에 걸릴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먹을 것이 귀한 환경에서 잉태된 아이의 신진대사는 나중 모든 것이 풍족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고생한 것이다. 태어나기 전 가혹한 환경 변화에 따라 유전자가 변했고 이런 변화는 다음 세대, 그리고 그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체중과 체형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이는 유전자는 150개 정도가 있다. 그중에는 얼마나 배고픔을 느낄지 지시하는 유전자(이 유전자는 언제 먹어야 하고, 언제 배가 부른지 알려 주는 신호를 뇌로 보낸다)와 쾌락회로에 관여하는 유전자(어떤 사람은 뇌의 보상경로를 자극하려면 더 많은 칼로리가 필요하다. 이들 수용체의 민감도가 떨어지기에 남들보다 더 많이 먹어야 기분이 좋아진다), 뇌가 몸속의 필수 영양분 수준을 감지하여 영양분이 너무 부족하면 더 먹으라고 지시를 내리는 것과 같은 유전자 등이 있다.



사람은 선천적으로 고칼로리나 고당도, 고염도 음식을 선호하게 되어있지만, 이것 말고도 평생에 걸쳐 생긴 온갖 식습관이나 기호는 말할 것도 없고, 개인이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나 만족 지연 같은 것도 작용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그날 호르몬 수치도 영향을 미치고, 당신이 얼마나 지친 상태인지, 당신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지도 영향을 미친다. 짜장면이나 짬뽕을 고르는 일만 해도 거기에 따르는 의사결정 과정은 복잡할 뿐 아니라 대체로 무의식으로 이루어진다.
















흄의 주장처럼 사람들이 이성적일지라도 – 사실 주로 이성적이지 않고 감정적이지만 - 자신이 통제하는 범위 밖의 힘에 영향받으며, 또한 스피노자 주장처럼 감정과 인지 반응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없기에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전제에 의문을 던진다. 이에 더해 신경과학은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결정을 내리도록 뇌가 조종한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행동하려고 마음먹기 최소 0.3초에서 최대 10초 전부터 행동 관련한 뇌 활동은 무의식적으로 증가한다. 뇌는 사람이 인식하기 전부터 벌써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만약 어떤 행동이 의식적으로 마음먹기 전에 이미 무의식 상태에서 시작되었다면 자유의지 역할은 그 과정에 끼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의식적 의지는 환상에 불과하다.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직관은 우리 내면에 숨겨진 것이 밖으로 표현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보통 생각이 마음에 떠오르고, 그것이 정서를 유발하고, 느낌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느낌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를 이어 정서가 표현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잘못되었다. 기쁨이나 슬픔이라는 정서가 먼저 나타나고, 기쁨이나 슬픔에 대한 느낌이 그 뒤를 따르며, ‘기쁘다’ 혹은 ‘슬프다’고 말하는 마음의 상태를 규정하는 생각들이 나타난다. 정서 상태가 먼저 오고 느낌과 생각이 그 뒤를 따른다는 점은 사람이 행동하기 전 인식하는 것보다 무의식이 먼저 발현된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신경생리학자들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애초 없다고 주장한다. 자유의지뿐 아니라 자아라는 개념도 물리적 뇌 신경의 착각이다. “우리 인간은 행동에 대한 모든 결정을 스스로 내리는 ‘자아’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계속해서 착각한다. 이 믿음은 떨쳐내기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하고 압도적인 환상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유의지가 있다는 ‘압도적인 환상’을 갖게 되었을까? 우선 인간 본성 측면에서 살펴보면, 우리에게 정서가 먼저 유발되고 느낌과 생각이 뒤따르는 이유는 진화 과정에서 정서가 먼저 생겨났고 그다음 느낌이 생겼기 때문이다. 정서는 자동으로 자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된 도구다. 신경세포를 활성화시키는 연결망으로 인해 우리 인식보다 결정이 앞서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 행동에 대해 이러한 사전 무의식을 알지 못한 채 나중에야 자신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의식화한다. 즉, 과거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제시함으로써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이유는 뇌가 인과관계를 추론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뇌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말이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사실을 조금씩 날조한다. 결국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 의식적 자아는 그 결정을 가장 늦게 알뿐 아니라 왜곡되어 알게 된다. 신경과학자들이 내린 난처한 결론은 이렇다. “이런저런 일을 하거나 하지 않을 판단은 의식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의식에서 ’드러난다‘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압도적 환상’을 양육(사회화)의 측면에서 보면 도덕과 법률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자유의지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고 단순한 환상이라고 한다면, 자유의지에서 유래하는 ‘책임’도 붕괴하고 도덕철학이나 법철학이 성립하지 않을 염려가 있다. 그래서 칸트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도덕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이론을 전개했다. 자유의지에 대한 대중 통념은 한 가지 가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듯하다. 즉, 우리들 각자는 과거에 우리가 했던 것과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다는 가정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저질렀다면, 그가 그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점을 전제한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주체는 결코 자율적이고 주관적인 주체가 아니다. 인간은 태생 자체가 다른 무수한 원인에 지배받을 수밖에 없다. 인간 의지는 철저히 타율적인 존재다. 우리 의지는 기본적으로 타인 의지에 의해 감염된 ‘최면 상태’와 같이 작동한다. 의지가 자유롭다는 생각, 그것이야말로 일종의 독단이자 사회적 현상에 대한, 그리고 우리 정신 본성에 대한 무지다. 
















프로이트의 양심 이론도 옳고 그름에 대한 생득적 개념이나 절대적 개념의 가능성을 부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로이트는 인간이 본래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 지를 결정하는 것은 초자아다. 초자아에서 생긴 두려움이 죄책감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정신분석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흔히 자신의 초자아와 싸워서 그것의 요구를 철회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문화가 제시하는 윤리적 요구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불교적 관점에서도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행하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행위를 할 때 어떠한 정서 상태에 있었는지 이다. 행위 자체는 단순히 마음 작용의 후속 절차, 즉 반향(反響)일 뿐이다. 정서 상태(emotional states)가 매 순간 활발하게 발현하는 반면, ‘정서 특성’(emotional traits)은 행위 결과로서 창조되어 개인에게 남아 오래 지속된다. 정서 특성은 수동적인 형태로 쌓이고 의식적으로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불교적 사고가 프로이트적 사고 및 현대의 심층 심리학에 매우 가까이 접근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우리 마음속 밑바닥에 숨겨진 성향 또는 잠재적 기질이라고 부르는 어마어마한 영역이 잠자고 있고, 다양한 자극을 받아 이 기질들이 활성화된 상태로 일어난다는 점을 고대에도 이미 잘 이해하고 있었던 듯하다. 이 정서 특성들이 일생에 걸쳐 매 순간 퇴적암 지층처럼 쌓여가고, 깊은 곳에 쌓인 지층은 현재의 경험 안에 격하게 분출될 수도, 잠잠하게 드러날 수도 있다.



특이한 점은 이러한 시각이 자기(self)에 대한 가변적인 시각[無我]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어떤 정서들이 심층에 내재하는 동안, 개인은 저마다 독특한 인성을 갖게 된다. 경험적이고 습관적인 반응을 결정하는 정서 패턴들은 독특한 경험에 의해 긴 시간에 걸쳐 축적되면서 독자적인 형태로 발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환경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배우고, 긴 시간에 걸쳐 퇴적된 잠재 성향은 일련의 습관을 형성한다. 이렇게 학습된 반응에 따라 우리는 순간순간 적절한 방식으로 새롭게 반응한다. 

















우리는 우리 의지로 행한 결과에 따라 뭐든 우리가 얻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운명을 전부 통제할 수 없고 우리 성공과 실패는 다른 누군가에게, 가령 신이거나, 운명의 장난이거나, 순간의 선택에 따른 예상 밖의 결과 등에 좌우되는가? 내게 주어진 보상은 행운 덕이지 자유의지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겸손이 시작된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이렇게 태어난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 그런 겸손함은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는 가혹한 성공주의나 능력주의를 넘어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자유의지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더 관대한 공동체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게다가 우리는 굳이 현대 서양의 자유의지 개념이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 고대에는 자유의지 개념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의지 자리를 대신할 대안적 견해가 오히려 매력적일 수 있다. 그 대안적 견해란, 개인 수준에서는 습관적 행동을 바꾸기가 쉽지 않지만, 법률 제정이나 정책 입안, 교육 등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환경을 바꿈으로써 거시 수준의 변화가 만들어진다면 우리가 집단적으로 특정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고 유지해서 집단 수준에서 바람직한 큰 변화를 일구어낼 수 있다. 



일단 개인과 마찬가지로 집단도 병든 신념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식이 작동해서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생각되는 신념조차 의식적 자각 없이 일어나는 뇌의 작동으로 결정된다. 평생 계속 이어지는 학습을 통해 뇌 속에서는 새로운 경로가 만들어진다. 과학자들은 이를 가소성이라 부른다. 몇몇  연구에서는 단순히 페이스북 피드를 바꿈으로써 사람 감정 상태를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의식적이고 지적인 활동 결과로 여긴 의견이나 신념 중 상당 부분이 사실은 뇌 기능이 주도하는 감정 반응에 의해 빚어진다는 의미다. 이런 지식을 적용해서 우리의 신념을 역설계(reverse-engineering)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데올로기 스위치’ 설계의 가능성은 한 인간 신념을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바꿔 놓을 수 있다. 사람들은 실제로 극적인 사건 결과로, 혹은 삶의 경험이 천천히 축적되면서 자신 생각과 의견을 바꾸기도 한다.



인간의 본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없다. 우리가 종 전체 특성을 공유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 집단이 전체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는 것 또한 지나친 단순화다. 신념 체계는 집단적 재평가와 그에 따르는 압력 아래에 변하고 진화한다. 집단도 자신 생각을 바꿀 수 있고, 또 실재로 바꾼다. 타고난 선천성과 자율적인 개인의 힘이라는 기존의 지배적 통념에서 멀어져 우리를 이끌고, 인생 결과를 빚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면 기회가 열린다. 

















소크라테스도 모든 악행은 악의가 아닌 제대로 학습하지 못한 무지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만약 우리 실수가 미칠 영향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특정 덕목에 대한 참된 이해는 도덕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윤리적 사고를 펼쳐 나감에 있어 기원전 5세기 당시 그리스에 널리 퍼져 있던 도덕관념에 크게 반발했다. 소크라테스 임무는 의지의 나약함이라는 널리 퍼져 있는 일반적인 생각이 왜 사실상 잘못인가를 보이는 것이다. 의지 나약함은 한 개인이 어떤 행위가 그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쾌락을 추구하려는 욕구에 압도되어 결국 그 행위를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 즉 개인 의지가 유혹을 이겨낼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을 때 – 발생한다고 대부분 사람은 생각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런 개인이 사실상 자신 입장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지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수행하려고 선택한 행위가 – 즉 자신이 나쁜 것이라고 믿지만 자신에게 쾌락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행위가 – 사실상 결국 고통을 주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나쁜 행위를 한 것은 다름 아닌 무지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자신 행위가 선을 산출할 것이라고 믿고 있으나 그의 이러한 믿은 잘못된 것이다. 
















니체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건 행위가 아니라 태도며, 잘못된 행위는 몰이해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이렇게 비유한다. “어린아이가 동물에 대해 보이는 잔인함은 어린아이의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그 아이는 동물이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결국 어떤 행위가 악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늘 ‘어리석은 행위’일뿐이다. 그런 행위를 선택했던 지성 정도가 너무 낮았던 것이다. 타인 고통을 유추할 수 있는 능력, 우리 기억과 상상력을 활용해 고통을 주는 행위에 대해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 능력, 이것은 오로지 배움에 의해 가능해진다. 배움이 커지면 해석도 달라진다.



이런 과정을 거칠 때 우리는 ‘도덕적 인류’에서 ‘현명한 인류’로 진화해간다. 모든 것을 자유의지에 따른 죄악으로 보는 관점에서 지성 정도에 따른 어리석은 행위로 보는 관점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지은 게 아니라 어리석은 행위를 한 것이다. 지금의 최고 지성도 언젠가는 더 우월한 지성에 의해 추월당할 것이므로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다. 범죄자를 니체적 개념에서 하나의 ‘어리석은 자’로 보자. 이렇게 범죄자에게서 자유의지를 제거하면 죄라는 개념과 벌이라는 개념도 세계에서 추방된다. 형벌을 가해 범죄자에게 보상받고자 하는 복수심까지도 극복해 나가야 한다. 사악한 자유의지가 문제라면 거기에 대한 벌은 분노하는 자의 자의에 의해 무한대로 커질 수도 있지만, 남에게 끼친 손해에만 집중한다면 벌은 정확히 계량 가능한 것이 되어 원한의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다.



악한 행위를 한 사람이 자신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모르고 있다면 그에게 벌을 내리는 게 가능할까. 벌은 행위의 모든 의도를 다 알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가능한 법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태반이다. 우리는 우리 본능과 육체, 정신 운동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우리는 범죄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명명할 수 있어야 한다. 범죄자에게서조차 죄를 빼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낯설며, 일부 철학자나 과학자 사이에서나 공허하게 떠도는 이야기라 여겨질 수 있지만, 범죄자에게 자유의지가 없었다고 보고 처벌보다는 진짜 ‘교화’ 관점에서 운영되는 교도소들이 있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남쪽으로 약 96킬로미터 떨어진 숲에는 세계에서 가장 이상한 교도소 중 하나가 있다. 그곳은 마약 밀매범, 성범죄자, 살인범 약 250명이 수감되어 있는 노르웨이에서 두 번째로 큰 감옥이지만, 감방이나 철장을 볼 수 없으며, 권총이나 수갑으로 무장한 교도관도 볼 수 없다. 교도관들은 ‘우리는 그 사람들과 이야기한다. 이야기가 우리 무기다’라고 말한다.



할렌(Halden) 교도소 수감자에게는 바닥 난방을 갖춘 개인 전용 방이 주어진다. 평면 텔레비전과 전용 욕실, 수감자들이 요리할 수 있는 주방에는 자기로 된 접시와 스테인리스스틸 칼이 있다. 또한 도서관과 암벽등반 연습용 벽, 수감자들이 자신 음반을 녹음할 수 있는 음악 스튜디오까지 완비하고 있다. 



할렌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만 더 가면 마지막 형량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중범죄자 115명이 수감되어 있는 그림 같은 섬 바스퇴위가 나온다. 수감자와 교도관이 함께 버거를 뒤집고 수영을 하고 느긋하게 햇볕을 쬐고 있다. 솔직히 교도소 직원과 수감자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바스퇴위 교도관들은 유니폼을 입지 않고 수감자와 함께 같은 테이블에 앉아 함께 식사하기 때문이다. 섬에서는 영화관과 일광용 베드, 스키 슬로프 2개가 있어 온갖 종류의 일을 할 수 있다. 섬에는 교회와 식료품점, 도서관도 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미쳐버린 건가? 수많은 살인자를 휴양지로 보내는 형을 선고하는 것은 얼마나 순진해빠진 행동인가? 바스퇴위 직원에 의하면 이는 더없이 정상적인 일이다. 그들은 수감자와 친구가 되는 것이 그들을 하대하고 모욕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배운다. 노르웨이에서 교도소는 나쁜 행동을 예방하는 곳이 아니라 나쁜 ‘의도’를 예방하기 위한 곳이다.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이 정상적인 삶을 준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들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 ‘정상성 원칙’에 따르면 벽 안의 삶은 가능한 벽 밖의 삶과 비슷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은 코페르니쿠스와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 개념을 처음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우주에서 인간 자리를 재평가해야 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자유의지 개념도 그와 비슷한 사상 붕괴의 여정을 출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분명 그 통찰에 담긴 함축적 의미와 윤리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신념이 역사와 사회 산물임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덜 독단적이 되고,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 누구도 완벽하게 객관적일 수 없고, 누구도 객관적 진실을 완전하게 깨우쳤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자신이나 외부 대상과 맺는 관계를 변형시킨다. 우리 상처를 치유하고 타인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누군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잘못을 가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의 행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의도적인 것은 아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각각의 사건과 사람을 셀 수 없이 많은 조건의 결과로 봄으로써[緣起] 하나의 사건이나 단 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게 한 구조적 원인을 알게 될 때 우리 미움과 괴로움은 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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