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의 고향은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3시간 정도 걸리는 섬서성 서안...에서 버스로 3시간 남짓 달려 닿는 한성...에서도 또 꽤 들어간 서촌(徐村). 사마천이 일면식도 없는 장군 이릉을 비호하다 궁형을 당하자 후손들은 동, 풍 두 성씨로 사마 성을 감춘 채 흘러왔단다. 서촌의 徐는 두이변에 남을 여가 합쳐친 글자로 두 성씨만 남았음을 상징하는 마을 이름이라 했다. 서촌은 중국에서도 그야말로 깡촌. 그래도 바람 들이치는 그 허름한 교실에서 아이들의 노래소리는 낭랑했고, 행복은 부유함과 무관히 고루 내리쬐는 햇살 같음이 얼마나 감사하던지.  

 
     사진으로는 꽤 운치 있어 보이지만 가슴 아플 정도로 낡고 추운 교사.
 
    
공지사항들? 빨강, 노랑 분필로 그려진 예쁜 무늬장식이 얼마나 고운지. 
    삶을 가꾸는 건 꼭 화려한 문명의 이기를 가지고서만은 아닌 것이다.
  
      낡은 풍금 하나 없이 그저 입으로, 손으로 노래를 가르치는 다 해진 양복의 선생님과 
      기쁘게 배우는 아이들. 이들은 사마천의 후예들이다. 
 
     해맑고, 귀여운 아이들. 화장실 하나 변변치 않은 삶이라도 아이들 행복전선에는 
     이상없음이다. 그러나 자꾸만 이 아이들에게 맛난 사탕과 예쁜 문구 좀 보내주고 싶다. 
     어쭙잖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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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고향옥 옮김 / 양철북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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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참 식상한 느낌의 어휘다,하고 책을 받아들면서 생각했다. 졸업식에 눈물이 없어진 날부터 이 말은 그저 그런 느낌이 되어 버렸다. 인생에서 한 고비를 넘길 때마다 그때를 졸업이라고 표현하는 것, 역시 식상하다. 표지 그림도 의미심장해 보이나, 한때 유행했던 스타일이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예상 외의 호감이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솟아올랐다.

  이야기가 매우 새로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너무 익숙해서이다. 식상할 만큼 익숙해서. 딱 나이 마흔이면 느낄 인생의 그런 것들이 딱 알맞게 책에 농축되어 있고, 그것이 마흔 나이에 슬하에 둔 자녀들의 인생과, 또 짧거나 길게 죽음을 앞둔 마흔 나이 사람들의 부모들의 인생과 마침맞게 어울려 개개의 삶, 그리고 삶들의 고리에 대해 마침맞게 펼쳐져 있다.

  아마 작가 나이 마흔에 썼던 (혹은 마흔에 기획했던) 솔직한 자전적 단편소설들이리라 그렇게 여겨졌다. 그만큼 솔직하고 감정에 군더더기 없다. 마흔이란 나이는 자녀가 청소년기에 접어들고, 삶의 굴곡이 깊어지고, 부모가 암 따위로 세상을 떠나는 나이다. 그 자신 기존에 매달려 왔던 삶에서 떨려나거나 스스로 멀어지기 십상인 나이이고, 앞으로 살아갈 젊지 않은 날의 무게가 양 어깨에 턱하니 내려앉는 나이다.

  이 책에는 그 나이의 삶에 닥치는 네 가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첫째 이야기 '졸업'은 전형적 일본식 어투가 거슬리는 가운데도 자살한 남자와 그 남겨진 임신한 아내, 태어난 아이, 가장 친하다 여겨졌던 친구(나이 마흔), 임신한 아내의 새 남편이자 아이의 새아버지인 남자의 삶을 보여주며, 마흔이 사회에서 겪게 되는 낙마라든가 청소년의 왕따 문제도 건드리는 노련함이 돋보인다. 삶과 죽음에 대한 관찰기록이랄까. 그러나 제목, 역시 식상하다.

  두 번째 이야기 '행진곡'은 마흔 살의 비교적 잘 나가는 직장인이 격조했던 홀어머니의 임종을 앞두고, 여동생과 더불어 병실을 지키면서 풀어나가는 과거, 현재의 이야기다. 노골적이면서도 함축적인 가족에 대한 성찰이 독자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우리 주변에 편재하는 사람 사이의 불통, 인생유전. 그런 것들을 느끼게 한다.

  세 번째 이야기 '아버지의 마지막 수업'은 엄격한 선생님이자 아버지였던 암 환자의 아들, 그 역시 선생님인 마흔 살 남자가 화자로 등장해 또 다른 색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과 더 깊은 생각을 들려준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같은 느낌이 있지만 훨씬 정서적으로 우리와 가깝다. 툭하면 암에 걸려 고통 속에 마지막 나날을 보내는 수많은 우리 부모들 모두가 선생님이었을 거라는 동질성을 느끼게 한다.

  네 번째 이야기는 어릴 적 젊은 나이에 자궁암으로 죽어간 어머니의 일기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주인공이 새엄마로 대표되는 다른 세상과 어떻게 불통의 나날을 살아가다 화해에 이르는가를 담담히 엮어간 '추신'이다. 역시 마흔 살.

  참 공감가는 이야기들이다. 주인공 연배인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마치 일기를 읽듯이 차분하고 저릿하게 읽힌다. 남 이야기기 같지 않다. 대단한 해법을 제시하지 않지만 일기가 그렇듯 써내려가는 것 자체로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주니까 할 말 해버린 느낌이 후련하다. 오히려 책 소개에서 두드러져 보이던 청소년이란 부분은, 물론 매 작품에서 건드리고 있으나 그다지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그저 모두 뭉뚱그러져 사람살이를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어떤 나이이든 자기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을 듯하다.

  마흔 살 주인공들의 이야기. 아마 화자가 자살을 꿈꾸는 청소년이 되었다가, 남편 잃고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가 되었다가, 죽음을 기다리는 할아버지가 되었다가, 이렇게 종횡무진했더라면 공감의 폭이 많이 줄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마흔 나이의 남자가 마흔 만큼의 이야기를 하고, 그 눈으로 살아왔던 날, 살아갈 날을 이야기하니까 청소년 이야기도 되고, 노년의 이야기도 되는 것 아닐까 싶다.

  다시 강조하는 공감. 자기 이야기만 해도, 모두의 이야기가 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청소년보다도 오히려 마흔 나이에 처했거나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권하는 우리들의 자서전 혹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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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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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일본 소설에 그다지 끌리지 않는다. 툭하면 무릎을 꿇거나, 울거나, 나이 많은 사람들이 별 것 아닌 일에 쉽게 고개를 숙이는 그들의 문화에 적잖은 거부감을 지녔기 때문이고, 어릴 때부터 일본 소설에서 보아 온 특유의 화법이 거슬리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은 최근 요시모토 바나나나 츠치 히토나리를 읽으면서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뭔가 불편한 낯섦.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런 반감을 느낄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섬세하다 못해 선병질적인 예민한 감성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보통 남과 맺고 사는 인연에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보통을 뛰어넘는 특별한 인연에는 그런 섬세함이 바탕이 된 깊은 소통이 필요할 수 있겠구나 싶은 느낌이 처음으로 들었다.

  옛날에 수학박사였다던 꾀죄죄한 작은 노인. 그는 교통사고로 1975년에 멈춘 채 80분간만 기억이 유지되는 장애를 앓고 있다. 미망인인 형수가 별채를 내주고, 파출부를 고용해 주어 생계를 유지하지만 예상대로 파출부는 쉴 새 없이 바뀐다.

  얼핏 보면 그는 필요도 없는 수식에만 매달려 하루를 보내는 정신 이상한 노인네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돈 받고 정해진 일만 하면 되는 파출부라고 해도 다음 날 완전히 새로운 기억회로로 갈아 끼우고 똑같은 질문을 해대거나 자기 세계에 빠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일삼는 지저분한 노인네를 상대하는 일에는 익숙해지기 어려울 것이다. 소통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에게는 소통이라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파출부이거나 기억이 정지된 노인네라고 하더라도. 또 파출부 엄마와 둘이서만 살아가는 소년에게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파출부와 소년은 결국 박사와 친구가 된다. 어떤 의미로 그들은 이미 가족이다. 소년의 손이 베이자 너무 슬퍼하며 패닉 상태에 빠지고, 소년에게 날아오는 파울 볼을 그 약한 몸으로 대신 막아내는 박사는 소년의 멘토이기도 하고, 빈자리를 채워주는 아버지이기도 하다. 소년에게 스며있는 마이너스 1을 채워주는 1과 같은 사랑이었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사람에 대한 애정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므로. 파출부와 소년은 스스로 수식의 아름다움에 동화됨으로써 박사와 기억의 한계를 뛰어넘는 연결의 통로를 지니게 된다. 박사에게 수식이 영원불변의 진리이자 아름다움이듯, 그리하여 사랑할 수 없는 형수를 사랑한 마음만 깊이 품고 생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듯 파출부와 소년 루트에게도 진실은 진실이었다.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자기 앞의 생>의 에밀 아자르는 말했다. 박사도 사랑하는 대상을 지녔으므로 그 반복되며 끊어져 결코 되살아나지 않는 일상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사랑한 것은 내보일 수 없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진실, 마치 수학공식과도 같이 불가해한 질서를 통해 아름답게 레이스를 그리며 존재하는 진실이었을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해도 결코 변하지 않을 단 하나, 오가와 요코는 수식이라는 단어 뒤에 진실이라는 단어를 숨겨놓았을 것 같다. 

  박사의 말 한 마디가 가슴에 남는다.

  “종이에 진정한 의미의 직선을 그리기란 불가능하다. 진정한 직선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여기에밖에 없어.” 그가 가리킨 곳은 자기 가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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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킬러 2007-10-30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대문에서 우연히 들어와봤는데.. 리뷰가 단정하면서도 잘 읽히고.. 책의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는듯해서 좋네요..
영화는 보고 책은 못본 상태인데.. 궁금해지는 책이에요..

파란흙 2007-10-31 08:3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일독을 권해 드립니다.
 
톨스토이 단편선 1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보리스 디오도로프 그림 / 푸른숲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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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를 접해보지 않고 자란 이가 없을 것이다. 어릴 적 계몽사에서 나온 50권짜리 전집의 <러시아 동화집>이라는 책에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바보 이반'을 읽은 것이 내게는 이 문호와의 첫 만남이다. 그때 이들 동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지금처럼 논술이 활발한 시절이 아니라 책을 읽고 누군가와 토론을 해보지도 않았고, 그저 좀 독특한 재미가 있다는 느낌만 가졌다.

  그의 책을 다시 접한 것은 청소년 시절 읽게 된 <안나 카레니나>와 <부활>에서였다. 그때도 내게 이 책들은 ‘어둡다’는 느낌만으로 모호하게 다가왔다. 도대체 안나와 카추샤는 왜 그렇게 꼬인 인생을 살아가야 했을까 싶었고, 안나의 비극적 선택이나 카추샤의 인생은 굽이굽이 비현실적이게도 느껴졌다.

  그리고 다 자란 어느 날 내게 톨스토이의 작품은 한꺼번에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몰려왔다. 도대체 나는 무엇으로 살 것인가 하고 깊이 고민하던 날에 그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대단한 무게로 다가왔고, 먹고 살기 위해 마지못해 하는 노동이란 것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 날에 ‘바보 이반’은 얼마간 명쾌한 해답을 주기도 했다. 이어 나는 안나가 되어보기도 하고, 카추샤가 되어 보기도 하며 삶의 진실이란 것에 다가가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러던 얼마 전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이란 책을 우연히 얻게 되어 읽기 시작했다. 톨스토이란 ‘사람’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그의 고뇌에 조금은 다가선 느낌이 들었다. 그가 백작의 아들에서, 혈기 넘치는 청년 장교에서, 한 가정의 가장에서, 세계적 문호로서, 농민운동의 핵심인물로서 살아가며 겪은 고뇌. 깨어 있는 양심과 행동가로서의 톨스토이는 자신이 생득적으로 얻은 것들, 문호로서 얻게 된 것들을 모두 버리고자 했으나 한 남편, 아버지로서의 톨스토이에게는 많은 걸림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심지어 톨스토이를 이중인격자로 몰아붙이기까지 했으나, 그 역시 남자로서의 톨스토이를 겪어온 그 아내에게는 진실이었으리라 싶은 공감이 있었다.

  어쨌든 톨스토이의 단편은 운동가로서의 그의 실천적 행위의 일환이었다. 러시아 문학의 권위자로 꼽히는 박형규 역자에 따르면 많은 이야기들이 민화에서 모티프를 가져다 재편한 것이고, 많이 배우지 못한 대중 누구나 읽고 유쾌하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고려가 문장 하나하나에 숨어 있다 한다. 톨스토이 스스로 자신의 논저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참다운 예술은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 따라서 종교적 감정을 토대로 민중들에게 흥미를 주어야 하고, 또 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려면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와 형식이 단순하고 간명하고 정확한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고.

  요컨대, 하느님 말씀대로 살라. 그러기 위해 욕심을 버리고, 이웃을 사랑하며, 내어줌에서 즐거움을 느끼며, 노동의 신성함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라. 이런 메시지를 자못 노골적으로 풀어낸 것이 그의 단편들이다. 문학의 순수성을 선호하는 많은 이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한 대목이다. 그러나 그에게 문학의 순수성이란 오로지 현실의 실천을 담보로 하는 것이어야 했던 듯하다. 지역, 학교, 공동노동생활체, 잡지의 이름이었던 ‘야스나야 폴랴나’는 그의 실천의지의 표상이었다.

  실제로 여러 단편을 통해 보이는 톨스토이는 사유재산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고, 공동 노동과 나눔이 더 이상적이라 여겼던 것 같다. 신분제를 비판하고, 어쭙잖은 지식과 지식인의 행태를 비판하며, 심지어 교회나 성경이라고 하는 전범이 지닌 오류를 정면에서 공격하고 있기도 하다. 그 시대에!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사회의 모습은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원시공동체 사회의 그것과 가깝게 보이기도 한다.

  이 시점에서 나는 그간 문학의 순수성을 옹호하며, 심지어 와일드나 보들레르 등의 유미주의에 꽤 오래 열광해온 내 문학성향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되었다. 절대적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문학을 위한 문학이든, 실천적 삶을 위한 문학이든 완결성과 아름다움, 교훈과 감동이 잘 어울려 있다면 무슨 상관이랴 싶기도 하다. 그 모든 걸 완벽하게 지어내는 톨스토이라는 작가가 존재하니까 말이다. 불꽃처럼 삶과 사상과 문학의 혼연일체를 이루려 분투한 톨스토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서.

  자, 그러니 이런 그의 사상을 치밀하게 풀어낸 작품들을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청소년이 읽기 좋게 한다는 이유로 그저 줄거리만 전하는 것이 위험할 수 있음 또한 당연하다 싶다. 이번에 푸른숲에서 새로 나온 <톨스토이 단편선> 서문에는 그런 식의 편의에 따른 번역이 지닐 수 있는 오류를 경계하며 다시 만들어낸 책이라고 씌어 있어 관심 있게 보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극히 일부분의 톨스토이 단편, 동화라고 이름붙일 만한 정도의 강도를 지닌 책들 외에 이 책들에는 좀 더 센, 훨씬 많은 단편이 소개되어 있다. 특히 2편으로 가면 신분이나, 재산, 갖가지 형태의 사랑, 죽음, 세월, 부부간의 배신 등등에 대한 더 노골적이고 풍자적이며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많다. 

  그리고 과연 문장이 비교적 짧고 평이한 단어로 구성되어 꼬임 없이 스르르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 당대 러시아의 말투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여럿 보인다. 주전자라고 하지 않고 사모바르라고 쓴 뒤 조그만 적갈색 글씨로 러시아 전래의 주전자라고 표기한다거나, 마부라고 하지 않고 어자(馭者)라고 쓴 뒤 말을 부리는 사람으로 설명해 놓은 것과 같은 부분이 많다. 귀얄이라든가 우듬지 같은 우리말을 쓴다거나, ‘땅은 귀로 차 있다’는 러시아 속담을 그대로 쓴 뒤 ‘낮말은 새가 듣고~’와 비슷한 뜻의 러시아 속담이라고 해설해 놓은 부분 등 세밀한 신경을 쓴 점이 돋보인다. 물론 간종거리면서 등의 우리말이 오히려 낯설어 읽는 속도에 제동이 걸리기도 했지만, 찾아보며 읽는 것 또한 맛이려니 싶다.

  이 책은 러시아의 인민화가라는 칭호를 받는 보리스 디오도로프가 그림을 그려 더욱 원전의 향기에 가깝게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덕분에 바보 이반이 어떻게 생겼는지, 악마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궁금해 하는 아이들에게 조금은 근접한 그림을 보여줄 수 있을 듯하다.

  책이 180도에 가깝게 활짝 펼쳐지면서 단단히 묶어진 점이나, 크지도 작지도 않은 판형, 조금은 두툼하다 싶은 두께, 튼실한 느낌을 주는 내지 종이까지 플러스를 줄 요인이 꽤 많은 책이다. 그 중에서도 2편 말미의, 러시아 문학 전문가인 역자의 해설, 개개 단편에 대한 전거, 상당히 자세한 연보가 매우 매력적이다.

  솔직히 깨 쏟아질 정도로 재미있지는 않고, 밤을 꼴딱 새워 가며 읽게 되는 흡인력이 있지는 않지만 이 정도의 톨스토이는 필독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고, 더 늦기 전에 톨스토이 단편을 이나마 섭렵할 수 있었던 기회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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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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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라국 오구대왕의 일곱째 딸은, 딸이라는 이유로 버림받았다. 그 이름은 바리데기다. 버려진 아이라는 이름을 달고 인생을 시작한 아이. 신데렐라가 재 투성이라는 뜻이고, 올리버 트위스트가 못 먹어 말라서 배배 꼬인 몸을 하고 있는 아이라는 뜻이라는 걸 알았을 때처럼 눈물 나는 이름이다.


설화 속 바리데기는 무쇠 옷, 무쇠 신발, 무쇠 지팡이 차림으로 그것들이 다 닳을 때까지 고된 여정을 겪으며 서천서역국으로 자신을 버린 부모님을 구할 생명수를 구하러 떠난다. 그녀는 심지어 생명수 지킴이인 동수자의 아이 셋을 낳아주며 긴 세월을 보낸 후, 기어이 생명수를 구한다. 그녀는 그 와중에 만난 저승 가는 혼들의 아픔에 눈물짓다 모든 아픈 넋들을 위로하는 신이 된다.


나는 바리 설화를 읽으며,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한 꺼풀 벗는 안도감을 느꼈다. 누군가 내 죽음 뒤의 아픔을 위로해 주는 이가 있구나 하는! 어릴 적 읽은 영국 동화에는 이 세상사람 중 누구라도 죽으면 슬프게 울어주는 요정 이야기가 있었다. 늘 누군가가 죽어갔기 때문에 그녀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고, 그녀의 긴 백발에 감춰진 눈은 차마 쳐다볼 수 없이 짓물러 보는 이를 기함하게 했으며, 길 가다 마주치는 모든 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아무도 울어주지 않는 죽음만큼 슬픈 건 없다고 느꼈던 것 같다. 바리는 그런 존재이다. 사람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응어리를 씻어내려 주며 영혼을 깨끗이 씻어 편안한 휴식을 주는 치유.


황석영 작가의 <바리데기>에 나오는 바리 역시, 딸이라는 이유로 버림받았다가 할머니에 의해 구원된 후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인물이다. 그녀의 출생지는 북한이다. 북한을 온통 뒤덮었던 굶주림의 시절 바리는 가족을 잃고 중국으로, 영국으로 옮겨가며 지난한 삶을 살아간다. 그녀가 산 삶은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이 있었고, 그녀가 디디는 땅은 늘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죽음이 결코 멀리 있지 않고, 지옥은 늘 이곳에 있다는 걸 바리의 삶은 처절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마치 설화 속 동수자를 닮은 아랍인 알리와 결혼하고, 아이를 배고, 마사지를 통해 상대 영혼의 아픔을 치유하는 신통력으로 영국 사회 속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알리와 기약 없는 이별을 하고, 갓난아이를 잃는다. 그래도 그녀는 사람들의 아픔을 치유한다. 그녀는 더 깊이 사람들의 속으로 스며들어 고통을 씻어 내린다. 바리에게 사람의 고통은 결코 남의 것이 될 수 없고, 거기에는 국적이나 민족이나 인종, 혹은 부유함과 가난함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조그만 몸은 세상 모든 아픈 이들을 향해 뻗는 구원의 손이다. 너와 나, 이쪽과 저쪽이 아니라 우리이며, 세상은 흐르는 한 줄기 물과 같아서 고통 속에서 혼자 빠져나오기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작가는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작가는 아마 온갖 이름으로 편 가르기, 잘라내기에 광분하는 사람들에게 바리라는, 자신의 살을 싹둑싹둑 잘라내어 사람들의 배고픔 해소해 주는 고단하고 조그만 여인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치려 한 것일지 모르겠다.


긴 기다림 끝에 알리와 재회하고, 스스로 상처를 감싸 안으며 두 번째 아이를 잉태한 바리는 조그만 행복감에 젖는다. 그런 바리 바로 앞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난다. 여전히 세상은 생지옥이다. 가녀린 북한 소녀 바리의 구원의 몸짓, 해원의 간절한 바람은 늘 세상의 폭력과 광기 때문에 멈칫거린다. 바리는 하염없이 눈물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아가야, 미안하다.”
책장을 덮으며, 눈물 어린 눈으로 나도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이런 세상,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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