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관찰하는 대상이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과학 방법론에 노출된 자연 일부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 하이젠베르크







‘진리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모르겠다’로 답한다면, 그 믿음은 회의주의(상대주의)다. 인간 한계로 진리가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주장이다. 회의주의는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절대주의(객관주의)와는 다르다. 대표적인 회의주의자는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다. 그는 호모 멘수라(homo mensura), 즉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라고 회의주의를 명쾌하게 정의했다. 프로타고라스는 유일무이한 진리를 발견할 수 없으며, 특정 조건에서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진리만 있다고 말했다. 상반되는 주장이라도 다른 사람이나 다른 시기에  모두 똑같이 진실일 수 있다는 말이다. 모든 진리와 선, 아름다움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다. 따라서 모든 것의 기준이나 척도는 인간 자신일 수밖에 없다. 프로타고라스는 아테네 민회에서 자신 회의론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나는 신들이 존재하는지 안하는지,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많은 것이 우리 인식을 혼란하게 한다. 대상은 모호하고 우리 인생은 너무 짧다.” 아테네 민회는 신에 대한 프로타고라스의 부정적 견해에 당황해하며, 그를 추방하고 모든 아테네인에게 그의 책을 불태워 버릴 것을 명령했다. 

















과학 이외에 다른 분야라면 시대나 문화 변천에 따라 서로 다른 ‘진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과학은 회의주의(상대주의)를 거부한다. 과학은 객관적이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탐구방법과 증거에 기초한다. 과학자들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검증한다. 같은 결과가 반복해서 나오고 방법상 어떠한 오류도 없다면 가설은 이론으로 살아남는다. 이 규칙은 엄격하게 적용된다. 과학에서 진리를 찾는 데는 특별한 변명거리가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어떤 진리를 말하는 것일까? 같은 진리일지라도 시대마다 서로 달라 보였다. 고전역학에서 뉴턴은 중력을 ‘서로 당김[만유인력]’이라고 보았고, 근대역학에서 아인슈타인은 같은 중력을 ‘공간의 휘어짐’이라고 보았다. 과학자는 외부 대상을 연구하지만, 그들이 다루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 지식과 경험이 반영된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가설, 곧 과학자의 직관과 마음에서 태어났기에 우리는 과학자들 마음을 살펴보는 것으로 자연법칙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닐스 보어는 “물리학은 객관적인 자연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인간의 경험을 정리하고 조사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눈이 아니라 뇌가 물체를 인식한다. 실재를 알기 위해서는 뇌 안에 이미 세계를 바라보는 형식이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눈을 통해 뇌에 들어온 신호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뇌는 무질서한 신호를 분류하고 재배열하고, 때론 무시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실재는 뇌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기에 간혹 착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비트겐슈타인 말을 인용하면, “당신은 보고자 하는 것만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학자들은 자연에 수학 형태의 법칙이 실제 존재하기에 자연에 객관적인 법칙이 존재한다고 한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케플러의 제1 법칙도 행성 궤도가 타원에 가까울 뿐이다. 실제 자연을 아주 비슷하게 기술한 자연에 대한 근사일 뿐이다. 과학자들은 실제 복잡한 자연 세계의 여러 조건 중 특정 조건에만 초점을 맞춘 뒤 과학법칙을 얻어낸다. 그래서 많은 과학법칙이 수학적 형태를 띠고 있다. 자연이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였기 때문이 아니다. 자연에서 수학적 관계를 만족하는 특정 변수에만 초점을 맞춰서 변수 사이에 연관 관계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과학은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외부 세계를 관찰하는 행위는 항상 기존 지식과 경험에 바탕을 둔 ‘이론 부가’(theory-burdened)적이다. 결국 우리 지식이나 경험은 그 지식이나 경험이 예상되는 기대 범위 내에서 관찰자에게 인식된다. 그렇지 않은 것은 의미가 없거나 부적절한 것으로 거부된다. 이것은 구조, 즉 게슈탈트가 모든 인식과 모든 행동을 조절한다는 의미다. 구조는 모든 인간 활동이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견해를 제시한다. 구조는 가치를 결정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도덕과 윤리, 목표, 목적을 결정한다. 따라서 ‘과학이 찾는 진리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진리는 현대 구조에 의해 정의된다’라는 답변밖에는 구할 수 없다.



구조는 연구 과정과 절차를 제공한다. 연구자들은 증거를 수집하지만, 증거가 받아들여지거나 거부되는 판단은 이미 구조에 의해 부여된 가치들에 좌우된다. 사건과 관계없다고 여겨지는 어떤 데이터도 무시될 것이다. 따라서 과학은 무엇보다도 대상이 어떻게 보이느냐에 관한 학문이 아니다. 과학은 객관적인 것도 아니며 편견이 없는 것도 아니다. 자연에 관한 모든 관찰은 이론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자연은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 임의적이기에, 자연에 관한 특정 사실을 예상하는 체계적인 도구를 이용해서만이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패턴이 없다면, 심지어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라는 단순한 물음에조차 답할 수가 없다. 미지 세계는 구조 용어로 먼저 정의되어야만 조사가 가능하다.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과학은 오직 동시대 용어로 정의되고 동시대 도구로 연구된 동시대 문제에만 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진리는 인위적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시기의 모든 견해는 마찬가지로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절대적인 실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이 변하면 우주도 변한다. 진리는 상대적이다.



물리학자이자 심리학자, 생리학자, 역사학자인 에른스트 마흐는 어떠한 형태의 절대주의도 반대했다. 마흐는 모든 이론과 법칙이 현상을 묘사하고 예측하기 위해 고안된 계산상 장치에 불과하다는 조지 버클리의 자연에 대한 도구주의 견해에 동의했다. 이론과 법칙은 실재를 설명하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시간과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특정한 현상을 통해서만 인식된다. 공간과 시간 결정은 다른 현상을 결정하는 방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별 위치를 시간 견지에서 정의 내리는데, 그것은 실제로는 지구 위치에서 본 견지에서다. 공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다른 현상과 견주어진 결정에 비추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으로부터 위치를 인식한다. 질량과 속도, 그에 따르는 힘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다. 절대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가 마주치는 것, 우리가 받는 힘 모두 상대적이다. 프톨레마이오스 또는 코페르니쿠스 설은 하나의 해석일 뿐이다. 하지만 둘 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아인슈타인은 마흐에게 크게 영향을 받고 상대성원리를 내놓았다. 더욱이 하이젠베르크가 주장했듯이 실재를 묘사할 때는 언제나 근원적이고도 불확실성이 동반되고 관찰자는 관찰하는 동안 그 현상을 변하게 할 수밖에 없다.
















철학자 이사야 벌린은 진리는 영원하지 않다며 이렇게 말한다. “글로 썼건 또박또박 명시했건 냉철한 시간에 분별 있는 인간들이 얻어낸 것일지라도 뭐든지 얄팍한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며, 똑같이 건전하고 똑같이 이성적인 다른 사람들이 논박하고 나서면 붕괴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그런 것은 실재에 참된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 근대 회의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도 우리가 궁극적 실재의 본질을 결코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궁극적 실재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자은 무뢰한이거나 바보이다. 바보라 함은, 우리 인간이 감각 지각으로만 지식을 얻을 수 있으므로 궁극 실재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를 무뢰한이라고 하는 것은 지식 한계를 알면서 자신의 그릇된 철학을 따르라고 우리를 설득하기 때문이다. 

















흄에 따르면 우리 정신은 오히려 일종의 신체 반응으로, 이성은 개인 생존과 욕망 실현을 위해 필요한 분석적, 계산적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률 또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묵계 산물로 인간 본성 산물이지 객관적 진리와 무관하다. 근대 유럽철학은 흄에 이르러 비로소 진리라는 몽상과 이 몽상에 바탕을 둔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 불완전한 이성 한계를 자각해야 한다. 이성 한계는 경험이다. 이성이 경험을 넘어서면 필요 없는 사변에 빠질 수밖에 없고, 이것은 독단과 몽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흄 철학의 기초다. 그렇다고 해서 경험을 논거로 삼을 수도 없다. 경험을 논거로 삼을 수 없는 이유는 경험 자체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흄은 독단에 대해 비판하고, 상식에 맹종하는 일상 태도에 경종을 울린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나 상식을 비판하고 교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흄에 따르면, 나의 손가락 생채기보다 전 세계 파멸을 선택하는 것이 이성과 상충되지 않으며, 낯선 사람 편의를 위해 나 자신 파산을 선택하더라도 이성과 상충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성은 정념의 노예일 뿐이다. 즉 이성은 진리를 인식하고 자신 자유의지에 따라 정념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정념의 실현을 위해 이후에 이성을 사용한다.  
















그런데 진리가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회의주의자들은 자신 주장을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진리가 있는지 ‘모르겠다’라는 주장 자체가 그러한 진리를 인정한 것이기에 자기모순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회의주의자들은 종종 웃음거리가 된다. “세계는 환상에 불과하다”(아낙사르코스)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아낙사르코스 자신도 환상에 불과하고, 따라서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 누군가가 “모든 진리 주장은 알고 보면 권력욕의 표출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면, 이 명제 자체도 그 사람의 권력욕의 표출에 불과하게 된다. 사실 이러한 ‘자기지시’(self-reference)의 모순은 흔한 일이다.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이 이해의 주체인 ‘내’ 자신이 될 때는 필연적으로 풀기 어려운 자기지시 문제를 만들어낸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나 러셀의 ‘이발사의 역설’이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거짓이다’ 혹은 ‘이 이발사는 스스로 머리를 깍지 않는 마을 모든 사람만의 머리를 깍아준다’라는 참과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역설이 존재한다. 참도 거짓도 될 수 없는 이유는 이 같은 문제가 자기 스스로를 가리키는 자기지시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역설을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가 진리라고 인식하는 것을 잘못 이해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쟁이 역설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이 생각보다 까다로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발사의 역설은 사물을 속성에 따라 서로 다른 집단으로 분류하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일인지 보여준다. 이처럼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수 있다.
















철학자 섹시투스 엠피리쿠스는 회의주의가 함축하는 이런 자기지시 문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좀 더 유연한 형태로 변환시켰다. 엠피리쿠스는 진정한 회의주의자라면 ‘어떤 것도 알 수 없다’라는 식의 모순된 주장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회의주의자는 판단을 유보할 뿐이다. 회의주의 목적은 진리가 존재한다는 독단주의를 치유하여 마음의 평온을 얻는 것이다. 회의주의 핵심은 다음 구절에 담겨 있다. “회의주의란 어떤 방식으로든 감각된 것들과 생각된 것들을 대립시키는 능력이다. 이때 서로 대립하는 대상과 생각이 팽팽히 맞서기에, 우리는 판단중지(epoche)에 이르게 되며, 그로써 평온함(ataraxia)에 도달하게 된다.” 회의주의는 일종의 치유다. 독단주의자를 치유함으로써 독단이 가져올 문제점을 풀고자 하는 것이다. 회의주의 목적은 독단주의자들, 즉 확고한 의견을 가진 자들의 자만과 경솔을 치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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